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

사이트검색

문헌/학술자료

◇ 存齋公의 生涯 및 著述 年譜  

존재 선생의 생애를 다룬 기록은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02년(壬戌)에 동생인 서계(書溪) 백순(伯純)이 찬한 행장이 있다. 다음에는 1848년(戊申)에 홍직필(洪直弼)이 찬한 묘지명이 있다. 또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가 찬한 행장이 있다. 그리고 선생이 타계한 지 78년 만인 1875년(乙亥)에 발행한 유고집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가 쓴 서문이 있다. 선생의 생애를 담고 있는 연보는 아마 이들 자료들을 저본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연보는 대동소이하다. 그 중 최근에 발행된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의「삼벽에 피어난 호남 지성사의 꽃, 존재 위백규」란 책자가 약간 세밀하다. 그런데 오래된 기록을 이리저리 옮기고 바꾸면서 더러 서로 연대가 맞지 않은 내용이 있다. 가령 전주대가 발행한 연보 11세조에 있는 좌우명「與其視人寧自視, 與其聽人寧自聽」의 경우 다른 기록에는 10세조에 있다. 또한 저술의 소개도 극히 일부에 그친다. 이를 감안해 연보를 재구성하려 한다.
여기에 선생의 저술 가운데 한시는 제작 연대별로 소개한다. 선생의 저작은 1875년에 발행된 《존재집》과 1974년에 발행된 《존재전서》가 있다. 두 문집 중 한시는 《존재집》에 142편, 《존재전서》에는 90여 편이 수록해 있다. 많지는 않지만 중복된 작품도 있다. 특히 《존재집》의 수록분은 모두 국역됐으나 《존재전서》에 수록된 작품은 국역되지 않았다. 이외에도 두 문집에 모두 빠진 작품도 있으니 한시작품은 약 300여편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다.  
한시에는 산출된 해의 간지(干支)를 적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48편에는 간지가 없다. 김석회 교수는 《존재 위백규 문학 연구-18세기 향촌사족층의 삶과 문학》 이라는 논문에서 이를 규명하고 있다. 하지만 문집을 편집하면서 산출된 간지에 따라 편집되지 않아 산출시기를 규명하기가 어렵다. 한 해의 작품이라도 게재된 면이 달라 혼란스럽다. 이를 감안해서 작품의 산출시기를 규명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필자 주)

1. 出生과 家系
존재는 1727년(丁未 영조 3) 5월 15일 방촌 계춘동에서 영이재공(詠而齋公)과 평해(平海) 오씨(吳氏)의 5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파조 안항공(顔巷公)은 5대조, 웅천(熊川)현감을 지낸 정열(廷烈)은 고조, 동식(東寔)은 증조, 세보(世寶)는 조부이다. 자(字)는 자화(子華) 호(號)는 존재(存齋) 또는 계항(桂巷), 옥과(玉果)이다. 스승 병계(屛溪)가 서재를 存存齋라 지어주어 존재로, 계항은 태생지, 옥과는 현감으로 재직한 지명이다.
그가 태어나던 날밤 아버지는 꿈을 꾸었다. 하얀 용(白龍)이 뜰아래 우물로 내려오는 모습의 꿈을 꾸었는데 그날 밤에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름과 자(字)를 그래서 처음에는 이름과 자(字)를 龍자나 虬자를 넣어서 부르기도 했다. 영이재공과 존재공이 어려운 가운데서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숙부이자 작은 할아버지의 희생정신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자신에게 후사가 없자 조카와 손자의 양육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나섰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한 것은 영이재공은 태어 난지 4년되던 해다. 영이재의 아버지자 형인 삼족당(三足堂) 휘 세보(世寶)가 타계한 것이다. 그러자 동생 춘담공(春潭公) 휘 세린(世璘‧1673~1741)은 조카의 교육을 위해 형수 백씨와 협의해 자신의 논 8두락을 큰집에 합치고, 집도 합쳤다. 백씨(白氏)어머니도 여느 어머니와 달랐다. 살림을 합치고는 형수와 자신의 부인 하동 정씨로 하여금 열심히 길쌈하게 해서 조금씩 살림을 불어나갔다.
이는 조카의 교육을 위해 물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결단이다. 그는 인재를 키우는데 뒷바라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재질이 있어도 제대로 지원하지 않으면 범부로 끝나기 때문이다.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재력을 갖춰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큰집과 작은집의 재산을 나눠가지고는 힘이 분산돼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결과다. 재산이 늘었지만 흉년이 들면 장리쌀을 빌어야 했으니 중농정도의 수준이다.
영이재공의 어머니는 엄중했다. 8세 때의 사건이다. 백씨는 아들을 장천재 서당으로 보내 공부하게 했다. 정해 그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오지 않도록 단단히 당부했다. 하루는 아들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왜 왔느냐’며 물었다. 영이재는 ‘훈장님이 집에 가도 좋다며 가라했다’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다’면 용서할 수 있으나 ‘거짓말로 둘러 대니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종아리를 올리게 해서 회초리로 때려 돌려보냈다.
훈장님이 말씀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서 하는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언행이라고 꾸짖었다. 아들도 ‘거짓말을 했노라’고 실토했다. 당장 서당으로 가라고 내쫓았다. 보통 엄마들 같으면 하루라도 머물게 하든지 아니면 밥이라도 한 끼 먹여서 보낼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냉정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억제했다. 그리고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어린 아들을 집 밖으로 쫓아 보낸 것이다.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왔다가 매를 맞고 쫓겨난 영이재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슬프기도 하고 화도 나고 기분이 엉망이었다. 대문에다「근방촌(近傍村) 원방촌(遠傍村), 명태평(名泰平) 불태평(不泰平)」이라는 낙서를 하고 떠났다. 즉 “집은 곁 마을이나 머나먼 마을이고, 이름은 태평(泰平)이나 태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 낙서는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즉 집은 가까운 곳에 있지만 먼 곳에 있는 것처럼 갈 수 없고, 자신의 이름은 큰 평화를 뜻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속내를 들어 낸 것이다. 그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2. 연보(저술 포함)

 2세(1728년 戊申)
춘담공 무릎에서 천자문을 배우다
막 돌을 지날 무렵이니 말귀를 겨우 알아들을 정도였다. 작은 할아버지 춘담공(春潭公 휘 世璘, 1673~1741)은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무릎교육을 시켰다. 처음에는 쉬운 천자문부터 시작한데 이어 육십갑자를 가르쳐 준 뒤 얼마 지난 후에 묻자 줄줄 외운 것이 아닌가. 이때부터 천재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가르쳐주고 나서 다시 물으면 잊지 않고 외워 바쳤다. 육갑을 배우면서 손가락을 꼽으면서 길흉을 택일할 줄 알았다. 비범성이 나타났다.

 3세(1729년 己酉)
배운 글을 막힘 없이 외워 바치다
춘담공이 천자문을 가르쳐주자 며칠이 지난 후에 책을 덮고 물어보아도 막힘이 없었다. 천(天) 아래 율(律), 아래 운(雲)과 지(地), 아래 여(呂), 그 아래 등(騰)등 상․하판의 글자를 맞췄다.

 4세(1730년 庚戌)
기지로 동생의 낙상을 방지하다
상상하기 어려운 기지(機智)를 보였다. 하루는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어린 동생(伯昊) 마루에서 토방으로 내려오려고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떨어져 크게 다칠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를 본 그는 마당에 있던 짚단을 풀어 난간 밑에 잽싸게 깔았다. 아기가 떨어져도 다치지 않게 충격방지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이해 여름 집에 온 손님이 학자는 온 종일 반듯하게 무릎을 꿇은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이르자 이후 평생 무릎을 꿇는 자세로 생활했다.

 5세(1731년 辛亥)
眞草의 漢詩 句를 바꾸라 하다
사랑방 벽에 붙여진 당음(唐音) 소시(小詩)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미 고인이 되신 할아버지(三足堂)께서 진초(眞草)로 써 놓았는데 춘담공이 풀어 가르쳤다. 이 한시는 당나라 때 동포자(同褒子) 위응물(韋應物 737~804)이 지은「추재독숙(秋齋獨宿)」이란 오언절구인데 존재는 기승전결의 구를 바꿨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선 한시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대견하지 않는가. 그것도 진초(眞草)로 써져있는 것을 읽고 승구(承句)를 결구(結句)로 내리는 게 오히려 잘 어울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秋齋獨宿
山月皎如燭 산위의 달은 촛불처럼 밝은데
霜風時動竹 서릿바람이 때로 대나무를 흔드는 구나
夜半鳥驚栖 밤중에 깃든 새들이 놀라는데
窓間人獨宿 창가에 사람이 홀로 잠자는 구나

◇承結換置
山月皎如燭 산위에 달은 촛불처럼 밝은데
窓間人獨宿 창가에 사람이 홀로 잠자는 구나
霜風時動竹 서릿바람이 때로 대나무를 흔드는데
夜半鳥驚栖 밤중에 깃든 새들이 놀라는 구려
춘담공은 손자의 견해가 비록 잘못된 것이지만 시를 이해하는 능력에는 감탄했다. 율곡도 4세 때 사략(史略)을 읽을 때 훈장이 구독(句讀)을 잘못을 지적했다. 즉 사략 첫 권의「제위왕초불치후개래벌(齊威王初不治侯皆來伐)」이란 구절인데 제나라 위왕(威王)이 처음에 제후들을 잘못 다스려 모두 와서 쳤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훈장은「제위왕불치후(齊威王不治侯)」에서 구절을 뗀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따라 읽지 않고 있다가 잘못을 지적했다고 전한다.


6세(1732년 壬子)
三聲, 六書, 半切의 용법을 알다
소학을 읽었다. 소학은 朱熹의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1185년에 書經․儀禮․周禮․禮記․孝經․佐傳․論語․孟子․弟子職․戰國策․說苑에서 인용한 내편과 송대 제유(諸儒)들의 언행을 담은 외편으로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가언(嘉言)·선행(善行) 순으로 엮어져 있다. 효와 경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상과 수기·치인의 군자를 기르기 위한 계몽과 교훈이 주요내용이다. 선생은 어렸지만 소학을 읽으며 그 의미를 새겼다.
언해(諺解)와 초․중․종성(三聲), 육서(六書), 반절(半切)의 용법도 이해했다.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등 육서(六書)의 조자(造字)원칙으로 두 글자의 뜻이 같아 호훈(互訓)한 글자이다. 즉 낙(樂)자가 음악의 악(樂)자로 쓰는 경우이다. 반절은 일종의 발음표기로 문(文)자의 음은 무(無)의 과, 분(分)의 중성(ㅜ)과 종성(ㄴ)을 합쳐 문이 되는데 이를 무분반(無分反) 또는 무분절(無分切)이라고 표기하는 방법이다.

 7세(1733년 癸丑)
不善非人子 不孝非人子 휘대  
한시『詠星』을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어느 날 이웃집 모자의 싸움하는 모습을 보고 깊이 탄식했다. 이때「不善非人子 不孝非人子」라고 종이에 써서 지니고 다니거나 심지어는 팔뚝에다 써서 수신의 좌표로 삼았다. 곧 선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불효하면 자식이 아니다는 뜻이다. 이런 구절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바로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라는 의지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허다한 다툼이 일어난다. 이웃집 모자간의 싸움은 어린 존재에게는 대단한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서 선악에 눈뜨게 한 계기가 된 모양이다. 座右銘

◇詠星
各定名與位 제각기 이름과 자리 정해져
須氣卦無形 기에 의하여 형체도 없이 걸려있네
參爲三光一 삼광의 하나로 참여하여
能使夜色明 능히 어두운 밤 환히 밝히네


8세(1734년 甲寅)
孔顔曾思孟을 본받고자 하다
대학(大學)을 읽었다. 종이에「孔顔曾思孟」5자를 적어 오른쪽에 놓고 공부했다. 그분들을 닮고자하는 바램의 의지이다. 문중의 할아버지(艮庵公 휘 世鈺)으로부터 관왕묘(關王廟)에 대해 들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이 승전의 수호신으로 고금도에 세웠는데 제사비용과 사당의 관리 문제로 말썽이 일었다. 이때 나라가 불안하면 배움이 충족되지 못한다며 나무패 두 개에 國安과 關王이라 적어 가묘의 동쪽 담장에 묻고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겨울부터 먼동이 틀 무렵에 일어나 세수하고 독서하는 습관이 들었다. 어느 날에는 하인이 집안에 쌓아둔 땔나무를 훔치는 것을 봤다. 혹시라도 어른들에게 들킬까 싶어 중문을 닫아 가려줬다. 또 작은 할아버지가 행랑채에 매어둔 이웃집 소의 옆을 지나다 뿔에 다쳤다. 그 집은 소를 맬 공간이 없었기에 남의 집에 매어 둔 것이다. 할아버지가 발설하면 소의 주인의 입장이 곤란할 입장이다. 그래서 발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뢰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매귀(埋鬼)와 창우(倡優)등 기악(妓樂)을 싫어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역귀를 쫓는 제사인 향라(鄕儸)와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창우 같은 놀이가 베풀어졌다. 동네잔치가 벌어지면 노소가 따로 없이 몰려들어 구경했으나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엿보지 않았다. 이해 겨울부터는「周易總目」을 보고 아버지 영이재공(詠而齋公)으로부터 요지를 듣고 신기하게 여겼다. 그리고는 도서(圖書), 괘서(掛書), 선후천설(先後天說)을 배워 자획으로 괘를 지어보기도 했다.  다음의 영등화(詠燈火)라는 제목의 한시는 8세 때의 작품으로 세인들을 놀라 게 했다.

◇詠燈火
照物無欺暗 사물을 비추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으니
丹心本自明 붉은 마음 본래 스스로 밝았구나
獨作房中晝 홀로 방안을 대낮처럼 만드는데
窓外過三更 창밖은 삼경이 지나는 구나


 9세(1735년 乙卯)
孔子像을 걸고 매일 절하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공자상(孔子像)을 베껴 벽에 붙였다. 8세 때 孔顔曾思孟 등 5자를 적어놓고 독서했는데 이해에는 공자상에 절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공부했다. 공부할 때 공자상에 절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는 자신도 그 인물처럼 되겠다는 동경이라 할 것이다. 곧 공자가 자신을 수양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修己以安姓) 널리 은혜를 베풀어 못 사람을 구제한다(博施濟衆) 라는 이상을 실현하고 한 마음의 발로인 것이다.
장천재(長川齋)에서 잉여옹(剩餘翁), 간암공, 아버지 영이재공 등이 보는 상서(尙書)를 읽었다. 서경(書經)이라고도 부르는 상서는 이제삼왕수재치평(二帝三王修齋治平)의 도(道)를 담은 책이다. 즉, 유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제왕인 요(堯)와 순(舜) 등 2제와 우(禹), 탕(湯), 문무(文武) 3왕을 이른 것이다. 이들 2제3왕이 몸을 닦고 집안을 화목하게 해서 천하의 평화를 이루는 도(道)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책이다. 9세에 상서를 읽었으니 놀랍다.
어느 봄날 서당 학생 19명과 서북쪽의 천관사을 거쳐 천관산에 놀러갔다. 이들의 나이는 16, 17세로 모두 7․8세 연상이었다. 산에 올라 각자 품은 뜻을 시로 표현하는「언지시(言志詩)」즉「天冠山記」를 짓기로 했다. 일행들의 시는 현존하지 않으나 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다는 내용이라 전한다. 그러나 존재공은 하늘에 사다리를 놓고 높이 올라가 인간세상을 바라보니 티끌이 삼만리라는 이른 바 상춘호(上春昊)로 후세들의 인구에 회자됐다.
이때 서당을 어디에 있었을까. 아마도 그의 할아버지 삼족당(三足堂)의 어린 시절 이전부터 관산의 위씨들은 장천재를 강학(講學)의 도장을 삼았으니 장천재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훈장을 했을까. 아마도 잉여옹(剩餘翁) 휘 명덕(命德, 1683~1770?)이 아닐까 싶다. 그는 그 이전에 흥양(興陽)에서 서당을 경영하고 이 무렵 귀향해서 장천재에서 간암(艮庵) 휘 세옥(世鈺, 1689~1776)과 영이재 등이 날마다 학문을 논하며 지냈기 때문이다.


◇天冠山遊
發跡天冠寺 천관사에서 걸음을 시작하여
稊空上春昊 허공을 사다리 삼아 봄 하늘로 올라
俯視人間世 인간 세상을 굽어보니
塵埃三萬里 티끌이 덮인 삼만리라
이무렵 주역(周易)의 선후천설과 변역묘리에도 관심을 가졌고 한다. 주역이란 우주질서를 이(理)와 기(氣)로서 점괘를 다룬 분야라서 접근하기 어려운 학문이다. 선후천설은 천(天)은 주위가 360°이고, 남극성과 북극성의 추(樞)의 위치에 있으며 적도(赤道)가 남북의 중간을 둘러서 반(半)씩 상하로 나뉘었다. 하루에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좌선하여 일주를 하고 1°에서 시작하여 365°를 돌아 다시금 원 위치인 1°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10세(1736년 丙辰)
與其視人寧自視, 與其聽人寧自聽
좌우명을「與其視人寧自視」즉 남을 보기보다 차라리 스스로를 돌아보고「與其聽人寧自聽」즉 남에게 듣기보다 차라리 스스로에게 들어라라고 했다. 7세 때의 不善非人과 不孝非人子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는 주로 남의 언행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때부터는 자신에게 맞춰진 것이다. 곧 외부에서 내부의 수양 쪽에 포커스를 맞춘 변화인 셈이다. 그는 이시기에 이미 맹자의 사단(四端)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내면을 추스리고 있었다. 
「인의예지」를 좌우명으로 삼은 것은 세상이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이다. 옛날의 인은 사랑이나 지금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이고, 옛날의  의(義)는 마땅함이었으나 지금의 의는 어긋나고 억세고, 옛날의 예(禮)는 공경이었으니 지금의 예는 거짓과 꾸밈이며, 옛날의 지는 지혜였으나 지금의 지는 속임수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로 태어났으니 남자다움에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학문도 옛 사람들의 글귀나 모으는 것으로는 내 마음을 다할 수 없다 했다.    
학문에 대한 관심의 영역도 다양했다. 상서 이외에 주역의 천문, 지리, 복서, 율역, 의학, 관상, 도교, 불교, 병법, 산수도 넓게 읽고 대의를 파악했다. 특히 후한서(後漢書)의 지(志)와 역(曆)에 보인 연보(衍步) 즉 대연보중삭(大衍步中朔) 및 대연보발렴술(大衍步發斂術)과 가령(假令) 즉「칠정산외정묘년일식가령(七政算外篇丁卯年日食假令)」에서처럼 일식(日食)이나 원식(月食)에도 관심을 가졌다. 곧 가령은 교식(交食)을 추산(推算)하는 예(例)의 방법이다.
예학에도 깊었다. 주자가례는 신의경(申義慶)이 1620년(광해군 12)에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1646년(인조 24)에 편찬하고, 김집(金集)이 교열한 예설서인「의례문해(疑禮問解)」등의 서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또한 정교한 공장(工匠)들의 기술도 습득, 기형(璣衡)과 수레를 손수 만들기도 했다. 그러기에 과거공부에만 마음을 전념할 수 없었다. 다만 이는 선비의 급무가 아닌 것을 알고 전념하지 않았다.
수신(修身)은「사친(事親)」이다. 즉 몸을 닦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를 위한 수신은 사친이며, 사친은 시경 소아(小雅)의「육아시(蓼莪詩)로 수신의 지표로 삼았다. 곧 사친은 입신양명하여 부모님을 현양하는 일로 끝난 12단이며 수신은 부모에게 아름다운 명예가 돌아갈 것을 생각해서 좋은 일을 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하여 말이 진실하고 행동이 독실하면 오랑캐 사이에서도 살 수 있다는 말로 끝난 시로 12단으로 모두 24단이다.


11세(1737년 丁巳)
愚․亡․輕으로 수신을 점검하다
 스스로의 언행을 매일 점검하면서 조신했다. 분판(粉板)으로 작은 첨(帖)을 만들어 지니고 다니면서 무슨 말을 잘못했다. 무슨 행동을 잘못했다라고 체크했다. 그리고는 그 아래 란에「愚」,「亡」,「輕」이라고 주(註)를 붙였다. 논어(論語) 향당편(鄕黨篇)에 군자(君子)는 거상(居喪) 때 외에는 몸에 항상 옥(玉)을 차고 지냈다. (無所不佩)라는 문장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이해했다. 이후부터는 송곳․숫돌․침․부싯돌․붓․벼루 등을 갖추고 다녔다.
매일 자네 고을에 안회(顔回)가 있다는 말을 되뇌면서 생활하곤 했다. 그리고는 앉은 자리의 오른쪽에 황헌(黃憲)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동한(東漢) 때의 인물인 황헌이 나이는 어렸지만 당대의 석학들도 그의 총명함에 무릎을 꿇었다는 고사를 보고 흠모하여 사표로 삼았다. 이는 안회와 황헌을 닮고자 한 것이다. 그는 간암공이 1766년에 타계하자 그의 행장을 찬술하면서 기록이 없는 것을 황헌에 비유하기도 했다. 매일 새벽에 가묘(家廟)를 참배했다.

自修勉業期의 授學 書冊

 年齡
                       書冊名
6세
小學, 諺解, 四聲, 六書 등의 妙理 攄得해 應用
8세
大學, 中庸, 孟子, 論語
9세
尙書(書經), 詩經
10세
周易(天文地理, 卜筮) 律呂, 醫學, 兵法, 算數, 道家, 佛書, 歷史書

 禮學(尙禮備要, 儀禮問解)
11세


 12세(1738년 戊午)
講譜를 보고 科擧에 매력 잃다
12세 때는 인생의 방향이 과거에서 학문중심으로 바뀐다. 주역을 처음 읽을 때의 마음은 장차 과거시험에 응시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과거시험의 기출문제나 예상문제를 적은 강보(講譜)나 강규(講規)를 읽으면서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강보나 강규에 나온 기출문제에 실만한 결과일 것이다. 바른 인재를 발탁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직 과거에 응시할 나이에도 미치지 못한 그는 이때부터 출사(出仕)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성인이나 현인의 길을 가기로 다짐한다.
성인이나 현인은 어떤 사람인가! 남을 존중하고,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서로 나누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 순리에 의지하며, 천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게 되면 성인의 도는 현실에서 바로 이루어진다. 성인과 현인은 세속을 쫒지 않으며 이익을 다투지도 않고, 위험을 애써 피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인의 마음은 진리에서 노닌다고 말한다. 그는 맹자 진심(盡心句章上)의 만물은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萬物皆備於我矣)는 말을 새기며 성인이나 현인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다.
아울러 논어 및 맹자와 주자 등의 중요구절을 벽에 걸고, 동방제현의 예설 및 주역총목 계몽(啓蒙) 등을 읽으면서 근원을 찾는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중용도(中庸圖)에 따라 高明(日月)을 하늘로, 博厚(大地)를 땅으로 삼아 안택을 만들었다고 한다. 안택은 주위에 담을 둘렀는데 초목, 금수, 이적(夷狄)도 담장 안의 존재로 삼았다. 중용도에 의해서 안택을 만든 것은 아마 심성(心性)의 공효(功效)를 수련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해되나 된다.

  13세(1739년 己未)
朱子語類에 심취해 춤추다
 주자어류를 읽으면서 그 심오한 진리에 놀라고 감격스러워 춤추고 싶었다. 어떤 내용이었을까. '문생들에게'와 '성인은 배워서 이른다'가 그것이다. 그 첫 장은 특히 감동적이다. "무엇이든 자네 자신이 직접 대결하고 자네 자신이 몸소 생각하며 자네 자신이 수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도 자네 스스로 읽고 도리도 네 자신이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이며 입회인에 불과하다. 의문점이 있으면 함께 생각해볼 따름이다."
주자는 제자들에게 앎의 신체성을 강조했다. 그의 훈계에는 '스며들다', '기른다', '적신다' 등과 같은 표현이다. 인간은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 고로 마음 안에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다. 그것이 드러나면 '인의예지신'이 된다. 오륜을 아우르면 사단을 대표하는 仁은 곧 천지만물과 하나가되는 것이다. 그 이치를 터득한 존재가 곧 성인(聖人)이다.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고, 또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주자의 대전제다.
요컨대, 공부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의 『學不可以己, 靑出於藍, 以出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란 배움을 그쳐서는 안 된다. 푸른색은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며, 얼음은 물이 얼어서 비롯되지만 물보다 더 차다는 뜻이다. 스스로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다. 그 가운데서도 그 곡진(曲盡)한 묘사에 심취해 과거시험을 위한 강경에는 더욱 뜻을 두지 않았다.
특히 荊公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독맹상군후(讀孟嘗君傳」이란 비평에 대한 논평「논맹상군전후(讀孟嘗君傳後)」를 써서 비판했다. “신종이 왕형공에게 정권을 위임한 것은 한 인물을 얻어 자신의 보좌로 삼아 송나라를 요순시대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들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형공이 인물을 얻은 것은 과연 어떠했는가? 형공이 등용한 복건자(福建子)에게 언제 주인을 따르는 계명구도의 성의라도 있었던가? 형공은 다만 증포(曾布)와 여혜경(呂惠卿)의 길을 열어 준 초조 달마(達摩)였을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계명구도가 문하에서 나왔으니 훌륭한 인물이오지 않는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또 유종원(柳宗元)의 「해고를 부르는 글」뒤에 쓰기를, 두 완씨의 문하야 말로 세상에서는 바다와 마찬가지였다. 그 무녀져 내리고 솟구치는 파도는 약수(弱水)나 양곡(暘谷)보다도 훨씬 심했는데, 유자후는 음험하고 사특한 배에 아첨하고 웃는 돛대를 달고서 거의 20년 동안 출몰하면서 돌아오는 것을 잊고 있다가, 마침내 스스로 해치는 격이 되었다. 그러니 바다의 상인과 비교해서 나을게 무엇인가. 이 글을 지엇을 때 아마도 그는 후회했던 것이리라라고 논평했다.
12월에는 돌이 되기 이전부터 무릎에 앉히고 교육시켜준 종조부 춘담공(春潭公)이 타계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학문의 기초를 닦아준 은사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할아버지의 타계는 선생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이미 성장해서 소년이 된 선생은 할아버지의 치상을 위해 마음으로부터 울어 나온 정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천전(薦奠)을 도와주기도 하고, 조문객을 맞고, 제사준비 등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심부름했다.

◇書王荊公論孟嘗君傳後
◇李德裕의 蔭補說 論評
◇柳宗元의 招海賈文 論評


14세(1740년 庚申)
講經공부를 접고 史書를 읽다
 연보에서는 아예 강경(講經)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과거를 보기 위한 강경공부를 하지 않으려는 것은 12세 때부터의 다짐이고, 주자어류와 사마천의 사기와 송사(宋史)를 읽으면서는 그 다짐이 더욱 굳어졌다. 세속적으로는 생각하면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천재이니 과거에 가볍게 합격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과거에 매력을 잃었을까. 더구나 그는 집안의 기대를 온 몸으로 짊어지고 있었음에랴.
선생의 이상향은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아니었을까. 인간의 본질은 남과 구별 않고 만물을 모두 살려가는 자연의 이치이다. 그것을 인간에 국한시키면 仁이고, 물체에 적용시키면 誠이며, 자연물까지 포함시키면 理이고, 우주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天命이다. 이 중에서 仁이 실현되는 길이 義이고, 誠․理․天命이 실현되는 길이 道이니, 義와 道는 적용범위가 다를 뿐 같은 것이다.. 장자(莊子)는 대인무기(大人無己)이라 했다. 즉 대인은 자기가 없다는 뜻이리라.
이해에는 38세의 아버지 영이재(詠而齋)가 진사에 급제한 해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마음속으로 가문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기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생의 입장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번민이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그런 연유로 말미암아 그는 이후 30여년 동안 방촌과 한양을 오가면서 과거에 응시하기는 한다. 그 부거(赴擧)를 그는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다라고 여러 기록에서 술회하고 있다.


15세(1741년 辛酉)
綸天地而作縕胞萬物而同體
과거문체의 형식에 따라 부(賦)를 지었다. 글은 사람들이 벼의 줄기만 보고 뿌리를 못 본다는 의미이다. 내용 가운데 천지를 엮어 솜을 만들고 만물을 안아 한 몸이 된다(綸天地而作縕胞萬物而同體)는 만물일체관도 보인다. 이는 하찮은 벼도 뿌리를 통해 영양을 받아 이삭을 영글게 한 이면을 보지 않고, 피상적으로 줄기만 보고 사물을 판단하는 인식론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과거를 부정적으로 여긴 그가 과거체제에 따라 글을 썼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아마 아버지께서 작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했기에 부거를 준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16세(1742년 壬戌)
多言, 그 逆說的인 의미
「多言」을 좌우명으로 삼은 것은 역설적이다. 속담에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다고 했으며, 동서양 종교도 다언을 경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노자(老子)는 도덕경 5장에서 말이 많으면 자주 궁지에 몰리니, 마음속에 품고 있으니 만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라고 했고, 56장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子不言, 言子不知)라고 했다. 無爲自然의 진리는 不言之敎 즉, 말없는 가르침이 첩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학의 경전인 주역(繫辭傳)에서는 말과 글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즉, 글로써 말을 다 표현할 수 없다(書不盡言)와 말로써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言不盡意)라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다. 기독교 성경도 경험이 많을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깨우칠수록 감정을 억제한다(잠언 17장 27절)라고 했다. 말수가 적어지고, 감정을 억제하는 것은 삶을 통해 깨우친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선생도 일찍부터 다언을 경계했던 것이다.
과거공부를 전폐하고 독서의 폭을 넓었다. 물론 과거시험 형식의 부(賦)도 일체 짓지 않았다. 대신 찾아보기 어려운 오서(奧書) 나 비전(秘傳) 등의 서책을 읽었다. 칠서 및 중국의 역사서 등의 공부로도 이미 해박하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그의 학문적 수준은 지방에서는 가르칠 스승을 찾기 어려웠다. 예나 지금이나 천재 또는 비범인들은 가르침을 받을 스승을 찾기가 어려워 재주를 썩히게 마련이었다. 선생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오서와 비전들은 빌려 읽은 것으로 소일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7세(1743년 癸亥)
구평촌 김씨와 관례를 올리다
3월에 영암 구평촌(九坪村) 김시성(金始聲)의 딸과 성인의 예인 관례(冠禮)를 치렀다. 관례는 정식혼인의 전단계라 신부는 친정에서 살았다. 겨울부터는 장천재(長川齋)에서 지내면서 서당은 찾아오는 학생을 지도하고 독서했다. 연상의 선배들과 연배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낮추고 배우기를 원하면 가르쳐주기도 하고 의심나는 대목을 놓고 토론하고, 자신의 공부를 하면서 소일한다.

  18세(1744년 甲子)
花樹宗會規約과 嘏辭를 짓다
 여름 4월에 영암(靈岩) 구평촌 金씨와 정식으로 혼인했다. 그해 12월 27일 아내 김씨가 친정에서 방촌의 시집으로 신행하면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도립(道立), 도급(道及) 창녕(昌寧) 조씨에게 시집보낸 딸 등 2남 1녀를 두었다. 매일 식사를 하고 나면 장천정사를 오가며 독서하며 지냈다. 신혼생활 2년 동안 읽은 책명에 대해 언급이 없다.
문중의 화수종회규약(花樹宗會規約)과 화수종회 하사(嘏辭)를 지었다. 규약은 당일 회의 직전의 절차와 회의장에서 문중의 화목을 위한 주의, 혹시 다툼이 일어날 때의 대처방안을 담고 있다. 그리고 종원들이 모여 사회(射會)를 할 때의 절차 등의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종회의 명칭, 임원의 권한과 임기 등 조직의 헌법으로써의 규칙을 정한 규약과는 다르다.
이를 놓고 문중 일에 관여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아버지 영이재(詠而齋)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아버지는 문중의 도유사(都有司)로 1740년  제암산 서북쪽에 있는 충렬공 묘소를 찾아내 이듬해부터 시제를 지냈다. 아울러 족보발행을 위해 준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759년 장흥 위씨 최초의 족보인「己卯譜」의 발행을 주도했다.


<宗會 規約>
이날 아침 온 문중의 노소가 일제히 장장(莊長)의 대문 아래에 이르러 나이 순수대로 가기를 청하고, 천천히 가면서 뒤따른다. 회소(會所)의 문 앞에 이르면 사정(司正) 두 명이 좌우로 먼저 들어가 자리에 이르러 중성(重席)을 정리 한다. 장장이 앉은 후에 사정이 정좌하시오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제자리에 앉으면 사정 두 사람이 좌우에서 읍(揖)하고 아뢴다.
이 모임은 오로지 예모(禮貌)를 숭상하고 화목한 정을 돈독히 다지는 자리입니다. 기대앉지 말며, 사나운 말을 쓰지 않고 흘겨보지 말며, 꾸짖거나 농담하지 말고 성낸 기색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좌석에서 일어나 밖의 사람을 부르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반드시 속으로 삭여서 이겨내야 하며, 그 사람과 서로 나무라지 말고 원망을 쌓아두면서 겉으로만 우애하는 척 말아야 하며, 술 때문에 주사를 부려 예의를 부려서도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40세 이상은 앉아서 예라고 하고, 40세 이하는 일어나 답례로 읍한다.
사정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불만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피차간에 함께 가운데 앉게 하고, 자신의 변론을 못하게 하며, 다만 여러 종원이 들었던 공론에 따라서 대략 시비를 판별한다. 그런 후에 사려(司旅)에게 명하여 술잔을 주고 술을 따라 주어 가운데 자리에서 서로 권하여 마시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이외의 사항은 인 장법(莊法)은 생략한다.

 <射會 規約>
활을 쏘는 방법은 순(巡)으로 정 한다. 두 차례 여헌(旅獻)을 한 후에 사사(司射)가 가운데 서서 권하기를 맛 좋은 술이 마련되어 있고 분위가 한껏 즐거우니, 청컨대 사례(射禮)를 향하여 옛 의식을 본받으십시오라고 한다. 이에 사우(射耦)를 정하여 나아가 쏘고 겹사(袷射)를 마치면 하우(下耦)가 화살을 주워서 실격(失格) 에 두고 바로 상우(上耦)와 함께 읍한다.
차우(次耦)가 나가서 활을 쏘고 읍하는데, 상우가 하우에게 읍하면 하우와 차우가 모두 답례로 읍한다. 매번 한 우가 쏘기를 마칠 때마다 사사가 들어와 고하기를 아무개가 아무개보다 잘 하였습니다라고 한다. 활쏘기가 끝나고 상우의 이겼으면 하우의 장이 잔을 씻어서 술을 따라 상우의 장에게 오리며 하례한다. 하우가 이기면 상우가 사사에게 명하여 술을 따라서 하우의 장에게 마시게 하면서 칭찬을 하고, 또 모두 즐겁게 마신다.
화살을 쏠 때 좌중에서는 명중여부를 가리면서 돌아보고 질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사사가 들어와 알려주기를 기다린다. 사정은 온 자리의 예의를 감독하고 바로잡는다. 사려가 웃옷의 왼쪽 소매를 내리고 여헌을 행하는데, 한 번 술잔을 올릴 때마다 하사(嘏辭)를 읽고 두 번 절한다. 날이 저물면 사정이 일찍 일어나 마치를 청하고, 사화(司貨)는 고자(庫子)와 하인에게 자리를 거두라고 명한다. 마칠 때에는 혹 소란스럽지 않도록 한다. 노소가 모두 장장을 따라 그의 집에 이르면 흩어진다. <국역 존재집 5권 153쪽)    

◇花樹宗會 嘏辭

 <初獻嘏辭>
  花樹之會 화수의 모임에
 有酒維旨 맛좋은 술이 있구나
 勉爾孝友 너는 효도와 우애에 힘쓰고       
  敦爾敦誼 화목과 우의를 돈독케 하라
 子孫有慶 자손에게는 경사가 있고
 萬世有辭 만세토록 칭송이 있으리라

 <亞獻嘏辭>
  再獻有醇 재헌에 좋은 술이 있으니
 陸誼乃敦 화목한 정 두터워지네
 父老無故 어르신들 무고하고
 兄弟俱存 형제들 모두 있네
 介爾景福 너는 큰 복을 받고
 眉壽永年 길이 장수하여라

 <終獻嘏辭>
  三獻旣洽 삼헌에 이미 흡족하니
 和樂備至 화락함이 두루 지극하도다
 受祿于天 하늘에서 녹을 받게 되니
 旣均且厚 이미 고르고 두텁도다
 宜稼于田 토지에 농사가 잘되니
 勿替引之 중단하지 말고 이어가리라


19세(1745년 乙丑)

百科事典的 知識을 닦다 

 백과사전적(百科事典的) 소양의 기초를 닦은 해로 평가할 수 있다. 10세까지는 4서3경 등 강경공부를 주로 했다면 그 이후는 오서와 비전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섭렵했다. 더구나 이해에는 중국의 사서(史書)와 문학작품을 통해 문학적 자질을 축적한다. 전국시대 초(楚)나라 서사시인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송옥(宋玉)의 구변(九辯), 초혼(招魂), 고당부(高唐賦), 후한 반고(班固)의 漢書, 장형(張衡)의 혼천설(渾天說)과 응한부(應閑賦), 서진(西晉) 반악(潘岳)의 도망시(悼亡詩), 북송(北宋)의 정자(程子), 남송의 주자(朱子)등의 여러 저술을 평가하는 부(賦)를 지었다. 이때 고루한 기존방식에서 벗어나 신선한 글을 짓고자 했다. 그는 12세부터 과거체제의 글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이들 저작은 역사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은 이들 이외의 작품에 대해서는 대단치 않게 여겼다. 선생의 학문적 기초와 문학적인 자질은 어쩌면 19세에 정점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20세(1746년 丙寅)

賦를 다듬으며 科擧에 대비하다

이미 지은 부(賦)를 다듬느라 여러 날을 보냈다. 부를 다듬은 속내는 과거를 준비하려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과거에 응시하라고 권유를 받기도 하고, 누군가로부터 다듬고 있는 부는 과거 문체가 아니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독서의 오묘함을 알아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면 과거 급제여부는 저 조물주가 어떻게 하든지 내 맡겨둔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강경공부보다는 큰 가치관을 성취하려 했다.

그의 학문은 성숙해졌다. 더 이상 배우고 싶어도 가르쳐줄 스승이 없었다. 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간암, 잉여옹 등에게 직간접적으로 배웠지만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靑出於藍, 以靑於藍」이랄까. 영이재는 자신처럼 북학(北學)을 못해서 대과에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할 절실함을 고민했다. 근기(近畿)로의 유학이 대과급제의 필수라고 믿었기 때문 종숙부 간암공과 상의했다. 주역팔괘와 육십사 효수의, 변화하는 이치로 홍도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21세(1747년 丁卯)

周易의 妙理에 한계를 느끼다 

 한 분야에만 이름을 떨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여러 학설을 넓게 섭렵하고자 했지만 실용성을 중시했다. 주역(周易)과 예기(禮記)에 몰두했는데, 깊이 공부하다 근원을 깨달으면 즐거워했다 천문 지리 복서 의상(醫相) 등은 신령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그 묘리(妙理)에 통달할 수 없다고 느꼈다. 설사 묘리를 이해하더라도 실용성이 없음을 깨닫고 더 이상 깊이 공부하지 않았다. 음율(音律)과 악률(樂律)인 율려(律呂)나 계산법인 구수(九數)와 같은 경우는 소질이 있었으므로 잊을 수 없었지만, 역시 적극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좋은 일을 하려했다. 부모된 사람에겐 자제의 교육을 권면했고, 그 자제들에게는 효제(孝悌)와 문학에 힘쓰도록 했다. 예학(禮學)이나 계수(計數) 또는 의술(醫術)은 그 재능에 따라 각기 노력하게 했다. 농사를 잘 짓고 물자를 절약해서 그의 살림살이가 안정되기를 바랐고, 같은 집안의 경우에는 더욱 진심을 다 했다.동네사람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 양쪽의 잘잘못을 분별, 마음을 털어놓고 화해하도록 했다. 화해를 시키지 못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모함을 당해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온갖 방법으로 변론해주고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 같은 성격을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경사에도 함께 기뻐했다. 일가 가운데 사내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나쁜 일은 거론하지 않았다.   


22세(1748년 戊辰)

長川齋에 溪堂學塾을 열다 

 장천재에서 서당을 운영했다. 학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43세 때 황해도 해주 석당(石潭)에서 운영한 은병정사(隱屛精舍)의 학규 21조 가운데 17조를 추려「계당학규(溪堂學規)」를 지역실정에 맞게 적용했다. 율곡은 주자(朱子)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무이구곡(武夷九曲)에 세워 운영한 서당 <대은병(大隱屛)>의 이름에 따른 것이다. 이전 7년간은 배우려는 학생이 물으면 가르쳐주는 형식이었으나 정식으로 계당학숙을 정식으로 개설하고부터는 과목과 생활규칙을 적용했다. 과목의 경우 낮에 온 학동에게는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밤에는 율곡의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를 강의했다. 그리고 관례를 치른 학생들에게는 신의경(申義慶)가 지은

상례비요(喪禮備禮)들을 공통으로 가르쳤다.

학규는 일상의 수칙과 학동별로 배울 교과서와 교양과목을 적시하고 있다.

특별한 점은 과거문장 짓기에 대해

(전략) 그러나 글을 짓는 핵심 방법이나 과거문제의 지름길 또한 방심하는 자들이 능히 살펴 도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재에서는 이러한 습속을 따르지 말도록 하라며 아예 학규에 명문화 시켰을 정도로 과거체제를 부정적으로 봤다. 12월 첫아들 道立을 낳았다.


溪堂學規.

붕우끼리 화목하고 공경하며 실수를 바로잡고 선을 권하는데 힘쓸 것이며, 교만하지 말고, 자신이 옳다는 생각으로 서로 헐뜯지 말아야 한다.

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추대하여 당장(堂長)으로 삼고, 또 학문이 뛰어난 한 사람을 추대하여 장의(掌議)로 삼아 모든 일을 여쭈어서 처리한다.

매일 오경(五更)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방과 당을 청소하며, 모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衣冠)을 정돈하고 글을 읽는다.언어는 반드시 신중하게 하며 문자, 예법, 의리 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궤안, 서책, 붓과 벼루 등 문구는 모두 제자리에 정돈해 두어 혹시라도 뒤섞여 어질러지지 않도록 한다.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혹 독서하고 혹 학업을 청하며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여 학문의 일이 아닌 것이 없도록 한다.

어른은 매일 한 가지 책을 정하여 읽고, 오시(午時)에는 가례(家禮)를 강론하고 -<상례비요(喪禮備要)> ,<의례문해(疑禮問解)> 및 여러 선현의 예설(禮說)- 저녁 이후에는 <염락풍아(濂洛風雅)>를 옲조리며 외운다.

어린이는 한 책의 범위를 정하여 읽고, 오후에는 <소학>을 윤강(輪講)하며, 저녁에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외운다.

평소에 의관을 바르게 하고,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기를 마치 웃어른 대하듯 하며, 평상복을 입고 스스로 편하다고 여겨 외람되게 기대거나 눕지 않아야 한다.

학당에 있을 때나 개울을 건너거나 언덕을 오를 때 차례대로 하고, 또 사물을 완상하거나 이치를 궁리할 때에 서로 다투어 토론하거나 잡담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안 좋은 옷과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단점을 말하지 말게 하고, 남이 선생을 했을 때에 혹 시기하지 말고, 장려하는데 힘써야 한다. 조정의 득실과 관장(官長)의 현부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나아가 취하기를 바랄 수 없으니,

언제나그 의를 바르게 하되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되 그 공을 바라지 않는다 는 말로써 서로 바로잡고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과거문장은 또한 선비의 할일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으레 모두 방탕하고 안일하게 장난삼아 희롱하면서 과거문장을 익힌다. 그러나 글을 짓는 핵심 방법이나 과거문제의 지름길 또한 방심하는 자들이 능히 살펴 도달할 수 일이 아니다. 이 재()에서는 이러한 습속을 따르지 말도록 하라.

이곳에 거처하는 어린이에게는 어른을 공경하고 가르침을 자상하게 하며, 한결같이 <소학> <곡례(曲禮)>로 가르침을 삼게 해야 한다. 임의로 출입하면서 칼이나 낫을 함부로 사용하거나 먹으로 창문이나 벽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옷차림을 바르게 하여 어른을 모시고 강론을 듣게 하며, 위험한 계곡이나 바위에는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구속해서 어린이들이 싫어하고 주눅이 드는 마음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집에 돌아갈 때는 재중(齋中)에서 익힌 내용을 잊지 말고, 모든 일에 한결같이 그 마땅함을 따라야 한다.

이 학교를 멸시하여 따르려고 하지 않는 자는 이 재에서 살면서 이미 정해진 학규를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23(1749己巳)

柳元宗招海賈文 評하다

장천재에 서당을 운영한지 2년째 되는 해다. 배우려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졌다. 인근에 소문이 퍼져 많은 학생이 몰려왔다. 학생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그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실증으로 보인다.

한편 유종원(柳宗元)해고를 부르는 글(招海賈文)도 논평했다. 두 왕씨(王叔文王丕)의 문하야말로 세상에서는 바다와 마찬가지로 무너져 내리고 솟구치는 파도는 약수(弱水)나 양곡(暘谷)보다 훨씬 심하다. 그런데 유자후는 음험(陰險)하고 사특한 무리에게 아첨하며 돛대를 달고서 거의 20년 동안 출몰하면서 돌아오는 것을 잊고 있다가, 마침내 스스로를 해치는 격이 됐다. 그러니 바다 상인과 비교해서 나을게 무엇인가. 이 글을 지었을 때 그는 후회했던 것이리라고 꼬집고 있다.

 

24(1750庚午)

府使 李鎭儀薦擧를 받다

장흥부사 이진의(李鎭儀)

는 존재를 才高行美, 學遂啓蒙 재능은 높고 행동은 아름다우며, 학문이 심오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계발해주었다라는 천목(薦目)으로 전라감사에게 추천했다. 이후에도 여러 번 향천(鄕薦)이 있었다. 다만 부사의 추천에 대해 감사가 어떻게 받아들여 처리했는지 등의 후속조치는 알 수 없다. 아버지 영이재는 아들의 유학 놓고 종숙부 간암공과 협의한 끝에 충청도 덕산(德山)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를 사부로 정했다.

병계를 선택한 것은 간암공이 그보다 5세 연하이나 서울에서 동문수학했고, 서인 노론계열이기 때문이다. 병계의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와 구암(久庵),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그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에게 수학한 후 1714년 진사에 급제했다. 1725년 유일로 청도군수에 제수된 이후 집의 때 우암 송시열의 영당에 주자를 추배하자했다가 삭직됐다. 이듬해 부호군, 사과(司果), 진서(進善), 공조판서를 역임했으며, 강문팔문장(江門八文章)의 한 사람이다.


25(1751辛未)

屛溪 先生束脩禮를 드리다

봄에 덕산의 병계(屛溪) 찾아 속수례(束脩禮)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은 간암공의 서신을 보인다.

백규(伯珪)는 어릴 적부터 천품(天稟)이 질소(質素)하고 위기문학(爲己文學)에 뜻이 있었는데 이 멀고 외진 곳에서 사우(師友)의 덕을 못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혼자 찰흙 밭을 갈고 어두운 길을 가듯 하면서 먼저 깨달음을 얻고 계발된 바 있으나 돌아보건대 사문을 위하여 어디 갈 데가 있습니까. 이에 부급(負芨)천리하고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청하게 되니 헛된 삶이 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를 기대합니다.’라고 간청했다.

존재 선생이 1766년 간암공이 타계한신 후에 스스로 찬한 간안공의 행장을 보자. ‘윤병계 선생과는 젊었을 때 한 마을에 살았으므로 서로 아는 것이 가장 깊었다. (중략) 병계 선생은 그 자제와 문생들에게 말하기를 이 분은 나의 죽마고우

라고 표현했다

(지장록, p.256). 이런 표현으로 보면 두 사람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죽마고우라 할 만큼 절친한 사이다. 그래서 간암은 다음 내용으로 존재를 가르쳐달라는 요지의 서신을 보냈다.

병계의 문하로 들어가 15년간 덕산과 관산을 오가며 공부했다. 45경을 비롯해 예론, 시폐론 등을 놓고 대담하는 것이다. 제자라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의문에 대해 자신의 논리를 개진하는 형식이다. 유학(留學)이라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1년에 한 달 정도 머물면서 수학하는 게 고작이었다. 스승은 그 것이 안타까워 아들로 하여금 체류에 따른 물자를 지원해 더 머물며 공부하게 했다. 속수례 이후 스승은 贈三難韻으로 학문의 길이 어려움을 일깨웠고, 제자는 스승의 시에 화답했다. 9월에 딸을 낳다.


◇贈三難韻
經意難知說亦難 경서의 뜻 알기 어렵고 말하기도 또 어려우니
難言言下領之難 말한들 말하자말자 이해하기 어렵네
又難領會分明得 또 이해하여 분명 터득하였더라도
心體行時覺最難 마음으로 체득하여 실천하기 어렵다네

綱條己熟極功明 삼강령 팔조목 이미 익혀 지극한 공 밝혔지만
不識眞能築底成 진정 그대가 쌓아 이룬 공부는 내 모르겠어라
和靖一書猶半歲 화정선생도 반년 간 한 권의 책만 읽었으니
纔旬二傳恐難精 열흘 만에 이전에 정밀하기란 어렵지

冠山秀色夢中回 천관산의 선경을 꿈속에서 그리워했는데
君自冠山千里來 그대가 관산에서 천리 길을 왔구나
何日携君山上去 어느 날 그대와 함께 산 위에 올라가서
南臨滄海壯襟懷 남쪽 창해 바라보며 흉금을 장대하게 해보나

◇辛未春 謁久庵先生 玉屛溪 歸途中敬次先生所贈三難字韻
人不處生自古難 사람이 헛되이 살지 않기란 예부터 어렵고
眞知實踐是爲難 참되게 알고 실천함이 바로 어려운 일이네
今見先生聞大道 지금 선생을 뵙고 큰 도를 들었으나
升高行遠肯辭難 높고 먼 경지를 어찌 어렵다 사양하겠습니까
사제의 연을 맺고 약 10일간 머물다 귀가한 이후 그해 8월 다시 덕산으로 스승을 찾아뵙고「의례(疑禮)」에 대한 문답을 했다. 즉 경문(經文)의 뜻이 의심스럽고 분명치 않은 대목에 대해 질문하면 선생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방식이다. 또 가을에는 한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스승을 뵙고 수십 일을 머물었으니 첫해에는 전후 3차례나 덕산을 찾았던 셈이다. 그러나 음력 8월이 가을인데 같은 시기에 두 번의 덕산과 한양행은 겹친 것으로 보인다. 귀향하면서 스승에게 다음의 절구 한수를 지어 바치니 스승도 화답했다.


◇是秋自洛下歸 歷謁玉屛溪留數旬 以一絶上呈
吾道相傳秖此心 유학의 도 서로 전하는 건 단지 이 마음
淵源千古活來深 천고토록 연원 깊어 콸콸 흘러왔네
玉溪秋月明寒水 옥계의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밝으니
審問能行便易尋 자세히 묻고 행하면 쉽게 찾을 것이리라
 
◇先生和詩
初學惟宜收放心 초학자는 오로지 방심을 거두어야 하니
本源旣得資之深 본원을 체득하면 의뢰함이 깊어진다네
自玆迤邐向前去 이로부터 끝없이 앞을 향해 나간다면
入德門程庶可尋 덕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병계 선생의 화시에 제자를 초학자로 규정짓고 있다는 점이다. 그 무렵 존재는 비록 시골이기는 하지만 스승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학문이 성숙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점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
 
 26세(1752년 壬申)
言行에서 輕佻浮薄에 조심하다
장천재에서 지냈다. 서당경영의 지속여부는 확실치 않다. 원문(原文) 즉 본원(本源)을 논하는 글을 지었다. 이는 선비의 언행과 부박함을 경계하는「경조부박(輕佻浮薄)」을 글을 말한다. 이해에는 덕산행여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속수례를 올린지 2년차라서 다녀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7세(1753년 癸酉)
人物性異論의 타당성 설명하다
겨울에 덕산으로 갔다. 그때 스승이 인물성동이설(人物性同異說)은 여전히 분분하여 정해진 것이 없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라고 물었다.

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성즉리(性卽理)'라는 세 글자를 잘못 인식한 결과입니다. 인과 물이 애당초 생겨날 때 그'이(理)'가 같지 않은 적이 없지만 이'이'가  이'기(氣)'를 승(乘)하면 문득 온갖 형질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질(氣質) 중에 나아가서'이'한 글자를 뽑아내야만 바야흐로'성'이 이루어진 후에 人과 物이 어찌 같겠습니까. 또한 《중용》의'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한 구절을 보면'天'자에 무게가 있어 인과 물이 한 근원이라는 이치를 볼 수 있습니다. 또'솔성지성(率性之性)'한 구절에'솔(率)'자 역시 중요하여, 인과 물의 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자(程子)는'이'가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주장으로 성선(性善)의 뜻을 밝히려 했기에 성의 본원까지 끌어올려'성즉리(性卽理)'라고 풀이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성리'두자를 보아 구분이 없게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여기서 ()자를 꼭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대체로 성이 하늘에 있는 것은 이니, 를 근원해서 보면 인과 물이 같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가 물에 있으면 성이니, 성에 대해 논한다면 인과 물이 다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대개 두 글자가 맥락은 비록 통하지만, 그것들이 위치한 자리는 다릅니다. 다만 배우는 사람들이 이점에 대해 철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평소 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습니까?라고 응답하며 <이기운> 한수를 지어 올렸다.    
성리학에 관한 한시와 연구는 7언절구 <성리음(
性理吟)> <성리운(性理韻)> <증인(贈人)>, 1761(辛巳) <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 1762(壬午) <근차구암선생성정이기동이운(謹次久庵先生性情理氣同異韻)>,  1774(甲午)에 창작한 매군과 수창록 <선과 악>, 중용차의(中庸箚義)> 등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스승은 제자의 <성리운>에 대해 기질이 치우치고 아니고는 따질 게 무엇이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더불어 <서경(書經)>과「의례(疑禮)」에 대해 문답을 했다. 이해부터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했다. 향촌의 유생들이 학교나 서원 등에 모여 나이 많고 덕 있는 어른을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베푼 의식이다. 그가 주관한 향음주례는 아버지를 주빈으로 한 가족단위의 의례이다.


◇性理韻
性因理賦本於天 성은 이로부터 품부되니 하늘에 근본하고
人得其全物得偏 사람은 온전함을 얻고 동물은 치우치게 얻네
若論一元同處是 한 근원으로 논하자면 같은 곳이지만
纔看氣上便殊千 기의 측면에서 보자면 천 가지로 달라지네

◇理氣吟
非一非二兩而一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며 둘이면서 하나다
初何擬議有後先 애당초 어찌 선후가 있음을 논하겠는가
呼吸動靜宜體認 호흡과 동정 속에 마땅히 몸소 깨달아야 하니
霜露風雲儘布宣 서리 이슬 바람 구름에 진실로 펼쳐졌구나
氣旺攝理善喪本 기가 왕성해 이를 섭정하면 선이 근본을 잃고
理定率氣惡無緣 이가 정해져 기를 거느리면 악이 따르지 않지
兩存之地驗偏重 두 가지 함께 있는 곳에서 편중을 징험해야만
理氣工夫是當然 이기에 대한 공부가 마땅하리라

◇先生和詩
君知性善出於天 성선이 하늘에서 나온 것을 자네는 알지니
氣質何論偏不偏 기질이 치우치고 아니고는 따질 것 무엇인가
學問元來工最大 학문이란 원래 공부가 가장 중요하니
人能之十己能千 남들보다 백배 천배 더 노력하게나

◇宿海仙庵
徒倚危欄納晩風 높은 난간에 기대어 저녁 바람 쐬니
醺醺酒力上顔紅 거나한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지네
江村日暮孤烟起 강촌에 날 저물어 한 가닥 연기 피어나고
客子閒情細雨中 가랑비 속에 나그네 마음 한가로워라

<又宿海仙庵>
蕭灑矮簷隱翠松 상큼해라 작은 처마가 푸른 솔에 숨었으니
海風山雨趁高春 해풍과 산비에 봄기운은 완연해지네
吟詩把酒渾閒事 시 읊고 술 마시는 건 모두 한가로운 일이니
占檢身心聽暮鐘 저녁 종소리 들으며 심신을 점검해 보네
<숙해선암>은 암자에서 하룻밤을 지낸 감상이다. 봄철 어느 날 가랑비가 오는 저녁 무렵 술에 거나해지자 암자 난간에 기대어 연기가 피어오른 정경을 바라보면서 바람을 쐬는 서정을 담고 있다. <우해선암>은 그 이후 해질 무렵 처마가 숲으로 가려진 모습과 완연해진 봄기운 속에 술을 마시는 한가함과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해선암은 어디에 있는 암자인지 모른다. 예부터 해선암이란 이름의 암자는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등지에 있으나 선생의 연치로 보면 먼 곳에 있는 암자는 아닌듯하다. 혹시 천관산의 어느 사찰 암자가 아닐까 싶다.





 28(1754甲戌)
科擧 增廣試 應試하다
봄에 증광시(增廣試)의 동당(東堂)에 응시한 후 귀가하는 길에 스승을 뵙고 <周易總目>에 대해 질문하고, 기형(璣衡)과 관련해 대화를 나눴다. 대나무로 기형을 만들어보라는 스승의 권유로 작품을 만들어 久庵軒 두었다. 7월에 차남 道及 출생했다. 천관산을 주재로 한 시를 지어 스승에게 바쳤다.

咏天冠山呈久庵先生
山到懷州氣益全 산자락이 회주에 닿아 기세 더욱 완전하니
復興淸淑此蜿 성대하고 깨끗함이 이렇게 꿈틀거리네
望中壺丈三千里 눈앞에 별천지가 삼천리로 펼쳐지고
物外風烟八萬 세상 밖의 풍연이 팔만 봉우리에 서려 있네
嵌窟龍藏雷雨動 깊은 동굴엔 용이 서려 우레와 비가 진동하고
石棧雲霽月星懸 돌사다리엔 구름 개어 달과 별이 걸려 있으니
靈區造化眞宰秘 신령한 지역에 조화옹의 참된 주재 신비하여
自在天南極海邊 스스로 하늘 남쪽 끝 해변 가에 있구나

 29
(1755
乙亥)
傍村 養正塾 開設하다
1748
(戊辰)에 이어 이해 봄에 두 번째 서당을 개설했다. 장소는 장천재가 아니라 방촌 귤우헌(橘友軒, 世璜 16731734)의 사랑채로 이름은 양정숙(養正塾)이라 했다. 선생이 서당을 연 이유는 종조인 간암공께서 일가 자제들을 무식쟁이로 놔둘 수 없으니, 가르치라는 강권을 받아들인 것이다. 학규는 부노(父老)의 의견을 모아 만들어 이전 계당학규보다 상세했다. 현판은 스승이 써준「養正」을 붙였다. 가난한 집 자제들은 낮에 농사를 짓고 밤에 배우는 주경야독의 형태로 운영했다. 과목은 구구단, 육갑, 조상의 세계(世系), 사략(史略), 상례비요, 통감절요, 소학, 대학, 맹자를 수준에 따라 가르쳤다. 다만 <소학>은 피교육생의 공통과목으로 풀어서 납득하도록 했다. 이렇게 반년을 운영하니 거의 체계가 잡혔다. 문중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67세의 간암공은 내가 죽지 않고 이런 모습을 보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기뻐했다.  

 30
(1756
丙子)
救荒식물과 政絃新譜 짓다
가뭄이 심해 농민들이 양식이 떨어져 굶주렸다. 너무 배가 고파서 느름나무나 칡뿌리 등으로 허기를 채우며 목숨을 부지했다. 이 참상을 표현한 작품이 곧 구황식물(
救荒植物) 연작이다. 학계는 이들 작품을 한꺼번에 지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선생께서는 글을 지을 때 초안(草案)도 없이 뜻대로 썼다고 한다. 이는 평소 문장형식이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현신보(政絃新譜) 시폐(時弊) 13조를 이해에 저술했다(救弊 1759년 저술). 政絃이란 정치의 병폐를 낡은 악기의 줄로 여겨 새 줄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 자신의 글이 세상에 전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덕산을 다녀온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문묘종사(宗廟從祀)가 이루어진 만큼 스승을 찾아뵈었을 가능이 높다. 노론으로서는 우암의 종사가 숙원이었기 때문이다.


〈茨苽〉
在田自不妨嘉穀 밭에 있어도 스스로 곡식을 해치지 않고
登鼎偏宜活萬民 솥에 들어가면 만민을 살리기에 딱 맞네
最是歲歉方見用 흉년에 바야흐로 쓰임 받기에 제일이지만
等閑平日野山春 등한 평일에는 봄마다 산과 들에 널려 있네

〈松葉〉
靑靑雪裏葉 파릇파릇한 눈 속의 잎새들
和粥見淸眞 죽에 섞이면 청진을 드러내네
始覺凌寒節 추위를 견뎌내는 너의 곧은 절개
方能活世人 바야흐로 세상 사람들을 살려내누나

〈假餠>
麩糠團作餠 밀기울을 둥글게 반죽하여 떡을 만드니
飢食易爲香 먹을 것에 주린 입이 향기롭기만 하네
稚子强求飽 어린 것은 배불리 먹고자 떼를 써대니
驕啼鬧室堂 시끄러운 울음소리 온 방안이 떠나갈 듯

◇尤春兩先生從祀聖廟韻      
絶學歸東土 끊어진 학통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懷川道不窊 회천에서 도가 어그러지지 않았으니
洛濓明水月 염낙엔 물에 비친 달 밝아졌고
沮澤遠龍蛇 늪에선 용과 뱀 추방되었지
冠冕三韓國 삼한에서 최고의 학자가 되었으니
淵源兩宋家 두 송 선생댁에서 학문이 연원하였지
聖祠尊爼豆 문묘에서 공손히 제사 드리니
天聽定非遐 하늘같은 성상의 들으심 정녕 멀지 않구나

◇呈金渼湖丈
百川歸海狂灡急 온 냇물 바다로 광란의 물결 급하게 흐르니
一水派分有淺深 같은 물줄기라도 깊고 얕은 구분이 있지
鏡面無風秋月白 거울 같은 물에 바람은 자고 가을 달 밝아
平湖方是見天心 잔잔한 호수에서 바야흐로 천심을 보네

◇輓剩餘翁 族叔命德
身世浮休付剩化 인생사의 부침은 조화의 찌꺼기에 맡겨 두고
百年遺計在東崗 백 년 동안 남긴 계획 모두 동강에 두는데
平生禮學醇儒富 평생 예학을 공부했으니 진정한 유학자이며
偕老光陰晩福昌 해로하였으니 노년에 복도 많았구려
隱不厭深長澤縣 은거지로 외진 장택현을 늘 싫어하지 않았고
詩常戀舊俯溪堂 읊조리는 시는 옛 부계당을 늘 연모했는데
賢郎己赴仙曺會 아드님이 이미 저 하늘나라로 돌아갔으니
應促雲輧入帝鄕 응당 운병재촉하며 하늘로 올라가시겠지

◇政絃新譜 時弊 13條目
△學校
△薦擧
△登用
△郡縣
△官職
△田制
△武選
△漕運
△宮屯
△田結

〈葛根〉
形似神笭麵似桄 형체는 신령한 감초 같고 가루는 광랑나무 녹말 같아
鍊成瓊膏遞糜粮 반죽하여 쳐대면 보배기름이라 죽거리를 대신하네
仙人强解塵間事 선인이 티끌세상의 일을 이해하고도 남아
故洗眞方救歲荒 짐짓 참된 비방을 누설하여 흉년을 구함일세

〈楡根〉
冷窓疎烟焄赤楡 가난한집 어쩌다 오르는 연기는 느릅나무 끓이는 것이네
野人生活盡堪吁 시골사람의 생활은 정말로 개탄스럽네
如今國乏三年積 지금 나라의 비축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肉食諸君念也無 고기에 배부른 분네들은 생각이나 있는지 없는지

〈黃精〉
淡紫微甘初悅口  엷은 자주색, 약간 단맛, 처음 입에선 먹을 만하나
纔傳腸腑便成廜  겨우 뱃속에 전해지자 갑자기 병을 이루네
非緣窳賊戕嘉穀  마디 벌레가 벼 곡식을 쓸어버린 연유가 아니다면
豈有朽根上共廚  어찌 너의 썩은 뿌리가 주방에 오를 수 있으랴

31(1757丁丑)
정현신보
救弊를 보충하라
덕산에 갔다. 스승과 『대학차의(
大學箚義)』에 대해 문답했다. 스승은 당시 정시(庭試)에 응시하라고 권유했으나 여의치 않아 상경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체류 비용 때문으로 보고 식량을 주어 열흘이라도 더 머물도록 만류했다. 또한 <주자대전>이 없음을 보고, 금구(金溝) 현감인 아들 윤심위(尹心緯)에게 자화(子華) <주자대전>이 없어 공부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완영(完營)과 협의하여 한 질 구할 방법이 없겠느냐며 대책을 마련토록 했다.
스승의 지극한 배려가 진한 감동을 일으킨다. 제자가 오래 머물고 싶어도 비용이 없자 그 비용을 아들에게 줘서 머물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10일 정도 더 머물며 공부하게 한다. 그때 그의 아들은 지금 전라북도 김제시 관내인 금구(
金溝)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경서 등 중요한 책은 조정의 인쇄소에서만 출판했기 때문에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생에게 구해주고 싶은 <주자대전>의 구입을 전라도감영에 주선해보도록 이른 것이다.  
당시 책값이 얼마나 비쌌으며, 선생의 가정형편이 어려웠으면 <주자대전>도 없었을까. 이미 한 세기가 지난 중종(
中宗)실록을 보자. <대학> <중용>은 상면포 34필 값이다. 이는 논() 23두락의 1년 소출인 쌀 28()에 해당된다. 더구나 <주자대전>은 양민 25명이 1년간 국가에 바친 군포 값과 맞먹은 돈에 해당된다. 선생의 집은 작은 조부 춘담공(春潭公) 8마지기의 논을 합쳐 20마지기를 경작하는 정도의 중농이니 보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구할 수 없었다.
정현신보 시폐(
時弊) 13조를 스승에게 보였다. 그러자 이는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글 한 통을 써서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초야에서 하는 말은 무익하다. 다만 선비도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몰라서는 안 되므로, 그 방법을 조목별로 개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면서 구폐(救弊)도 아울러 입안하라고 조언하자 시폐에 대응하는 구폐의 저술을 결심한 것이다. 지난해 이어 가뭄이 심했다. 구황식물 연작 가운데 <갈근> <유근> <황정>등을 내놓았다.

葛根
形似神笭麵似桄 형체는 신령한 감초 같고 가루는 광랑나무 녹말 같아
鍊成瓊膏遞糜粮 반죽하여 쳐대면 보배기름이라 죽거리를 대신하네
仙人强解塵間事 선인이 티끌세상의 일을 이해하고도 남아
故洗眞方救歲荒 짐짓 참된 비방을 누설하여 흉년을 구함일세

楡根
冷窓疎烟焄赤楡 가난한집 어쩌다 오르는 연기는 느릅나무 끓이는 것이네
野人生活盡堪吁 시골사람의 생활은 정말로 개탄스럽네
如今國乏三年積 지금 나라의 비축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肉食諸君念也無 고기에 배부른 분네들은 생각이나 있는지 없는지

黃精
淡紫微甘初悅口  엷은 자주색, 약간 단맛, 처음 입에선 먹을 만하나
纔傳腸腑便成  겨우 뱃속에 전해지자 갑자기 병을 이루네
非緣窳賊戕嘉穀  마디 벌레가 벼 곡식을 쓸어버린 연유가 아니다면
豈有朽根上共廚  어찌 너의 썩은 뿌리가 주방에 오를 수 있으랴

春帖
仰而無愧俯無作 하늘과 땅 한 점 부끄러움 없으니
屋漏吾心可質神 옥루에도 내 마음 귀신에게 물어볼 만하네
萬事只應前定好 만사는 앞서 정한 대로 감응하는 법이니
何須煩祝媚新春 어찌 번거롭게 새봄에 축원하며 아부하나

病中偶吟
身貧且賤服耕耘 신분이 비천하기에 농사일만 하면서
憂恢欺人病又殷 남들 속일까 근심하다 병마저 심해졌네
海曲蒼生衆所厭 바닷가 백성의 삶이란 모두 싫어하는 것이니
天何玉汝苦慇懃 하늘은 나를 옥으로 만들려 은근히 괴롭히네

贈眞上人
趙州言有己難詳 조주가 말한 는 벌써 이해하기 어려운데
纔到言無更渺茫 를 말함에 이르자마자 다시 아득하구나
爲問觀空眞長老 묻노니 참선하는 진 장노여
明星何以在東方 밝은 별이 어인 일로 동방에 있는가

蒼光山(平壤) 歌贈別黃上舍載之 大厚 丁丑
君居蒼光山            그대는 창광산에 살고
我居天冠山            나는 천관산에 살지
蒼光山天冠山          창광산천관산은
隔千里幾重雲山        몇 겹의 구름 낀 산으로 천리나 떨어졌지
且休道隔千里          천리나 떨어졌다 말하지 말고
但願君爲我聽流水高山  나를 위해 고산유수곡
我欲遊關西            내 관서지방을 유람하고자 하면서
跋涉愁江山            어느 강산을 건너고 오를까 근심하나니
自從獲得君            그대를 만난 이후로는
眠中長對蒼光山        내 눈에는 늘 창광산이 어른거린다네
황상사
載之 大厚와는 아주 다정한 친구였던 모양이다. 존재는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그와의 사귐이 덕산 병계 선생의 문하에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과장을 출입하면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평양의 창광산과 천관산을 백아와 종자기의 지음지우로 여기면서 읊은 시이다.  

贈別蔡季能 百休
鎭川冠山南北州 진천과 관산은 남북으로 떨어진 고을인데
溪上逢迎若萍浮 부평초처럼 떠돌다 옥계에서 만났었지
好是襟期相照地 속마음을 나누는 좋은 자리었으니
兩鄕明月卽靑時 두 고을 밝은 달은 반가워하는 눈빛이라

 32(1758戊寅)
初試 합격하고, 寰瀛誌 짓다  
스승께서 천관산을 보고자 남쪽으로 여행에 나섰다는 전갈이 왔다. 그런데 감영 영저리를 통해 보낸 편지가 늦게 전달됐다. 이해 4월에 스승은 아들
尹心衛 읍재로 있는 금구(金溝) 관아에 도착했다. 연락을 받은 선생은 노령(蘆嶺)으로 가서 스승일행과 만났다. 스승은 여행을 계속하려다 더위가 심해 입암(笠巖)에서 포기했다. 스승을 수행해 다음날 태인(泰仁)의 피향정(披香亭)에 올랐다. 일행은 금구현의 관아에서 이틀을 묵은 뒤 덕산으로 갔다.
초시(
初試)에 합격했다. 그리고 『환영지(寰瀛誌)』를 저술했다. 환영이란 기내 환()과 바다 영()을 합쳐 지도(地圖) 또는 천자의 영토를 뜻한다. 지리(地理)에 관한 저술은 이해에 시작해서 61(1787)에 보완한 <환영지>를 비롯해 52(1778)에 지은 <지제지(支提誌)>와 작년 미상의의 <해도지(海島誌)> 등이 있다. 이들 지도서 가운데 환영지와 해도지는 1795년 정조의 명으로 내각에 보내졌다가 해돋이는 유실됐다.  
한편 선생은 세계지도 격인 환영지를 제작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환연지』서문에서
우연히 81()가 그려진 그림책을 열람했다.(중략) 그래서 책을 베끼고, 중주(中州) 13()과 조선 8도의 지도를 이어 붙였다. 또 천지와 고금의 가득하고 혼란하여 기억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림으로 모아서 정렬하여 그 아래에 붙이고 이를 합하여 책 이름을 <환영지>라 했다라고 제작한 동기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詠立巖之遊 呈久庵尹先生
步徐山失險 느긋이 걷다보니 산의 험함도 잊고
神爽脚忘勞 마음이 상쾌하여 피곤한 줄 몰랐는데
俯視南天界 남쪽의 하늘을 굽어보자
方知立處高 이제야 서 있는 곳 높다는 걸 알겠구려

立巖山城
東南天險地 하늘이 내린 동남쪽 험준한 요새
曾未絶戎塵 병란이 끊인 적이 없었지
肉食終何事 벼슬아치들 끝내 뭐했던가
銘碑只士人 비명에는 단지 선비들뿐이로다

松串石臺
廢港寒潮入 피폐한 항구에 찬 조수 들어오고
荒臺野草多 황량한 석대에 들풀만이 가득하다
客來深竹裏 나그네가 대숲 깊은 데서 나오자
鷄犬兩三家 두서너 집에서 개와 닭이 우짖는구나

寰瀛誌 저술

33(1759己卯)
정현신보 시폐 두 번째  다듬다
봄에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오면서 스승을 뵙고 횡거(
橫渠) 장재(張載, 10201077)의 『정몽(正蒙)』과 『의례(疑禮)』에 대해 묻고 답을 들었다. 그리고 5월에 별시(別試)에 응시하고, 6월에 회시(會試)에 응시하러 한양에 갔으나 심한 더위로 몸이 아파 응시하지 못하고 귀향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봄의 회시에 응시하고, 다시 윤 6월에 회시 응시도 못했다는 것은 잘못이다. 초시인 진사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이해에 『정현신보』의 시폐 13조를 두 번째로 수정하고, 경전(
經傳) 가운데 심신수양에 가장 절실한 편()과 장() 가운데서 골라서 장정해 『고금(古琴)』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이 책도 산실됐다. 한시 『입춘』에서 나의 기도(祈禱)가 오래되었으니, 옛 성인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라고 했다. 이는 공자가 공()에서 포로로 잡혔을 때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지 않았는데 광인(匡人)들이 나를 어쩌겠느냐라는 말과 비슷하다.
스승 곁을 떠나 귀가하면서 공주와 부여를 거쳐 마이산까지를 여행했다. 한식 직후라 아직은 조금 쌀쌀한 기온이었을 것으로 보인 계절이다. 선생은 660년 신라에게 멸망한지 1099년만에 백제의 옛 모습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마 생애에서 한해 전에 입암산성과 금구 등을 관람한 이후 처음으로 타도의 유적지를 관람하는 감회가 달았던 모양이다. 그래선지 <부여회고> <쌍수산성> <고란사> <마이산> 등 여러 수를 읊었다
.
특히 아버지 영이재공(
詠而齋公)이 주도한 「기묘초보(己卯)가 발행됐다. 장흥 위씨로는 사상 처음으로 족보를 발행하려고 1741(辛酉)부터 20여년간 총력을 경주한 사업이었다. 당시 선생은 문중의 요구로 간암공(艮庵公)의 친구이자 통정대부행공조참의 신경(申暻)을 찾아가「족보서문(族譜序文)」을 찬해 부탁해서 받아왔다. 이런 연유로 기묘초보에는 영이재공이 1741년에 찬한 서문과 1759년 신경이 찬한 서문 등 두 편이 실려 있다.          

立春
夜氣猶存際 밤기운 아직도 남았을 지음
東君始到時 봄기운 비로소 찾아오는 때로다
吾之禱久矣 나의 기도가 오래되었으니
先聖豈余欺 옛 성인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屛溪寒食
歸夢三更不禁寒 한밤중 고향 꿈에 추위를 견딜 수 없었네
一年春事旅窓間 한 해의 봄 일이 나그네 창에 스치는구나
遙知故國淸明雨 멀리서도 알만하니 고국의 청명절에 비내리면
綠滿前畦紅滿山 밭 온통 푸르고 산에는 붉은 꽃 가득하리라  

扶餘懷古
落花巖上草離離 낙화암 바위 위엔 풀들만 우거지고
疎柳荒城啼晩 황폐한 성 성근 버들에는 꾀꼬리 소리
千古興亡無限恨 천고의 흥망에 한은 끝도 없는데
滿江春水日斜時 저물녘 봄물만이 강에 질펀하도다

雙樹山城月波樓次上板韻
畫閣崢嶸女堞頭 단청 누각 높다랗게 여첩의 머리에 있어
登臨知是古熊州 이곳에 올라 보니 옛 옹주임을 알겠도다
關防國倚湖西重 나라가 의지하는 관문이라 호서에서는 중요하고
形勢天生江水流 하늘이 내린 형세라서 강물이 흐르는구나
過去名存都督府 지난날 그 이름 옹진도독부로 남아
卽今人上月波樓 오늘의 사람들은 월파루에 오르는구나
請看雙樹亭前石 부디 살펴보소서 쌍수성 앞의 비석을
未許諸君作浪遊 사람들 헛되이 노는 것 허락하지 않는다오

皐蘭寺東閣次金三淵韻
巖畔危欄倚半天 바위 옆 난간이 하늘 반쯤 기댔고
繁華時事落花前 화려한 시절은 바로 꽃 떨어지기 전이었지
遊人佇立滄桑後 상전벽해 뒤에 나그네가 우두커니 서 있으니
老木寒崖月一川 노목과 찬 벼랑의 강물엔 달빛만 가득하다

詠馬耳山
雙峯削出石蓮花 두 봉우리 돌로 깎아 낸 연꽃인 듯
撐柱南天入紫霞 남쪽 하늘 지탱하니 선계로 들어간 듯
自是渾身剛似鐵 온몸이 마치 쇠처럼 굳세어진 뒤로부터
也能千古不消磨 천년만년 영원히 닳지 않으리라

重陽
醉帽風萸影亂斜 취해 기운 갓 나부끼는 그림자 어릿거려
一年佳節到山家 한 해의 명절이 산가에 이르렀다
幽人計活隨時足 은자의 생계는 때에 따라 넉넉하니
坐得黃金滿院花 정원 가득한 꽃에서 황금을 얻어서라지

除夕
歲時摧謝若曛朝 세시가 끝나려고 재촉함이 조석과 같아
一氣循環理自饒 하나의 기 순환이니 이가 절로 풍요롭네
天意本無新舊別 하늘의 뜻 본래 옛것과 새것 구별 없는데
詩人枉了恨今宵 시인은 부질없이 오늘 밤을 한스러워하네

34(1760庚辰)
장천재에서 한가롭게 지내다
장천재에서 지냈다. 의문은
양정숙의 운영여부다. 계속했다면 장천재에서 지냈다는 것과 상치되기 때문이다. 물론 학숙을 운영하면서도 장천재에서 지낼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한가할 수 없다. <방유거불우(訪幽居不遇)> <탁족(濯足)> <심원(尋源)>등의 한시를 보면 학숙 운영은 안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귤우헌의 양정숙 운영은 1759년까지 최대 5년 정도에 그쳤다는 계산이 나온다. 계당학숙이나 양정숙의 운영기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다. 덕산행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다녀왔을 것으로 간주된다. 귀가하는 길에 포옹(圃翁) 안이행(安以行)의 손자인 안동재(安東齋)를 방문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렇다.  

訪幽居不遇
境靜啼山鳥 고요한 이곳에 산새들 지져귀고
林踈見野烟 성근 수풀에는 들 연기 자욱한데
客來幽興足 손님오자 그윽한 흥취 넉넉해서
傍花弄淸靑 꽃 곁에서 맑은 샘물 희롱한다오

松竹侵庭蔭 송죽은 뜰까지 그늘 드리우고
梨花傍水新 배꽃은 물가에 새로워라
韶光只在此 봄 풍경 바로 여기에 있거늘
何事遠尋春 어인 일로 멀리 봄을 찾아 갔는가

濯足
垂足山泉洗垕塵 산속 샘물에 발 담가 더러움을 씻으니
閒居無事不淸新 한가로워 일마다 정진하지 않음이 없어라
若言濁斯方斯濯 물이 탁하면 발을 씻어라 했다지만
却恐淤泥反汚身 진흙이 오히려 몸을 더럽힐까 두렵다오

尋源
兩岸松篁境轉幽 두 언덕에 솔과 대는 갈수록 그윽해지고
淸漪隨處見深湫 맑은 물결 흐르는 곳에 깊은 못이 보이네
臨流不敢談塵事 물가에 감히 속된 일 말하지 않는 것은
却怕山翁恥飮牛 산옹이 소 물 먹이기 부끄러워할까 두려워

培蘭
嫩芽新長趁春陽 어여쁜 싹 새로 자라 봄볕을 쫓으니
風格依然壓衆芳 품격이 의연하여 뭇 꽃을 압도하네
慇懃日夕勤培意 정성스럽게 아침부터 난을 키우는 것은
爲待時來擅國香 때가 되면 온 나라에 향기 날리게 하리라


로그인 정보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