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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방기

우애로 뭉친 平德의 위씨 마을

탐진강 한편에 위씨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은 강진군 군동면 평덕리. 군동 면소재지쪽에서 보면 강건너편에 위치하지만 동네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앞 다리를 건너 정자나무에 이르면 마을로 통하는 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가노라면 그리 크지 않은 동네가 바로 평덕이라는 곳이다.


접근하는 방법은 강진읍쪽이나 장흥읍쪽이나 같다. 강진방면은 목포~순천간 4차선도로를 타고 오다 군동 인터체인지로 들어온다. 국도를 타고 오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장흥읍쪽도 순천~목포간 4차선도로를 타고 오다 군동 인터체인지로 빠져 면소재지에서 탐진강 다리를 건너야 한다.


평덕은 행원파에서 갈린 직장공파(直長公派)의 고장이다. 직장공 휘 대방(大方)은 괴봉공(魁峯公) 휘 대용(大用)의 친동생이다. 그의 후손들이 평덕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들 휘 순정(舜廷)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도 큰 아버지 권유로 집안의 아저씨들과 임진왜란의 의병으로 참여한다.


기록은 없지만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대기(大器)장군 밑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기 장군이 가리(加里) 첨사(僉使)시절인지 아니면 해남현감을 제수 받을 무렵인지 모른다. 그럴 무렵 그는 평화 또는 행원에서 가리 또는 해남을 오가면서 평덕을 거쳐 오고가면서 나중에 보금자리로 삼았다고 한다.


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이순신 휘하로 들어간다. 전쟁발발 당시 만 20세인 그는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노량진과 명량해전에 참여해서 선무원종 2등훈의 녹을 받고, 장기현감(長鬐縣監)에 제수된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온 공은 1년 후 1599년에 평덕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당시의 이거 이유는 확실치 않다. 대기장군 밑에서 고향과 임지를 왕래할 때 마을을 거쳐 오고가다 살기가 좋게 보였는지 아니면 이 마을의 어떤 규수와 혼인해서 그런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지역이 아름답다거나 마음에 들어서 정착의 보금자리로 삼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거나 이 때부터 평덕은 위씨 마을로 자리 잡아갔다. 지금까지 400년이 넘으면서 숱한 후손들이 명멸했을 것이다. 마을이 명당인지 평덕에서 근래들어 사법시험 합격자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인물의 배출의 후광은 곧 일가들에게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평덕 위씨의 자랑은 재각건립이다. 사실 우리의 유교적 전통 때문인지 모든 성씨들은 재각 갖기를 소망한다. 재각은 종중 또는 문중의 빛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각을 짓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가라고 해야 30여 가구 남짓한 동네에서 재각을 짓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종중의 어른들도 평생 재각 하나 가져보기를 소원했다. 그러지만 마음처럼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다. 벼르고 바랬다. 사회가 어수선할 무렵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 마을 어른들은 결단을 내렸다. 다른 곳에 있는 기와집을 구입해서 재각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종중은 결정을 내리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재각의 위치는 마을 가장 높은 곳으로 정했다. 800평의 대지를 마련하는 한편 문제의 기와집을 웃돈을 얹어주고 구입했다. 재목 등 뼈대가 좋은 집이라도 헌집을 헐고 옮겨 짓기란 재목으로 새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도중에 여러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전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됐다. 4칸 겹집인 재각은 이듬해인 1954년 가을에 완공됐다. 재각의 명칭은 당시 명망이 높은 성산(星山) 이기윤(李基允)선생이 이필재(二必齋)라 지어줬다. 의미는 “반드시 슬프고 반드시 두렵다”는 뜻이라고 한다.


성산은 이필재 양송(樑頌)에서 “누구라도 그 조상이 있을 것이며 조상이 있다면 또한 조묘가 없으리오. 자연히 세상이 흐름에 이륜(彛倫)이 날로 패하여 제모에 정성을 다한 자가 끊어져 드문데…”하며 탄식했다. 그는 세상의 그릇된 풍조에도 평덕의 위씨는 그러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재각에는 파조인 직장공을 주벽으로 22세 휘 순정, 23세 휘 덕보(德寶), 24세 휘 천주(天柱)의 위패를 모셨다. 찬 바람을 맞으며 지내던 시제를 재각에서 모시는 일가들은 기쁘기 한량없었다. 적은 수의 종친들의 힘으로 재각을 지어낸 직장공 후예들은 그래서 대단하게 평가되고 있다.


평덕 위씨들의 장점은 서로를 위하는 애족정신인 것이다. 그 전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애하는 마음은 4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한 사람이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평덕의 위씨들은 자기 일을 제치는 미덕에서 그 저력이 나오고 있다.


지금도 전국에서 차출된 대학생 하계수련학생들이 오면 정성을 다해 맞은다. 물론 가는 곳 마다 그러지 않은 곳이 없지만 평덕의 일가들이 상대적으로 더 친절하다는 느낌이다. 유별난 우애로 뭉친 직장공 후예들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한결 같이 단결의 저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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