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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탐방기

박사 16명을 배출한 박사고을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基洞里) 그곳을 텃골이라 한다. 광주에서 기동으로 가는 길은 두 코스가 있다. 나주 금정과 화순 이양코스. 두 갈래의 길은 모두 보림사(寶林寺) 왼쪽과 오른쪽의 장흥댐 상류를 거쳐 터널입구에서 함께 만나 면소재지 앞 신호등에서 좌회전해서 들어가게 된다.


목포나 순천에서는 일단 장흥읍을 거쳐야 한다. 읍에서 광주방면의 북쪽도로를 타면 오른쪽 들판 건너편에 행원이 보인다. 조금 지나면 왼쪽에 내안마을이 보기고 면소지 앞 신호등에서 우회전해서 1㎞쯤 진행하면 예양강(汭陽江)을 가로지르는 다리 건너편의 동네가 바로 기동이다.


텃골은 국도에서부터 그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양강에 자리 잡고 있는 경호정(鏡湖亭)과 저존각(著存閣)이 위용을 뽐낸다. 욱어진 숲과 거울같이 맑은 강기슭에 고즈넉이 들어선 두 채의 건물. 그 건물은 틀림없이 전통과 격조가 있는 집안의 상징처럼 보이기에 충분하다.


이곳에 보금자리를 잡은 주인공은 운암공(雲巖公)이다. 그는 20세 진사공(進士公) 휘 곤(鯤)의 셋째 아들로 관산읍 당동(堂洞)에서 1547년에 태어났다. 그는 기동의 건너 마을인 내안리 영광(靈光) 김귀명의 딸과 결혼하면서 기동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이주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세 아들이 관산에서 10여세에 이르도록 살았다. 그러다 처가 동네를 거쳐 기동에는 1593년 당신의 연치 47세 때 입촌 한 것이다. 그 때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라서 시국이 어수선해 주거를 옮기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의 생활은 평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후손들은 수적으로 크게 번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왜소하지도 않다. 벼슬한 인물을 배출한 것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부와 인물이 배출됐다. 가령 회은공(悔隱公) 휘 원량(元良)은 천석군의 부자로 문중에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이곳저곳의 재각의 제기 등을 조달했다. 더구나 현재 하산사 강당 백산재(栢山齋)도 회은공이 문중에 희사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당초 1895년에 신축한 장흥부의 동헌이었으나 1934년(甲戌) 일제가 그 자리에 경찰서를 신축하면서 철거한 것을 구입, 자기 집 사랑채로 이축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백산재의 전신인 초가인 다산재(茶山齋)가 낡아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자신의 집 사랑채를 문중에 바친 것이다. 문중은 공이 사랑채를 줘도 옮겨지을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자신이 이전비용을 대고 공사를 감독해서 건물을 완성한 후 문중에 희사했으니 그 정성이 얼마나 지극한가?


텃골의 자랑은 이뿐 아니다. 뭐니 뭐니 가장 큰 자랑은 위성미를 꼽을 수 있다. 세계적인 골퍼 성미는 물론 하와이에서 터났다. 그러니 기동이 고향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성미의 아버지 등 선조들의 출생지가 텃골이기에 그도 역시 여기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성미의 할아버지 위상규박사는 서울대에서 정년한 후 고향 텃골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성미는 2003년 11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경제적으로 후원해준 군민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텃골을 방문하기도 했다. 비록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성미의 고국이 한국이듯 고향은 기동인 것이다.


사실 성미 또는 미셀 위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은 세계적 언론들이 천재골퍼라고 불러 주고 있다. 그년 이미 세계적 인물이다. 2006년 타임지가 뽑은 세계 100인물에는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은 들어 있지 않지만 성미가 당당히 포함돼 있다.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기동에는 박사의 텃밭이다. 이곳 출신 가운데 성미의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큰아버지, 고모, 아버지 등 4명이 박사이다. 큰집 작은집 위씨와 많지 않지만 다른 성씨의 박사까지 합치면 무려 18명이 박사학위를 소지하는 박사동네다. 한 동네서 그 많은 박사를 배출하기는 드문 일이다.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위씨소유의 정자이다. 마을 입구에는 예날 조상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하던 경호정(鏡湖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1912년 휘 계훈(啓勳)이 입향조인 운암공 유장지 경호의 바위위에 지었다. 정자가 낡아지자 회은공이 자신의 초당을 기증, 이전건축해서 오늘에 이른다.


문각인 저존각(著存閣)도 운암종중다운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종중은 1980년대부터 조상에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재각을 지어 계자(啓字) 항렬까지 위패를 모시고 시제를 올리기로 결론을 냈다. 이는 종중의 단합과 제찬을 마련비용을 절략하자는 의도도 있었다.


종중은 1992년 봄에 재각신축에 착수했다. 공사는 착공 2년만인 1994년 10월에 완공했다. 완공된 제각에는 운암공을 주벽으로 그 후손 183주 391위를 모셨다. 제일은 매년 4월 첫 일요일로 정했다. 처음에는 전국에서 300여명이 넘는 후손이 참여했지만 차츰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경호정과 저존각은 장흥댐으로 인해 변화할 가능성이 많다. 큰물에 대비해 제방의 둑을 넓혀야 하기 때문에 건물이 서있는 지역도 마당을 돋거나 이전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어쩌면 현 위치에 있을지라도 제방의 높이만큼 높아지는 선으로 낙착될 공산이 크다. 결과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텃골은 특히 지금까지 16명의 박사가 배출된 특별한 고장이다.배출된 박사 가운데 장흥 위씨가 대부분이다. 가령 위성미의 집은 할아버지 위상규옹이 서울대 항공학박사, 두 아들도 박사, 고모와 고모부도 박사다. 곧 한 집안에서 5명이 박사인 것이다. 그리고 기동에 연고를 가지고 있는 위씨들이 국내 여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명 중에는 타성도 역시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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