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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방기

구름 골서 번성한 部將公 後裔

경상북도에는 장흥 위씨 집성촌이 몇 군데 있다. 예천군 풍양면 효갈리와 청송군 현서면 천천리 등이 그곳이다. 본관인 장흥을 제외하면 전국의 집성촌 가운데 가장 많은 일가가 사는 고장은 김천시 남면 운곡리(雲谷里)다. 구름 골에 가면 다른 성씨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구름 골로 가는 길은 매우 편리하다. 경부고속도로와 국도는 물론 경부고속철도(KTX)까지 다닌 곳이다. 그러니 부산 쪽에도, 서울 쪽에도 찾아가기가 수월하다. 다만 광주에서는 대전으로 가서 경부고속도로나 고속철 또는 일반 기차나 노선 고속버스를 이용해야 하기 불편하다.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던 일단은 김천시소재지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는 남면 운곡리를 찾아야 한다. 소재지에서 운곡리까지는 30분정도 소요된다. 마을은 대체적으로 여느 농촌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2층집도 있고 규모도 적지 않아 부자동네라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구름 골과 위씨와의 인연은 역시 임진왜란이다. 당시 의병으로 참전한 행원파 출신 위씨는 휘 억무(億武)의 아들 대의(大義) 대례(大禮), 억장(億章)의 아들 대경(大經), 문보(文甫)의 아들 대기(大器) 대홍(大洪)등 이른바 5호(五虎)장군이다. 이들 중 막내 대홍이 운곡을 개척한 주인공이다.


부장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만 29세였다. 친형 대기와 4촌 또는 6촌 형 그리고 조카 순정(舜廷)과 함께 이순신장군의 진영으로 들어가 훈련주부(訓練主簿)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 적현(赤峴)과 이현(梨峴) 등 육지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주로 경북지역에서 지낸 듯 하다.


후손의 보금자리가 된 구름고을도 공이 점지한 곳으로 추정된다. 정확히 알 수 는 없어도 아마 경상도에서 지내다 운곡을 알 게 된 듯 하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다 “마을의 지형이 마치 하늘로 오르는 용의 모습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러지만 전쟁이 끝나자 고향 평화로 귀향, 여생을 마친다.


그런데 공이 언제 어디서 결혼한지는 모르나 후손이 부산에 살고 있었다. 아들 추남(樞南) 손자 사징(師徵)은 부산에서 살았다. 그러다 증손자 춘환(春桓)은 부산을 떠나 적현면 원동(院洞)으로 이주하고, 현손 명방(命邦)에 의해 구름고을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5대조에 의해 점지된 지역의 정착은 약 1세기만에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니까 부장공(部將公)이 길지(吉地)로 확인 것은 임란이 발발한 1592년 이후이다. 그런 연후에 현손이 정착했으니 약 100여년 이쪽저쪽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착기간은 300여년정도에 이른다.


부장공의 길지 예언은 적중했다. 비록 보금자리를 개척할 당시에는 어느 지역보다 열악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구름고장은 농토가 협소하다. 산간벽지이니 농토가 넓지 않은 것은 불문가지였다. 농지가 생활의 정도를 좌우하던 그 옛날에는 생활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위씨들은 불리한 조건을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었다. 농지가 적으니 미맥(米麥)위주의 영농에서 벗어나 고등원예농업으로 전환한 것이다. 즉 포도와 기타 과일 등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일가들의 생활수준은 날로 향상되어 갔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자식들의 교육열도 정비례했다.


자식농사는 어느 농사보다 값진 결과를 가져 올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자치단체 책임자도 배출했다. 경북 어느 고을의 시장을 역임한 것이다. 본 고장에서는 한때 하다못해 마을 이장에서부터 면장에 이르기까지 싹쓸이를 할 때도 있었다. 위씨가 아니면 행세를 못한 것이다.


그런 여력은 문중사로 이어졌다. 평소 재각을 갖고 싶은 일부 어른들은 1950년대 말경 종친회를 열고 재각건립문제를 논의했다. 그 중심에 성량종원이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생활의 여유가 없었지만 주역을 맡은 이가 솔선수범하자 모든 종원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출연했다.


길지 중의 길지라는 재각 터도 마련했다. 마을 오른쪽 가장 높은 지대가 그 곳이다. 420평의 대지에 재각을 착공한 것은 1958년 봄이었다. 공사는 이듬해 4월에 끝났다. 재각의 이름은 본관을 상징하는 관산재(冠山齋)라 명명하고, 파조인 부장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매년 10월에 시제를 지낸다.


행원파도 18세 이전에는 관산파였다. 18세부터 관산파가 행원과 종사랑파 또는 여천파로 가라졌지만 뿌리는 어디까지나 관산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각의 이름을 관산재라 붙이지 않았나 짐작된다. 구름고을 위씨들은 많을 때는 100여 가구였으나 지금은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그런데 이곳 일가들은 본향에 한 가지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다. 1990년대 어느 해 대종회의 권유로 하산사 제향에 참여했다. 버스를 대철해서 운곡 종친 30여명이 동참했다. 도문중에 제찬대도 희사했다. 하지만 주최측의 부주의로 배려가 적어 마음의 상처를 입고는 대제참여를 중단했다고 한다. 하루 속히 응어리가 풀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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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泉 2016-02-17 10:03 *.73.97.109

“부장공(部將公) 대홍(諱 大洪)할아버지는 1564년8월 12일 태어나 학문과 무예가 출중하여 20세에 무과에 등극 훈련주부(訓練主簿)의 벼슬로 임진왜란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큰 전공을 세웠다. 운곡종중의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10일 관산재에서 거행하는 데 부장공(部將公/21세), 휘 추남(樞南/22세), 휘 사징(師徵23세), 휘 춘환(春桓/24세), 휘 명방(命邦/25세), 휘 경숙 (慶淑/26세) 할아버지의 재각이다.” (제공 苑谷 위상복(魏相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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