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장위공성량 식수기념비(前面長 魏公性良 植樹記念碑)
김천 운곡(雲谷) 면장공(面長公) 휘 성량(諱 性良, 1863~1938) 고(考)
면장공(面長公) 할아버지는 부장공(部將公) 휘 대홍(諱 大洪)의 11대손이다.
자(字)는 원일(元一)이며 휘(諱)는 성량(性良)이다. 1863년 아버지 계구공(諱 啓龜)과 어머니 일선김씨(一善金氏)사이에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우인 계량(諱 繼良 1881~1927)과는 18살 차이로 물심양면으로 우애(友愛)가 돈독했다. 연일정씨(延日鄭氏) 사이에 외아들인 병두(諱 炳斗)를 두었다. 손자(孫子)는 성묵(諱 聖默), 증손(曾孫)은 일복(諱 一復, 1925년생~1991년, 前경찰공무원), 고손(高孫)은 진동(鎭東, 1953년생, 前기아자동차 부사장)이며, 현재 종손(宗孫)은 대영(大映, 1984년생, 현대제철 과장)이다.
관산재(冠山齋)를 1935년 건립하여 6先祖을 모시다.
“여우가 죽을 때 되면,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 首丘初心(수구초심)”라고 한다. 면장공 할아버지도 나이가 드시면서 본관 장흥을 몹시 그리워하셨다. 장흥에 산재한 재각 또한 부러웠다. 그 이유는 평화리에서 타계한 부장공 할아버지를 가까이 모시고 싶어 해서이다. 장흥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여건탓에 운곡종중은 구심점이 필요했다.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한학(漢學)에 밝으시고 유학(儒學)을 체득하셨기 때문에 재각건립을 통해 운곡종중을 단합시키고자 노심초사하셨다. 결국 운명(運命)하시기 3년전인 1936년 73세 되시던 해가 되서야 비로소 관산재를 건축하셨다. 척박한 농촌에서 손바닥만한 농토를 일구어 부장공 운곡종중 후손들은 힘을 모아 큰 일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면장공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부장공(部將公) 대홍(諱 大洪)할아버지는 1564년8월 12일 태어나 학문과 무예가 출중하여 20세에 무과에 등극 훈련주부(訓練主簿)의 벼슬로 임진왜란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큰 전공을 세웠다. 운곡종중의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10일 관산재에서 거행하는 데 부장공(部將公/21세), 휘 추남(樞南/22세), 휘 사징(師徵23세), 휘 춘환(春桓/24세), 휘 명방(命邦/25세), 휘 경숙 (慶淑/26세) 할아버지의 재각이다.” (제공 苑谷 위상복(魏相復)
1935년 전후 사장나무를 심으시고, 부동산을 매입하여 운곡종종(雲谷宗中)에 헌납하다.
운곡동네 입구(김천시 남면 운곡리 289번지 소재)의 사장나무(보호수 11-26-2-1 / 1982. 10.29지정)인 느티나무 역시 할아버지의 지시로 성춘공(諱 聖春, 1922.1.20~2012.5.14)께서 인근 개령면에 가서 지게에 지고와 식목(植木)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재각을 가꾸는 일에도 전심전력을 다 했다. 남면 면장(南面 面長)을 하시면서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동네 마을 길을 청소하면서 집집마다 안위를 물어 어려움을 나누었고, 재각이 건축된 후에는 매일 손수 재각과 그 주변을 청소하셨다. 덕과 배려의 성품이 운곡동과 남면을 넘어 널리 금릉군(김천시와 통합) 에서조차 칭찬이 자자했다.
또한 할아버지는 동네인근의 임야 수십정보를 매입하여 운곡종종에 헌납하여 선산(先山)으로 사용하게 했다. 또한 전답(田畓) 수십마지기를 매입하여 어려운 종친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등 운곡종종의 귀감이시다. 특히 선산은 최소한의 비용(1기당 쌀 몇되정도)으로 묘로 사용하게 했고 어려운 종친에게는 종중 전답을 부치게 하여 최소한의 끼니는 굶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혈정과 배려의 마음이었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각고의 노력으로 운곡종중은 본관 장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장흥위씨 김천 운곡종중으로서 탄탄한 물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운곡서당(雲谷書堂)에서 한학(漢學)을 익혀 시서(詩書)에 능하시다.
할아버지는 금오산공립학교 기성회 회장을 역임했고 마을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익혀 시와 서에 능하셔서 여러 유품을 남기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6.25동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운곡동네 근처는 전쟁의 피해가 심각했다. 김천은 상주, 거창, 왜관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다. 더구나 중공군과 유엔군이 대치한 낙동강전선의 길목이라 격전의 장이었다. 중공군이 마을에 탱크를 숨겨 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마을의 태반이 파괴되었다. 당시 입대한 20여명의 마을 젊은이들 대부분은 전사했다. 인근 오재지골, 중상골, 각골, 조섬골, 서당골, 감나무골, 뒷골, 원골, 송골, 여시골 등 골짜기에서는 당시 전사한 군인의 유골이 나오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유품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없어지고 그나마 남은 일부는 후손의 관리부실로 사라졌다. 1960년대 말까지도 동네 사람들은 할아버지께서 쓰신 책과 글을 자주 접했다. 유학을 숭상하고 이를 문중에 적용한 김천 운곡종중의 실천적 지식인이시다. 그 영향으로 2000년대 초에도 옛 선비복장에 갓을 쓰신 종중 어르신들이 많았다. 운곡에서 서당(書堂)을 운영한 위항복(魏沆復 1950년생) 종친 선대(先代)는 학식이 뛰어나 동네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주고 택일(擇日)을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서당집으로 불렀고 면장공 할아버지도 서당집 어르신들과 교류를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근 동네에서도 관혼상제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이 많았다.
김천 운곡(雲谷)을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고 인재 양성에 힘쓰다.
할아버지의 면장재직시 지서(현재는 파출소)가 세워진 이래 우체국, 초등학교, 농협, 성당, 교회 등의 공공시설이 줄줄이 들어서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위씨(魏氏)는 인근에서 중심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김천출신 종친으로 정치계(영주시장 위성소), 금융계(신한은행장 위성호), 지자체 (대구 시의원 위용복, 위현복), 재계(기아차 부사장 위진동), 군(공군대령 위진호), 학계(교수 위유찬), 언론계(대홍기획 위풍길) 등 많은 인재들은 할아버지의 인재양성 교육의 결과이다..
김천 운곡(雲谷)의 옛 지명은 등골(等谷)이다. “마을은 부상역의 관리들과 인근에 주둔하던 군사들에게 지급되는 둔토(屯土)가 있어 둔골(屯谷) 혹은 등골(等谷)이라고 불렀다. 원래 개령면 남면에 속했는데 1914년 운양과 둔골을 합한 후 운양(雲陽)의 운(雲)자와 둔곡(屯谷)의 곡(谷)자를 따서 운곡(雲谷)이라 했고, 1971년 둔골을 운곡1리로, 운양을 2리로 분동했다”(제공 苑谷 위상복(魏相復)).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운곡은 임야가 70~80%이상이라서 농토가 매우 적은 그야말로 가난한 마을이다. 1필지의 전답이 대부분 200평~500평이 고작이었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전체 180여 가구 중 120여 가구 이상이 위씨로 구성된 집성촌이었다. 나머지는 위문의 재각인 관산재를 돌보는 일을 했었던 박씨( 朴氏)를 비롯한 권씨, 성씨, 이씨 등의 성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2016.02.04
큰 증조부님 면장공(面長公)을 그리워하며 선친(先親)이신 성춘공(諱 聖春)의 구전(口傳)을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