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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村公의 北道陵殿誌

1. 학촌 휘 위창조는 누구인가
 학촌공 휘 창조(1703~1771)는 관북 입조 휘 자공(自恭)의 15대 손(관북 31世)이며 도승지공 정상(定相)의 증손, 부는 태래(泰來)이다. 1731년(영조 8 辛亥) 문과에 급제, 승정원 주서(主書)겸 성균관 학록(學錄)․보안도 찰방(察訪)․성균관 사례(司禮)․개성부 경력(經歷)․성균관 전적(典籍)․통례원 우통례(右通禮)․동부승지(同副承旨)․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 수찬(修撰)․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호조정랑(兵曹正郞)․호조참의(戶曹參議) 등의 요직을 거쳤다.
조선 500년 동안 남북의 장흥 위씨 가운데 당상관에 오른 인물이다. 물론 고려 말과 조선 태종 때 별시위패두를 역임한 판사공 휘 충(种)과 심양왕환일기(瀋陽往還日記)의 저자인 병조참판 휘 정철(廷喆)도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당상관은 공이 유일하지 않을까. 공은 이력이 말해주듯 28세에 문과에 급제해서 주로 학문을 관장하는 기관에서 봉직한 것으로 그 학문적 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경연참찬관이라는 직책은 조정에서도 그 지적수준이 높지 않고서는 어렵기 때문이다.
위씨가 북도의 명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통천(通川)군수를 역임하고 관북최초 미완의 족보인 기사보(1689)를 닦은 공의 증조인 정상(定相)과 형 영조(榮祖), 동생 홍조(弘祖)도 문과에 급제하면서 이루진 것이다. 마치 원감국사 3형제를 떠올리게 한 3형제의 문과급제는 보기 드물다. 한편 학촌공은 이보다 3년 전에 영조의 명으로 장헌세자(莊獻世子) 서(序)를 지어 올리니 미재경지철문성수불루(美哉卿之綴文盛水不漏)라며忠臣이란 휘호(揮毫)를 내렸다. 그는 입조(立朝)생활이 말해주듯 문장이 대단했다.

1) 北道 陵殿誌의 內容
범례에서는 이 책의 작성 및 증보 원칙을 밝히고 있는데, 앞의 여섯 조목은 ≪북도능전지≫의 범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대개 권4까지는 능에 관한 기록이며, 그 이후는 전과 궁에 대한 기록이다. 능전지는 조선왕조 창업자의 근거지 및 태조 선계에 대한 조선 후기의 관심의 일단을 엿볼 수 있으며, 이후 함경도의 읍지 편찬에 참고 자료로 이용되었다.
권1에 숙묘어제(肅廟御製), 당저어제서(當宁御製序), 덕릉(德陵)·안릉(安陵)·부구덕릉(附舊德陵) 신도비(神道碑), 권2에 지릉(智陵)·숙릉(淑陵) 신도비, 권3에 의릉(義陵)·순릉(純陵) 신도비, 권4에 정릉(定陵)·화릉(和陵) 신도비, 사지기비(四至記碑)가 수록되었다.
권5에 선원전(璿源殿), 권6에 경흥전(慶興殿), 권7에 본궁(本宮:함흥), 권8에 본궁(영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어 당저어필별유비(當宁御筆別諭碑)·신유동반시북민어제별유(辛酉冬頒示北民御製別諭)가 실려 있다.
권1∼4에는 주로 각 능별로 그 위치와 묻힌 사람에 대한 사항을 기재한 뒤, 고실(故實)·상설(象設)·정자각(丁字閣)·홍살문[紅箭門]·비석(碑石)·사전(祀典)·재실(齋室)·능관(陵官)·제기복(祭器服)·수호군(守護軍)·죽책문(竹冊文) 등 항목별로 해당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중 중심을 이루는 것은 고실로서, 사적·연혁·사초(史草)·수개(修改)·중건(重建) 등의 담당자 및 필요한 물품의 조달·제사·봉심(奉審) 등의 규정과 그 변화 등을 기록하였다.
권 5∼8에서는 각 전이나 궁별로 위치와 연혁을 밝힌 뒤 정전(正殿) 또는 전우(殿宇)·고실·영정봉안(影幀奉安)·의장(儀仗)·이안실(移安室)·홍살문·전사청·사전·재실·전관·제기복·수호군·옥책문(玉冊文)·궁속(宮屬) 등의 항목을 세워 기록하였다. 또한 유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각 능·전·궁에 대한 사실의 고증을 목적으로 한 책이다. 체재는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모방했고, ≪선원보략 璿源譜略≫·≪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열성지장 列聖誌狀≫ 등을 참고 자료로 이용했으며, 세주(細註)로 전거를 표시하였다.
끝에는 편찬자인 학촌공의 지(識)와 간기(刊記)가 있는데 지금은 규장각(奎章閣) 장서목록 2794호로 소장돼 있다. 우리 족보에는 1747년(영조 23)에 편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2) 御製北道 陵殿誌序
 「此誌卽參議魏昌祖所編輯也豐沛古蹟創業休祥開卷瞭然首錄昔年御製奉讀未半不覺涕泗之交頤頃年因儒臣筵奏始覽原本而伊後有更爲纂輯之命今日成書已盡書凡三卷編則共八敬讀釋王寺御製小識奉和篇首宸翰少伸羹墻之慕而因此有興感于心者何則爲嗣王者若念皇天眷佑之意聖祖創業之艱一言一動一政一令莫敢須臾放忽則吁嗟吾東其將永垂千億豈不休哉追慕之中略記篇首仍令編輯之臣繕寫昌祖其誰卽咸州之人也曾於兼史知其人而陞擢矣今覽纂輯其忱可嘉特令道臣鋟梓板本藏府印本封進云爾歲洪武壬申後三百六十六年孟夏中旬七日敬題通政大夫戶曹參議臣魏昌祖奉敎書」

 〈해설〉임금이 지은 북도능전지서문
 이 지(誌)는 곧 호조참의(戶曹參議) 위창조(魏昌祖)가 편집(編輯)한 것으로 풍패(豊沛)의 고적(古蹟)과 왕업(王業)을 이룬 길하고 상서로움이 책을 펴면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첫머리에는 예년에 임금께서 지은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절반도 다 읽지 못해서 눈물이 턱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근년에 유신(儒臣)들이 면전(面前)에서 주청(奏請)한 말로 인하여 처음 원본(原本)을 열람하였고 그 후 다시 자료를 모아서 책을 편찬(編纂)하도록 명하였으며 오늘에야 책을 완성하여 편찬한 내용은 여덟 편으로 묶어져 있다. 삼가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임금이 지은 소지(小識)를 읽고 편 머리에 신한(宸翰:임금의 친필)으로 갱장(羹墻:추모의뜻)의 뜻을 짧게 펴 놓았다.
이로 인해서 나의 마음에 감흥을 일으키게 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왕위를 계승하는 분이 만약에 황천(皇天)의 돌보아 주시는 뜻과 성조(聖祖)때 왕업을 이루기 어려웠던 점을 생각한다면 말과 행동, 정책, 명령을 할 때에도 감히 잠시라도 방심하고 소홀히 함이 없다면 아! 우리나라는 장차 그 천억(千億)년이 가도록 영원히 지켜갈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추모하는 가운데 대략 첫머리 편에 기록을 하게 되므로 인하여 편집하는 신(臣)으로 하여금 정서하게 하였으니 창조(昌祖)는 그 어떤 사람인가 하니 곧 함주(咸州)사람이다. 일찍이 겸사(兼史)로 있을 때 그 인품됨을 인증 받고 승진 발탁되었다. 이제 자료를 모아 편찬해 놓은 책을 보니 그 정성이 참으로 가상하다. 특별히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그 판본을 목판에 새기도록 하고 장판 각에 소장할 인본(印本)을 봉진(封進)하였다고 한다.
  洪武壬申1392:명태조 25년)후 366년(英祖34년1758) 孟夏(음력4월) 中旬七日
                                 通政大夫戶曹參議 臣 魏昌祖 敎書

2. 北道 陵殿誌 刊記 (編輯後記)
「惟我北道實爲,聖祖之豳豊,園陵宮殿備在焉 象設之儀奉守之節固宜,有攷證而年代旣邈文獻疎漏以至龍興,舊蹟之雜出於傳記者日漸散落終無可以,一開卷而徵信者此非徒北人之常所慨惜,抑亦掌故氏之差也臣不侫世霑,湯沐之化榮名登朝叨被,恩榮家食以來無所用,心乃敢不揆謏淺有意編述公私文籍鳩聚,而玩釋者雃矣洪惟我朝,祖宗積累之遠實與姬周並隆自,司空佐新羅種德毓慶至于,穆祖肇基朔方,翼祖度祖相繼遷徙所在得民益膺神休,桓祖居咸興永興私邸仍有大勳勞於麗朝受,苐京都復鎭東北闢土服遠克開厥後,世世轉移不常其居而要不出於北道雖或有,久速之不同而鷄犬桑梓皆被,天光衣冠之藏月出之游又皆卜吉於此地以,至我,太祖大王誕生于黑石里胥宇於雲田社靈符,休徵盻蠁萃集文德武功之日盛,天命人,心之皆歸畢竟家化而,國室變而,殿丕啓億萬年無疆之墓追王,四代崇奉,八陵玆盖,陵殿之始而編中故實遺蹟之所以爲目者也,況我,定宗,太宗誕彌之慶乃在慶興宮潛邸則惟咸百里,之地不獨爲億萬年開創之基六七,聖世居之鄕實亦日月胚胎之所沛邑兒童猶,歌大風舂陵婦孺皆傳降衣猗歟休哉,列聖相承眷顧不替粤我,肅廟旣寓感於宸章今我,聖上又寄意於別諭皆以肇基興王之地爲,敎矧玆遺黎生老於扮楡之社灑掃於,園廟之側者尤敢不不盡心於裒輯事蹟思所以,永壽其傳耶故雖俗傳諺說之未可盡信者,苟有文字之可徵則輒皆收錄又敢並將,玉律奎章之出於,兩聖朝而勒之金石奉留此土者分載一編之,首末以備士民之常目噫以其蹟則,國朝之璿源也以其文則,陵廟之攷證也蟣虱賤臣非敢自居以編撰只,欲搜輯遺聞以俟後來君子之參證焉,上之二十三年丁卯孟秋上浣通訓大夫前行」
                                          兵曹正郞 臣 魏昌祖 拜手謹識

 〈해설〉오직 우리 북도(北道)는 실로 성조(聖朝)의 빈(豳)과 풍(豊)의 지역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원(園)이나 능(陵)과 궁전(宮殿)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여러 가지로 설립되어 있는 의장(儀仗)과 받들어 지켜야할 범절 등이 진실로 의당 고증(考證)할만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연대가 이미 멀어짐에 문헌(文獻)이 소홀해지고 있다.
용흥(龍興)의 옛 유적에 여러 가지 잡다하게 발견된 전기(傳記)까지도 날로 점차 흩어져 버리고 마침내 한번 책을 펴보고 증표를 삼으며 믿을만한 자료도 없으니 이는 단지 북도(함경도)사람들만이 항상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길 뿐만이 아니며 또한 전례담당 장고씨(掌故氏)의 수치이기도 합니다.
신은 재주 없는 사람이지만 대대로 탕목(湯沐:왕의 출생지)의 지역에서 덕화를 입고 책명(策名)이 조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외람되게 은혜를 입고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밥만 먹고 지내다가 마음 쓸 곳이 없어 곧 이에 감히 아는 것도 없는 저의 부족함을 헤아리지도 아니하고 공과 사로 문적(文籍)을 모아 그 깊은 뜻을 생각하여 찾은 지가 오래전부터였습니다. 
성대하신 우리 조선의 조종(朝宗:역대 왕)들께서 누대에 걸쳐 오래 쌓아온 덕은 실로 주(周)나라 희씨(姬氏) 왕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융숭하셨으며 사공(司空)때부터 신라(新羅)의 왕조를 도와서 덕(德)을 쌓고 경사가 모여졌기에 목조(穆祖)때 이르러서 처음으로 삭방(朔方:북방)에 제왕(帝王)의 기초를 닦기 시작하였습니다.
익조(翼祖)와 도조(度祖)가 서로 계승해서 궁성을 옮기었으며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어 더욱 신(神)의 경사로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환조(桓祖)때에는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사저(私邸)에 거쳐하시면서 그로 말미암아 고려(高麗) 왕조에게 큰 공로를 세웠으므로 경도(京都)에 있는 저택(邸宅)을 하사(下賜) 받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또 동북(東北)을 진정하고 국토를 개척하여 먼 지역의 오랑캐들을 굴복시키고 그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대대로 거주한 곳이 일정하지는 않았으나 북도를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간혹 오래 있거나 빨리 옮기는 것이 동일하지는 않으나 닭 울고 개가 짖으며 뽕나무와 가래나무 같은 식물까지도 모두가 다 천광(天光)을 받으며, 조상의 의관(衣冠:체백)도 모두가 다 이 땅이 길지(吉地)의 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태조대왕(太祖)이 흑석리(黑石里)에서 탄생하시어 운전사(雲田社)에 집터를 잡게 됨에 이르자 영부(靈符)가 길조를 보이고 모든 사물이 성대하게 모여 늘었으며 문덕(文德)과 무공(武功)이 날로 융성(隆盛)해 지고 천명(天命)과 인심이 모두다 대왕께 돌아갔으며 결국 한 가문이 나라로 바뀌어 지고 개인의 사실(私室)에서 궁전으로 바뀌었으며 크게 억만년(億萬年)의 끝없는 왕기(王基)를 열게 되었습니다.
사대(四代)를 왕으로 추존하고 팔릉(八陵)을 높이 숭봉(崇奉)합니다. 대개 능전(陵殿)의 시초부터 중고(中故)의 사실을 편찬하고 유적(遺蹟)의 목록을 기록합니다. 또 정종대왕과 태종대왕이 탄생한 곳도 경흥궁(慶興宮) 잠저(潛邸)였으니 오직 함흥군 백리의 지역은 억만년 창업을 연 왕기일 뿐만이 아니라 육칠 명의 성군(聖君)의 세거지(世居地)이며 실지 또한 일월(日月)을 잉태한 패읍(沛邑:왕이 출생한 고을)이기도 한 것이다.
아동들도 아직까지 대풍가(大風歌)를 부르고 부유(婦孺)들도 모두가 강의(降衣:장군이 입던 옷)를 전해 오고 있으니 성스럽고 아름답다 할 것입니다. 열성(列聖)들이 서로 대를 잇고 하늘이 볼보와 줌도 멈추지 않았으니 우리 숙종(肅宗)임금께서는 이미 신장(宸章:임금의 필적)에 대해 감회를 나타내셨고 지금 성상께서도 특별한 유지를 전하신 것은 모두다 왕업을 일으킨 최초의 조기(肇基)이므로 교서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물며 기기에 유민들은 분유(枌楡:느릅나무)를 신으로 섬기는 고장에서 태어나고 늙어가며 원묘(園廟)의 곁에서 물 뿌리며 청소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감히 그 사적(事蹟)을 모이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영구히 오래 전해 갈 수 있게 되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비록 세속에서 전해온 속설로 다 믿을 수 없는 말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문자로 증명할 수 만 있다면 문득 모두다 수록(收錄)하였습니다. 
또 감히 아울러서 옥률(玉律)이나 규장(奎章)이 양대의 성조 때 나온 것을 가지고 금석(金石)에 새겨서 이 땅에 봉유(奉留)하게 된 것은 한 편(編)의 첫머리와 말미에 나누어서 등재하고 사민들이 언제나 눈에 뜨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아! 그 유적으로 말하자면 국조의 선원(璿源)이요 그 문헌을 가지고 말하자면 능묘 고증의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기슬(蟣虱)과 같이 천한 신(臣)이 감히 편찬했다고 자처 할 수 없으며 단지 남긴 유문들을 수집하여 후일에 군자들의 참고와 고증이 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英祖 24년 정묘(丁卯:1747) 맹추(孟秋음력 7월) 상완(上浣)                              
          通訓大夫 前 行兵曹正郞 臣 魏昌祖 拜手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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