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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위씨시조 위필만 한옥상(魏氏始祖 魏畢萬 漢玉像)

 

1. 명칭 : 위씨시조 위필만 한옥상(魏氏始祖 魏畢萬 漢玉像)

2. 소재지 : 중국 신밀시 노성 서가

 

魏畢萬,原為畢姓,是畢公高的裔孫,是魏姓的始祖,仕晉為將。

위필만은 본래 필성畢姓으로 필공고畢公高의 후손으로 위성魏姓의 시조로 진나라晉에 임하여 장수가 되었다.

晉獻公十六年(公元前 661 年),獻公建立二軍,自將上軍,命太子申生將下軍,趙夙禦戌,萬為車右,伐霍(今山西霍縣西南),狄(今山西河津東南)、魏(今山西芮縣東北),大獲全勝,班師回朝論功行賞時,鑒于畢萬建功顯赫,獻公不僅把畢萬封為魏大夫,世為晉卿,還把魏國所轄三地封給畢萬。

진헌공晉獻公 16년 (기원전 661년), 헌공은 2군을 창설하고 스스로 상군上軍을 이끌고, 태자 신생申生에게 하군下軍을, 조숙趙夙은 좌익을, 필만은 우익을 맡게 하여 곽霍(지금의 산서성 곽현霍縣 서남), 적狄(지금의 서하진西河津 동남), 위魏(지금의 산서성 예성현芮縣 동북)를 정벌하였는데, 크게 승리하여 조정으로 회군하여 논공행상할 때에 필만이 세운 혁혁한 공로에 비추어 헌공은 위나라 대부大夫로 봉하고 세칭 진경晉卿이 되었고, 위나라가 관할하는 3곳을 필만에게 주었다.

 

于是畢萬遂以國為姓,改為魏畢萬,從此,後世子孫便以 魏為 姓。

그래서 필만은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하여 위필만으로 고치고 이 때 부터, 후세 자손들도 위魏를 성으로 하였다.

而後魏氏日隆,成為晉國“六卿”之一 , 當時,晉國的神算子卜偃就預言:“畢萬的後代一定會昌盛。萬,是滿數;魏,是大名(古時魏寫作“巍”,高大的意思);以這裏作為始封地,上天已經啟示預兆了。天子主天下,稱兆民;諸侯主一國,稱萬民。現在把這個叫“魏”的地方封他,他名字裏又有“萬”這個滿數,所以一定會得到民眾的。”神算子卜偃的預言得到證實,以後的魏畢萬的子孫,以魏為姓,有了重大的發展。

이후 위씨는 나날이 융성하여 진나라晉國의 육경六卿 중 일인이 되었으며 당시 진국의 신산자神算子 복언卜偃이 예언하여 : 필만의 후대는 반드시 크게 융성할 것이다. 만萬은 가득찬 수이고 위魏는 큼은 말하는 것이다.(옛날에는 魏는 “巍”라고 썼는데 높고 크다는 뜻이다) ;

훈공으로 봉지에서 시작하였으니 하늘은 이미 징조를 보이셨다. 천자는 천하를 주장하니 조민兆民이라 말하고, 제후는 한 나라를 주장하니 만민萬民이라 부른다. 지금 위라는 지방의 봉지는 그의 이름에 또 “萬”이라는 가득 찬 수가 있으니 반드시 만백성을 얻을 것이다. 신산자 복언의 예언은 마침내 실증되어서 이후 위필만의 자손은 魏로 성을 삼고 중대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필공고(畢公高). 주문왕의 15자. 주나라 개국공신. 태사(太師)]

 

畢公高是周文王的第十五子,周武王的弟弟,文王吞並商人畢方之後,便封畢公高于畢國故地。

필공고는 주문와의 15자이고 주무왕의 아우로써 문왕이 상나라 사람들의 필땅을 병탄한 후 다시 필공고를 필국의 옛땅에 봉했다.

 

周初時,他被封于畢(今陝西鹹陽西北),爲公爵,故史稱爲畢公高。

주나라 초가에 그는 필(畢지금의 섬서 함양 서북)에 봉해졌다. 작위가 공작이므로 역사는 필공고하고 불렀다.

 

先后辅佐周武王周成王周康王

주무왕, 주성왕, 주강왕을 계속하여 보좌하였다.

 

长子楷伯别封至楷国,次子毕仲继承毕国,毕公高是晋国大夫毕万的祖先,也就是战国七雄之一的魏国的始祖。

장자 해백(楷伯)은 별도로 해국(楷国)에 봉해지고, 차자 필중(毕仲)이 필국을 계승하였다. 필공고는 진국(晋国) 대부(大夫) 필만(毕万)의 선조이며, 필만은 전국칠웅 중의 한 나라이 위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春秋時,其裔孫畢萬自畢國出奔晉,爲司徒,並被分封于魏,傳至魏文侯斯,與趙、韓三國瓜分晉國。

춘추시대에 그의 후예인 필만이 필국(畢國)에서 진나라(晉)로 가서 사도司徒가 되었고 위땅에 봉해졌으니 위문후 사斯에 이르러 진국晉國을 조趙, 한韓과 나누어 가졌다.

 

公元前225年爲秦所滅,其子孫四散,因是王者之後,也都被稱爲王家。

기원전 225년 진나라에 멸망한 바 그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임금의 후손 중 수령을 왕가로 불렀다.

 

《史記·魏世家》說:“武王伐纣,而高封于畢,于是畢姓。”

사기 위세가에 말하되 : 무왕이 주纣을 정벌하고 고高를 필에 봉하였는데 여기에서 필성이 생겼다 하였다.

 

史记》载毕公高与周王同姓,周武王把毕公高封到毕地(今陕西西安西南)

사기에 필공고와 주나라 임금은 동성이며, 주무왕이 필공고를 필지(지금의 섬서성 서안 서남)에 봉했다고 실려있다.

《集解》?:“杜預曰:畢在長安西北。”

집해에 두서(杜預)왈 필(畢)은 장안(長安) 서북이다라고 하였다.

 

 

[필국의 위치]

《正義》引《括地志》:“畢原在雍州萬年縣西南二十八裏。”即今陝西鹹陽市北畢原。地貌西至興平縣東部,東抵秦鹹陽城遺址,北抵泾陽縣泾水南岸,南抵渭水,地面平坦,土壤肥沃,是關中平原富庶之區。 畢國封于此地,是得天獨厚。

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필원은 옹주 만년현 서남 28리에 있다.

즉, 지금의 섬서 함양북쪽의 필원이다.

땅의 모양은 서쪽으로 흥평현 동부에 이르고, 동쪽으로 함양성 옛터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경양현 경수 남안에 이르고, 남쪽은 위수에 이르니,땅은 평탄하고 토양은 비옥하여 관중평원의 부요한 지역이다. 필국은 이 땅에 봉하여 졌으니 하늘을 얻어 으뜸으로 부유하였다.

 

 

周文王十五子,封于畢(今陜西咸陽東北),名高。成王時為太史。

주문왕 십오자로써 필(지금의 섬서성 함양 동북)에 봉하였는데 함자는 "고"였다. 주성왕시 태사가 되었다.

 

成王去世,與太保召公以成王遺命輔康王。見《書—顧命》。康王時,曾奉命加強管理東都成周(今河南洛陽)東郊

성왕이 세상을 뜨자 태보 소공 성왕의 유명으로 강왕을 보좌하였다.. 서일고명(書—顧命)을 보라. 강왕 때에 일찌기 동도 성주(지금의 하남 낙양)의 동쪽 지역의 관리를 강화하라는 명을 받았다.

 

《周本紀》稱:「武王即位,太公望為師,周公旦為輔,召公、畢公之徒左右王師,修文王緒業。」

주본기에 말하되, 무왕이 즉위하고 태공망(太公望)을 태사로 하고 주공단(周公旦)을 태보로 하고, 소공(召公), 필공(畢公)을 모두 좌우 왕사(王師)로 하여 문왕이 시작한 대업을 닦았다고 하였다.

戡耆飲至典禮上,這些人都在場。簡文雲:「畢公高為客,召公保(奭)為夾(即介),周公叔旦為命,辛公(甲)為位,作策(冊)逸為東堂之客,郘(呂)上(尚)甫(父)命為司政(正),監飲酒。」他們在飲至中的身份,可參看《儀禮》等書。

畢公和周公一樣,是武王之弟,他于典禮中為客,可能由於他任伐耆的主將,功勞最大。

필공과 주공은 모두 주무왕의 아우인데 이 분들을 전례 중에 객(客)으로 하는 것은 이들이 은나라 정벌에 임할 때 원로 주장(主將)으로 공로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召公或説係文王庶子,同武王也是同輩。辛公見《左傳》襄公四年,稱辛甲,為周大史,《韓非子‧説林上》作辛公甲,這裡的「甲」大約是一名一字。作冊逸見《尚書‧洛誥》,古書裏又稱史逸(佚)、尹逸。《國語‧晉語四》雲文王「訪于辛、尹」,韋昭注:「辛,辛甲,尹,尹佚,皆周太史。」呂尚父古書作呂尚、師尚父、太公望等,是大家熟悉的。

簡文沒有詳述典禮的儀節,主要講的是飲酒中武王和周公所作的詩。

先看武王致畢公的詩,簡文雲:王夜(吒)爵畢公,作歌一終,曰《樂樂旨酒》:樂樂旨酒,宴以二公,紝(任)仁兄弟,庶民和同,方壯方武,穆穆克邦。嘉爵速飲,後爵乃從。

「作歌一終」,語見《呂氏春秋‧音初》:「有娀氏有二佚女,……二女作歌一終,曰《燕燕往飛》。」古時詩均入樂,演奏一次為一終,「作歌一終」便是作詩一首的意思。武王詩內「宴以二公」意即以宴二公,二公是畢公和周公。

 

(세계위씨종친회  : 글,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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