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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국사전(圓鑑國師傳)

< 머 리 말>

원감국사는 지금으로부터 714년 전인 1293년에 타계하셨다. 공은 世俗的으로는 우리의 방계선조에 불과한 분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장흥 위씨들은 그분의 仲弟 文凱公의 후예들이다. 따라서 공과는 방계선조란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관련이 없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를 있게 선조와 한 형제라는 사실만으로도 대수롭지 않은 인연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공과 공의 부모형제에 대해 예나 지금이나 별로 알지 못한다.


우리가 공을 잘 모르는 증거는 족보에 잘 나타난다. 최근에 발행된 대동보에도 공과 관련된 기록은 그 이전에 발행된 족보와 별로 다르지 않다. 17세에 사마시, 19세에 예부춘위시(禮部春闈試)에 장원급제한 후 출사하여 영가서기(永嘉書記)로 재직할 때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10년 뒤 출가해서 송광사 사주로 있다 타계 후 원감국사 시효를 받았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형제간에 장원급제를 자축하는 시 등 4편이 실려 있을 뿐이다.  


족보에는 공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중요한 문중기록이라 할 수 있는 지장록(誌狀錄)에는 우금까지도 存齋公과 萬庵公의 이른바 보의설(譜疑說)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족보의 世系는 공을 7세조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앞도 뒷도 맞지 않아 기형적인 세계를 갖게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는 단지 '어른들께서 만들어 놓았다'는 이유로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족보에서 원감국사 관련 기록을 보면 정설(定說)이 없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부위마다 다른 정의(定義)를 내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사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대목이 없지 않다. 존재공은 원감집과 복암집을 입수해서 본 것으로 전해지나 내용이 빈약해선지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만암공은 그런 자료마저 보지 못한 상태에서 기묘초보와 다른 기록간의 대조(對照)했으니 의문이 풀릴 수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의 대응(對應)이다. 중앙대 秦星圭교수의 「圓鑑集」번역편이 1988년에 출판됐다. 그런데 그 보다 11년 뒤에 발행된 1999년의 기묘대동보 조차 원감국사 관련기록이 이전에 나온 족보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족보를 만들면서 사전에 충분한 연구를 하지 않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추진한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니까 선조들이 잘못된 부분을 고치라고 당부했어도 고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족보세계의 부실과 오류를 해소하려면 원감국사를 알아야 한다. 그분을 알아야 잘못된 세계를 고칠 수 있고, 충의록(忠義錄)도 개선될 수 있다. 아울러 보의설의 묵은 숙제도 해결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타계한 이후 700년이 지났으나 우리 후손 가운데 공에게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비록 불민하지만 공의 언저리를 가볼 작정을 했다. 능력은 없지만 주변에서 서성거리다보면 뭔가 보일 것이라 싶어서 이다.
어렸을 때 魏哥를「중(僧)」이라 들었다. 그 근거가 뭔지 몰라도 가령 김씨는 「도깨비」, 이씨는「삵」등 동물을 빗대어 상징했는데 우리는 중이다. 그 이유가 자못 궁금했다. 그의 俗姓이 魏氏이기에 붙여진 것이 아닌 가 여겨졌지만 더 이상은 능력 밖이었다. 그러다 2002년 송광사에서 개최된「국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학술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우리 선조 가운데도 저런 훌륭한 인물이 계셨구나'하는 충격(衝擊)을 받았다.
더구나 족보의 지장록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존재공의 상소문은 있은데 공이 원나라 황제에게 보냈다는 청전표(請田表)는 왜 없는가? 공의 유고집이 오래 전에 나왔다 하나 왜 4편의 한시(漢詩)만 실린 것인가? 등등 의문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2007년 2월부터 선조들의「千年 世錄」을 정리하고 들어갔다. 공의 문집인「圓鑑國師集」도 입수해 봤다. 그 결과 아버지가 정승이며 두 동생이 군수를 역임하는 등 새로운 사실도 나타났다.
기왕에 입수했으니 뭔가 후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한눈에 공이 탄생했을 때의 시대적 상황과 출가의 배경 그리고 승려로서의 역정을 육필(肉筆)인 유고를 통해 정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두서없이 산재된 시를 분야별로 묶어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한정된 유고에다 능력도 부족해서 욕심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비록 부족하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자위한다. 미진한 부분은 후학들의 몫으로 돌린다.

         
1. 族譜面註와 譜疑記錄

1) 族譜의 面註全文

(1) 圓鑑國師
고려 고종 丙戌1226년 11월 17일에 出生하였고 고종 甲辰1244년 19세 때 壯元及第하여 관이 翰林學士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 10년 후인 29세 때에 出家하여 法諱는 法桓이요 후에 冲止로 改名하였으며 自號를 宓庵老人이라 하고 諡號는 圓鑑國師에 贈되다. 仲弟가 平陽郡事 때에 공이 作歌曰 靑雲歌起白雲好하니 君何歸兮我不歸오하며 亦入松廣寺하여 甘露庵에 居하다가 忠烈王 壬辰 1292년(壬辰) 1월 10일 享年67세요 法臘 39년에入寂하였고 1월 20일 茶毘하다.
塔號를 寶明에 贈하고 大司成文翰學士 承旨 金嚑이 奉敎撰하고 甘露庵前鶴頭嶝에 門人大禪師 靜眼과 大禪師 眞寂 神悅 등이 謹竪碑하다. 癸酉 1993년 4월 장흥지구종친회에서 보명탑전에 奉審碑를 謹竪하다.
※위의 기록은 대부분 맞다. 그러나 졸년은 1293년(癸巳 忠烈王 19년)이다. 그리고 仲弟가 평양군사 때 지었다는 시는「與君相別十三年 洛北江南兩杳然 那料鷄峯風雨夜 白頭今復對床眠= 그대와 이별한지 13년, 낙북 강남으로 서로 묘연했는데, 어찌 생각했으랴 계봉의 비바람 치는 밤에, 흰머리로 이제 다시 잠자리 같이할 줄을」시가 있을 뿐이다.

(2) 仲弟 文凱
고려 고종조 戊子1228년에 出生하고 고종 乙巳 1245년 18세 때에 壯元及第하여 관이 翰林學士補闕 平陽郡事에 이르다. 伯氏인 樞密公이 作詩하여 有圓鑑集하고 載與地勝覽하다. 又詩曰 月宮丹桂最高枝를 去年今年兄弟折이라하다. 樞密公이 19세에 장원급제하였으니 以此觀之면 공의 등제시년이 18이다. 今府治의 主峯이 壯元峯이요 그 右峯이 居末峯이니 盖以公之兄弟가 壯元及第하였고 季弟인 堂後公이 及第하였기에 그 峯을 장원봉과 거말봉으로 名之하다. 有詩曰 誰知巖下如斗舍에 養得天池幾箇龍고하다. 巖下는 盖指舊官衙後盤石而言이다.
※ 장원급제에 대해 1245년 설과 1249년 설 등 두설이 있다. 圓鑑集에 따르면 仲弟 문개공은 급제 후 개성조정에서 補闕과 平陽郡守에 이어 海州郡守로 재직할 때 병으로 1289년에 타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3) 季弟 信凱
관은 樞密院堂後요 宓庵集에 季弟堂後公 璇에게 주는 詩가 있으니 詩曰 世難今年勝去年하니 四方何處不騷然고 陟岡謾自勞相望하니 姜被無因得共眠이라하여 璇은 其或公之少字歟아
※ 圓鑑集에 따르면 季弟인 신개의 호는 樞院堂인데 여기서는 벼슬의 품계인 堂後(后) 함께 붙여 놓았고, 경상남도 梁州郡守를 역임했다고 했으나 기록되지 않았다. 시도 伯兄과 仲兄이 정혜사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는 소식을 듣고 백형의 詩韻에 따라 지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진성규교수는 고려사에 나온 璇을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2) 3兄弟 관련 譜疑記錄

(1) 存齋(桂巷)公의 所論
萬庵公譜疑說에 인용된 부분= 舊譜를 살펴보니 員外郞公으로서 忠烈公을 이어간다면 아들 항렬이 되며 忠烈公이 仁宗 때 졸하였고 충렬공의 손자인 元凱는 출가하여 시호가 원감국사인데 원나라 成宗 때에 죽었으니 고려 睿宗으로부터 원나라 초까지는 160여년이 되는데 충렬과 원개는 단지 3세이니 年代는 멀고 世代는 촉박하다. 원나라 초로부터 李朝까지는 겨우 100년이 되는데 원개씨로부터 祗侯公까지는 무릇 8세이니 世代는 멀고 年代는 좁으니 감히 어찌된 연유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또 東人詩話를 상고해보면 원감국사의 속명은 珣이라 하였고 원감시집에는 또 堂後인 계제 璇에게 부치는 시가 있으니 珣과 璇은 모두 玉字邊이나 원개를 지적해서 圓鑑이라 한 것은 實傳이 아닐 것이며 元凱氏가 참으로 충렬의 손자일까. 또 원감집에 舍弟 평양군사에게 부치는 시가 있으나 과연 이 분이 文凱氏의 형일 것인가. 또 송광사에 원감국사의 비문에는 고의 휘는 紹니 戶部員外郞이라 하였으나 불가의 碑例에더 世德을 서술하는데 국사가 과연 명신 충렬공의 손자라면 어찌 祖는 某요 관은 太師며 시호는 忠烈이라 말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2) 萬庵公의 所論
① 樞密公 諱 元凱= 추밀공 사적비에 대강 공은 定安道 艸縣人이다. 睿宗 丙戌1106년(1226년의 잘못) 11월 17일 출생하니 용모가 빼어났으며 9세 때 글을 배우니 총명하고 민첩함이 보통사람보다 월등하여 무릇 經書와 諸子書며 史記를 흝어만 보고 바로 외우고 글을 잘 붙여 읽었다. 17세 때 향시에 합격하고 19세 때 春闈에 응시하여 장원에 올랐고 일찍 벼슬하여 永嘉書記로 나갔으며 日本에 사신으로 가서 異邦에 국위를 선양했다.
禁直玉堂에서 글 짓는 솜씨가 圓熟하고 通麗해서 碩學老儒나 유생들이 모두 탄복하였으며 벼슬이 樞密院 부사에 이르자 時俗에 용납되지 못한 것을 알고 세속을 피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정을 나와 중이 되니 上國(宋아라 했는데 元임)에서 그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초청하고 宋帝(원나라 태조임)가 친히 맞이하여 賓禮로 대접하였다. 自號를 宓庵老人이라 하고 나이 67세 때 乘化하였다.

② 與地勝覽.舊譜의 기록과 桂巷公의 의문점 詳考
■與地勝覽= 여지승람 長興人物條에 위원개는 고종 戊申 1248년에 장원급제하여 관이 추밀부사로 뒤에 중이 되어 원감국사로 贈諡되었다고 하였고 또 위문개는 원개의 동생으로 장원급제하니 시에 이르기를「黃金榜을 첫째로 내가 일찍 차지했는데 붉은 계수나무 높은 가지를 자네도 또한 거두었네. 천만년 동안 드물게 있는 일이니 한 집에서 두 마리 용머리를 산채로 얻었구려」라고 하였다.
■舊譜= 구보에 원개씨 事蹟이 여지승람과 같으며 또 이르기를 號는 宓庵이고 시집이 있는데 文凱氏 밑에다 고려 때 장원급제한 백씨가 樞密公이라 하며「달 속의 붉은 계수나무 가장 높은 가지를 거년과 금년에 형제가 꺾었구나」라고 하였으니 대개 추밀공은 나이가 19세 때 급제하였고 공이 급제한 것도 또한 17, 8세 때 였을 것이다. 관이 翰林學士와 平陽郡事에 이르렀다.(평양은 지금 순천이다)
■桂巷公= 계항공이 말하기를 圓鑑集에 사제인 평양군사 文凱에 붙이는 시가 있다고 하였고 또 문개씨는 고려 고종 乙巳 1245년에 장원급제하였다고 한다. 芝峯類說 文章卷에는 고려 때 위원개와 문개는 장흥인이며 형제이고 모두 장원급제하니 이른바「한집에서 두 마리 용의 머리를 산채로 얻은 것」이라고 하였으며 원개는 뒤에 중이 되어 호를 圓鑑이라 하였고 昇平 定慧寺에 살았으며 시가 있으니「누가 알리요 鷄足山中의 늙은이가 일찍 이 용머리에 上賓으로 앉을 줄을」이라 하였고 또「떨어진 돌 시냇물에 구르니 맑아서 옥을 부수는 것 같고 물에 비친 구름 층층히 푸르니 차가운 가을을 만지는 것 같네」라고 하였다.
舊譜에 信凱氏 밑에 관이 樞密院 堂後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宓庵集을 살펴보니 季弟인 추밀원 당후인 璇과 화답한 시가 있는데「어지러운 세상이 금년에는 작년보다 더하여 4방 어느 곳이고 소연하지 아니한가. 언덕에 올라 부질없이 스스로 위로하며 서로 바라보니 한 이불속에 같이 잘 날이 돌아올 수 없겠구나」라고 하였으니 璇은 공의 小字가 아닌가 한다.
東人詩話에 원감의 속명은 珣이라고 하였다. 순천 송광사에 원감국사의 비가 있는데 비문에 이르기를 考의 諱는 紹니 戶部員外郞이라 하였다. 계항공이 삼가 舊譜를 살펴보니 員外郞으로 충렬공을 이어간다면 아들 항렬이 되며 충렬공이 仁宗 때 졸하였고 충렬공의 손자인 원개는 출가하여 시호가 원감국사인데 원나라 成宗 때에 죽었으니 고려 睿宗으로부터 원나라 초까지는 160여년이 되는데 충렬공과 원개는 단지 3世이니 연대는 멀고 세대는 촉박하다. 원개로부터 이조까지는 겨우 100년인데 원개씨로부터 祗侯公까지는 무릇 8世이니 세대는 멀고 연대는 좁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또 東人詩話를 상고해 보면 원감국사의 속명은 珣이라 하였고 원감시집에는 또 당후인 계제 璇에게 부치는 시가 있으니 珣과 璇은 모두 그것이 옥자변이니 원개를 지적해서 원감이라 한 것은 實傳이 아닐 것이니 원개씨가 참으로 이 충렬의 손자인가. 또 원감집에 사제 평양군사에게 부치는 시가 있으나 과연 이 분이 문개씨의 형인가. 그것이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다.
또 순천 송광사에 원감국사비의 비문에는 考의 諱는 戶部員外郞이라 하였으나 불가의 碑例에도 세덕을 서술하는데 국사가 과연 명신 충렬공의 손자라면 어찌 祖는 모요 관은 태사며 시호는 충렬이라 말하지 아니하였는지 알 수 없다. 만약 원개씨가 참으로 원감이라면 충렬의 손자가 될 수 없고 右直諫의 아버지가 아니니 의심이 없지 않을 뿐만 아니라 昆明의 겁회(劫灰)를 어루만지더라도 사람이 생겨나기 이전의 事情을 고증할 수 없고 남아있는 책갈피만 만지며 눈물을 흘린다. 하나 史記에도 闕文이 있다고 공자께서 말씀했는데 후생이 어찌 臆說을 하겠는가.
■各種記錄의 壯元及第時期= 舊譜에 이르기를 여지승람에 보니 위원개는 고종 戊申 1248년에 장원급제하여 관이 추밀부사요 뒤에 출가하여 시호가 원감이라 하였고, 族譜에도 戊申년에 장원급제하여 관이 추밀부사요 출가하여 호는 복암이고 시호는 원감이라 하였으며, 또 나이 19세에 급제하였다고 했다. 지봉류설에는 장원을 하였고 출가하여 원감이라 칭하였다고 하니 그렇다면 공이 고종 庚寅 1230년에 출생하여 19세인 戊申년에 장원하였다.
金嚑이 지은 추밀공사적비에는 공이 丙戌년에 출생하여 19세 때 장원하였고 관이 추밀부사며 뒤에 출가하여 복암이라 자호하였다고 했는데 諱도 없고 某字라고만 하였다. 高麗史에는 고종 甲辰 1244년에 魏珣 등에게 급제를 하사하였고 하였으나 고종 甲辰은은 곧 사적비의 19세가 되고, 東人詩話에는 원감의 속명은 珣이라 하였으니 珣이 이미 원감이라면 곤 宓庵이다. 이것이 어찌 19세의 등제는 族譜와 碑가 같고, 생년이 丙戌과 庚寅으로 다르고, 장원은 甲辰과 戊申으로 족보와 비가 서로 다르다.
사적비가 과연 이 원개씨의 비인가 珣의 비인가? 장원하여 관이 추밀부사요 뒤에 출가하여 호는 복암이요 시호는 원감이라 하였으니 과연 이분이 元凱인가 珣인가? 東人詩話는 어떤 사람이 썼는지는 알지 못하나 與地勝覽에는 고종 戊申 1248년에서 230여년 뒤에 썼고, 지봉류설은 여지승람보다 100년 정도 뒤에 썼으며, 족보는 지봉류설보다 130,40년 뒤에 만들어 졌다. 高麗史는 비록 李朝 때 썼으나 前朝의 實錄을 따라 썼를 것이요, 金曛은 고려 어느 때 알지 못하나 고려인이 틀림없다.
이제 여지승람.지봉류설.족보를 따른다면 元凱氏가 戊申년에 장원했고, 뒤에 출가하여 복암이라 하고, 시호를 원감이라 한 것을 옳다고 할 것인가. 고려사.동인시화.사적비를 따른다면 珣이 甲辰년에 장원하고, 뒤에 출가하여 호는 복암이요 시호는 원감이라 하는 것을 옳다고 할 것인가.「월궁에 계수나무가장 높은 가지를 거년과 금년에 형제가 꺾었구나」의 시로 보면 文凱氏의 장원급제는 마땅히 乙酉년에 있었을 터인데 玉果公(존재공)은 무엇 때문에 乙巳년에 장원했다고 하였을까.
그렇지 않다면 원개씨의 장원급제를 甲辰년에 귀착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일까? 그러나 甲辰년에는 魏珣이 이미 장원했으니 응당 甲辰년 한해에 위씨의 두 장원이 있지 아니할 것이다. 舊譜에 신개씨 아래 복암이 동생 璇과 더불어 相合한 시가 기록되어 있음으로 璇은 혹시 공의 小字인가 하였는데 옥과공께서 동인시화에 원감의 속명은 珣이라 하였고, 원감집에 동생 璇에게 부치는 시가 있으니 珣과 璇은 모두 玉邊인데 원개씨를 지적하여 원감이라 한 것은 實傳이 아니라고 하였다.
원개씨가 참으로 이 충렬공의 손자인가 하였으니 珣이 원감이라면 원감은 복암일 것이요 珣과 璇은 자연히 형제의 이름자가 되니 충렬공 伯氏의 휘가 繼令이요 그 손자 3인이 仁凱, 孝凱, 忠凱라 하였으니 원개와 문개 양공도 또한 모두 凱로서 이름을 하였음으로 어찌 信凱氏만 홀로 璇자로 이름을 만들 이유가 있으리요. 생각건대 원개, 문개, 신개 3공은 자연히 한 형제요, 珣과 璇 2공도 또한 한 형제였으며, 璇은 관이 堂後인즉 또한 급제다.
한 성씨 4형제가 훤하게 빛났으며 珣과 원개 문개 양공을 합하여 5년간에 3인이 장원하니 원근이 떠들썩함으로 전설이 와전되고 年條가 서로 바뀌어졌으며 名字가 서로 혼돈되어 망연(茫然)히 3,4백년 뒤에 붓을 잡고 追記한 자가 혹은 선인의 오전(誤傳)을 신빙하고, 혹은 타인의 만록(漫錄)을 믿어 오늘의 의심을 얽히게 되었을 것이니 만약 고려사, 동인시화, 사적비로 증거를 삼으면 19세에 장원하고 중이 되어 호를 복암이라 하게 된다. 그러나 지봉류설, 족보의 호 宓庵과 시호 원감을 珣에게 돌아가게 한다면 혹 바른 것을 얻을 것도 같다.
옥과공이 원개씨를 가르켜 원감이라 한 것도 깊은 의문을 일으키게 한다. 공이 근거로 삼은 제설(諸說)을 보건대 모두가 증거가 있으며 고종 甲辰에 魏珣 등에게 급제를 하사한 것과 여지승람과 족보의 戊申년에 장원급제한 연대를 보면 서로 틀리며, 사적비와 19세 甲辰년 장원연대는 서로 부합되니 누가 이 복암 원감인지, 누가 복암 원감이 아닌지 반드시 의심을 깨뜨릴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기록이 없어져버려 고증할 곳이 없으니 또한 어찌 감히 딱 잘라 말 할 수 있으리요.
■忠烈公과 國師間의 關係= 삼가 살펴보건대 충렬공과 원개씨와는 단지 3세인데 문종 때 충렬공 등제 때로부터 고종 戊申년 원개씨 장원급제 때까지는 200여년이 되니 연대가 너무 멀고 세대는 너무 가까우니 충렬공 이하로부터 우직간공 이상에 혹시 代數가 失傳된 것이 아닌가 하며, 承系가 또한 착오가 있지 않을까 두렵다. 원개씨 장원급제가 고종 戊申년이라면 문개씨 장원급제도 乙酉년에 있었을 것이요, 원종 9년 己巳 1269년에 正郞인 魏文愷를 開元路에 보내어 招刷하였다고 하였으며, 乙酉로부터 己巳까지는 21년이니 文凱와 文愷 양공이 같은 때다.
凱字와 愷字가 모두 豈音을 따랐고 또 서로 같으니 응당 한때에 文凱와 文愷 양공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凱字가 이 愷字를 잘못 쓴 것이 아닐는지. 고려사에는 愷라 하고 여지승람에는 凱라 하였으니 또한 어떻게 딱 잘라 말하리요. 또한 상고 하건대 고종 11년 甲申에 검교장군 魏玿가 있었고 18년 辛卯에 용주부사 魏玿가 있으니 玿와 珣과 璇字는 모두 玉邊이니 혹시 이분들이 같은 시대 족형제의 항렬이 아닐까?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圓鑑國師 3형제의 身上을 놓고 存齋公과 萬庵公이 고려사, 여지승람, 동인시화, 지봉류설, 사적비 , 舊譜와 족보 등의 기록에 생졸년, 급제시기, 명휘가 서로 달라 많이 헷갈린 모습이 역력하다. 궁금증은 지금도 여전하다. 가장 큰 문제는 충렬공과 원개공간의 연대와 세대로 만암공은 아마 세계가 失傳돼서 비롯된 현상으로 추측할 정도이다. 그 부분은 누가 봐도 상식이 통하지 않은 대목임을 부인할 수 없다.

3) 誌狀錄의 遺詩記錄
족보 지장록(誌狀錄)에는 남아있는 300여 편의 유고(遺稿) 가운데 4편이 실려 있다. 언제 누가 유고를 입수해서 게재했는지 연유는 알 수 없다.

(1) 病中言志
一室靜無事= 일실이 고요하여 일이 없으니
任他世亂離= 세상의 난리 아랑 곳 없네
硏衰便瀨散= 나이가 늙으니 게으르고 어수선 하여
病久謝遊嬉= 병이 오래되어 노는 것도 사절이네
釅茗聊澆渴= 텁텁한 막걸리는 갈증을 없앤데 도움이 되고
香蔬足療飢= 향기로운 나물은 시장기를 없앤데 족하네
箇中深有味= 이 가운데 깊은 맛이 있으니
且喜沒人和= 또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기쁘네

(2) 病中言志
古寺秋深木葉黃= 고사에 가을이 깊으니 나뭇잎은 누렇고
風高天色正蒼凉= 바람 높은 하늘색이 시퍼렇고 서늘하네
閑無檢束甘年老= 한가하여 단속함이 없으니 늙음이 싫고
病似拘囚覺日長= 병들어 갇혀있으니 해긴 줄을 알겠구나
霜令急尋三事衲= 하늘 차니 급히 삼사계율을 삼은 장삼을 찾고
室空唯對一爐香= 텅빈 방안에는 오직 한 화로에 핀 향을 대하네
沙彌不解蔬湌淡= 사미승은 나물에다 밥먹은 담담함을 깨닫지 못하고
來點山茶勸我嘗= 山茶를 가리키며 내게 맛보라고 권하네

(3) 舍弟就官韻
黃金榜首吾曾點= 황금방의 으뜸을 내가 일찍 차지했는데
丹桂魁科子亦收= 단계의 높은 가지를 그대 또한 거두었네
千萬古來稀有事= 천만년 내려오면서 드문 일이 있으니
一家生得兩龍頭= 한 집안에서 살아있는 용 두 마리를 얻었구려

(4)與南原倅趙酬唱詩
再捷用門第一人= 두 번이나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여
便將忠孝奉君  = 문득 앞으로는 충효로 군친을 받을었네
親欲窮出世人間事= 출세를 다하고자함은 인간의 일이니
來作鷄峯社裏賓= 계봉사 속의 손님이나 되어 오게나
2. 時代狀況과 出生 및 出家

원감국사는 암울한 시대를 살았다. 우리가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통치 아래 살았던 것처럼 국사 3형제도 그런 시대를 살아야 했다. 당시는 일본이 아니라 징키스칸이 개국한 몽고제국이었다. 국사 3형제는 출생하자 말자 몽고의 침약과 2차례의 일본정벌로 고려가 시달리고 있던 시기를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 고려백성들의 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몽고의 침략상을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기에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 蒙古의 27年間 7차례 侵略
1218년(고종5)에 거란유민들이 金의 압박을 피해 고려로 몰려왔다. 이 보다 앞서 遼가 멸망한 뒤 금의 지배를 받고 있던 거란족이 1211(희종7)경 몽고의 지원을 받아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지배층의 내분으로 야율유구(耶律留哥)가 몽고에 투항, 이를 계기로 몽고가 거란을 공격하자 거란의 유민들이 1216년 고려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몽고는 그들을 뒤쫓아 들어왔는데 추위와 군량부족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자 지원을 요청했다.
고려 또한 단독으로 거란족을 물리칠 수 없자 군량지원을 들어준 대신 함께 거란족을 섬멸했다. 이런 일이 있는 직후 몽고는 형제맹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하며 공납을 요구하고 나섰다. 고려는 과중한 공납요구와 사신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발, 양국관계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때 공납을 독촉하기 위해 파견된 몽고 사신 제구유(著古與)가 귀국 길에 피살됐다. 몽고는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간주, 국교를 단절하고 1231년부터 1258년까지 7차례나 고려를 침략하며 반도를 유린하기에 이른다.
(1) 몽고의 1차 침략
1229년 징키스칸의 뒤를 이어 오고타이(太宗)가 칸에 올라 동진국과 금에 공격을 재개하는 한편 1231년부터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살리타(橵醴塔)이 이끈 몽고군은 함신진(의주), 철주(철산), 귀주(귀산), 안북부(안주), 서경, 황주, 봉주(봉산), 평주(평산)을 공격, 점령했다. 그들은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면서 양주, 광주, 충주, 청주까지 공격하는 한편 개경을 포위하여 압박해 들어왔다. 왕은 권항사(勸降使)를 인견하고 왕족 회안공을 살리타 둔소(屯所)에 보내 화의를 추진했다. 몽고는 제유구의 피살을 추궁했으나 고려는 금의 소행이라면서 예물을 주고 회의를 성립시켰다. 이 때 몽고는 서북면 지역 40개성에 그들의 행적조직이라 할 다루기치(達魯花赤)을 남기고 요동으로 철군했다.
(2) 몽고의 2차 침략
무신정권의 우두머리 최우는 몽고군이 수전(水戰)에 익숙치 못한 점을 이용, 고려의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는 각지의 주민들을 산성(山城)과 해도(海島)에 입보(入保)시켜 항몽(抗蒙)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때 내시 윤복창과 서경순무사 번희가 다루가치를 자주 습격하자 몽고는 1232년 1차 침략 때의 주장 살리타가 다시 침입해 환도를 요구하며 경상도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고려도 몽고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항전을 계속하다 그해 12월에는 처인성(용인)에서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를 사살했다. 지휘관을 잃은 몽고군은 부장 데구(鐵哥)의 인솔로 철수했다. 1233년에는 북계병마사 민희가 최우의 가병 3000명을 인솔, 서경을 공격해 1차 침입 때 몽고군 앞잡이 홍복원일당을 요동으로 몰아내는데 성공, 몽고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는데 성공을 거뒀다.
(3) 몽고의 3차 침략
몽고는 1233년부터 2년간 동진국과 금을 멸망시키고 남송(南宋)을 공격하느라 고려에 대한 침략을 일시 중단했다. 그러나 1235년부터는 다시 고려를 침략, 2차 침공 때 분풀이로 당구(唐古)를 주장으로 삼아 경상도와 전라도까지 유린했다. 고려인민들의 항쟁도 만만치 않아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그러자 고려조정은 김봉정장군과 송언기어사를 몽고에 보내 강화를 제의했다. 몽고는 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4년만인 1239년 철수했다. 고려는 왕이 친조했다가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여겨 친조를 않고 왕족 신암공 전을 왕의 동생이라 칭해 입조시켰는데 그는 이듬해 무사히 귀국했다. 몽고는 이때 사신을 보내 해도에 입보하고 있는 민호(民戶)를 상륙하게 하고 그 수를 보고할 것과 독로화(禿魯花) 즉 인질을 보내고 항몽행위 관료를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고려는 안녕공 준을 왕의 친아들이라 하여 귀족자제 10명과 파몽했다. 그런데 오고타이가가 죽자에 칸위계승에 따른 분규로 소강상태에 놓여 있었다.
(4) 몽고의 4차 침략
몽고는 칸위 계승문제를 놓고 5년간 분규 끝에 나중에 정종이 되는 구유구(貴由)가 즉위했다. 칸위가 확정되자 다시 안정을 되찾아 1247년 고려의 국왕친조와 출륙환도(出陸還都)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다시 침입했다. 이 때 야무간을 주장으로 고려 북부지방에 이르렀으나 1248년 칸인 구유구가 죽고 칸 계승분규가 재연되면서 철수했기 때문에 전쟁은 전국적으로 번지지 않고 끝났다.
(5) 몽고의 5차 침략
1251년(고종38) 내분 끝에 즉위한 망구(蒙哥․헌종)는 즉위하자 말자 사신을 고려로 보내 친조와 강화도 출륙을 재촉했다. 고려는 1252년 1월 이현을 파몽하는 한편 6월에 친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왕의 출륙은 무신정권 최항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자 몽고사신은 이를 힐난하고 귀국했다. 1253년 몽고는에구(也古)를 주장으로 다시 침입해 왕의 출륙을 요구했으나 최항의 반대로 교섭은 성과 없이 끝났다. 이때 고려는 충실도감(充實都監)을 두고 군사력 강화와 각지의 민호를 산성과 해도에 입보해 항전을 다졌다. 그러나 고려는 왕이 강화도에서 나와 에구의 사신을 맞이하고 뒤이어 왕자 안경공 창을 몽고에 보내 친조를 대신하여 화의가 성립됐다.
(6) 몽고의 6차 침략
몽고는 철수 후 반년만인 1254년 7월 사신을 보내 최항을 비롯한 조정의 개경환도를 요구했다. 아울러 쟈랄타이(車羅大)가 이끈 몽고군이 전국을 유린, 한 해 20만 명이 포로로 잡히고 희생자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고려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삼별초군을 선발, 강화도 수비를 강화해 몽고에 타격을 줬다. 이에 쟈랄타이는 고려의 태도변화를 지켜보겠다며 일단 철수 했다. 그래도 고려가 출륙환도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1256년 쟈랄타이가 강화도 갑곳의 대안에 군사를 집결, 고려조정을 위협하고 수군활동에 타격을 입히자 김수강의 외교활동으로 몽고군을 철수하게 했다.
(7) 몽고군의 7차 침입
몽고군의 철수에도 왕의 출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257년 고려는 해마다 보낸 공물도 중단했다. 이에 자극 받은 몽고는 그해 6월 쟈랄타이로 하여금 다시 고려를 침입하게 했다. 몽고군은 황해․경기․충청도 등까지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자 조정은 국왕의 친조를 태자의 입조로 대신하자고 제의했다. 곧 강화가 성립됐다. 그러나 고려는 태자를 보내지 않고 안경공 창을 보내자 몽고는 다시 북계에 집결, 공격했다. 1258년(고종45) 유경과 김준 등이 최의를 죽여 최씨정권이 막을 내렸다. 그러자 촤자와 김보정의 대몽강화론이 대두되어 화의는 급속도로 진전돼 1258년 5월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에서 몽고의 사신을 맞았다. 그리고 12월에는 박희실과 조문주를 몽고로 보내 최의제거를 알리고 출륙과 태자입조을 약속해 1259년 3월 태자 전(원종)을 몽고에 보내 화의가 성립되면서 28년간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됐다.

2) 蒙古의 高麗支配
몽고는 1231년부터 1259년까지 무력에 의해 고려를 유린한 후 이후부터는 왕실을 통한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고려는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고는 이듬해인 1271년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元이라 했다. 태자 전은 인질로 몽고 궁에 살아야 했고, 그의 비도 몽고황제의 딸을 맞아야 했다. 인질인 왕자는 다음 왕으로 계승하게 하니 몽고가 사실상 고려조정을 지배하는 꼴리 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몽고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한 동정함대(東征艦隊)를 고려로 하여금 만들게 했다. 침략을 위한 물자와 1천척의 함대 건조는 전적으로 고려 백성의 몫이 됐다. 28년간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민생은 처참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다 공물과 전쟁물자까지 조달해야 하니 그 참상은 실로 목불인견(目不忍見) 그것이 아닐 수 없었다. 거의 100년 동안 몽고의 지배하에 놓인 당시의 사정은 우리가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겪은 참상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3) 成長期와 戰爭 그리고 被支配
원감국사 3형제의 출생과 성장기는 바로 몽고의 침략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이 끝나면 태평하리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몽고의 끝없는 지배 아래 놓이고 만다. 참의정승(參議政丞)의 벼슬까지 지낸 아버지는 3형제가 저마다 머리까지 명석하니 얼마나 기대가 컸겠는가. 우리들이 그때를 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자식들이 출사해서 가문을 빛내주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1) 3兄弟의 出生과 及第時機
원감국사는 1226년 장흥읍 동동리 장원봉 아래서 태어났다. 아버지 참의정승과 어머니 송씨의 장남인 그는 어려서 정말 총명했다고 전한다. 기록으로는 9세 때 경서(經書)와 사류(史類)의 서적을 읽었다니 그 총명함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되기도 한다. 季弟 文凱는 1228년에 태어났다. 2년 터울이라면 막내인 信凱는 출생년도가 기록에는 없지만 1230년경에 태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3형제의 출생은 격동의 시기에 맞춰졌다.  
그의 3형제가 태어난 때가 중국의 남송은 물론 요동의 거란 동진국 금나라가 새로 일어난 징키스칸의 몽고로부터 망할 끝자락에 처한 시기이다. 고려 또한 그가 출생한지 5년째 되던 1231년부터 28년간 7차례의 침략을 받아 이듬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그러고 부족해서 끝내는 그들의 100년 동안  몽고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지배를 받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누란의 국란을 온몸으로 부대껴야 하는 시기였다.
이들 3형제는 임시수도인 강화도로 가서 과거시험을 봤다. 원감국사는 1244년(1248년 설도 있음) 19세에 예부춘위시(禮部春闈試)에 장원급제의 영광을 앉았다. 중제 문개 또한 장원급제에 두 설이 있으나 국사의 詩로 보아 1245년(1249년설)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막내인 신개는 급제시기에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 1250년 이전에 장원은 아니지만 급제하였다. 그래서 국사는 永嘉書記, 樞密院副使를 역임했고, 중제는 補闕, 평양군수, 해주군수를, 막내는 梁州군수를 역임한 것까지 확인되고 있다.

(2) 元凱의 出家動機
원개는 공직생활을 하다 10년 후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다. 그러나 그의 출가에 대해 지금까지는 본인의 표현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로 인해 그의 사상과 생애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막연히 몽고의 피침과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애환을 보고 출가했을 거라는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출가의 동기를 말하지 않은 이상 7백년 뒤의 시대를 살고 있는 후학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막연히 당시의 시대상을 빗대어 짐작하는 도리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① 秦星圭교수의 견해
『金曛이 찬한 비문에 의하면 그는 9세에 就學하여 經子書를 암송하고 속문(屬文)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경과 1242년 17세에 司馬試에 합격하고, 1244년 19세에는 春闈(禮部試)에 장원으로 뽑혀 재질의 탁월함을 보여 주었다. 그 후 日本에 使臣으로 가서 국위를 선양하였고 禁植玉堂에서는 문체가 수려하여 많은 선비들이 탄복 하였다. 이와 같이 儒者로서 전도가 밝은 그가 무엇 때문에 29세인 1254년에 승려로 변신하였을까?
19세로 장원급제한 후 승려가 된 29세까지 10연년은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었을까? 구체적 사정은 모르지만 미관(微官)인 永嘉書記를 지닌 것으로 보아 관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한 지식인으로서는 별다른 생활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10여년의 생활이 승직(僧職)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1245년(고종32)~1254년(고종41) 사이가 입신(入信)생활의 배태기간이랄 수가 있다.
그러면 이 기간의 연대기(年代記)가 여하했던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 아시아는 역사상 未曾有의 몽고제국의 정복전쟁으로 고려사회는 폭풍우의 와중에 힙쓸려 정신이 없을 때였다. 1232년(고종19)에는 고려의 수도가 강화도(江華島)로 옮겨갔고, 육지에 남은 백성들은 몽고와 전쟁을 치르면서 강도(江都)의 정부에 혹사당하는 이중의 고통이 부가되었다. 특히 1245년에서 1254년까지는 최이(崔怡)와 초항(崔沆)이 정권의 중심에 있던 때로 몽고의 말발굽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기이다.
곳곳엔 몽고와의 전쟁으로 큰 성과를 올린 경우도 있었지만 대세를 역전시킬 형편은 못됐던 것이다. 게다가 전쟁의 주역은 관리가 아닌 농민 즉 일반백성이요, 천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정됐다. 몽고는 고종의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철병이유로 내세우면서 강화의 대안(對岸)에서 애태우고 있었지만 그들이 주돈했던 곳은 모두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곳곳에서 민란이 일고 귀중한 문화재소실은 물론이요, 죄 없는 백성들의 고귀한 생명은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더욱이 무인정권의 부패는 혹심했다. 특히 최이의 아들 萬宗과 萬全은 승려로서 그들의 門徒들까지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몽고병의 침입으로 고초를 겪고 있는 판에 이들마저 괴롭히니 백성들이 모두 적에게 투항할 위험도 있었다. 萬全은 還俗 후 沆으로 개명, 실권을 장악,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 이 때 불교는 전쟁에 지친 백성에게 정신적 지주이긴 했으나 祈福的이었다.
이런 상황이 원개로 하여금 입신생활로 전향토록 유인(誘引)한 것은 아닐까? 어릴 때부터 출진(出塵)의 마음이 있던 그에게 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했을 때 백성의 고통을 공유(公有)할 길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아픔을 승화할 수 있는 길이란 지고(至高)의 존재에 의하여 그들의 왕생을 기구(祈求)하는 방법이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② 遺稿行間의 出家理由        
물론 진교수의 진단도 맞다. 그러나 원개의 글에 출가(出家)의 변(辨)이 자술(自述)되어 있다. 1272년(1270년 설도 있음) 김해 神魚山 甘露社에서 순천 定慧社로 왔을 때「定慧入院祝聖夏安居始疏」가 있다. 그 글속에 (상략) '엎드려 생각하니 제자는 어려서 참된 진리(眞乘)를 사모했으나, 늦게야 총림(叢林)에 참석하여…'(하략)라는 내용이 있다.(伏念弟子幼慕眞乘晩投禪藪但竊效丹霞之) 이로 미루어보면 그의 출가는 이미 어려서부터 동경(憧憬)의 차원을 넘어 간절한 염원(念願)이었음을 알 수 있다.(원감집p.259)
출가의 변은 이 보다 앞서「甘露入院祝法壽疏」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전략)'엎드려 생각하니 제자는 어려서 선수(禪藪.禪門)에 의지해 깊이 진승(眞乘)을 사모했습니다. 일찍이 여러 번 부모님께 편지를 올려 승려가 되고자 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쌓인 어장(業障)을 어찌할 수 없어 인연을 벗어날 수 없었음으로 10년 동안 미리(未利)를 추구했으나 항상 처음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하략)고 말하고 있다. 이쯤되면 그의 출가동기와 염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원감집p.205)
강화도 임시수도에 가서 과거시험을 보고 관리로 10년간 봉직한 것은 부모를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어려서부터 마음속으로 추구한 세계는 관료로써 입신출세가 아니었다. 그동안 부모를 설득해서 출가하기 위한 과도기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혼인적령이 넘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제야 이해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출가는 일시적인 기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10대부터 품어온 이상의 세계였던 것이다. 부모도 10년간 만류하다 끝내 저지할 수 없어 마침내 허락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출가의 동기는 시대적 상황에도 있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그 길을 가야할 길로 정해 놓은 것이다. 다만 전통적인 유가적인 인연 때문에 과거를 보고, 관료생활을 했던 것은 출가를 위한 잠간의 외도였다. 여기에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백성들의 모진고통과 처절한 죽음 등이 그의 출가의지를 보다 강렬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진교수가 자신이 번역한 글속의 행간을 보지 않고 시대상황 만을 출가이유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3. 出家 이후 求道旅程

1) 天英에게 具足戒받다

자식의 고집을 꺾을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원개는 10년간 부모님을 조르고 설득해서 29세 때 출가를 단행한다.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그가 강화도 선원사(禪源社) 법주 대원부(大原浮. 圓悟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출가동기를 밝힌 「甘露入院祝法壽疏」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전략)'마침 우리 송령화상(松嶺和尙)은 화산도장(花山道場)에 계셨는데 평소의 뜻을 펴고자 무릅 걸음(膝行)으로 달려가 고하니 지난날의 인연이 맞았는지 턱을 끄덕여 허락하였습니다'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松嶺和尙과은 누구이며 花山道場은 어디를 일컫는지가 해답의 관건이다. 원감집의 역자(譯者)인 진성규(秦星圭)교수는 송령화상을 원감국사로 본다. 그리고 화산도장은 新東國與地勝覽에는 23곳, 增補文獻備考에는 20곳이 나온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화산도장이라는 이름이 너무 많이 산재돼 있어 특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으나 호남지방 사찰일 것으로 여겨 여산(廬山).옥구(沃溝).함열(咸悅).무장(茂長)지역의 어느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p.205)  
그러나 金煐泰 동국대 명예교수는 花山道場을 강화도 禪源社로 본다. 즉 '圓悟國師가 花山 곧 禪源社의 法主…'로 단정한다.(세미나p.38) 승려로서의 첫 관문인 삭발식과 구족계를 받은 곳이 달라지면 국사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혼란이 생긴다. 기왕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선원사라면 왜 거주지 주변의 대찰이 있는데 그곳까지 갔을까도 의문이 든다. 아마 19세 때 과거보러 갔다가 그곳 사찰을 들러보고 스승 원오국사를 만나서 그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말을 했기에 이루어진 수순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이를 뒷받침할 대목이 있다. 앞의 甘露祝壽疏에 부모의 출가허락을 받고 화산도장에 계신 松嶺和尙을 무룹 걸음으로 찾아가갔더니 지난날의 인연이 맞았던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고 했다. 이 말은 원개를 제자로 삼아줬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는 불가(佛家)에 귀의(歸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원개는 지금까지 세속의 인연을 끊고 본격적으로 구도의 여정에 들어가 39년 동안 도를 닦다 1293년 1월 타계하게 된다.

(1) 甘露寺住持 冲止의 聲價
원개는 1254년(고종41) 출가해서 강화도 선원사 법주 원오국사로부터 수계한 이후 12년 만인 1266년(원종7) 41세 때 경상도 김해현 神魚山 甘露寺 주지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는 몽고의 7차 침략전쟁이 끝난 후 9년째가 되는 해였다. 전쟁이 끝났다 해서 주권국가가 아니라 몽고의 철저한 간접지배를 받고 있었던 때였다. 출가해서 줄곧 선원사에서 지냈는지 아니면 다른 사찰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속세의 떼를 벗기는 듯 법휘(法諱)는 법환(法桓뒤에 冲止로 개명), 자호는 복암(宓庵)이라했다.
당시는 승려의 인사권도 왕에게 있었다. 원개의 감로사사 주지 발령도 역시 원종(元宗)의 조지(朝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마 강화도에 임시수도가 있었고 선원사 또한 섬 안에 함께 있었기에 원개의 인물됨을 알고서 하는 인사(人事)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원개는 12년 전 춘위시(春闈試)에 장원급제한 비상한 인물임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대 승려사회의 지도자인 천영(天英.원오국사)의 제자이니 조정과 승려사회에 그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를 걸려서 갔는지 원개는 감로사에 부임했다. 아마 부임하기 전부터 주지되는 사람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과거에 장원급제했고, 영가서기로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관료생활을 하다 출가해 승려가 된 사람이다. 그런 얘기들이 부임 전에 퍼져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때는 지방관도 부임하면 토박이 선비들과 시를 지으며 상대의 지적(知的) 능력을 시험해 보는 일이 있었고, 그런 풍속은 후대에도 전해졌다. 그가 도착하자 어느 선덕(禪德)의 요청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응수(應酬)했다.

春日花開桂苑中 = 봄날의 꽃은 계원 중에 피었는데
暗香不動小林風 = 그윽한 향기는 소림풍에도 움직이지 않네
今朝果熟沾甘露 = 오늘 아침 익은 과일 감로에 젖었고
無限人天一味同 = 한없는 인천은 한 가지 맛이구나

이 시는 삽시간에 퍼지면서 대중들에게 회자(膾炙)됐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衲子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고요하기만 했던 사찰이 젊은 중 충지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갑자기 붐비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들 장원급제한 충지스님의 설법으로 들으러 모여든 것이다. 사찰측은 운집한 납자들은 위해 법석(法席)을 마련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감로사 주지로 부임한지 3년만인 1269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승려들에게 보통 일어나는 기적(奇蹟)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圓鑑國師碑銘 幷書)
송광사 성보박물관장 古鏡스님은 2002년 9월 29일 베풀어진「원감국사 冲止의 生涯와 思想」학술세미나의 行狀에서 당시의 국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師의 입원으로부터 종고(鐘鼓)가 일신되고 불사가 연속하여, 동로(洞盧)가 빛을 내고 임학(林壑)의 값이 솟았었다. 이리하여 감로사에 나아가 道를 묻는 숙덕(宿德)과 법을 구하는 도반(道伴)이 발굼치를 이어 폭주함으로, 법석이 매우 은성(殷盛)하여 大法의 同流己來로 의학(義學)의 세위(勢威)가 師로부터 크게 떨침 직하였다'고 적고 있다.      

(2) 定慧社時節의 2大 業績
충지는 감로사에서 4년째 되던 1272년(1270년說) 승주(순천) 定慧社로 발령을 받았다. 정혜사는 순천 서면 청소리 711 소재 계족산(鷄足山.682m) 밑에 있다. 절은 신라 46대 문성왕 2년(840)에 창건됐다 하나 확실치 않다. 그나마 1907년 화재로 소실됐으나 이듬해인 1908년 월파(月坡)승려가 재건했다고 한다. 1984년 대웅전이 보물 제 804호로 지정됐으나 주지로 있었을 당시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승려가 된 후 두 번째 사찰인 정혜사로 발령받아 이주한 후 보다 활동을 벌인다.
그가 정혜사로 이주하던 해의 시국은 변화가 많았다. 가장 특별한 대목은 수도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것이다. 몽고의 침략으로 1232년 임시로 천도한 이후 무려 38년만이다. 그것도 무인정권의 마지막 실력자 최이(崔怡)를 유경과 김준 등이 죽인 후에야 이루어진 결정이다. 수도가 개경으로 원상회복됐다고 해서 고려의 조정이 몽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세자(뒤에 원종)를 인질로 몽고에 보내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때부터 고려는 몽고의 부마국으로 전락, 허수아비 노릇을 해야 했다.

① 丹本藏經 修繕 移運
충지는 정혜사에서 불교계에 커다란 업적 두 가지를 남긴다. 하나는 몽고가 탐라의 삼별초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징발한 수선사의 토전을 되찾은 것이며, 하나는 중국 선종의 육조대사 혜능(慧能․639~713)의 단본장경(丹本藏經)을 보수해서 수선사로 옮기는 것이다. 징발된 전답문제는 다음 항에서 얘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단본장경에 대해 알아보자. 문제의 대장은 혜조국사가 송(宋)나라에 가서 3부의 장경을 가지고 와서 정혜사.海印寺.허참정댁 등 3곳에 분치하여 봉안해둔 것이라고 한다.(三國遺事)
그런데 그가 강화도 선원사에 있을 때부터 정혜사의 단본장경을 보니 빠진 부분이 많았다 한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보수작업에 착수했는데 마침 보관된 사찰인 정혜사 주지로 부임한 것이다. 부임 직후부터 8년 동안 보수작업을 벌여 1278년 7월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송광사측은 정혜사가 아니라 강화도 선원사의 원오국사가 수선한 것을 충지 등이 도중에 대중을 동원하여 인계받아 옮겼다고 한다. 그는 단본장경을 보수해서 수선사에 안치한 후 타입시(馱入詩)를 지었다.

◊馱入詩                      
昨趁晨曦下翠微 = 어제 새벽녘에 푸른 산을 내려와
今隨夕照入松扉 = 오늘 석양 따라 소나 문에 들어섰네
諸人莫怪雙肩重 = 모든 사람들 양 어깨 무겁다 이상타 생각말라
擔得龍宮海藏歸 = 용궁의 대장경을 짊어지고 돌아가는 데

② 僧侶의 고달픔과 請田表
몽고는 진도와 남해에서 저항한 삼별초(三別抄)가 탐라도로 이동하자 고려와 연합 소탕작전에 나섰다. 이 토전은 옛날부터 왕으로부터 사찰의 운영을 위해 근읍의 토전을 획하(劃下)해준 것이다. 그런데 고려 장수 金方慶과 원나라 장수 忻都가 討平했다. 원나라는 탐라에 세정을 담당하는 達魯花赤과 管句兵糧左使을 두고 병량을 준비하게 했다. 그 때 관적에 올려있는 수선사의 토전을 다시 관적에 올려 전세(田稅)를 회수해 가니 수선사 승려들은 식량이 조달되지 않아 살아갈 수 없게 됐다.
이 참상을 보다 못해 충지는 1273년(원종14) 원나라 世祖에게 청전표문을 올렸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청전표를 올릴 당시 그의 소속사찰이다. 원감집에는 정혜사 입주시기를 1270년(p.10)으로 기록된 반면 세미나 자료에는 127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감집 역자 진성규교수는 季弟 신개(信凱)가 양주(梁州)군수로 있을 때의 시를 보고 1273년의 작품으로 해석하기도 했다.(p.27) 그렇다면 그의 소속은 정혜사 주지인데 무슨 자격으로 수선사의 토전(土田)문제를 그가 해결하려 나섰는가?
정혜사와 수선사는 어떻게 다른가? 순천시 신평리에 있는 수선사의 전신 길상사(吉祥寺)는 신라 말 혜린(慧璘)이 창건했다. 그 후 1197년 승려 수우(守愚)가 확장하다 3년 후 보조국사 知訥(1158~1210)이 정혜사를 이곳으로 옮기고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펴면서 수산사(修禪社)라 했다. 또 다른 설은 1205년 중수공사를 마치자 왕명에 의해 松廣山을 曹溪山이라 하고 수선사를 松廣社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러면 충지의 임지는 처음부터 송광사야 하는데 정혜사이고 청전표의 대상은 수선사니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충지는 원나라 황제에게 수선사의 사정을 알리고 사찰의 토전을 돌려달라는 표문을 올렸다. 고려의 상국(上國) 원나라(1271년 수도를 北京으로 이전) 황제에게 올린 것이다. 태조는 청전표를 보고 수선사의 토전을 원래대로 사찰에 돌려주라고 윤허했다. 즉 토전의 세금을 수선사 몫으로 돌려준 것이리라. 그의 청전표문은 상전국의 황제 마음을 움직이게 해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선승(禪僧)의 주린 배를 달래게 했다. 당시 승려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 다음의 시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鷄峯之苦(在定慧時戱作 p.174)
鷄峯之苦今無譬 = 계봉의 고통 이제 비유할 수 없어
欲說一二先酸鼻 = 한두 가지 먼저 말하려하니 코가 찡하네
經營歲久屋甚老 = 지은지 오래되어 집은 너무 낡았거니
檐뢰牆壁皆傾地 = 처마 끝의 기와와 담벽이 모두 땅에 기울어졌네
每遇淋漓下雨時 = 매양 끊임없이 비가 내릴 때면
屋漏如節無處庇 = 집은 채 같이 새어 가릴 곳도 없고
四時執爨唯數髡 = 사철 불을 지필 땐 두어 가지 나무
衣裳襤縷諺色悴 = 의상은 남루하고 안색은 초췌하네
齋時蔬藕晨淡粥 = 재 올릴 땐 나물과 연뿌리 새벽엔 묽은 죽
陟嶮搬柴日三四 = 험한 곳에 나무 운반 하루에도 3, 4번
何曾揀擇寒與暑 = 어찌 일찍 추위와 더위를 가렸던가?
雖復雨雪不敢避 = 비록 눈.비 내려도 피할 수 없네
園頭老僧只一個 = 원두(채소경작) 노승은 단지 한 사람인데
薙草倒地折一臂 = 풀 깎다 땅에 넘어져 한 팔을 다쳤네
山椒菜圃小如掌 = 산추(살충약)와 채소밭은 손바닥만 한데
草深沒膝無人理 = 풀이 무성해 무릎 빠져도 관리할 사람 없네
深村丁力四五戶 = 깊은 산속이라 장정은 4, 5호뿐
茅茨不完蓬滿地 = 띳풀집 수리도 못했는데 쑥대는 마당에 가득하고
男出耕耘女踏雄 = 남자는 김매고 여자는 방아 찧는데
長年力役到童稚 = 어른의 할 일리 아이들까지 미치네
十日驅使一日休 = 십일 시달리다 하루 쉬는데
奚暇仕家營自利 = 어느 여가에 집을 살펴 자신의 이익을 꾀할까
秋至蕭然無所穫 = 가을이 닥쳐와도 황량해 수확도 없네
但向人田拾遺穗 = 남의 밭에 가서 남은 이삭만 주을 뿐이네
每說明年必不堪 = 매양 말하기를 내년까지 견딜 수 없어
遠邇不復見玆寺 = 머나 가까우나 다시는 이 절을 보지 못하리라 하네
獨眠院主頻來言 = 외눈의 원주는 자주와서 말하기를(그때의 원주는 외눈임)
糧罄將無數月備 = 양식은 몇 개월 못가서 떨어지리라 하네
欲令齋鉢不全空 = 공양의 발우를 비게 하지 않으려면
急須將貨糴於肆 = 급히 돈을 갖고 시장에서 양식을 사야 하리
不然晨夕省其費 = 그렇지 않으면 아침저녁 비용 줄여서
草加於飯鹽加豉 = 밥에 나물 더 넣고 된장에 소금 더 넣어야 하네
鷄峯之苦苦復苦 = 계봉의 고통 괴롭고 괴로워
且說豆止唯此事 = 또 말하려면 어찌 이 일 뿐이랴
旣不是北洲鬱單越=이미 북주울단월(재물이 풍부한 곳)이 아니거니
衣食隨心而自至 = 먹고 입는 것이 마음대로 스스로 이리니
又不能毘耶老居士=비야리의 늙은 거사가 아니거니
上方取飯而分施 = 상방에서 밥을 가져와 나누어 줄 수 있으리
不如將此千飯萬飯苦=이 천 가지 만 가지 고통을
都付風軒一場睡 = 모두 바람찬 난간의 한바탕 꿈에 붙이는 것만 하리

◊問諸禪者(p.114)
朝來共喫粥 = 아침이면 같이 죽 먹고
粥了洗鉢盂 = 먹고 나선 발우 씻네
目問諸禪客 = 모든 선객에게 눈으로 묻노니
還曾會也無 = 정말로 이 소식 알았느냐 모르느냐?

◊齋餘偶作戱語(p.79)  
鷄足一鉢飯 = 계족산의 한 바루 밥
序細何辨白 = 맛있고 없음을 어찌 구별해 말하랴
人以麥爲草 = 사람들은 보리를 풀이라 하는데
我以草和麥 = 나는 풀을 보리와 섞였다 하네
鷄峯一盖羹 = 계봉 한 바루 국이여
滋味休擬議 = 맛이 어떤지 의론하지 말라
人以鼓和鹽 = 나는 소금을 된장이라 하네
何殊神鼎禋 = 신정인과 무엇이 다르랴
十年無醬食 = 십년간 간장을 먹어보지 못했네

             <이하 생략>

원나라 태조는 청전표문를 보고 충지를 초청했다. 초청장은 고려조정을 통해 1275년(乙亥) 3월 본인에게 전달했다. 아마 표문에서 태조의 성덕을 중국의 삼황에 비유해서 기분이 매우 흡족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충지는 원나라의 수도 북경을 가고 싶지 않았던지 충주까지 갔다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주저앉는다. 淸州牧伯 尙書 롱서공(隴西公) 이오(李敖)와 깊은 우정에 끌린 대목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의 요구로 그 해 다시 원경에 가서 빈주의 대접은 물론 금란가사 등의 선물도 받아왔다.  

(3) 上無住庵의 坐禪
충지는 1276년 대선사(大禪師)가 된다. 정혜사에 있는지 10년 또는 12년째 되는 1284년(甲申) 3월 8일 정혜사 주원(住院)을 그만두고 智異山 上無住庵으로 옮겨 조용히 좌선에 든다. 그의 나이 59세다. 당시 원나라는 1274년 1차 東征과 1281년 2차 東征도 실패로 끝난 후였다. 고려조정은 무기력하고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을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탓하며 매우 가슴아파했다.

(4) 修禪社主 就任과 入寂
충지는 상무주암에서 좌선한지 2년 후 1286년(丙戌) 2월 12일 修禪社主로 발령을 받는다. 스승 원오국사 天英이 順世하면서 충지를 후임으로 충렬왕에게 천거해서 이루어진 결정이다. 왕은 員外侍郞 金浩淡을 시켜 그에게 청하여 수선사 사주로 入院하게 했다.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취임한 것은 4월 16일이었다. 1291년(辛卯) 66세 때 원나라의 태조의 동생 합적온(合赤溫)의 손자인 반적 합단(哈丹)의 남하로 고흥 佛臺寺로 잠시 이주한 것을 제외하면 1293년 1월 入寂할 때까지 7년간 주지로 재임했다.
그가 사주로 재임하는 동안 사찰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영했는지는 모른다. 그는 定慧寺에 있을 때도 원오국사가 丹本藏經을 수선한 것을 옮겨났고, 사찰의 징발된 토전을 원나라 황제에게 청전표문을 올려 되돌려 받아 놓았다. 그러니 사찰운영의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해 놓은 셈이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송광사에서는 많은 국사가 무려 16명이나 배출됐다. 그렇지만 충지의 업적이 단연 높다고 후진승려들은 평가하고 있다. 社主時節 그만큼 사찰운영이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일 것이다.  

2) 寺刹周遊遍歷
충지는 정혜사시절에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러니까 1254년(甲寅) 29세에 출가해서 선원사에서 원오국사 天英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12년을 수행하다 1266년(丙寅) 감로사 주지로 6년, 1272년(壬申) 정혜사로 부임, 12년을 지낸 것이다. 그의 나이 47세에서 59세까지 승려로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에 정진하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으며 수창한다. 또한 전국의 다른 사찰을 찾아가 당시 유명한 선승(禪僧)들과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를 하며 등 구도에 정진한다.
유고의 기록으로는 그가 찾아간 사찰은 10여 곳이 넘는다. 그 중에서도 瑞石山(無等山) 圭峯寺를 아주 좋아했다. 주변의 경승이 뛰어난데다 지눌(知訥).혜심(慧諶).몽여(夢呂) 등 유명한 승려들도 방문한 바 있다. 게다가 그곳의 주지 인선백(印禪伯)과는 여러 편의 한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마음이 통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청주의 華井寺.元興寺.玉岩寺.眞覺寺.萬淵社.開泰寺.楞伽山의 소래사 등을 순유했다. 그러나 여러 번 金剛山을 가보려고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쉬워하기도 했다.

◊夏日懷圭峯印禪伯(p.13)
一臥圭峯上 = 한번 규봉사에 머물렀다가
于今歲月移 = 어느 사이 많은 세월 흘렀네
片雲隨步武 = 조각구름은 걸음걸음 따라 흐르고
孤鶴伴棲遲 = 외로운 학은 은거생활을 짝하네
鐵脊久彌硬 = 쇠로 된 등줄기인 듯 오랠 수 록 꼿꼿하고
氷姿老不衰 = 얼음 같은 자세 늙어도 쇠하지 않네
秋凉何日至 = 서늘한 가을 언제 오려나
吾欲往從之 = 나 인선백 따르고 싶어라

◊華井寺 夏安居(p.32)
拂衣高步謝塵區 = 옷자락 떨치고 당당히 티끌세상 인연 끊고
膠膝雲山二十秋 = 구름과 산과 짝한지 벌써 20년
下詔急徵今始覺 = 조서를 급히 내려 부르신 뜻이 이제 깨닫고 보니
蓋天移我著淸州 = 개천(임금)이 나를 옮겨 청주에 안착하게 했네

◊遊元興寺林亭(p.32)
滿山松柏鬱蒼蒼 = 온 산이 송백으로 울울창창한데
中有高禪水石莊 = 그 가운데 높은 선객의 수석장이 있구나
一杖來遊良有意 = 막대 짚고 와서 노는 것 진실로 뜻이 있나니
小亭閑味要同當 = 조그마한 정자 한가로운 맛을 같이 하려네

◊抵宿玉岩(p.32)
避喧求靜至玉巖 = 시끄러움 피해 고요함 찾아 옥암사에 이르니
滿眠幽奇未易談 = 눈에 가득한 그윽하고 기이한 경치 말로 표현키 어려워
石上松孤類巢許 = 돌 위의 외로운 소나무 소허(高士)를 닮았고
門前杉老似彭월 = 문 앞의 버드나무 늙어 팽월과 같구나(耳+月=귀벨월)
千里岳色深還淺 = 천리산악 빛깔 깊고도 얕은데
一派泉流冷且甘 = 한 줄기 흘러내리는 샘물 차고도 맛있네
二八應眞曾駐錫 = 16나한(羅漢)이 일찍이 머물던 곳
暫來聊喜得同龕 = 잠시 와서 같이 머무는 것 애오라지 기뻐라

◊遊眞覺寺(p.37)
西原牧伯與書記 = 서원 목백과 서기는
賢相敵兮心不二 = 어진 것이 서로 맞으니 마음이 둘이 아니네
仁風三載邑居寧 = 어진 바람 3년에 고을이 살기 편하고
竟日官閒無一事 = 해가 다하도록 관청이 한가해 아무 일 없구나
時方淸明最佳節 = 때는 바야흐로 가장 아름다운 청명인데
百紫千紅爭嫵媚 = 온갖 가지 자주 빛 붉은빛 아름다움 다투누나
試携儒釋同道人 = 유교와 불교의 동도인을 이끌고
遊到麒麟峯下寺 = 기린봉 아래 진각사에 이르러 노니네
塼爐石銚自提예 = 벽돌 호로 돌솥 끌고
側足行行上層翠 = 발꿈치 들고 푸른 산꼭대기 올랐지
烹蔬煮茗有餘歡 = 나물 삶고 차 끓이니 즐거움이 많아
眺水看山無限思 = 산수 즐기며 끝없는 생각
由來四事固難幷 = 사사(의식주 및 의약)를 갖추기는 정말로 어렵나니
似此一歡那易致 = 이처럼 한 가지 즐거움이라도 어찌 쉽게 이뤄지랴
淸吟雅笑但自適 = 맑은 노래 청아한 웃음으로 자적할 뿐
不覺西峯紅日墜 = 서쪽 봉우리에 해가 지는 줄도 몰라라
歸來閉閣想前遊 = 돌아와 절문 닫고 앞서 놀던 생각하니
怳然一枕邯鄲睡 = 홀연히 베갯가의 부질없는 꿈 이런가
他年勝事恐堙沒 = 다음 해 이 즐거움 잊을까 싶어서
故作此詩聊自識 = 억지로 이 시를 지어 애오라지 스스로 기념하네

◊遊楞伽山(p.97)
舊聞海上有名山 = 예부터 해상에 명산이 있다는 소식 들었는데
幸得遊尋斷宿攀 = 다행히 찾아 놀면서 지난날의 소망 이루었네
萬壑煙嵐行坐裡 = 일만 골짜기 연기와 노을은 좌선 속에 있고
千重島嶼願瞻間 = 천겹의 섬돌 한 눈에 들어오네
義湘庵峻天連棟 = 의상암은 드높아 기둥이 하늘에 접해 있고
慈氏堂深石作關 = 자씨당은 깊속해 돌로 문을 만들었지
堪誇倦鳥解知還 = 고달픈 새가 돌아올 줄 아는 것 자랑스럽네

四面山屛海簇 = 사면에 산 병풍이요 바다는 족자인데
誰將水墨來施 = 누가 수묵을 가져와 이 그림을 그렸는가?
轉眄淸人肌骨 = 돌아보면 사람의 기골을 맑게 하나니
飛昇何待別時 = 승천하기에 어찌 특별한 때를 기다리리

◊多寶寺吟(p.190)
地幽衰草尙蒙茸 = 궁벽한 땅 쇠잔한 풀 아직도 더부룩한데
松檜童童碧玉幢 = 소나무 전나무가 무성해 푸른 옥 깃발이네
一楊姻霞留勝迹 = 한 자리 고은 노을은 훌륭한 자취를 남겼나니
百年香火福吾邦 = 백년의 향불은 내 나라를 복되게 하네
空庭得月鋪晴雪 = 빈 뜨락에 달빛은 깨끗한 눈으로 포장한 듯 하고
遠壑來風吼夜江 = 먼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밤 강에 울부짖네
衲帔蒙頭寒不寐 = 누더기 옷으로 머리 덮고 추위 잠못 이루는데
壁間蘭焰吐殘缸 = 벽 사이 난초는 찌그러진 화분에서 반짝이네

◊黑龍寺吟(p.190)
城郭摧頹草木深 = 무너진 성곽에 초목은 우거졌는데
當年淸蹕駐江潯 = 그 당시 맑은 행차 강가에 머물렀네
北山霜樹欹畢蓋 = 북쪽 산 서리 맞은 나무에 화개를 의지하고
南岸烟篁聳羽林 = 남쪽 언덕 연기 낀 대숲엔 우림이 솟았네
輦路螢飛封蘚暈 = 행차 길에 나르는 반딧불 이끼에 붙어있고
彤闈禽噪銷松陰 = 궁전에 지저기는 새는 소나무 그늘을 에워쌓네
秋風破院蟬聲晩 = 가을바람 허무러진 절에 저녁 매미소리
獨倚欄于感古今 = 홀로 난간에 의지해 어제와 오늘의 생각에 젖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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