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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방기

杏園派의 搖籃 살구나무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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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좌측은 행언 종가가 보관중인 장흥 위씨 가장, 우측은 사마방

 


杏園派의 搖籃 살구나무 고장

장흥읍 서북쪽에는 행원이라는 마을이 있다. 읍내 중심지에서 약 2~3㎞에 위치하고 있 있다. 예양강변 도로를 따라 텃골(기동)쪽으로 가다 보면 표지석이 살구나무 고장임을 알려준다. 논 가운데를 가로지른 시멘트포장도로는 누구나 찾아가기에 어려움이 없는 마을이다.


동네 입구에 닿으면 여기가 장흥 위씨와 광산 김씨의 텃밭임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마을 표지석이 세워진 입구부터 두 성씨의 상징적인 비석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양새가 좋은지 나쁜지를 차치하고 세워진 비석들을 보면 위씨와 김씨가 일촌을 이루며 살고 있구나 여겨진다.


행원은 읍내 이면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전성기 때는 300여 가구가 살만큼 큰 동네였다. 그리고 멀리 강진만이 보이고 우리 선조들의 보금자리인 장원봉, 바로 곁에 예양강이 흐른다.  그리고 넓은 들로 말미암아 장흥일원에서 2행원 할 만큼 경치 좋기로 이름난 동네로 알려진 곳이다.  


마을 이름인 행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예부터 동네에 살구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다른 하나는 동네 뒷산에 옛날 행원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이름을 동네 이름으로 붙였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도 행원에는 살구나무 많다.


그렇다면 위씨와 행원과 인연은 언제부터 이루어졌을까? 인연의 끈은 결혼이다. 괴봉공(魁峯公)이 이미 행원에 정착한 광산김씨 교리공 협의 딸과 혼인하면서 인연의 단초가 열린다. 1530년생인 괴봉공은 1555년 진사에 합격하고 2년 뒤 1557년에 협의 딸과 결혼한 것이다.(광산김씨 보첩의 기록)


괴봉공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위씨의 행원 정착이 바로 이뤄지지 않았던 같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와병중임에도 김천일 창의사(倡義使)의 호남모곡도유사로 참여, 격문을 붙이고 대기공 등 4촌 6촌 동생들을 의병으로 참전시키고 곡물을 모집, 일선에 보내는 등 구국활동을 폈다.


공의 활동무대가 과연 어디였을까? 행원일까 아니면 평화일까? 정확한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본인은 물론 왜란에 참전한 대택(大澤), 대의(大義), 대례(大禮), 대경(大經), 대기(大器), 대홍(大洪) 등 동생들의 유택이 평화에 있다. 이는 행원 정착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석천강당(石川講堂)이 세워진 것을 보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후손들은 사우의 건립시기를 1822년으로 보지만 서원은 괴봉공이 후학을 가르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이 결혼하신 후부터 돌아가신 1610년 이전에 행원에 정착하셨다는 얘기가 된다.


정착시기가 언제였건 행원은 장흥 위씨를 빛나게 한 고장이다. 우선 임진왜란 당시 임계영(任啓英)이 창의사 김천일의 우의장으로 활동했지만 괴봉공의 영향력을 넘볼 수 없었다. 괴봉공은 비록 임천에 계셨지만 조야(朝野)에 그 영향력을 떨친 장흥의 대표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행원파가 배출한 인물은 가히 기라성 같다. 임진왜란 때는 호남모곡도유사롸 활동한 괴봉공을 비롯 대자(大字) 돌림의 5형제와 인행, 순정 등이 의병으로 참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4세 판사공의 고려조정 회복운동으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갑을족(甲乙族)이 역적집안으로 전락한 이후 2백 년 만의 명예회복이라 할 수 있다.


행원의 위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괴봉공의 큰 손자 망미당(望美堂) 휘 산보(山寶: 1593~1656)는 광해조 때 예빈시 주부를 거쳐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했다. 둘째 손자 퇴우당(退憂堂) 휘 정보(廷寶: 1596~1644)도 무과에 급제, 갑자란 때 공을 세워 도총부도사에 제수됐다.


그뿐인가. 괴봉공의 증손 부사(府使) 휘 천회(天會: 1629~1683))와 해남현감(海南縣監) 휘 천상(天相;1635~1683) 형제도 모두 무과에 급제, 형은 선전관과 삼부수사를 지냈다. 그리고 동생은 해남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청백리로 목민(牧民)하니 주민들이 거사비를 세우고, 고향의 집 담장을 쌓아주는 일화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지금 석천사에는 임진왜란 때 수사공(水使公)이 쓰고 왜적을 무찔렀던 투구(鬪狗)가 보존돼 있다. 4백년이 지난 투구는 부식되어 상층부에 구멍이 뚫어있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그 「보은의 담장」이다. 만일 그 담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행원은 지금 매우 스산하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든 농촌이 그렇지만 이농현상으로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고 없다. 남아 있는 종씨들에 따르면 장흥 위씨나 광산 김씨는 각각 30가구정도 살고 있다고 한다. 전성기에 비하면 절반이상이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래도 행원의 위씨들은 무던한 데가 있다. 그 현장이 석천사와 강당의 중건이다. 고향을 등졌지만 조상들의 유적을 보전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주머니 돈을 추렴해서 무너져가는 사우와 강당을 말끔히 새로 세웠으니 참으로 대견하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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