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 다산재 액호>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다산嶝에 위치한다. 삼족당공(휘 세보, 1669~1707)이 서재용으로 세운 건물이다. 이어 영이재공(詠而齋公), 존재공(存齋公) 등 3대가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1902(壬寅)년 장흥의 유림들은 존재공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재 위쪽에 단(壇)을 세웠다. 그 후 후손들은 1950(庚寅)년 서재를 재실로 변경 하였고, 한편으로는 1970초년까지 후손들의 강학 장소로 사용해 왔다. 1984(甲子)년에 사우를 건립했다.
(1)상량문(上樑文)은 존재공(휘 백규, 1727~1798, 안항공 5대손)이 찬(撰)하다. (2)중건상량문은 1951(辛卯)년 산음공(휘 근, 1883~1971, 안항공 9대손)이 기지(記誌)하다. (3)다산팔경(茶山八景)은 ①관사모종(冠寺暮鍾), ②소산제월(蘇山霽月), ③상잠초적(觴岑樵笛), ④덕호귀범(德湖歸帆), ⑤석실숙운(石室宿雲), ⑥석정모연(石亭暮煙), ⑦연화청풍(蓮花淸風), ⑧우산반조(雨山返照)로 영광人 김준식이 찬(撰)하다. (4)화증(和贈) 위사문(魏斯文)자화(子華)귀천관산(歸天冠山)은 1938(戊寅)년 경해(絅海) 송상휘가 근고(謹稿)하다. 위사문(魏斯文)행헌(行軒)은 1938(戊寅)년 홍장해가 찬(撰)하다. 부화(附和)는 1947(己丑)년 산음공(휘 근)이 재배근서(再拜謹書)하다.
<現 다산재 전경>
2002(壬午)년 관리사의 과실로 재당(齋堂)이 전소(全燒)된 후 후손들의 헌성(獻誠) 참여와 장흥군청의 재정 지원을 받아 2003(癸未)년 상산(성탁, 1926~ , 안항공 13대손)의 주도로 신축했다. (5)상량문(上樑文)은 운사공(휘 성모, 1933~ 2013, 안항공 13대손)이 근서(謹書)하다. (6)외삼문인 계연문(桂蓮門) 상량문(上樑文)은 유헌(계현, 1929~ , 안항공 10대손)이 근서(謹書)하다.
※ 다산재 전경 사진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구(舊)·현(現) 사진을 게재함.
<음통덕랑공(휘 동식) 등 38 神位>
<제향 행사>
23세 음통덕랑공(휘 동식, 1640~1708), 음통덕랑공(휘 동헌, 1645~1706), 24세삼족당공(휘 세보, 1669~1707), 춘담공(휘 세린, 1673~1741), 25세 영이재공(휘 문덕, 1704~1784), 26세 존재공(휘 백규, 1727~1798), 상암공(휘 백호, 1734 ~1810), 동산공(휘 백신, 1736~ 1820), 서계공(휘 백순, 1737~1815), 죽서재공(휘 백헌, 1742~1783), 27세 송오공(휘 도립, 1748~1808), 양천공(휘 도급, 1754 ~1821), 호산공(휘 도운, 1759~1815), 휘 도전공(1759~1861), 수재공(휘 도흡 1760~1815), 죽오공(휘 도한, 1763~1830), 휘 도영공(1767~1840) 등 배(配) 포함 38位에 대해 매년 陰 10. 2일에 제향 한다.
<첨추헌>
<석류헌>
다산재와 첨추헌(瞻楸軒) 액호(額號) 편액이 있었다. 이중 화재 전(前) 첨추헌 편액 글씨는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없으며, 현재의 다산재와 첨추헌 편액 글씨는 2003년 중건 후 전(前) 편액의 사진을 재현하였고, 석류헌(錫類軒) 편액 글씨는 학정(鶴亭) 이돈흥(영천人, 1946~ )이 썼다.
<다산사 전경>
<다산사 액호>
<존상문>
1984(甲子)년 다산사(茶山祠, 향사우)를 경내에 건립했다. 액호(額號)편액 글씨와 내삼문인 존상문(尊尙門) 글씨를 덕운(황량)이 썼다. 주벽(主壁) 존재공(휘 백규)을 독향(獨享) 해오다가 2003년(癸未) 서계공(휘 백순, 1737~1815), 죽오공(휘 도한, 1763~ 1830), 다암공(휘 영복, 1832 ~1884)을 추배(追配)하여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여 매년 陰 3. 15 제향 한다. 안항공파 웅천종중 소유다.
※ 존재공(휘 백규) : 1727~1798, 영이재공(휘 문덕)과 평해吳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자(字) 자화(子華), 호(號) 존재(存齋)‧계항(桂巷), 천문(天文)·지리·율력(律曆)·복서(卜筮)·산수 등에 통달하고 특히 역(易)에 정통하였다. 정조(正祖)때 공(公)이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 달성人, 1759~1816)의 천거로 사용(司勇)에 제수된 후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명(命)이 거듭되어 입궐하여 정조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 받아 1년4개월 재임하였다. 그 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종(終)하였다. 묘소(墓所)는 관산읍 방촌리 다산嶝이다. 죽천사, 다산사(主壁), 곡성군 옥과면 영귀서원(詠歸書院), 합천군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존재집(存齋集), 저서에 지제지(支提誌), 환영지(寰瀛誌), 정현신보(政弦新譜), 예설(禮說), 경서조대(經書條對), 경서차록(經書箚錄), 고금(古琴)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등 총 90여권의 저서(著書)를 남겼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