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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존재집 간행시말(譯註 存齋集刊行始末)

박경래(한국역대문헌연구원장)
김희태(전남도청 문화재전문위원)

[편집자 주]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1798)선생의 <존재집> 간행 경위를 기록한 “존재집간행시말”을 국역 주석하여 소개한다.
존재 위백규는 이재 황윤석(1729-1791), 규남 하백원(1781-1844, 동복)과 함께 호남실학 삼걸(湖南實學 三傑)로 호칭되고 있다. 향촌생활을 통하여 형성된 강한 현실비판의식이 저술에 나타나 있어 그의 학문적 성격은 경세적 실학의 색채가 짙다. <정현신보(政絃新譜)>나 봉사류(封事類)에서 당시의 현실을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그의 실학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그가 주장한 향촌사회개선론은 지방교육개선
(향촌사회질서유지, 지방관리견제), 관제축소, 공평부세론, 지방관리선도책, 향촌방위체제구축 등에 대한 것이었다.
존재는 경세론 외에도 경학, 지리, 역사, 의학 등에 관한 저술과 시, 가사, 시조 등 많은 문학작품이 전한다.
존재 위백규의 저술들은 <존재집>과 <존재전서>에 집성되어 있다. <존재집>은 다암 위영복(1832-1884) 이 주도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존재전서>는 1974년에 경인문화사에서 간행하였다. 1875년 간행한 <존재집> 간행 시말을 자세히 적은 글이 위영복의 문집인 <다암유고>에 실려 있다.
<존재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처음에 남파 이희석(南坡 李僖錫, 1804-1889)을 통하여 노사 기정진(1798-1879)을 찾아가 교정 편집을 부탁했다. 갑술(甲戌)년 즉, 1874년 2월의 일이었고 다암 위영복이 족손 위춘백과 서울을 다녀오는 길 등 네 번에 걸쳐 노사를 찾아갔지만 이루지 못한다. 다만, 노사 기정진은 다암에게 송서(送序)를 지어준다. 이어 1875년 2월에 전의에 살던 고산 임헌회(1811-1876)를 찾아가 부탁하여 성사된다. 이 과정을 적은 “존재집간행시말”에는 찾아가는 노정이나 주변의 지명과 풍경, 심정 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풍속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먼 길의 왕복과 재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문집을 펴내게 된 내력을 잘 알 수 있다.
기록상 나타나는 지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장흥 방촌(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 장흥 동문(장흥군 장흥읍 동동리) ⇒ 장흥 단촌(장흥군 유치면 단산리) ⇒ 장흥 유치 월천장(장흥군 유치면 늑룡리) ⇒ 가음치(더음재, 덤재. 장흥 유치면 → 영암 금정면) ⇒ 나주 용두점(영암군 금정면 용두리) ⇒ 나주읍(나주읍성) ⇒ 나주 북창(광주시 광산구 산수동 용강마을) ⇒ 대강(영산강, 황룡강) ⇒장성읍(장성군 장성읍 성산리) ⇒ 장성 단암(장성군 북이면 용강리) ⇒ 장성 조암(장성군 북이면 조양리) ⇒ 장성 갈재(장성 북이면 → 정읍 입암면) ⇒정읍 연주원(정읍시 연지동) ⇒정읍 한교점(정읍시 북면 한교리) ⇒ 전의 상로(충남 연기군 전동면 노장리)

이처럼 “존재집간행시말”은 조선시대 후기 향촌사회 지방학인들의 문집 편찬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그 어려움도 잘 나타나 있다. 이제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존재선생의 문집 국역사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존재집 간행시말(存齋集刊行始末)

아! 우리 위(魏)씨가 우리나라에서 신라와 고려조 때에는 명공(名公)과 거경(巨卿)들이 전과 후로 서로 기대고 바랄 수가 있었음을 삼국사(三國史)에서도 명백히 증거댈 수가 있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삼세(三世)가 폐고(廢錮 )되었다가 비로소 관적(官籍)에 오르게 되었고 근근히 사족(士族)의 명단에 빠지지 않았다. 한미하게 내려오면서 그 많은 수효가 떨치지 못하였고 또 번성하지 못하였으니 문중의 운세가 어쩌면 그렇게 전에만 왕성하고 후대에 와서 구차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가운데 다행히 조상들이 쌓은 음덕의 여화(餘華)로 백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운세가 일어나 우리 10대조 습독공(習讀公) 형제의 자손들이 나누어져서 두 파가 되었다. 혹은 덕행으로서 두터운 신망을 받았고 혹은 공렬(功烈)로서 큰 공훈을 받았으며 문관이나 음직(蔭職)과 무관에 이르기까지 벼슬길에 나가 두루 역임한 분들이 있었으며 대대로 이어지면서 다시 가문의 명성을 떨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존재(存齋)선생은 천년이내에 불세출의 대유(大儒)로서 남도(南道)에 떨치고 일어나셨으며 문장과 도덕이 일세(一世)에 으뜸이었고 남도의 황무지를 족히 개척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지 팔십년도 다 못되어 그 자손들이 빈한하고 구차함이 그 이와 같이 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참으로 한탄스럽고 애석한 일이며 우리 문중의 박복한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께서 저술한 문고(文稿)는 거의 백권에 가까웠으나 당시에 편성된 원고를 거두어 모은 것은 겨우 오십여 권이었는데 모두가 풍속의 교화를 돕고 세도(世道)를 지키는 글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24권은 정조 때 임금이 열람한 뒤 규장각에 소장되었고 그 나머지 30여권은 지금도 선생의 사가에 먼지 덮인 상자 속에 금이나 옥처럼 간직되어 감춰져 있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선생의 이름만 알고 선생의 실질을 잘 모른다. 만일에 또 이대로 몇 대가 지나버리면 그 누가 능히 궤 안에 감추어진 보물을 알겠는가?

예전 선대의 사실을 거울삼아 보면 위인(偉人)이 배출되었더라도 재력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어쩌다가 그 기회를 얻지 못하면 그 남긴 문권(文券)마저도 먼지 덮힌 상자 속의 물건으로 남게 되어 버림을 면하지 못한다. 나도 좁은 소견으로 어떻게 지각(知覺)이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현인을 숭상하는 마음만은 스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말할 수 있으나 하물며 사종(四從)의 친척인데 어찌하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선생의 후손들이 갈수록 더욱 고단해지고 있으니 어느 때나 다시 창성해지고 유문(遺文)이 널리 전해지기를 기대해야 할는지 모르겠고 또 완급을 소홀히 하다가 탈이라도 있게 되면 선생의 평생사업이 마침내 파묻혀 없어짐에 이를 뿐일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 이후로 거의 마음에 병이 날 정도였으며 그 슬프고 한탄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 했다. 마침내 원근에 있는 일가들에게 계획을 논하며 말하였다.

‘우리 위씨는 모두 10세(世)의 종친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보면 존재선생을 숭배하고 받드는 도리에 있어서도 방손과 직손을 따질만한 처지가 아니니 서로 의사를 합쳐서 같이 성의를 들이고 협조하여 유문(遺文)을 널리 반포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그러자 모두 그렇게 하기로 승낙을 했다.

나는 마침내 몸을 일으키며 앞장서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였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으며 몸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이 문집에만 힘을 다했다. 비바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추위와 더위도 피하지 않고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비단 재정도 극히 곤란할 뿐만이 아니며 또 교정(校正) 부탁할 분을 정하는 일이 일대의 큰 중대사였다.

이 때 당시 노사(蘆沙) 기선생[丈席, 기정진)이 제일문장(第一文章)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또 남면(南面 ) 묵촌(墨 村)에 사는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선생과 평소에 서로 친분이 두텁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갑술( 甲戌)년 2월 남파에게 요청해가지고 같이 가서 노사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치포관(緇布冠)에 벽의(襞衣)를 걸치고 마루에서 있다가 남파가 찾아온 것을 보고 곧 마루를 내려오면서 맞이했다. 그동안의 안부 인사를 끝낸 뒤에 대략 이야기를 주고받고 이어 문집을 인출하게 된 사항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그 사유를 말하면서 서문[弁文]과 교정의 일을 좀 봐 달라고 요청을 하자 노사선생은 나이 늙고 눈이 어둡다는 이유만을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문집을 수산(水山) 김대수(金大叟)[금곡(金谷)김씨인데 장성으로 이사와서 살았음] 집에 맡겨두고 족손(族孫) 춘백(春伯 )과 함께 서울로 한성시를 보러 올라갔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노사선생을 뵙고 요청을 해 보기로 계획했다. 8월에 다시 남파와 함께 노사선생을 찾아가서 마음먹었던 사실을 말하고 청탁을 해 보았지만 또 들어주지 않았다. 단지 전번에 다녀간 뒤로 써놓았던 송서(送序) 한 장만 친필로 써 주었다.

나는 몇 일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었으나 더 이상 바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짐꾼을 사서 책(존재집)을 지고 남파와 함께 오면서 이야기한 도중에 이때 전의(全義) 임산장(任山丈)[호 고산(鼓山) 이름 헌회(憲晦)]의 말이 나왔다. 그 분은 매산(梅山) 홍문경공(文敬公, 洪直弼)의 수제자로 전의(全義)에서 두터운 인망이 있는 분이라고 했다. 당세(當世)에 조정에서도 예우를 극히 높이 받는 분이라고 했으며 팔도에서 유생들이 서로 앞 다투어 찾아와 존경하고 스승으로 대접받고 있다고 했다.

을해(乙亥, 1875)년 이월 임고산선생을 찾아갈 계획을 세우니 대단히 먼 길이라서 행장(行裝)을 차리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리하여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다시 하사(下沙)를 찾아가서 노사선생에게 요청해 보았지만 아직도 허락을 하지 않았다. 서글픈 생각이 들었고 네 번씩이나 찾아가서 간청하여도 하필(下筆)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은 자신의 성의가 아주 부족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그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그길로 이어서 상로(上蘆) 마을 임헌회선생을 찾아갔다. 행랑채에 잠시 쉬면서 명함을 써서 안으로 들여보내고 선생을 뵙고 보니 의관을 갖춘 모습이 매우 검소해 보였으며 사람을 대우함도 극히 관대하고 후했으며 문전에 가득 찬 손님들은 모두가 다른 도와 다른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의 출입하는 모습과 앉고 서는 예절도 질서가 정연하고 차례가 있었으니 참으로 면모가 갖추어진 산림처사의 문정(門庭)이었다.

인사를 나눈 뒤에 산장(임고산)선생은 나에게 물었다.

‘위존재(魏存齋)와는 몇 촌간이나 되느냐’

나는 대답하였다.

‘소생은 바로 존재선생의 사종손(四從孫) 입니다.’

산장(山丈)이 말하였다.

‘존재의 문학(文學)에 대해서는 들은 지가 이미 오래였다. 나의 선사(先師) 매산(梅山)께서 지은 묘갈명(墓碣銘)에서도 자세히 사실 내용이 갖추어져 있더라. 천리가 거의 다 되는 먼 길은 무슨 연유로 찾아 왔느냐’

나는 대답하였다.

‘안부를 살피는 초면의 자리에서 마음에 있는 일을 자세히 다 말씀드리기가 좀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문(下問)하신데 대해서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강 존재집 인출을 여러 대가 지나오도록 여가를 얻지 못한 사유를 말하였다.

‘소생은 능력도 헤아려 보지 않고 경망스럽게 인출의 일을 실시하려 하고 있습니다. 감히 서문을 선생님께 청하러 왔습니다.

선생은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그런 글을 지을만한 사람이 못되며 또 글도 잘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히 막중한 문자(文字)를 지을 수가 있겠느냐’

그리고 김한섭(金漢爕) [부산 거주] 선생과 이석채(李錫采) [용반 거주]) 선생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또 남주의 풍토와 천관산의 기상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일어섰다 다시 고쳐 앉으며 답하여 말하였다.

‘연세와 덕망이 모두 높으신 어른 앞에서 이렇게 경어로 말씀하시니 도리어 저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바라옵건데 평어(平語)로 낮추고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생은 누차 사양한 뒤에 ‘그렇게 하겠다’며 허락을 했다.
날이 저물어서 행랑채로 돌아와 자게 되었는데 아침과 저녁식사는 행랑채 주인이 준비를 다 했고 식대와 반찬값은 각자가 준비해 주었는데 이것도 이집 문전에 출입하는 규례라고 했다.
다음날 다시 선생을 찾아뵙고 서문을 어렵게 청하니 선생은 허락하며 말하였다.

‘부탁한 성의를 저버리기가 어려우니 그렇게 해 주겠다. 그러나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이 없으므로 마땅히 천천히 처리해 보겠다.

나는 대답하였다.

‘어떻게 감히 빨리 써 주시기를 바라겠습니까?’

마침내 가지고 간 문집 몇 권을 드리고 부탁했다.
거기에 머물던 몇 일 뒤에 임금은 특별히 돈유사(敦諭使)를 보내서 선생을 초빙하는 통보가 왔고 본 고을 아전 예방(禮房)이 도착하는 기일 전에 고목(告目)을 가지고 왔다.
다음날 아침 읍내 사람들이 일제히 도착하여 마을 책임자와 함께 사관(使官)을 대우하는데 음식과 필요한 것을 장만했다. 오시(午時) 께 사관은 본 마을에 들어왔고 권씨(權氏)의 사랑에서 사모(紗帽)를 입고 띠를 띠며 들어가서 가지고 온 유서통(諭書筒)을 붉은 보로 싸고 교생(校生) 네 사람이 교자(轎子)를 가지고 와서 들고 사관의 뒤를 따랐다.
선생(임고산) 댁에서는 먼저 뜰 아래 배석(拜蓆)을 펴고 또 덕석(德蓆)을 마당 가운데에다 폈다. 또 소반(小盤)을 대청 가운데 설치해 둔 다음 교생은 유서를 들고 들어와서 덕석위에 놓았다. 그리고 선생은 도포(道袍)차림에 흑립을 쓰고 마당으로 나와서 동쪽으로 향하고 섰다. 여러 선비들은 동쪽에 있으면서 차례로 관람을 했고 예조(禮曹)에서 내려온 서리(胥吏) 두 명은 유서를 받들어 당상(堂上)의 소반 위에 가져다 놓았다. 선생은 그 앞에 나아가서 북쪽을 향해 사배를 올렸으며 교생들은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서서 흥(興)과 배(拜)를 불렀다. 선생은 당으로 올라 소반 앞에 무릎을 꿇고 유서를 봉심한 뒤 배위로 내려와 또 북향 사배를 했고 교생은 흥과 배를 창하였다. 선생이 사관에게 읍(揖)을 치고 방으로 들어가자 사관은 선생에게 나아가 절을 했고 선생은 따라서 답배를 했다. 안부 인사를 나눈 뒤에 술과 음식상은 내왔으며 간소한 주연(酒宴)을 끝낸 뒤에 사관은 하직 인사를 드리고 권씨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병을 이유로 하여 임금의 부름에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상소(上疏)문을 지어서 사관에게 보냈으며 사관은 본 고을 읍내 숙소로 갔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먼 지방 하토(遐土)를 보았고 임금의 은혜가 끝이 없어 나로 하여금 흠모와 감탄을 미처 깨우치지 못했으며 선생댁에서는 이런 일이 어느 달 없는 때가 없다고 했으며 그 동네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보기를 평상시와 같이 보게 된다고 했다.

다음날 선생은 서문 을 지어주고 말하였다.

‘이 문집은 대문자(大文字)인데 모르기는 하지만 남도에도 교정을 잘 볼 수 있는 선비가 있겠는가?’

나는 대답하며 말하기를 ‘있다’고 했다.
대체로 당초에 교정을 봐달라고 청하지 않았던 것은 내 자신이 생각해 보았을 때 재력도 넉넉지 못한데 멀리 외지에다가 놓아두고 교정을 기다리게 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남파(李南坡)와 더불어 그 보존되어 있는 원고 가운데 가려서 골라가지고 편차(編次)를 정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이같이 대답한 것이다. 선생은 교정과 편차를 잘하라는 뜻을 담아 신신부탁을 했다. 아! 이와 같이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어떻게 앞날에 문제가 있을 것을 알았겠는가?

의례(疑禮)에 대한 십여조항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설정하여 올렸다. 선생은 말하였다.

‘자네의 문목을 보니 생각한바가 작지 않다. 어찌 위기(爲己)의 공부에 부지런히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문목에 답을 하여 마침내 친필로 써주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學問)을 하지 않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으며 천고(千古)의 전이나 천고의 뒤에도 이 몸은 두 번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人生斯世 非學問 無以爲人 前千古 後千古 此身不再來).’라 하고 을해(1875)년 중춘에 고산노부가 상로산중에서 쓴다[乙亥殷春日 鼓山老夫 書于 上蘆山中].’

다음날 하직 인사를 드리고 물러 나와 행장을 챙겨 가지고 내려오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으며 도중에 겪은 고생은 만분의 일도 형용하여 다 말하기 어렵다.

장성 수산(水山) 김씨 친구집에 이르러 남파(南坡) 소식을 물어보니 순창(淳昌) 기진사(奇進士) 집에 가서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순창으로 가려고 보니 열 번 살려다가 아홉 번 죽을 고비를 겪은 몸과 같은 나는 백리에 가까운 길을 찾아 간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기와 같이 어렵게 여겨졌다.
그러나 곧 바로 돌아와 버리게 되면 당초 작별 할 때 약속하기를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가자고 약속을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문집을 편차하는 일도 원래 맡길만한 곳이 없으니 이러한 경우를 두고 이른바 진퇴유곡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로 걱정하고 고민하던 때에 김내량(金乃亮)이 말하였다.

‘자네가 지금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내가 효일(孝一)에게 갔다 오기로 하고 교자를 타고 행장을 차리고 가서 남파를 내려 보내겠네.’

나는 바로 고맙다는 뜻을 표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돌아온 뒤 한 달이 넘어도 소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명범(明範)이를 보내서 남파를 맞이해 오라고 했는데 그 때가 5월 10일 뒤였고 남파는 집안사람인 금곡(金谷) 의 이중섬(李重暹 )과 함께 다산(茶 山)에 도착했다.
순서를 따라 편찬할 계획을 세우고 존재집을 앞장부터 펴 보았을 때 남파는 자신이 자운(子雲)과 요부(堯夫 )인양 하였다. 나는 속마음으로 이르기를 존재 뒤에 또 존재같은 분이 탄생했다고 하여도 반드시 자운과 요부를 거론하며 자처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남파의 그 말은 분에 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말을 하지는 않고 동참해서 그와 논하면서 글을 보았는데 뜻이 맞지 않았다. 이처럼 중대사를 어떻게 쉽사리 뜻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 맡길 수가 있겠는가?

이에 남파를 보내고 교정 볼 일을 생각하니 부득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지난 봄 고산선생 앞에서 요청드리지 못한 것이 깊이 한탄스러웠다. 천리 길 무더운 길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또 다녀오기가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6월 15일 가랑비를 맞으며 종과 말을 거느리고 장화를 신고 길을 떠났는데 간간이 가다가 비를 만났다. 오후에 동문(東門) 밖에 이르자 성주(聖珠)가 고하였다.

‘여기에 머물러서 유숙(留宿)하고 좋은 말고 바꾸어서 타고 가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이 때 전주[完營]에서 온 상인(喪人) 김씨(金氏)를 만나서 잠시 같이 놀면서 윤성도(尹聖道)가 말하였다.

‘이 분은 지사(地師)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사람입니다. 이번에 꼭 천관산 구경을 하려고 했는데 형께서 이미 나오고 집에 없으니 주인이 없어서 한입니다.

내가 말하였다.

‘우리 아들이 대신 집에 있는데 어찌 내가 없다고 걱정할 것이 있는가. 은어(銀魚)를 좀 살려고 했으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다.

성도(聖道)가 말하기를 한 군데 가면 마침 살 데가 있다고 해서 돈 두냥을 주었더니 은어 다섯 묶음(五束)과 죽피(竹皮)까지 함께 구해 가지고 왔다. 그래서 관노(官奴) 창률(昌律)이를 시켜서 싸도록 했다. 또 송명삼(宋明三)이 부탁했던 마포(麻布)와 간찰지[簡紙]를 가지고 왔으므로 술을 불러가지고 대접을 했다.

16일 아침 식사 뒤 늦은 시간에야 작별을 하고 떠났으며 정오에는 단촌(丹村) 윤홍(允洪)의 집에서 요기(饒飢)를 했다. 윤홍은 병이 난지가 이미 여러 달이 되었다고 했으며 존재(存齋)가 쓴 예설(禮說)과 수록(隨祿)을 그 집에서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바로 빌려서 싸서 사십오리 쯤 나주 용두점(龍頭店 )에서 숙소를 정했다.
날은 극히 더웠고 말에 얹은 짐이 너무 무거워서 잠시도 탈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 뒤 출발하여 나주읍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으나 말의 힘이 너무 피곤하여 능히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돈 35냥을 내고 백목(白木) 두 필과 춘포(春布) 두 필을 샀으며 부탁받은 해어 여섯 마리와 함께 말에 지인 짐을 덜고 변통하여 비록 약간 가볍게 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40리쯤 북창(北倉) 숙소에 이르렀을 때 성주(聖珠)가 와서 고하였다.

‘말의 피로가 너무 심하니 잠시 여기 주점에서 쉬었다가 오후에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비가 금방 올 것만 같고 대강(大江) 이 앞에 있으므로 건너 가서 단암(丹巖 )에 멈추어 쉬는 것만 못하다.’

18일 정오에 단암(丹岩) 길을 향해 가다가 장성읍 을 지나서 갑자기 소낙비를 만나 온 몸이 비에 젖은 체 바로 단암 주점으로 갔다. 주점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매우 불친절하므로 즉석에서 꾸짖었다. 오후에는 거기에 머물러서 잤다.

19일 아침 늦게 비가 개어서 겨우 조암(藻岩) 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백양산(白楊山 )에서 호랑이가 나타났고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하며 지나가는 길에 주막집에서도 준비를 단단히 해 놓은 것을 보았다.

오후에 갈재를 넘어서 연주원(連珠院 )을 지나 40리 쯤 가다가 정읍 한교점(韓橋 店) 숙소에 이르렀다. 이날 밤 빈대가 많아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여름 동안 손님되어 가기가 어찌 그리 어려운지. 날마다 지나는 곳마다 이러한 모양을 겪지 않은 데가 없었고 이와 같은 고충을 겪으면서 4-5일이 지난 뒤에야 겨우 상로(上蘆)에 이르러서 선생(임고산)을 뵈 었다.

선생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가을을 기다렸다가 와도 되는데 이와 같은 혹염에 천리 길을 오면서 병이나 나지 않았던가?’

대략 안부 인사를 나눈 다음 문집 교정에 대한 사유를 자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였다.

‘자네의 선조를 위해 고생하는 성심은 다름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자네의 성의에 감동하였으므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 일은 열흘이나 한달 동안에 쉽게 끝날 일이 아니므로 문집을 놓아두고 가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곁에서 수 일 동안 모시고 그 글을 논한 것을 보았더니 참으로 도학(道學)을 갖춘 안목이 있는 분이라고 말할 만 했으며 믿고 의심할 것이 없었다. 마침내 하직 인사를 드리고 물러 나와서 집으로 내려오는데 이 때 장마비가 연속 날마다 내렸기 때문에 길에 다니기가 극히 어려웠다.

성주(聖珠)가 말하였다.

‘그 많은 위씨(魏氏)들 가운데 오직 홀로 생원 어른께서만 이 고생스러운 일에 주관하고 맡아 하시지만 뒷날에 문중 임원들이 그 누가 이번 일에 대한 공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웃으며 말하였다.

‘지금 내가 이 일 하는 것은 문중에서 공(功)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그렇지만 너만은 나로 말미암아 고생을 겪은 사람이니 너의 고생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으므로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으니 말이나 잘 몰아라.’

종과 주인이 서로 웃고 잠시 객고(客苦)를 잊었다.
7월 16일에야 비로소 집에 돌아왔으며 몇 일 동안 안정을 취한 뒤에 인쇄[鑄字] 일과 지물(紙物) 식량 등의 갖가지 준비와 비용에 들어갈 만한 것을 겨우 마련하고 10월 초에 이르러서 다시 성주를 시켜 말을 끌고 출발했다. 읍내에 이르고 보니 시간이 아직 정오가 못되었고 관청에 볼 일이 있었으므로 유숙하기로 했다.

다음날 길을 나서니 이 때 북풍은 쌀쌀하고 길바닥에 괸 물은 다하였으며 차거운 연못에 물도 맑았으니 지나간 6-7월에 비하면 가히 신선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유치 월천(月川)장에 도착해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더음재[가음치]를 넘었다. 성주가 말하였다.

‘소인이 상전을 잘 만났으므로 여러 번 산장댁을 관람하게 되었으니 상놈 가운데 내가 또 제일입니다.’

내가 답하였다.

‘너도 또한 산장댁이 존귀한 줄을 아느냐? 너의 말이 그와 같으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종과 주인이 서로 웃고 몇 일 동안 말을 달렸고 날이 저물면 숙소를 찾아 자고 해가 뜨면 길을 출발하여 11월 3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상로에 도착했다.

선생이 말하였다.

‘사람마다 모두가 다 선조를 위할 줄 안다고 하나 자네와 같이 독실한 사람은 내가 처음 보았다. 존재선생이 초손(肖孫)을 두었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실정에 지난 칭찬 말씀을 해 주시니 소생은 진실로 황공스럽고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 일은 소생의 집안에서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기회를 얻지 못했으니 어찌 독실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선생은 교정을 본 편차와 목록을 내 보여 주었다.

‘이것이 그 대문자(大文字)라고 한 것이다. 정성을 다 해서 일을 끝마쳤으니 선대를 찬양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친필로 글을 써 주었다.

‘존문(尊門, 존재선생 집안)의 유풍과 공렬을 후손이 이었으니 자네의 천양[揄揚]에 힘입어서 백세(百世)에 전해지리라. 오직 바르고 밝으며 진심으로 따라서 참되게 선대의 일을 이어가니 돌아가거든 명예와 도리[名理]를 자양편(紫陽編, 주자학)에서 구하게나 . 이 글은 나의 옛날 스승 매산선생께서 나 헌회에게 준 시(詩)인데 위(魏)선비 방서(芳瑞 )에게 써 준다.’

아! 문집의 서문을 받고 또 교정을 받았으며 환영지(寰瀛誌) 발문을 고쳐 주었으니 받은 것도 적지 않은데 다암(茶嵒)이라는 두 글자와 제일등(第一等)이라는 세 글자까지 대서(大書)로 써서 특별히 주었다. 또 두 번 씩이나 권면(勸勉)하는 글을 써 주었으니 돌이켜보면 용렬한 이 사람이 어떻게 그 위대한 분의 문전에 찾아와서 이러한 대우를 받는가 싶었고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면 비록 온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족히 아깝지 않다고 여겨졌다.

11월 그믐이 지나고 난 뒤 다산(茶山)에 간소(刊所)를 설치해 놓고 밤낮으로 걱정을 했었다. 하물며 또 다음 해 병자(1876)년에는 전에도 후에도 없었던 큰 흉년이었다. 중지하려고 생각하면 이 흉년을 겪고 난 뒤에 사람의 일이 또 어떻게 될지를 알 수 없었다.

특지를 가지고 만 번 죽을 힘을 발휘하여 진행하면서 8월 그믐에 이르러서 비로소 장책(粧冊)을 끝냈다. 그 동안 결손된 비용도 수천금(數千金)이 훨씬 넘었고 몸과 마음도 이 일로 인해서 녹아들었으며 집안 살림도 따라서 군핍(窘乏)해지게 되었으니 시경(詩經)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 혼자만이 일에 분주하여 시달림[(賢勞]을 다 했다’고 하였듯이 바로 이 일을 두고 이른 말이라 할 것이다.

* 자료 - 존재집 서문[역주]
존재집의 서문(存齋集序)

호남은 산천이 씩씩하고 뛰어나서 현인(賢人)과 호걸의 선비들이 그 사이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그 중에서도 학술로 이름 높은 분들은 하서(河西 )와 고봉(高 峯), 손재( 遜齋), 목산 (木山) 등이 가장 우선하며 또 한 네 분 유현(儒賢 ; 하서, 고봉, 손재, 목산)에 뒤이어서(殿) 태어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존재 위공이다.
공은 두 살 때 육갑(六甲)을 암송했고 여섯 살 때 역학(易學) 공부에 들어갔고 열 살 이후부터는 널리 제자백가들의 학문을 널리 통하였으며 무릇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복서(卜筮), 율력(律曆), 선(仙), 불(佛), 병법(兵法), 의약(醫藥), 관상, 명리, 주거(舟車), 공장(공법), 기교(技巧), 등류(等流)를 능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손금을 들여다보듯이 환하였으니 진실로 천재(天才)라 할만 하였다.
25세 때 구암(久庵) 윤봉구(尹鳳九) 선생을 찾아뵙고 입문[執贄]을 했으며 이때부터 그 지난날 배웠던 것은 모두 다 버리고 예문[爲己]의 학문에만 힘썼으므로 스승의 자리를 양보하고 칭찬하며 기중(綦重)히 여겼다.
일찍이 세상을 다스리며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하려는 경세제지(經世濟志)의 뜻을 품고 고금(古今)의 사실을 추찰하여 당세의 사정을 헤아려보면서 통찰력 높은 식견과 사려 로 완성한 범위(範圍)가 갖추어져 있음은 그 분이 저술한 사서차의(四書箚義)와 격물설(格物說) 정현신보(政絃新譜),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에서 그 본체와 작용(體用)을 이룬 학문이 있음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며 만약에 천거되고 시행 할 수가 있었더라면 두루 실시되지 않음이 없었을 것이다.
공이 쓴 고축설(鼓軸說)에도 말했듯이 태산의 깊은 산 속에 백 년 된 노목(老木)이 있는데 꽂꽂하고 기이하여 귀신도 수호한 귀한 재목이므로 그 재목을 가져다가 궁중의 천구(天球)의 종 틀에 매달아 놓을 만도 하지만 해곡(嶰谷)의 특사를 만나지 못해서 다만 비탈에 스쳐가는 바람과 산협에 뿌리는 비속에서 용(龍)의 울음소리만 낼 뿐이라 하고 만약에 크게 쓰이는 때를 만났더라면 천하(天下)에서 그 기이함을 지칭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스스로 기쁘기만 하랴! 라고 했다.
그러나 공은 정조[正廟] 임금 때를 만나서 그 현철함을 알고 초야에서 발탁되었고 곧바로 수재(守宰)로 배수(임명)되었으며 은혜와 예(禮)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쇠미하지 않았고 비록 당시에 그 재능을 시기하고 배제하는 무리들도 있었으나 마침내 능히 그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했으니 또한 불우하다고만 말 할 수 없을 것이며 앞에서 말한 바대로 천하에 기인이라고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연치가 말년[暮年]에 임박해서 그 시행됨을 생각할 수 없었으나 큰 자취를 남기면서 법을 지키어 백성을 잘 다스리고 생애를 마칠 수 있었겠지만 이 또한 족히 천고(千古)에 지사(志士)의 한이라고 하겠다. 아! 애석 하도다 공이 저술한 문장은 그 도도(滔滔)한 붓끝이 마르지 않았고 문장의 조리가 모두 다 잘 들어맞고 남기신 저술의 많은 양도 거의 백권에 이르며 그 중에서 절반은 임금이 부를 때 서울로 가져다가 규장각에 함께 소장되었다.
지금 공의 후손(後孫) 병석(炳錫)과 족손(族孫) 영복(榮馥) 등은 문중의 일가들과 논의하여 그 상자에 남아 있는 유고를 인출할 계획을 세우며 나에게 교정의 일을 부탁하고 인해서 서문까지 요청하였지만 나는 말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힘도 미치지 못한 위치에 있으면서 일사(一辭)를 쓸 수 있으랴?

부처의 이마에 오물을 칠한다는 말[불두포예, 佛頭舖穢]라는 말이 있듯이 훌륭한 저서에 변변치 않은 서문을 쓰는 것은 세인들의 꾸중만 초래할 뿐이다. 또 나는 나이 늙어서 정신이 혼몽하므로 글을 청해 오는 것[求文) 회피하기를 원수 피하듯 한다는 송잠계(宋潛溪)의 말과 같이 하고 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찍이 나의 스승이셨던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 선생도 공의 묘지명(墓誌銘)을 써 놓은 것을 읽어 본 적이 있었는데 공의 바른 품행을 말하면서 감복을 했었다. 그리고 영복(榮馥)의 간청이 또 이와 같이 아주 간절하기에 차마 굳이 사양을 할 수가 없었기에 병든 몸을 참아가며 그런대로 위와 같이 써 주었다. 외길의 순수한 선비[髦士]로서 진실로 능히 공의 위엄 있는 풍채[威風]를 듣게 되면 흥기하여 떨치고 일어나게 되리라. 따라서 위로 네 분(四賢 ) 들의 학통을 이어갈 수 있으려면 나는 반드시 말 하노니 이 문집이 이루어져야 하겠고 이에 팔짱을 끼며 공읍(拱揖)을 드리고 하였다.
원집 외에도 고금(古琴), 환영지(寰瀛誌), 황명사략(皇明史略) 등의 저서가 아직 인출되지 못했지만 모두 다 후세에 전해질만한 책들이라. 그리고 공의 이름은 백규(伯珪) 자(字)는 자화(子華)이며 본관은 장흥인(長興人)이다.

숭정(崇禎)으로부터 다섯 번째 을해(乙亥, 1875)년 봄날
서하(西河) 임헌회(任憲晦) 서문을 쓰다.

* 참고문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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