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7 09:51
인천이씨 승의부위공(20세 諱 遇, 1541~1625)의 관직은 승의부위(承義副尉 정8품) 좌군사직(左軍司直)으로 장흥남면파의 파조(派祖)이다. 묘소는 관산읍 농안리 천관산 수정암등 남 묘좌(卯坐)이다. 배(配) 낭주박씨와 합봉(合封)이다. 배(配) 평산신씨는 용산면 자양동 마을 뒤 취현동 정좌(丁坐)에 별장(別葬)하였다. 매년 음 10월 상정일 천관산 수정재(水晶齋) 묘각에서 제향을 봉행한다.
승의부위공(諱 遇)은 아들 4분을 두었다. 첫째는 한동(漢仝 21세)으로 용산면 어서마을 태생이 후손들이다. 둘째는 경동(敬仝 21세 )으로 대덕읍 덕산마을 태생이 후손들이다. 셋째는 경숙(敬肅 21세)으로 장동면 만수마을 태생이 후손들이다. 넷째는 경휘(敬暉 21세)로 용산면 금곡, 어상, 묵촌, 접정마을 태생이 후손들이다.
●영사재(永思齋)는 장흥군 용산면 금곡길 49에 위치한다.
4칸 묘각(墓閣)으로 인천이씨 장흥남면파 장등종중 소유이다. 뒤 야산에는 병절교위공(21세 경휘, ?)의 유택이 위치한다. 매년 10월 상기일 장등종중 주관으로 병절교위공(21세 경휘)과 손자 대균공(23세) 2位에 대해 묘각에서 제향을 봉행한다. 재원으로는 제위답 8두락과 임야가 있다. 영사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영사재 액호는 상금마을 태생 소봉(小峯) 백기선(1887~1957)이 썼다.
이곳은 1865년(乙丑) 여곡(餘谷) 이중섬(1817~1884)이 강학 장소로 초옥을 지어 창건하였다. 이후 종중에서는 1889년(己丑) 기와로 개축하였다. 이때 금곡 태생 대목장 이사현(1832~?)이 참여하여 현재 형태인 구당 4칸 서재와 재직실 1동으로 건축하였다. 서재에서는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은 훈장 이찬원(1898~1966), 이종식(1911~1985) 등이 주로 종중 자제들과 인근 척산, 장전마을 학동을 대상으로 강학하였다. 신학문이 확산되면서 서재는 자연 쇠퇴해져 1970년 중반에 폐하였다. 재원은 논 7두락과 일부 임야가 있다.
액호 편액은 해강(海崗) 김규진(1868~1933)이 썼다. 해강은 근대의 서화가로 중국에 유학가서 진∙한∙당∙송(秦漢唐宋)의 명가의 진적을 연구했다. 귀국 후 고종의 어명으로 왕세자 영친왕(이은 1897~1970)의 스승으로 서화를 가르쳤으며, 벼슬은 시종관을 지냈다. 한국 최초로 서화연구회를 조직, 서화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산수벽화를 그렸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여러 흔적이 남겨져 있다.
차(次)여곡재운은 1870년(庚午) 남파(南坡) 이희석(1804~1889, 묵촌리 태생)과 지운(止雲) 김경현(1833~1906 내안리 태생)이 썼다.
여곡재중수상량문은 文宣王二千四百六十九年戊午十月下浣(1918년 10월 하순) 도유사 호고당(好古堂) 이장석(1886~1936), 감동 백헌(栢軒) 이창호(1872~1957), 금화(金華) 이성호(1873~1929) 근지(謹識)하다.
여곡재팔경은 백헌(栢軒) 이창호(1872~1957) 근제(謹題)하다.
여곡재중수기는 原記文後五十午年己未冬(1919년 겨울) 不肖子 화산(華山) 이교석(1874~1945) 근서(謹書)하다.
용산면 금곡마을에 위치한 여곡재는 인천이씨 장흥남면파 금곡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현재 연혁 등 안내 시설물이 없이 종중 산 자락에 방치되고 있어 훼손이 심하다. 당국의 문화재 지정 등 특단의 관리 대책마련이 필요하다 사료된다.
자문 : 인천이씨 장흥남면파 장등종중 16대손 춘사(春史) 이영숙(1932년생, 용산면 접정리 새터 거주)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