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

사이트검색

문화유적

금당도(金塘島)와 금당별곡(金塘別曲)

 

 금당도(金塘島)와 金塘別曲

 

1. 저자 : 수우옹공(守愚翁公)  휘 세직(世稷)

2. 작품시기 : 1700년대

3. 내용 : 장흥부의 관내인 금당 해상의 그 경치를 노래

 

수우옹 휘 세직(世稷)의 자는 우경(虞卿)이다.

아버지 청우당(淸友堂) 휘 동익(東翼)과 어머니 해남(海南) 윤씨(尹氏) 사이의 4남 중 장남으로 1655년(孝宗 6․乙未) 태어나 1721년(景宗 1․辛丑)에 66세로 타계했다. 공은 1675년 당쟁에 휘말려 유배 온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 장흥조(長興條) 편찬에도 참여했었다.

 

老峯의 자는 대수(大受), 시호는 문충(文忠). 1649년 진사 합격, 성균관 전적(典籍), 호남어사. 1680년 좌의정으로 승진됐다. 1675년 숙종이 즉위한 후 허적(許積)등의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이조판서의 관작을 삭탈당하고 장흥으로 유배됐다. 그는 서인과 노론계통으로 동생 민유중의 딸이 숙종 비(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스승이다. 노봉은 전라어사시절 무예를 알게 된 취수헌(醉睡軒) 천회(天會․1629~1669)를 추천, 무과(武科)에 오르게 하는 등 출사의 길을 열어줬다. 장흡내 원도리 연곡서원(淵谷書院)은 노봉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바로 그 자리이다. 그래서 27세 연하인 수우옹(守愚翁)과 운곡공(雲谷公) 휘 세설(世卨)형제도 그 문하에서 수학(修學)한 바 있어 사제 간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금당별곡은 그의 작품이지만 저술시기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종가에 보관된 모든 문적들이 화재 등으로 일실됐기 때문이다. 다만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그가 당시 장흥부의 관내인 금당 해상의 그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미루어 여지승람 장흥조를 편찬한 시기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1700년대 그의 나이 40대 중반 또는 50대초쯤으로 볼 수 있다.

 

(글, 사진제공 : 圓山 위정철)

 

1.jpg

 

2.jpg

 

3.jpg

 

4.jpg

 

5.jpg

 

 

profile

碧泉 2016-02-29 11:02 *.192.202.125

조선 후기에 위세직(魏世稷)이 지은 기행가사. 필사본. 가칭 ≪삼족당가첩 三足堂歌帖≫에 전한다. 처음에는 위세보(魏世寶)의 작품으로 소개된 바 있으나, 후에 위세보의 ≪석병집 石屛集≫의 ‘삼종형작금당별곡(三從兄作金塘別曲)’이라는 기록에 의해 위세직으로 밝혀졌다.

이 작품은 배를 타고 금당도(金塘島 :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 및 만화도(萬花島)를 거쳐 돌아오기까지의 자연경물을 서경적으로 읊은 일종의 해양기행가사이다.

금당별곡(金塘別曲)은 삼족당(三足堂) 문집(石屛集)에 들어있어 당연히 휘 세보(世寶․1669~1707)의 작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선대 이종출(李鍾出) 교수문제의 석병집 1권 7언절구에서 삼족당이 「次三從兄世稷金塘韻」(장흥문집p. 158)기록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1967년에 발행한 國語國文學 제 34~35 합병호에서 수우옹의 작품임을 밝힌 논문을 발표했다.(제공 野雲 위이환)

profile

碧泉 2016-02-29 11:18 *.192.202.125

존재 선생 65세(1791년 辛亥)
萬戶와 金塘島를 유람하다
4월 회령진 만호 조충배(趙忠培)의 초청으로 셋째 동생 백신(伯紳)과 함께 해상유람에 나섰다. 영안진(永安鎭)에서 배를 타고 산이도(山伊島)와 평이도(平伊島)를 거쳐 금당도(金塘島)를 유람했다. 붉은 절벽과 푸른 바위가 마치 귀신이 만들고 깎아놓은 듯했으며, 조대(釣臺)와 석첨(石簷)은 기괴하여 몹시 기이했다. 이때「금당시」,「금당유운」,「금당선유운」,「금당도선유기」를 지었다(제공 圓山 위정철)

로그인 정보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