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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정 (鏡湖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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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정 액호>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에 위치한다. 1912(壬子)년 행은공(휘 계훈, 1866~1942, 운암공 10대손)이 창건(創建)하였다. 그 후 1964(甲辰)년에 운암공파종중에서는 장흥군 부산면 자미마을 수인산 병풍바위 아래 있었던 회은공(휘 원량, 1882~1945)의 개인 별장 영이루(詠而樓)를 매입하여 헐어 현 위치인 기동리에 이축하고 주변 예양강 경관과 정자(亭子)가 조화되어 “경호정(鏡湖亭)”이란 글귀가 맞아 떨어져 편액을 현 경호정에 옮겨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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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상량문(上樑文)은 1912(壬子)년 만회공(휘 국채, 1846~1921, 운암공 9대손)이 근기(謹記)하다.

경호정 중건상량문 인환.jpg

(2)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 1964(甲辰)년 죽파공(휘 인환, 1901~ 1985, 운암공 12대손)이 기술(記述)하다.

경호정기 기우만.jpg

(3)경호정기(鏡湖亭記)는 1914(甲寅)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근서(謹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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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경호정중건기(鏡湖亭重建記)는 1964(甲辰)년 경암공(휘 계렴, 1898~1977, 운암공 10대손)이 근기(謹記)하다.

경호정 원운 계훈.jpg

(5)경호정중건원운(鏡湖亭重建原韻)은 1912(壬子)년 주인 행은공(휘 계훈)이 찬(撰)하다.

경호정 강신황.jpg

①근차중건운(謹次重建韻)은 1935(乙亥)년 모계(慕溪) 강신황(姜信晃, 진주人, 1878~ ?)이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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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동계(東溪) 이상철(李相轍, ~ ?)이 근차(謹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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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만은공(휘 계창, 1886~1948, 운암공 10대손)이 찬(撰)하다.

경호정운 국채.jpg

④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12(壬子)년 만회공(휘 국채)이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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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64(甲辰)년 죽파공(휘 인환)이 근고(謹稿)하다.

경호정 중건운 계염.jpg

⑥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64(甲辰)년 경암공(휘 계렴)이 근고(謹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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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64(甲辰)년 인당공(휘 영환, 1906~ 1989, 운암공 12대손)이 근고(謹稿)하다.

경호정 차운 김익한.jpg

⑧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30(庚午)년 운곡초부(雲谷樵夫) 김익한(金益翰 청풍人, ~ ?, 조선말 장흥 선비로 추정됨)이 찬(撰)하다.

경호정 차운 김익검.jpg

⑨ 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춘산초수(春山樵叟) 김익검(金益儉 청풍人, ~?, 조선말 장흥 선비로 추정됨)이 찬(撰)하다.

경호정 십경 국채.jpg

(6)경호정십경차무이구곡가운(鏡湖亭十景次武夷九曲歌韻)은 ①연봉제월(連峯霽月), ②동강청풍(桐江淸風), ③용산낙조(蓉山落照), ④송정어화(松汀漁火), ⑤선암명사(船巖明沙), ⑥용호명탄(龍湖鳴灘), ⑦인사만종(仁寺晩鍾), ⑧가정목적(稼亭牧笛), ⑨기암귀운(麒巖歸雲), ⑩귀야부운(龜野浮雲)으로 1912(壬子)년 만회공(휘 국채)이 근고(謹稿)하다.

경호정 내 시운 편액.jpg

<경호정 경내 시운 편액 글>

 

경호정 액호.jpg

경호정 운암유장.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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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정에는 운암유장(雲巖遺庄), 영이루(詠而樓), 경호정(鏡湖亭) 3개 액호(額號) 편액과 15개의 시운 편액 글이 소장되어 있어 선대의 묵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중 경호정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전라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김성근(안동人)이 썼으며, 운암공파종중과의 연(緣)은 알 수 없다. 한편 본래의 경호정 건물은 부산면 호계리(월만)에 재각을 이축하여 괴헌재(槐軒齋)로 사용하고 있다.

 

 ※ 김성근(金聲根) 이력 : 안동人, 1835∼1919, 조선말기의 문신·서예가, 자는 중원(仲遠), 호(號) 해로당(海鹵堂)‧해사(海士), 판서 온순(蘊淳)의 아들이다. 186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검열에서 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883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88년 이후 공조·형조·이조·예조 등 각 판서(判書)직을 두루 거치고 이후 일본정부에서 수여한 남작(男爵)을 받는 등 친일인(親日人)의 한사람이다.

 

 ※ 기우만(奇宇萬) 이력 : 행주人, 1846~1916, 자(字) 회일(會一), 호(號) 송사(松沙), 학자 기정진의 손자로 전남 장성군 태생이다. 1881년(고종 18) 참봉(參奉)의 직분으로 중암(重庵) 김평묵(청풍人, 1819~1891) 등과 함께 유생(儒生)을 이끌고 조정에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 로 불리었으며, 1895(乙未)년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되자 의병을 일으켜 장성· 나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 후 의병활동을 계속하다가 1906년 체포되어 광주·영광·목포·서울 등지 감옥에서 복역하였으며, 1908년 순천에서 재 거사(巨事)를 꾀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退位)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유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1980(庚申)년 건국훈장(建國勳章) 독립장(獨立章)이 추서(追書)되었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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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2016-03-14 16:04 *.211.38.102

경호정 소개를 보니 위문의 과거의 영광이 대단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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