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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장흥위씨 유래비 / 대전뿌리공원

長興魏氏의 由來碑

 

  大田뿌리公園碑文原稿

 

장흥(長興) 위씨(魏氏)의 시조는 회주군 경(鏡)이다. 공은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638년 신라 선덕여왕 7년에 도예지사(道藝之士)로 동래하여 문화활동의 공으로 벼슬이 아찬(阿飡)에 이르렀으며 그 뒤 고려 대 회주군(懷州君)으로 추봉(追封)되니 회주는 곧 장흥(長興)이다. 장흥으로의 수관(受貫)은 공의 추봉과 후손들의 오랜 세거(世居)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약 300년간의 세계(世系) 실전(失傳)으로 고려초기 대각관(大覺官) 창주(菖珠)를 중조(中祖)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5세 위계정(魏繼廷 1037~1107)은 고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 숙종, 예종 등 4조에서 삼중대신 검태교사 수태보 개의부동삼사 문하시중 판이부사 상주국 등을 역임했다. 타계하자 충렬(忠烈)시호와 함께 예종(睿宗) 묘정에 배향됐다.

 

또한 고려 고종 대 장흥읍에 살았던 원개(元凱), 문개(文凱), 신개(信凱) 3형제 가운데 맏이와 둘째가 춘위 예부시에 연거푸 장원급제하고 막내도 급제하니 고을이 떠들썩했다. 원개는 관직생활을 하다 출가, 정혜사 있을 때 원(元)나라 황제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송광사의 징발된 토전을 회복시켰다. 그가 입적하자 충렬왕은 원감국사(園監國師) 시호를 내렸다.

 

 위씨는 14세 위충(魏种) 합문판사(閤門判事)로 인해 조선초에는 억압을 받은 씨족이 됐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뒤엎으려다 동료의 고변으로 보복을 당한 것이다. 후손에게도 금고령(禁錮令)이 내려져 이로 말미암아 200여 년 간 출사자가 없었으나 이후부터는 문무과급제자가 배출되고, 특히 임진 및 병자 양란에 의병에 참여해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후손이 많았다.

 

그중 호남모곡도유사 대용(大用)은 형조참의에 제수되고 의주의 왕을 90일간 걸쳐 배알한 덕의(德 毅)도 형조참의에 추중됐다. 해남현감 대기는 무공으로 호서수군절도사에 제수됐으며, 언양형감 덕화(德和)와 의주부윤 한량(漢良) 등도 무공도 지대하다. 북도능전지를 저술한 창조(昌祖)는 호조(戶曹) 참의를 역임했다. 처음으로 족보를 닦은 영이재(詠而齋)와 관료의 타락상을 상소한 실학자 존재(存齋) 백규(伯珪)가 옥과현감을 지냈다.

 

2008.10.11 제막

 

圓山 魏正哲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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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2016-02-02 15:50 *.110.207.64

대전뿌리공원의 조형물에 각인된 글과 게시된 글은 다소 차이가 나는데 원문을 기준으로 게재합니다(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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