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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방기

장흥 댐에 잠긴 丹山의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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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유치면 단산마을 위씨 집성촌은 물속에 잠겼다. 수백 년 동안 큰집 작은 집 아저씨 조카하며 정든 집과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을 떠난 일가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천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오직 동네 뒷산인 수인산 자락을 쳐다보면서 옛 마을자리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위씨와 단산과의 인연도 역시 혼인이다. 주인공은 잉여옹(剩餘翁) 휘 명덕(命德)의 장남 계은공(溪隱公) 휘 사갑(師甲)의 차남 경와공(敬窩公) 휘 수장(守章)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는 관산 당동에서 나서 자랐으나 유치 단산마을 남평 문씨에게 장가를 들면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삶의 무대가 바뀐 시기는 약 240년 정도로 추정된다. 공이 1744년(壬戌)에 출생했으니 20세전후로 장가를 들었다고 가정하면 1764년 안팎일 것이다. 장가를 들자마자 삶의 무대를 옮겼는지 아니면 처가를 오가다 어떤 계기로 옮긴지는 알 수 없다. 형인 묵와공(黙窩公)도 동생을 뒤따라 이사한다.


위씨 형제의 단산생활은 일취월장했다고 전한다. 재물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심한 경우 위씨 부자 한명의 세금이 마을 전체의 세금에 비해 많았다고 한다. 여기다 한말(韓末)에는 월곡공(月谷公) 휘 계채(啓采)가 단성(丹城) 현감까지 지내게 되니 그 위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위씨와 문씨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꿨다. 처음부터 살고 있던 문씨들은 유치면 일대에 100가구가 살았다. 이에 비해 위씨는 6·25 전쟁 당시 가장 많이 살았을 때가 40여 가구에 불과했다. 비록 위씨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재(財)와 인물에서 자웅을 겨룰 만큼 세를 장악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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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단산은 찬란한 영화를 뒤로 하고 물속에 잠겼다.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을까? 유치가 물속에 잠길지를… 정부는 목포 등 강(康)·해남(海南)지방 주민들의 상수원을 영구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여러 해 동안 강구했다. 결론은 장흥 댐을 건설하는 것으로 낙착됐다.


지역민들은 댐건설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물론 단산에 사는 위씨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240년 넘게 살아온 조상들의 보금자리를 떠나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타지로 가서 살기도 버겁고, 더구나 조상이 묻혀있는 산천을 영원히 등지는 것은 너무도 아쉽기 때문이다.


국책사업은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됐다. 1996년 댐 공사가 착공됐다. 이 때부터 2003년까지 6천6백억원을 투입해서 53m의 댐을 축조한 것이다. 댐이 축조되면서 단산 마을을 비롯해 유치면 일대 19개 마을과 부산면 지천리와 강진군 옴천면 1개 마을이 물속으로 묻혀버렸다.


댐의 준공식은 2006년 6월 18일 현장에서 거행됐다. 착공한지 꼭 10년만의 일이다. 2005년부터 물을 가두기 시작해서 1년 만에 1억9천만 톤을 저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저장된 물은 매일 목포 3만 톤·완도 5천7백 톤·해남 5천7백 톤·진도 4천 톤·영암 1만2천 톤·무안 2만 톤·강진 1천3백 톤·장흥 7천6백 톤을 공급해서 주민들의 생명수가 되고 있다.


그뿐인가. 댐은 수력발전도 하고 있다. 장흥 댐 수력발전소는 연간 4천5백 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한다. 생산단가는 1킬로와트 당 고작 73, 6원이 먹힌다. 발전소가 생산한 전력은 한전에다 팔아 수자원공사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다. 그러니 댐의 기능은 1석3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수몰민이다. 댐으로 인해 수몰된 지역의 주민은 모두 6백97가구 2천2백여 명이다. 이들 중 1백97가구 6백여 명은 옛 거주지와 가장 가까운 장흥읍으로 주거를 옮겼다. 그렇지만 나머지 1천6백여 명의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 삶의 터전을 잡았는지 모른다.


위씨도 마찬가지다. 일가친척들은 저마다 연고지를 찾아 헤어졌다. 새로 자리 잡은 유치면 소재로 옮긴 사람이 옛 거주지의 지근거리에 산다. 그리고는 장흥읍 아니면 광주나 서울 등지로 떠났다. 이전처럼 일가들이 한꺼번에 만나 추석이나 설을 쇄는 세시풍속은 먼 추억거리가 됐다.


수몰지구에 모셔 있던 조상의 묘소와 정자도 이장하거나 이축했다. 단산의 일가들은 파조인 계은공(溪隱公) 등 선조의 묘소 가까운 곳에 집단으로 묘지를 조성했다. 그리고 영귀정(詠歸亭)은 23번국도변으로 옮겼다. 정자는 옮겼으나 찾은 일가들이 적어 쓸쓸하다 못해 처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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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은 복재공(复齋公) 휘 계민(啓玟·1855~1923)이 지었다. 그는 아버지 손암공(遜菴公) 휘 준권(準權) 등 조상들의 제사를 지낼 제각 겸 후손들의 강학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1884년(庚申)에 착공, 3년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숱한 시인묵객들이 수창하고 숱한 담론을 나눴을 것이다.


아울러 후손들의 공부하는 장소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공간에서 우리의 일가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학문을 배우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100년을 약간 넘긴 지금은 원래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정자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나 오늘도 홀로 외로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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