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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존재집(存齋集)

《존재집(存齋集)》 해제(解題) - 조선 시대 호남 지성, 위백규의 유향(遺香) -
 


오항녕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1. 삼벽(三僻)의 선비

나무도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다음 해에는 다른 꽃과 열매에게 자리를 내어 주듯, 어떤 문명이든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아마 조선의 영ㆍ정조(英正祖) 시대가 나무로 치면 열매를 맺는 시기, 조선 문명이 결실을 맺는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 말은 저 깊은 곳 어디에선가 새로운 시대가 움트고 있다는 말도 된다.
그렇게 조선 문명이 난만하게 펼쳐지던 18세기 영ㆍ정조 연간에 호남의 학자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는 열정적인 독서와 사색을 통해 책임 있는 지식인의 삶을 도모했고, 그 결과는 그의 문집 《존재집》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의 독서와 사색은 사서오경(四書五經)에서부터 도가(道家), 불가(佛家)의 저술에 걸쳐 있지만, 역시 본령은 유가(儒家)였다.
삼벽이란 위백규 자신의 표현이다. “삼벽(三僻)이란, 장흥이라는 사는 지역이 궁벽하고, 성씨가 궁벽하고, 사람이 궁벽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1796년 70세 되던 해 1월 6일이 되어서야 정조(正祖)의 명에 따라 여러 저술을 장흥부에서 조정으로 올려보냈고, 1월 25일 선공감 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제수되기까지 위백규가 시골 선비였던 점을 생각하면 단순한 겸사(謙辭) 이전의 소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백규가 평생을 그리 허투루 지내지 않았음을 《존재집》이 보여 주고 있다. 《존재집》 해제를 통해 그의 작품들을 소개할 참인데, 우선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존재집》을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 《존재집》의 편찬 과정이다. 둘째, 《존재집》의 구성과 내용에 대한 소개이다. 마지막에는 요약, 결론을 겸하여 간단히 존재 위백규가 조선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2. 《존재집》의 편찬

(1) 판본 상황
위백규의 문집은 《존재집》과 《존재전서》가 전해지는데, 《존재전서》는 《환영지》 등 기타 별종의 저술이나 단행본을 합하여 1974년에 간행한 것이다. 《존재집》과 《존재전서》의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1 국립중앙도서관본 존재집
ㆍ存齋集 幷附錄ㆍ年譜
ㆍ魏伯珪 著 魏炳錫 等編
ㆍ木活字本(後期木活字) 발행사항 〔刊寫地未詳〕:〔刊寫者未詳〕, 1875
ㆍ24卷12冊 四周單邊 半郭 22.7×16.0cm, 10行 20字 註雙行, 上三葉花紋魚尾:30.3×20.2cm
ㆍ序:崇禎五周旃蒙大淵獻(1875)…任憲晦
ㆍ조선총독부고서분류표 → 古朝46
①-2 규장각본 존재집
ㆍ청구기호 奎 12629-v.1-11
ㆍ木活字 22卷 11冊(落帙)
ㆍ위백규(조선) 저 간행연도〔高宗 12年(1875)〕 간행자〔刊者未詳〕 책크기 30.5×20.5cm
ㆍ匡郭 四周單邊, 半葉匡郭:23×16cm, 10行 20字 注雙行 版心 上花紋魚尾 下黑魚尾
ㆍ序:崇禎五周旃蒙大淵獻(1875)…任憲晦
② 경인문화사 영인본 존재전서
ㆍ국립중앙도서관
ㆍ存齋全書 上, 下
ㆍ影印本
ㆍ서울:景仁文化社, 1974
ㆍ형태사항 2책:삽도 - 25cm

한국고전번역원 간행 한국문집총간 243책은 국립중앙도서관본 《존재집》을 대본으로 하고 권14 12판만 규장각본으로 대체한 것이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에서 번역한 《존재집》은 이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국립중앙도서관본이다. 본 《존재집》의 구성과 내용은 따로 다루겠거니와 《존재전서》 중, 《존재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을 문체와 편명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文體 篇名
山中 / 宿金山寺 / 大石門 / 合掌庵 / 訪山居 / 松菓 / 假餠 / 淨修寺別表從吳邦佐 / 細柳道中 / 偶吟 / 次李忠武公刀字韻 2首 중 1首 / 留題聽雨齋 2首 중 1首 / 次梅軒韻 3首 중 2首 / 金塘船遊韻 4首 / 次永慕齋韻 / 次納爽亭板上韻 / 次黃芝室金水窟韻 / 次黃芝室支提詩軸韻 / 次華表柱韻 / 次大藏峯韻 / 次阿育塔韻 / 族祖聽溪公墓立碑時韻 /
金溪祠十二絶 / 磻谷古梅韻 / 聽雨齋次主人韻 / 罪麥 / 麥對 / 靑麥行 / 金塘詩 / 輿圖詩 / 輓丁夫人 / 詠蟬 / 閑居仲夏 / 卽事
茨菰 / 黃精 / 遣悶 / 春祝 / 聽新鴈有感 / 雨後海棠嫩芽頗有春意 / 山中立春 / 盆梅 / 皐蘭寺東閣次金三淵韻 2首 중 1首 /
登鷄龍山 / 登全州寒碧堂 / 龍穴 / 苦旱 / 暮春卽事 / 立春 2首 중 1首 / 次孝德亭韻 / 次朴友茅齋韻 3首 중 2首 / 次猗猗齋韻 / 和贈大來 4首 / 和李大來 / 次黃侯韻 / 遊海月樓 / 遊錦城石串亭 / 自警吟 / 夢得枝字覺而圓之 / 天風山次黃芝室韻 / 春日吟 5首 중 4首 / 磻谷古梅韻 / 次崔知事重牢宴韻 / 次焚黃日賀軸韻 3首 / 次化隱堂韻 / 偶吟 / 金塘船遊韻 / 宿寶林寺次板上韻 / 贈大來 3首 중 2首 / 嘗與金運元…… / 與黃芝室冠山酬唱韻 12首 중 4首 / 敬次黃使君韻 3首 / 詠蚕 / 晩霖 / 春帖 / 風 / 輓道溪 / 贈河上舍韻 4首 중 1首 / 又次羅忠烈建祠韻 / 長川齋後廡重建記事 / 題人書室 / 續首尾吟 78首 / 年年行 2首

對策文
전체 미수록
湖南儒生辨聖誣疏 / 請文益漸從祀聖廡疏
去病慈母文氏傳, 後傳 / 愼氏孝子傳 / 南陽宋氏忠孝家傳(缺) /
* 桂春洞厲祭文
辭職狀 5度 중 3度 / 與李潭陽 / 與李潭陽 / 與高參奉 / 答金昌平 / 與尹正郞 / 與金上舍 / 與黃上舍 / 與蔡都事 / 與兪參奉 / 與邑倅 / 與柳長興 / 與李大來 / 與曺斯文 / 抵龍山院朴斯文書 / 與白穩叟 / 白場東抵隣齋書 / 白場檄書
山水齋序 / 淵氷齋序 / 掛日山改名爲群玉山序 / 慕省齋序 / 馬氏追遠錄序 / 崇孝錄序 / 聽鳥齋序 / 寄內從弟宋公執序 / 遊浩然亭序 / 石室遺藁序 / 恕庵序 / 聽湖齋序 / 綠野軒序 / 雙樂齋序 / 岐南精舍序 / 病閑翁自號序 / 聽雨齋序 / 納爽亭序 / 愛葵軒序 / 觀水亭序 / 遵五齋序 / 恕庵序後語 / 四味堂序 / 興地村社約序 不匱齋序 / 披香閣重修序 / 永慕齋序 / 幸翁自號序 / 支提誌序 / 梁處士詩藁序 / 鳳山重牢宴詩軸序 / 暎湖齋序 / 化隱堂序 / 觀水齋序 / 送李生歸山陽序
德山記 / 金塘島船遊記 / 客舍重修記 / 天風樓重建記 / 塔山菴重修記 / 新塘記 / 玉果鄕校重修記 / 柳月波旌閭記 / 取取亭記 /重修司馬齋題名記 / 金溪祠講堂記 / 瑞竹記 / 遊錦城記 / 定靜堂記
宋氏南陽辨 / 梳詩辨

(2) 《존재집》의 편찬 과정
1875년 간행한 《존재집》은 그 자세한 내용이 다암(茶嵒) 위영복(魏榮馥, 1832~1884)의 문집인 《다암유고(茶嵒遺稿)》에 실려 있다. 《존재집》을 간행하기 위해 처음에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을 통하여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찾아가 교정 편집을 부탁했다. 이것이 1874년 2월의 일이었다. 위영복은 족손 위춘백(魏春伯)과 서울을 다녀오는 길 등 네 번에 걸쳐 노사를 찾아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노사 기정진은 다암에게 송서(送序)를 지어 준다. 이어 1875년 2월에 전의(全義 충청남도 연기군 북부 전의면)에 살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1811~1876)를 찾아가 부탁하여 일이 성사되었다.
이 과정을 적은 〈존재집간행시말〉에는 찾아가는 노정(路程)이나 주변의 지명과 풍경, 심정 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 당시의 풍속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먼 길의 왕복과 재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문집을 펴내게 된 내력을 잘 알 수 있다.
 
선생께서 저술한 문고(文稿)는 거의 백 권에 가까웠으나 당시에 편성된 원고를 거두어 모은 것은 겨우 오십여 권이었는데 모두가 풍속의 교화를 돕고 세도(世道)를 지키는 글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24권은 정조 때 임금이 열람한 뒤 규장각에 소장되었고 그 나머지 30여 권은 지금도 선생의 사가(私家)에 먼지 덮인 상자 속에 금이나 옥처럼 간직되어 감춰져 있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선생의 이름만 알고 선생의 실질은 잘 모른다. 만일 또 이대로 몇 대가 지나 버리면 그 누가 능히 궤 안에 감추어진 보물을 알겠는가?

정조에게 바친 100권 가까운 글이 규장각으로 들어갔고, 30여 권은 당시 남아 있었다는 말이다. 송치규(宋穉圭, 1759~1838)가 지은 행장에 따르면, 〈정현신보(政絃新譜)〉, 분진절목(分賑節目), 《환영지(寰瀛誌)》 등의 잡저(雜著)를 합해 90여 권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연석(筵席)에서 정조(正祖)에게 대답한 말 중에 저자의 볼만한 문자가 100여 권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어 1875년에 상로(上蘆 충남 연기군 전동면 노장리 상노장마을)에 있는 임헌회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간청하여 서문을 받았다고 하였다. 위영복은 일정은 물론이고 임헌회와의 문답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문집 교정에 대한 사유를 자세히 보고했더니, 임헌회는,
 
자네의 선조를 위해 고생하는 성심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자네의 성의에 감동하였으므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 일은 열흘이나 한 달 동안에 쉽게 끝날 일이 아니므로 문집을 놓아두고 가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라고 말하며 응낙하였다. 그런데 임헌회는 얼마 뒤 서문을 지어 주며 “이 문집은 대문자(大文字)인데, 모르기는 하지만 남도(南道)에도 교정을 잘 볼 수 있는 선비가 있겠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막상 ‘있다’고 대답했지만, 당초 교정을 봐 달라고 청하지 않았던 것은 재력도 넉넉지 못한데 멀리 외지에다가 놓아두고 교정을 기다리게 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임헌회는 교정과 편차를 잘하라는 뜻을 담아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교정을 맡기려던 이희석이 순창(淳昌)에 가 있었다. 가까스로 불러 편찬을 시작했는데,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이를 위영복은 이렇게 적고 있다.
 
순서를 따라 편찬할 계획을 세우고 존재집을 앞장부터 펴 보았을 때 남파는 자신이 자운(子雲 양웅(揚雄))과 요부(堯夫 소옹(邵雍))인 양하였다. 나는 속으로 이르기를 존재 뒤에 또 존재 같은 분이 탄생했다고 하여도 반드시 자운과 요부를 거론하며 자처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남파의 그 말은 분에 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말을 하지는 않고 동참해서 그와 논하면서 글을 보았는데 뜻이 맞지 않았다. 이처럼 중대사를 어떻게 쉽사리 뜻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 맡길 수가 있겠는가?

어찌어찌 수습하여 11월 3일에 교정을 본 편차와 목록을 임헌회에게 보여 주었다. 임헌회는 격려를 아끼지 않고 친필로 격려사까지 써 주었다. 11월 그믐이 지나고 난 뒤 다산(茶山)에 간소(刊所)를 설치해 놓고 밤낮으로 걱정을 했다. 더구나 다음 해인 1876년에는 큰 흉년이 들어 결국 8월 그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장책(粧冊)을 끝냈다. 위영복은 “그동안 결손된 비용도 수천금(數千金)이 훨씬 넘었고 몸과 마음도 이 일로 인해서 녹아들었으며 집안 살림도 따라서 군핍(窘乏)해지게 되었으니 《시경(詩經)》에서 말한 바 ‘나 혼자만이 일에 분주하여 시달림을 다했다.’고 하였듯이 바로 이 일을 두고 이른 말이라 할 것이다.”라며 그간의 노고를 스스로 위로하였다.

3. 《존재집》의 구성과 내용

(1) 《존재집》의 구성
현재 국립중앙도서관본 《존재집》의 권차, 문체, 편명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체 권차 편명
시(詩) 권1 詠星 외
소(疏) 권2/권3 萬言封事 / 封事 代黃司諫榦 / 請加贈武愍黃公上言
장(狀)/서(書) 권4 請褒洪處士命基狀代 외 4편
上久菴尹先生 외 12편
차의(箚義) 권5/권6/권7/권8/권9/권10 讀書箚義: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
잡저(雜著) 권11/권12/권13/권14/권15 堯典說 외 4편 / 格物說 / 格物說尙論
잡저
원류(原類)
권16 原圖書 외 11편
잡저 변(辨) 권17 己亥議禮辨 외 7편
잡저/서(序) 권18/권19/권20 諭邑中諸生文 외 22편 / 政絃新譜 / 鄕約序 외 7편
서(序)/기(記)/발(跋) 권21 歸樂窩序 외 8편
玉果鍊武廳重建記 외 13편
書王荊公讀孟嘗君傳後 외 20편"
명(銘)/잠(箴)/제문(祭文)/축문(祝文)/비지(碑誌) 권22 座右銘 외 3편 / 玉果公廨箴 / 祭屛溪先生文 외 4편 / 寶山祠宇羅州禮成祝文 외 3편 / 白草洞遺墟碑銘幷序 외 16편
행장(行狀)/
전(傳)
권23 處士梁公億柱行狀 외 12편
부록 권24 年譜 / 行狀 / 墓誌銘幷序 / 慰諭使啓目 / 京奇 / 本道繡啓別單 / 吏曹啓


앞서 위백규는 100권의 저술을 정조에게 올렸고, 1875년 《존재집》을 편찬할 당시 집에 남은 권질이 30권이었다고 하였던 바, 평소 매우 많은 저술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위의 《존재집》은 정조에게 올려 규장각으로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원고 외의 것만 수습하여 간행한 것이므로 위백규 저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존재집》의 구성을 보면 통상의 경우보다 시(詩)가 1권으로 적은 편이고, 관직 생활이 적었기 때문에 상소나 차자도 몇 편 되지 않는다. 그중 일부는 다른 사람 대신 작성한 글이다. 지역에서 기릴 인물의 추창(追彰)을 청한 글과 약간의 편지글이 있다. 행장, 연보, 그 외 위백규의 추천이나 관직 임명과 관련된 공문서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권20, 권21의 서(序), 기(記), 발(跋), 권22와 권23에 실린 명(銘), 묘비, 묘지, 다른 사람의 행장과 전기는 본 번역서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존재집》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위백규의 경세론(經世論)을 보여 주는 권2의 〈만언봉사(萬言封事)〉와 권19의 〈정현신보(政絃新譜)〉,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해석한 글로 경서(經書) 이해를 보여 주는 권5~10의 〈독서차의(讀書箚義)〉, 사물과 역사 및 우주의 이치와 원리를 탐구한 권11~16에 실린 〈격물설(格物說)〉과 〈원류(原類)〉, 조선 시대의 쟁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권17에 수록된 〈기해의례변(己亥議禮辨)〉, 그의 향촌 교육 및 계몽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권18 및 권20의 〈유읍중제생문(諭邑中諸生文)〉과 〈향약서(鄕約序)〉이다. 아래에서 이들 저술을 중심으로 간략히 그 내용을 검토하기로 한다.

(2) 《존재집》의 주요 내용
개혁론(改革論)
〈정현신보〉는 위백규가 30세 때인 1756년에 처음 저술되었다. 그 내용은 시폐 13조로 구성되는데, 1757년에 구폐를 추가하라는 윤봉구의 지적을 받고 구폐 13조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그 뒤 생각이 막혀 보완을 중단했다가 1778년 초에 장흥 부사 황간을 대신하여 〈봉사〉를 지으면서 다시 폐정개혁론에 관심을 쏟았다. 〈봉사〉는 〈정현신보〉 13조목 중 2조목을 제외한 11조목을 바탕으로 시폐 29조목을 논한 것이다. 그리고 1791년 겨울에 〈정현신보〉를 다시 보완하였는데, 이때 새로 추가된 내용은 설폐 없이 구폐만 수록되어 있는 ‘인리’ 이하의 19조목과 ‘정현신보총론’ 및 ‘정현신보후서’이다. 아울러 1794년 위유사(慰諭使)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를 계기로 1796년 정조의 부름을 받고 입경하여 폐단을 구제하는 근본적인 큰 요체 6조목을 논한 〈만언봉사〉를 올렸는데, 〈정현신보〉와 〈봉사〉 등을 바탕으로 10년에 걸쳐 연구한 끝에 완성한 것이었다.
〈정현신보〉와 〈봉사〉를 비교해 보면, 32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현신보〉의 경우, 학교 이하 앞쪽의 13항목은 설폐와 구폐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비하여 인리 이하의 19항목은 구폐만 갖추어져 있고 설폐는 없다. 이처럼 앞쪽의 13항목과 인리 이하의 19항목의 기술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은 두 부분이 서로 다른 단계에서 다른 조건하에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즉, 설폐와 구폐를 모두 갖추고 있는 앞쪽의 13항목은 1757년에 구폐를 추가하라는 윤봉구의 지적을 받고 구폐를 추가하여 보완한 내용이고, 설폐 없이 구폐만 갖추어져 있는 인리 이하의 19항목은 1791년 겨울에 다시 보완하면서 추가한 내용이다. 그런데 1791년에 〈정현신보〉의 내용을 다시 보완하면서 인리 이하 19항목의 구폐만 추가한 것은 그보다 앞서 1778년 초에 저술한 〈봉사〉에 설폐에 해당하는 항목이 들어 있으므로 다시 따로 갖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② 경학(經學)
위백규가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의 사서(四書)에 대한 장절을 떼어 해석한 〈독서차의(讀書箚義)〉는 그의 경학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득의의 작품이다. 그는 “욕구라는 정(情)은 이치상 본디 가지고 있지만, 단 크고 작음, 진실과 망녕의 구별이 있다. 만물을 생성하는 것은 하늘의 욕구이고, 만물을 키우는 것은 땅의 욕구이며, 서계(書契 문자)를 만들고 경전(經典)을 짓는 일 또한 이를 통해서 천하와 후세 사람들을 교화시키려는 신령한 성인의 욕구이니, 이것이 바로 욕구 중에 크고도 진실한 것이다. 현인이나 군자가 경전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구현하며, 성인이 되기를 희구하고 천명을 아는 것은 욕구 중 진실하고도 큰 것이다.”라고 선언하여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학문의 길을 가는 자신의 포부를 확인하였다.
특히 그는 기존의 주석서와는 다른 각도에서 《논어》 등 사서의 언어를 생동감 있게 해석해 냄으로써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였다. 허사(虛辭) 하나하나까지 뉘앙스와 뜻을 찾아내려는 그의 노력은 객관적인 성취 여부를 따지기 전에 탁월한 학습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격물설(格物說)

권11~16에 실린 〈격물설(格物說)〉과 〈원류(原類)〉 등은 일상의 사물과 역사 및 우주의 이치와 원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인식과 관찰을 서술한 작품으로, 천지(天地)에서부터 인간, 벌레 같은 미미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찰과 논설을 남겼다.
천지와 음양은 물론, 금수(禽獸), 곤충(昆蟲), 사물(事物) 역시 치밀한 관찰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쇠〔金〕에 대해서는 쇠와 소리, 광산(鑛山), 황금(黃金)과 은(銀), 강금(鋼金)과 유금(鍒金), 생동(生銅), 진철(眞鐵)ㆍ수철(水鐵)ㆍ이철(利鐵)ㆍ둔철(鈍鐵), 황금과 백금(白金), 편금(片金), 백금과 적동(赤銅) 등을 통해 성질과 특징을 서술하였다. 금수(禽獸)에 대해 서술할 때는 봉황, 돼지, 까치, 매, 제비, 닭, 까마귀, 올빼미, 말, 개, 쥐, 고양이, 이리, 족제비, 여우, 양, 참새, 메추라기, 뱁새에까지 관심이 미쳤다.
천지 음양(陰陽)으로 해석된 세계관은 역사 인식으로 이어졌다. 하나라 걸(桀)에서 은나라 탕(湯)으로의 변화, 당 현종(唐玄宗) 때 태진(太眞 양귀비)이라는 음이 시작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게는 한 사람의 화복(禍福)이 되고, 크게는 한 시대의 치란(治亂)이 된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은 이치이다.
천지에서 아(我)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우주론에서 자신에 이르기까지 견문과 관찰을 기록한 논설이 〈격물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권12~13은 우주와 자연에 대한 소견이고, 권14~15는 역사, 즉 인간 사회에 대한 소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외에도 권15의 인설(人說), 일원종시설(一元終始說)을 비롯하여, 권16 잡저에 실린 원류(原類)도 격물설의 범위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④ 논변(論辨)
조선 시대의 쟁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변론이 권17에 수록되어 있다. 이중 〈기해의례변(己亥議禮辨)〉과 〈춘추대의변(春秋大義辨)〉은 조선 시대 가장 큰 논쟁이었던 예송논쟁과 춘추대의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주목된다.
위백규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의 제자였다. 윤봉구는 송시열의 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제자였으므로, 스스로 후미진 장흥 땅에 살고 있다고 했지만 위백규 역시 당색으로 보면 노론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학맥 때문인지 위백규는 기해예송에서 기년설을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기년설은 현실적으로 장자가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은 사람을 또 장자로 간주하여 삼년상을 반복할 수 없다는 종법(宗法)에 대한 실용주의적 해석에 기반하고 있었다. 위백규가 보기에 효종의 정통성 문제는 복제논쟁의 핵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효종의 정통성을 복제논쟁을 통해 확증할 뿐이었다. 이런 그의 관점은 왕가(王家)와 사가(私家)에 공히 적용되는 보편주의 종법관으로 귀결되었다.
춘추대의에 대한 논의는 송시열에 대한 세간의 의혹, 즉 송시열의 춘추대의, 북벌대의의 진정성에 대한 의혹을 ‘손님의 질문’이라는 형식으로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질문은 당대에도 송시열에 대한 비난과 의혹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그 배경에는 송시열이 살던 현실과 나중에 만들어진 표상의 괴리, 또 명청(明淸) 교체와 복수설치(復讎雪恥)의 좌절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외상이 깔려 있었다. 그 외상은 창조적으로 나타날 수도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데, 위백규는 냉소적인 ‘손님의 질문’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판단했고 옳게 보지 않았다. 이 점은 위백규가 만났던 군주 정조의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향촌(鄕村) 활동
그의 향촌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권18 및 권20의 〈유읍중제생문(諭邑中諸生文)〉과 〈향약서(鄕約序)〉 등이다. 위백규는 20대 초반부터 교육 활동을 시작하면서 학규를 작성하였다. 〈계당학규(溪堂學規)〉와 〈가숙학규(家塾學規)〉 등을 분석하여 교육 방법, 교과목의 내용과 취지가 훗날 〈가중사시회음규(家中四時會飮規)〉, 〈사강규(社講規)〉 등에 적용되었다.
위백규의 향촌과 문중 활동의 동력은 선조의 유훈과 계승에서 연유하고 있다. 위백규는 20세 때인 1746년(영조22)에 〈화수종회규(花樹宗會規)〉를 시행하여 종원 간의 화목을 도모하였다. 40대에 들어와서 향촌과 문중의 모임과 조직을 본격적으로 조성하였다. 41세에 스승 윤봉구가 서거한 이후 본격적으로 향촌에서 사강회를 시행하여 농사를 지으며 독서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였다. 1769년 가중사시회(家中四時會)를 만들어 위백규 형제들이 사계절 보름마다 양친을 모시고 음례(飮禮)를 행하였으며,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세운 이후에는 그곳에서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실시하였다.
위백규가 향촌 활동 중 가장 주목한 모임은 바로 사강회이다. 그는 선조들의 유훈과 향촌 활동에 주목하며 그 취지를 되살려 보려고 사강회를 시행하였다. 사강회의 규약은 회규(會規), 강규(講規), 농규(農規)로 구분되어 있고, 특히 농규와 농가구장(農家九章)은 향촌 지식인의 독특한 의식을 논하였다. 사강회 규약은 이후 1870년 고읍면강(古邑面講)의 범례 중 강규(講規)를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계속 위씨 문중에서 규약의 전범으로써 전승되었다.

4. 사상사적 위상:성리학이 실학이다.

위백규의 《존재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선 전기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조선 후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나 성범심동이논쟁(聖凡心同異論爭)을 거치면서 난숙기에 접어들었던 조선 성리학의 시대인 영ㆍ정조 시대임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료이자 지적 성과였다. 그의 작품과 논설은 자잘한 재미만이 아니라 우주론적 통찰을 담고 있어서 호남 장흥 삼벽의 선비가 갖춘 학덕이 결코 만만치 않은 단계에 올랐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위백규의 학문은 성리학의 전통에 놓여 있다. 성리학의 이기론에 입각한 우주관과 자연관,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심성론과 수양론이 그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그는 세세한 일상의 소학(小學), 인체에 대한 의학(醫學), 벌레, 수목, 동물에 대한 자연학(自然學)적 관찰을 계속했다.
그가 태극, 음양, 오행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이기론(理氣論)과 이일분수론(理一分殊論)에 입각하여 우주와 자연계, 인간을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주장이나 해석은 구체적인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 음악이나 의학에 대한 기초 지식을 근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자연학의 토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위백규의 《존재집》 번역을 계기로 우리는 조선 후기 사상계의 이해에 관한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조선 성리학을 정태적, 도덕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많은데, 그 관점이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식민사관의 편견에서 유래된 바이지만, 조선 성리학은 사물과 세계에 대한 관찰을 전제로 한 지식의 축적과 체계화이다. 본래적 의미의 학문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세계관이든 규범성을 띠게 마련이다. 현대 법치주의 역시 규범적이듯이. 그러나 그 규범성에만 주목하여 조선 성리학을 규범으로만 이해하게 만드는 관점이나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이런 논의는 당연히 《존재집》의 모든 글에도 적용될 것이다.
둘째, 논자에 따라서는 위백규를 실학자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실학 개념이 조선 시대 사상사 연구를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한 바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이는 실학 개념의 탄생부터 예견되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실학 개념은 적극적 개념이 아니라 부정적 개념, 즉 허학(虛學)이라고 상정된 성리학을 부정하는 대립 개념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리학이 무엇이었는지, 정론이 없는 상태에서 불행하게도 실학 개념은 그림자와 싸우는 권투선수처럼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힘을 잃어 갔다.
이 난관을 이렇게 풀어 보았으면 한다. 위백규는 스스로 성리학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의 글을 보면 이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격물설〉만이 아니라, 〈독서차의(讀書箚義)〉에서 보듯이 관심 영역을 확장시키고 다른 학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견해를 제시한다. 한마디로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아니, 같으면서도 달라지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실학 개념과 대비하여 ‘N개의 성리학’이라고 부른다. 실학 개념에 내포된 근대주의적 목적론을 씻어내면 N개의 성리학이 남는다. 물론 어느 시점이 되면 N+1 성리학자는 N+2 성리학자를 보고 성리학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
셋째, 위백규라는 사상가를 연구할 때의 과제를 생각해 보자. 그동안 그의 시, 〈격물설〉, 〈독서차의(讀書箚義)〉 같은 경학, 경세론, 향촌 계몽 활동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었지만, 그것으로 위백규란 사상가의 면모를 드러내기는 부족하다. 그의 의학, 음악론, 예론, 언어학, 역사학, 자연학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격물설〉 및 〈상론〉만 해도 별도의 학위논문이 가능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위백규의 〈독서차의〉는 말할 것도 없다.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四書)에 대해, 주자나 이정(二程)의 주석에 근거하기는 하지만, 나름의 독해를 정리해 둔 저술이다. 이야말로 위백규가 N개의 성리학 중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2013년 6월 20일

(圓山 위정철 카페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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