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

사이트검색

문화유적

존재 위백규선생 옥과현감 재직 포폄단자

褒貶單子(殿最題目)

 

존재 위백규선생

옥과현감시 3건 전존

2회 上 1회 下(久病)

 

조선 관리들은 연 2회

근무 성적 평가

6월 15일, 12월 15일

연속 10회 上이면 승급

낮으면 파직

 

소장처 및 소장자 : 파악중

 

재치(財痴)

 

1504743185736.jpg

 

포폄법(褒貶法)

 

조선시대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해

포상과 처벌에 반영하던 인사행정 제도.

 

조선시대 관리들은 자급()마다 일정한 기간을 근무해야만

1자()씩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이를 사만승자(滿)라 한다.

 

그러나 사만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승자되는 것은 아니었다.

승자되기 위해서는 고과 성적과 포폄 성적이 좋아야만 하였다.

 

백관의 고과표()는 매년 말에

경관은 이조가,

외관은 관찰사가 작성,

국왕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각 해당 관아의 당상관과 제조(調)가 매긴 포폄 성적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포폄의 ‘포’는 포상을 의미하고 ‘폄’은 폄하()를 의미한다.

 

경외관에 대한 포폄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경관은 해당 관청의 당상관과 제조 및 육조 중 속조()의 당상관이,

외관은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상의해 포폄을 행하게 되어 있었다.

단, 제주() 3읍만은 제주목사가 등제를 매겨 관찰사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포폄제도는 태종 때부터 실시되어오기는 했지만,

 대체로 세종 때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사만자(滿)의 고과 성적과 포폄 성적은 매년 6월과 12월에 실시되는

도목정( : 라고도 함.)에 반영되었다.

 

이 때 포폄 성적이 십고십상()이면 1자를 올려 받고,

십고이중()이면 무록관(祿)에 서용되었으며,

십고삼중()이면 파직되었다.

 

그리고 오고·삼고·이고의 경우에는

일중()이면 더 좋은 관직으로 갈 수 없었고

이중이면 파직되었다.

특히 당상수령()은 일중만 되어도 파직되었다.

 

이와 같이, 포폄법은 관서들의 근만()을 직속 상관이 상정()하게 하여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료 사회의 명령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실시된 인사제도였다.

 

 

profile

碧泉 2018-02-14 19:19 *.86.97.165

위의 유물 중간에 옥과는 上,

아래위 유물 도장찍힌 곳이 옥과로 下,

존재공께서 옥과현감 시절 받으신 고과점수입니다.

下를 받으신 이유는 노년에 발병한 질병때문으로 보입니다.

로그인 정보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