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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宗親의 懷州大祭 參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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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杰)씨 회주대제 아헌관
역사 이래 또는 초유사란 말이 있다. 역사를 기록한 이후 없었던 일이 일어났음을 일컫는다. 2019년 5월 5일 장흥 위씨의 성지 장흥읍 회주사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날은 한국 위씨의 시조와 중시조 등 7현조 시제를 지내는 날이다. 이 제향에 중국의 종씨들이 참례한 것이다. BC 661년에 위씨 성을 득성(得姓)한 이후 2680년만이다.
이날 제향에 참례한 중국종친은 하남성 정주(鄭州)에 있은 「하남위성문화연구회(河南魏姓文化硏究會)」의 회원이 주축이다. 회장 제(杰)를 비롯한 전 회장 화이(懷習), 비서장 꽝신(廣信), 부회장 치푸(啓福), 부회장 쒜친(學勤), 난양시 연구회 사무총장 쑈삥(小兵), 상무부회장 쓔얜(秀岩), 부회장 푸팅((福亭) 등 11명이다.
도문회는 제관을 망정할 때 중국 종친을 아헌(亞獻)으로 배정했다. 그들이 수용하면 그대로 하고, 불편하면 그들 방식으로 하도록 했다. 다행히 한국측의 제례에 따르겠다고 동의했다. 그래서 일행 중 중국회장 제(杰)씨가 제복을 입고 아헌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다른 10명의 종친들도 1시간 10여간 진행된 제례대로 拜興을 따랐다.
한편 중국 종친들은 지난 5월 2일 4박 5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당일 저녁 위자형 대종회장 등 한국종친 12명과 한우식당에서 첫날의 만남을 가졌다. 이틀째는 여행사의 안내로 경복궁, 청와대인근, 남산, 백화점을 쇼핑했다. 4일에는 정남진전망대에 도착, 남해를 구경했다. 방촌유물관을 돌아보고, 저녁에는 한·중종친간의 간담회를 가졌다.
5일 제향에 앞서 강당에서 한·중 종친간의 수인사도 나눴다. 그들은 “이런 뜻깊은 제향에 초대해줘서 감개무량하다”며 감사의 인사를 표명했다. 제향을 끝내고 백산재 마당에서 점심을 들었다. 상경하는 버스에서 양국종친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창구를 일원화하기로 결정했다. 밤늦게 서울에 도착한 일행은 투숙한 후 6일 아침 출국했다.

2. 초유사를 만든 대종회장
한·중종친 교류의 물고를 튼 주인공은 위자형 대종회장이다. 그는 2009년 회장에 피선되기 이전부터 중국방문을 구상했다. 득성지가 중국이니 그곳에 가서 ‘魏字’ 등 “성씨에 대한 궁금증 등을 풀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중국을 가려해도 정보가 없었다. 주중대사관에 근무했던 종씨와 여러 여행사 등을 대상으로 수소문했으나 막연했다.
세거지를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무려 4백50만 명에 성씨 순위는 45위라지만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수소문 끝에 거록현(鉅鹿縣)을 소개받아 2012년 1차로 답사했다. 2차는 2015년 하남성 개봉과 고시현(固始縣)을 다녀왔다. 3차는 2018년 하남성 정주와 개봉시를 답사했다. 한국종친들은 갈 때마다 정주 등 중국종친들의 대접을 받았다.
대종회장은 마음의 빚을 갚아야 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로부터 종친이라는 이유로 대접을 3차례나 받았으니 말이다. 그가 연임한 이유도 어쩌면 중국종친의 답방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결자해지는 이런 경우일지 모른다. 사실 손님을 초청하는 일은 다른 일보다 어렵다. 경제적인 부담도 중요하지만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할 게 너무 많아 그렇다.
회주대제에 맞춰 방한을 초청했다. 중국종친들도 방문하는 쪽으로 의사를 모아갔다. 처음에는 희망자가 5명이었는데 7명, 10명 11명으로 늘어갔다. 한두 명 늘어난다고 비용의 차가 크게 불어난 것은 아니다. 소요될 비용을 감안하면 무모하지만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종친들의 후원이 있었기에 일을 치를 수 있었다.
특히 도문회에서도 발 벗고 나서줬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말이 실감나게 한 사례랄 수 있다. 중국종친들이 제향에 참례하고, 체류하는 1박 2일간의 여러 가지를 협조해준 것이다. 여기에도 눈에 보이지 않은 후원자의 지원이 있었다. 문풍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가벼운 백지장을 함께 드는 마음이면 더욱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3. 韓·中 宗親 懇談會 내용
○ 日時 및 場所 : 2019年 5月 4日 長興邑 東橋路 11 크라운호텔 1층 會議室
○ 參席者 中國側 : 河南魏姓文化硏究會 赴韓國交流代表 △懷習(中華家譜館館長) △杰(河南姓氏文化硏究會魏姓委員會 會長) △廣信(原河南省直机關行政幹部) △秀岩(河南省姓氏文化硏究會魏姓委員會創會會長, 常務副會長) 8명. 韓國側 △滋炯(大宗會長) △承復(大宗會副會長) △承烈(大宗會副會長) △正哲(前 大宗會氏族文化硏究所長)

Q 始祖 魏畢萬께서 BC 661년에 晉獻公으로부터 封土된 魏姓의 得姓地인 魏地의 現在 行政區域은 어디인가?
A 위씨의 득성지인 옛 ‘魏地’는 산서성 예성현(芮城縣)이다. 이곳에는 원나라 때 지었다는 영락궁(永樂宮), 백이숙제의 묘가 있다. 인근 운성시(運城市)에는 옛 하나라의 도읍인 하현(夏縣), 우왕성(禹王城)의 유지, 자치통감을 지은 사마광(司馬光)의 묘소가 있다.

Q 始祖 魏畢萬과 BC 453년까지의 諸侯國, BC 403년 王國을 건국한 以後3대 혜왕(惠王)에 의해 개봉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都邑地인 安邑에는 무슨 遺迹이 있는가?
A 불행하게도 아무런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역사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다. 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모든 유적이 사라졌다.

Q 諸侯國과 魏國이던 곳에 魏氏의 後孫들이 얼마나 居住하고 있는가?
A 제후국이나 위나라 수도 등 옛 도시에는 위씨 후손들이 살지 않고 있다. 현재 인구통계로는 중국의 위씨는 약 460만명이고, 성씨별 인구수도 약 45위 정도이다. 하남성에는 약 200만명이 살고 있다.

Q 中國 全體의 宗氏를 管掌하는 宗親組織이 있는가? 世界宗親會는 어떻게 管理運營되고 있는가?
A 중국에는 전국적인 조직은 없다. 지역별로 소규모 조직이 운영될 정도이다. 정주시(鄭州市)도 아직 전체 종친을 아우르는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문화혁명 등으로 문중문화도 단절돼 족보제작이나 항렬 등이 없어졌다. 세계종친회는 4번 개최됐으나 이후 답보상태로 있다.

Q 魏惠王陵 造成과 梁國時代 여러 遺迹의 管理 등에 대한 對策은 어떻게 推進되고 있는가? 한국 대종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예정이다.
A 관할 중모현(中牟縣) 등에서 복원계획이 수립돼 추진되고 있다. 규모는 부지가 약 6만㎢로 산서성 거록현 위징(魏徵)공원의 6분의 1정도로 보인다. 이미 사당의 조감도까지 나왔다.

Q 始祖 魏畢萬像이 新密市에 있는데 新密市에 設立될만큼 歷史的인 來歷이 있는 地域인가?
A 그곳에 필만 시조의 조각상(韓白玉像)이 설치된 것은 명나라 때 이곳 출신 유명한 정치인이 마련한 것이다. 중국 각 지역의 경우 지역출신 유명한 조상은 중시조로 모시고 있는데 이곳은 시조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Q 魏地와 安邑에 先祖의 遺迹이 없다면 始祖의 祠宇를 그곳에 建立하는 問題에 대해 鄭州 宗親들은 어떤 生覺을 하고 있는가?
A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Q 韓中宗親間 交流의 活性化를 위한 建設的인 方法이나 復案을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 동안 소통을 위해 여러 번 시도했으나 어려움이 많았다. 창구를 일원화할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겠다.
A 종친간의 교류는 물론 학생간의 교류나 기업인간의 교류를 해봤으면 좋겠다. 교류를 위해 소통이 보다 원할 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대책을 마련하는데 노력하기로 했다. 실제로 한국의 창구는 대종회 사무총장(斗良)으로, 중국의 창구는 전 회장 화이(懷習)으로 정했다.
중국종친들은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작년에 한국 대종회로부터 받은 1999년에 발행된 「장흥위씨대동보」에서 빛이 일어나는 현상이 나타나 중국종친들은 이를 상서롭게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4. 중국 위씨 유적 순례코스
한국종친의 중국 방문과 중국종친의 방한 등으로 양국 종친간의 교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가고 있다. 교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양국 종친조직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한국종친의 중국 위씨 유적지 답사코스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세 번의 답사가 있었으나 이는 위씨의 역사를 모른 여행사에 의해 급조된 상품이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보고 싶은 유적을 중심으로 관광을 곁들이는 답사코스를 마련돼야 한다. 코스를 정하는 데는 중국의 종친과 여행사의 사전 협의가 필요하다. 일단 한국의 종친 입장에서 가보고 싶은 유적은 위성(魏姓)의 득성지인 BC 661년의 「魏地」인 산서성 예성현(芮城縣)과 위국의 도성인 안읍(安邑)과 그 주변의 운대산(雲臺山)이다.
운대산은 1차 답사단이 갔던 곳이다. 그러나 지근거리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유적을 보지 않았다. 이곳 부근에는 백이숙제의 묘, 하나라의 우왕성(禹王城), 관운장의 묘, 사마광의 묘 등이 있다고 전한다. 운대산도 3보 1천(泉), 5보 1폭(瀑), 10보 1담(潭)일 정도의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 곳이라 한다. 아마 장안(長安)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하남성의 여러 유적이다. 하남 개봉(開封)은 위나라 3대 혜왕이 천도해 8대 가왕(假王 魏杓) 때인 BC 255 진나라에 의해 멸망 할까지 도웁지였다. 당시의 왕궁은 모두 수몰돼 지하에 있다. 그래도 주변에는 무려 35개소의 유적이 있다. 그 중에 혜왕릉,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无忌)의 묘와 저택인 상국사(相國寺)도 가보야 할 곳이다.
아울러 이들 지역에 위씨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 세거지가 있으면 포함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 위씨들만의 답사코스를 개설해보자는 것이다. 여행은 경치와 역사를 겸해야 제 맛이 난다. 임도 보고 뽕도 따면 일석이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나 지리에 밝지 못한 데 어리석은 생각을 두서없이 개진했다. 양해를 부탁드린다.

得姓까지의 간단한 歷史
무왕(武王)은 BC 1046년 은나라 주왕 타도에 나섰다. 이때 문왕의 15째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 희고(姬高)도 참전해 전공을 세웠다. 주나라는 봉건제도를 도입하면서 동생 희고에게도 필지(畢地)를 봉토하자 성이 필씨로 바꿔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후국은 무너지고 필씨는 서민으로 전락했다. 필고의 후예인 필만(畢萬)은 진(晉)나라 헌공(獻公)을 도운 공으로 대부에 오른다. BC 661년 필만공의 고위국(古魏國) 도성인 산서성(山西省) 예성현(芮城縣)에서 제후국을 개창한 연후에, 562년에 위구공(魏口公)이 산서성 곽주시(霍州市)로 이도(移都)하고, 562년에 장자(魏降)가 산서성 運城市 夏縣 西北 禹王城으로 천도했다. 424년 위문후(魏文侯)가 운성시 安邑 魏豹城으로 도성을 옮겨서 전국시대 초기 100년의 패업을 남겼다. 끝

2019.05.09

圓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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