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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의주부윤공(25漢良, ~ ? )

 號松軒이요. 宣祖 壬亂 1592년에 登武科하여 倡義 扈聖 龍灣하고 直拜하니 宣傳官兼禁府都事. 海營敵으로 除 黃海兵史하고 又除特使하며 移除義州府尹兼判官하니 濟勳一等錄卷하다. 晩年品階資憲大夫同中樞事追榮三世하고 命錄麟閣하다. 龜城郡 方峴面 靑松洞公心山 卯原이며 有碑床齋宮하다. 貞夫人 당진崔氏十月十五日이니 方峴面 靑松洞乾原이다. 二月 五日이다.(면주 기록과  충의록 내용은 유사하다.)

 

의 휘는 한량(漢良)으로 관북 25이며 장예원결사(掌隸院決事) 필문(弼文)의 장남이며 참의공 세충(世忠)5세손(지장록 p. 141)이다. 지략이 뛰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길에 오르자 의병 수 백 명을 영솔하고 행재소로 달려가 호위했다. 은 군량을 조달하는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왕은 공의 지략과 노고에 감탄하여 용만판관(龍灣判官)을 제수한 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승진시켰다. 선조는 관중(關中)의 소하(蕭何)나 하내(河內)의 구순(寇恂)이라도 이렇게 잘할 수 있겠느냐며 극찬했다.

이듬 해 황해병사(黃海兵使)를 제수 받아 연안의 왜적을 소탕하는 공으로 호성일등훈에 록()되고, 기린각에 봉안됐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다. 기린각은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가 선제(先帝) 때의 공신 11명의 초상을 모신 곳이다. 졸 후 월명사(月明祠)에 배향됐다.(요람 기록)

 

                                <교지, 조선왕조실록 등 확인 내용>

관북파 으로 현존 교지 확인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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