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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옹의 금당별곡 2007/01/05 원산

2015.11.07 12:02

master 조회 수:452

수우옹(守愚翁) 금당별곡(金塘別曲)

수우옹 휘 세직(世稷․1655~1721)의 자(字)는 우경(虞卿)이다. 그는 아버지 청우당(淸友堂) 휘 동익(東翼)과 어머니 해남(海南) 윤씨(尹氏) 사이의 4남 중 장남으로 1655년(孝宗 6․乙未) 태어나 1721년(景宗 1․辛丑)에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생전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과 특별한 교분을 가졌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 편찬(長興條)에도 참여했다.

금당별곡(金塘別曲)은 삼족당(三足堂) 문집(石屛集)에 들어있어 당연히 휘 세보(世寶․1669~1707)의 작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선대 이종출(李鍾出) 교수문제의 석병집 1권 7언절구에서 삼족당이 「次三從兄世稷金塘韻」(장흥문집p. 158)기록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1967년에 발행한 國語國文學 제 34~35 합병호에서 수우옹의 작품임을 밝힌 논문을 발표했다.  


'금당별곡'의 내용은 배로 금당도와 만화도(萬花島)를 유람하면서 감정을 서정적으로 읊은 일종의 기행가사이다. 이 작품의 영향 관계를 따져보면 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기봉(岐峯) 백광홍(1522~1556)의 '관서별곡'은 송강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주고, 관동별곡은 금당별곡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기봉과 송강의 가사가 모두 북방의 경승을 노래하는 기행가사라고 한다면, 금당별곡은 남방의 해양도서지방의 경승을 노래하는 가사라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교수는 금당별곡에 대해 '작자의 자유로운 시상이 마음껏 펼쳐져 있고, 비록 은일적(隱逸的)시상이 다소 엿보이기는 하되, 평민적이면서도 자연에 순화된 정도로는 오히려 관동별곡보다 승(勝)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고 밝혔다.그리고 '이 작품이 전대(前代) 가사에서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는 못될지언정 그 표현 및 구성에 있어서도 전대 가사들에 비하여 결코 못지않은 스스로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만 금당별곡이 수우옹의 작품이라지만 족보 등 문중의 기록에도 그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후손으로서 부끄럽고 아쉽다.(長興의 歌辭文學 p. 28) 사실여부의 확인이 아니라 학계에서 저자가 뒤바뀐 이후 1972년(壬子)과 1999년(己卯) 등 두 번에 걸쳐 족보를 편찬했지만 작품의 저자는 바뀌지 않았다. 더구나 인터넷 세상으로 들어가면 요지경이다. 금당별곡의 저자를 놓고 김선일 블로그(2006, 10, 14)는 위세보로, power of yes(2006, 11, 14)는 위백규로, 하하(2006, 6, 24)는 위세직의 작품으로 각각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장흥초교 61회 동창이 운영하는 카페는 수우옹의 성씨를 '이' 세직으로 표기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위씨들은 '죽이 끓은 지, 장이 끓은 지 무불상관이다' 관심이 없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 민정중(閔鼎重․1628~1692) 숙종 때의 문신.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시호는 문충(文忠). 1649년 진사에 합격, 성균관 전적(典籍), 호남어사 역임. 1680년 좌의정으로 승진됐으나 1689년 장희빈이 왕의 총애를 받자 허적(許積) 등이 정권을 잡고 송시열(宋時烈)을 유배시킨 후 사사하고, 인현왕우(仁顯)를 폐위시켰다. 그때 왕후가 아우 유중(維重)의 딸이라는 이유로 연루돼 노봉 민정중도 장흥(長興)에 유배됐다.
노봉은 호남어사시절 장흥에 와 취수헌(醉睡軒) 천회(天會․1629~1669)를 조정에 추천, 무과(武科)에 오르게 하는 등 출사의 길을 열어준 바 있다. 그러다 장흥읍에 유배된 후에는 많은 후학을 가르쳤다. 그래서 27세 연하인 수우옹(守愚翁)도 그 문하에서 수학(修學)하며 스승과 제자 사이로 글을 배우며 가깝게 모셨다.

일신이 병이 들어 만사에 흥황(興況) 없어
죽림 깊은 곳에 원학(猿鶴)을 벗 삼아
십년서창(書窓)에 고인시(古人詩)뿐이로다
일생호입(好入) 명산극(極)을 우연히 기리 읊어
만고시호(萬古詩豪)를 역역(歷歷히 세어보니
팔선(八仙) 천재(千載) 후에 이르리 그 누군가요
강산풍월이 한가(閑暇) 한지 여러 해라
분분(紛紛) 세사 나도 싫어 풍월주인 되려 하여
명구선경(名區仙境)에 반세(半歲)를 늙어 있다
앞산 아침 비에 봄빛이 빼어나니
산화(山花) 피는 곳이 흥미도 하고 많다
학우(鶴友)의 선자(仙子)들은 이 때에 만나보아
황금단(黃金丹) 지어내어 삼동계(三同契) 묻자하여
송요(松醪)를 뱉어내어 임의(任意)로 띠어내니
엽서화담(葉嶼花潭)은 망안(望眼)의 가경(佳境)이요
백빈홍요(白蘋紅僥)는 단도(短棹)의 향기로다
산형(山形)도 좋거니와 수세(水勢)도 갓이 없다
창강백구(蒼江白鷗)야 묻노라 가는 길이
삼신산(三神山) 내린 활기 이리로서 어디 매며
도원도(桃源島) 지낸 곳은 어느 물로 내리는고
계도(桂棹)를 흘리져어 가는대로 내려간다


연회 고면(顧眄)하여 곳곳이 지점(指點)할 제
상운(祥雲) 일편이 해천(海天)의 검이어서
온자(溫慈)한 학의 소리 십리에 들리거늘
난도(蘭棹)를 빨리 저어 나듯이 들어간다
부용화(芙蓉花) 피는 거동 반공(半空)에 솟아난데
올 때 듣던 그 소리 이 땅에서 나는가
평사(平沙)에 닷을 주고 채하(彩霞)를 허쳐보니
묘아래 물위에 그 사이 천척(千尺)이다
기상(氣象)이 만천이라 파능(巴陵)이 이같은가
대재(大哉)라 그 이름이 이제보니 과연하다
연하(烟霞)와 함께 내려 석로(石露)로 올라가니
기화요초(琪花瑤草)는 곳곳에 피어있다
옥전금경(玉殿金莖)은 곳곳이 널려있고
한제금경(漢帝金莖) 어느 때에 이 땅에 옮겼으며
왜황보천(媧皇補天)은 어이 하여 해천에 떨어진고
좋고도 맑은 기상 갖음도 갖으시고
석작(石作) 연하 운작대(雲作坮)는 이런 데를 이름이라
아미산(我嵋山) 적벽강에 추경 춘상(春償) 이러 한가
적송자 안기생(安期生)은 우화등선(羽化登仙) 이러 한가
반산(半山)에 흘러 쉬어 제일봉에 올라 가니
일진선풍(一陣仙風)이 양액(兩腋)에 비껴 붙어
표표(飄飄) 쌍앙(雙秧)에 심신이 청냉(淸冷)하니
봉구(蓬丘) 소식을 거의 아니 들을 소냐
왕자 요대(瑤坮)에 벽도(碧桃)만 늙어 있고
낭옹석구(浪翁石臼)에 채하(彩霞)만 잠겨있다
석각(石角)을 높이 배고 해경(海景)을 다시 보니
표묘(漂眇)한 동명상(東溟上)의 만강산(萬江山) 여기 저기
창망(滄茫)한 운해(雲海)가에 편어주(片漁舟) 오락가락
안전(眼前)의 모든 경(景)이 색색(色色)이 자랑하니
건곤(乾坤)의 이 조화(造化)를 뉘라서 알라보리
성관(星冠) 월패(月牌)를 꿈에나 보자 하여
송근(松根)을 높이 베고 낮잠을 잠간 드니
청동(靑童)이 나를 잡어 봉래산(蓬萊山) 건너 뵈네
송요주(松○酒) 가득 부어 나 잡고 저 권할제
장생(長生)에 묻는 말을 반 튼체 못 들어
구천일성(九泉一聲)에 선몽(仙夢)을 놀라 깨니
장연(長烟)이 일공(一空)한데 호월(晧月)이 천리로다
하정(霞汀)에 멸파(滅波)하고 수로(水路)도 무변(無邊)하다
아장(牙檣)을 다시 꾸며 만화도(萬花島)로 내려가니
산음(山陰) 설야(雪夜)에 자유(子猶)의 호흥(豪興)이라
석강(石江) 추월(秋月)에 백야(白也)의 시정(詩情)이라
지낸 경도 좋거니와 밤 경이 더욱 좋다
사변(沙邊)의 자던 구로(鷗鷺) 조성(潮聲)에 절로 깨어
삼강(三江) 연월(烟月)에 함께 놀자 우는 듯
수저(水底)의 놀던 상아(湘娥) 요슬(瑤瑟)을 뺏어 탈 제
남풍 오현(五絃)의 성음(聖音)을 전하는 듯
구예(扣예) 승주(乘舟)하여 흥을 재워 머무를 제
서신(西伸)에 달이지고 동곡(東谷)에 날이 나니
금파(金波)를 탕양(蕩漾)하여 만강(滿江)이 능란(凌亂)하네
연저(烟渚)에 배를 매고 낙화(落花)를 딸아 드니
새벽안개 찬이슬이 초의(草衣)에 젖을세라
산하 벽도(碧桃)는 옛 봄을 그저 띄어 뒷 주인을 기다리고
곡리유란(谷裡幽蘭)은 바람 끝에 향기로 날리는 듯 아뢰는
해객(海客)은 무심하여 백구(白鷗)를 따르거늘
선인(仙人)은 어디가고 황학(黃鶴)만 남었는고
백화향(白花香) 흘은 곳에 옥소(玉簫)를 비껴부네
벽해청천(碧海靑天)에 백학이 날아든다
어와 황홀하여 내 아니 신선(神仙)인가
일배주(一杯酒) 자주 부어 취하도록 먹은 후에
삼화루(三花樓) 비껴 앉아 물 밑을 굽어보니
월계(越溪)의 씻던 비단 어느 물에 밀려오며
낙포(洛浦)에 나던 선녀 어이하여 잠겼느뇨
수색(水色)도 기이(奇異)하여 다시금 살펴보니
호산(湖山)에 피는 꽃이 물 아래 비칠세라
갓 없는 이 경개(景槪)를 일폭(一幅)에 옮겨 내여
서시(西施)와 안기(安期)되어 대동전(大同殿)에 보내던
오룡(五龍)을 그린 그림 이 산수와 어떨런고
풍광도 한(限)이 없고 의사(意思)도 끝이 없다
애두를사 이내몸이 선도(仙道)에 연분(緣分) 없어
진심(塵心)이 미진(未盡)하여 향관(鄕關)으로 선반(旋返)하여
강산에 후기(後期)두고 백구와 맹세하여
허주(虛舟)를 다시 찾아오던 길로 찾아오니
못다 본 남은 경을 글귀에 영량(領量)하고
도기려지(倒騎驪支) 호구(狐裘)는 천만고에 과연(果然)하다
산창(山窓)을 다시 닫고 초조히 누었으니

만리강천(萬里江天)에 몽혼(夢魂)만 자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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