<근암고택 전경>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504번지에 위치한다. 2010. 8. 27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흥 방촌리는 선사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해 있고 백제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정안현(定安縣)-장흥부(長興府)-회주목(懷州牧)-장흥부(長興府)로 이어지는 관청(東軒)이 있던 곳이 현 판서공파종택이다. 고려시대 말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치소(治所)를 임시로 나주 철야현(현 봉황)으로 옮긴 후 조선이 개국되면서 수령현(遂寧縣, 현 장흥읍) 쪽으로 옮긴 뒤 고읍(古邑)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576년경 안항공(德厚 1556~1612)께서 인근 당동마을에서 최초 입촌한 후 1600년 초에 병조참판공(廷喆 1583~1657)께서 입촌하면서 장흥위씨 씨족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고택은 1649년(己丑)에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은 현 근암고택 터에 집을 내려 지었다. 집을 지으면서 호산마을 앞 남산에 위치했던 마을 화수정이라 할 수 있는 장춘대(長春臺)를 헐어 옮겨지었다. 이를 뒤받침 하는 망와(望瓦, 지붕위 마루 끝에 세우는 우뚝한 암막새)가 2011년 지붕 기와를 교체하면서 나와 확인되었다. 현재 망와는 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전시 되고 있다.
고택은 후손에게 전해져 내려와 1910년경 9대손 근암(勤庵) 위계상(1879~1948)이 입주하면서 보수한 목조 건물이다. 현재 마을 내 고택 안채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가치를 인정하여 아호를 따라 근암고택(勤庵古宅)이라 명명하고 2010년 8월 27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사당은 관리되지 않아 1998년경에 철거되어 아쉬움이 크다. 방촌마을의 독특한 경관 속에 자리 잡은 근암고택은 조선 후기 혹은 근대 초기의 방촌 지역의 주택 유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반가 건물로서의 위상도 있다. 청금공 11대손이자 근암공 손자인 성환 종친의 소유다.
<1659년 청금공 의금부도사 교지 종6품 下>
※ 청금(聽禽) 위정훈 : 1578~1662, 안항공(휘 덕후)과 배(配) 청주金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광해(光海) 1612년(壬子) 진사에 합격했으나 조정의 혼란(昏亂)을 개탄하며 출사(出仕)를 단념했다. 그는 1624년 갑자란(甲子亂) 때 의사(義士)와 군량미(軍糧米)를 모집해 도왔으며, 1627년 정묘란(丁卯亂) 때도 호소사 김문원(號召使, 金文元)의 격문(檄文)에 응해 공(公)께서는 중제(仲弟) 웅천현감공(휘 정열, 1580~1656), 계제(季弟) 반계공(휘 정명, 1589~1640)과 종형(從兄) 정망공(1558~1591), 종형(從兄) 국천공(휘 정헌, 1570~1643) 등과 의병·의곡을 모집하고 전쟁터에 나가 도적들을 물리치고 귀향한바 있다. 호란(胡亂)으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이때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의병 모집 격문(檄文)을 접하고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올라가다 5일 만에 왕이 항복(降伏)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했다. 公은 청금(聽禽)이라 자호(自號)하고 종제(從弟) 병조참판공(휘 정철)과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에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하나 취임하지 않았다. 묘소(墓所)는 관산읍 농안리 화운동이다.죽천사(竹川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기옥이 깔끔하고 정감이 갑니다.
교지까지 곁들이니 조선시대에 온 기분입니다.
소개도 깔끔해서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