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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방촌리 존재고택(古宅) 역사(歷史)와 편액(扁額)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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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고택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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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방촌리 존재고택(古宅) 역사(歷史)와 편액(扁額)

존재고택 : 관산읍 방촌리 476번지에 소재한다. 1984년 1월 14일 국가 중요 민속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안항공파 웅천종중의 종가집으로 계춘동(桂春洞)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위의 경치가 아름다워, 특히 여름철을 시원하게 보내기 적당한 집이다. 바깥마당에는 연못이 있으며, 집 뒤로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고, 그 앞에는 1937(丁丑)년에 신축한 안채가 높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맞은편으로 대문간이 있으며, 안마당 북쪽에 헛간 채가 있고, 남쪽으로는 250여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랑채 영이재공(휘 문덕, 1704~ 1784) 존재공(휘 백규, 1727~ 1798)의 서재(書齋)가 있다. 안채 동쪽에는 상당한 높이의 계단 위에 사당(祠堂)이 있다. 이곳은 장흥위씨 집성촌이다. 지정 당시의 명칭은 "장흥 위계환 가옥"이었다. 이후 조선 정조 때의 유명한 실학자 존재 위백규 선생의 호(號)를 따 2007. 1. 29 "장흥 존재 고택"으로 명칭변경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재의 문(門) 위에 걸려있는 영이재공의 당호(堂號) 편액글씨와 존재공의 당호(堂號) 편액글씨는 병계 윤봉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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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 당호 편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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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이재 당호 편액 >

영이재 왼쪽 하단에 도서낙관이 屛溪居士 라고 새겨져 있다. 병계 윤봉구가 썼다.

영이재 편액 옆에 쪼그마한 편액은 영이재 당호를 지은 내용이다. 병계 윤봉구가 썼다.

※ 윤봉구(尹鳳九) 이력 : 존재공의 스승이다. 파평人, 1683~1767, 호(號) 병계 (屛溪)· 구암(久菴), 시호 문헌(文獻), 1714년(숙종 40) 진사시에 급제, 1725년 (영조 1년) 청도군수, 1738년 집의(執義)를 지냈다. 1741년 주자(朱子)를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에 추봉(追奉)하게 하여 삭직되었다가 재 등용되었으며, 자의(諮議)· 찬선(贊善) 등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과 함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를 주장하였다.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문집에 병계집(屛溪集), 저서에 화양존 주록(華陽尊周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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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이재 보조 편액 >
병계 윤봉구의 도서낙관이 새겨져 있다. 본 내용은 영이재 당호 뜻과 병계가 지은 내용이 적혀있다. 5언 율시이다.

■편액 글자 판독

기제위상사의여영이재
(寄題魏上舍懿汝詠而齋)
상사(진사 또는 생원) 위의여(위문덕)의 영이재에 제(題)하여 부침.


沂水何年浴(기수하년욕)
기수에는 어느 해나 가서 목욕할꼬,

吾今且詠歸(오금차영귀)
나는 지금 또 노래하며 돌아오네.

花陰當晝靜(화음당주정)
꽃그늘이 한낮이라 고요하고,

竹韻自天氣(죽운자천기)
대나무 소리는 하늘에서 기운차게 들리네.

瀛海襟虛闊(영해금허활)
영해(瀛海)는 끝없이 트여 옷깃을 여미게 하고,

冠山望翠微(관산망취미)
관산은 바라보니 푸른빛이 도네.

千秋挹氣像(천추읍기상)
오랜 세월 떠올리는(挹) 기상은,

彷佛鳳皇飛(방불봉황비)
마치 봉황이 나는 듯하네.


崇禎甲申後再辛未秋末旣望
(숭정갑신후재신미추말기망)

※千"秋"挹氣像 편액에는 載이나 秋를 잘못 쓴 경우가 아닌가 생각됨.

※崇禎甲申後再辛未秋末旣望 예수기원 1751년 가을 말(음력 9월) 열엿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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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이재 당호 편액 ]
왼쪽에 도서는 "屛溪居士"이다

■詠而의 뜻
병계가 지은 당호 詠而齋의 뜻은 기수(沂水)같은 좋은 곳으로 비유한  것 같습니다.
※당호를 지은 것으로 추정.

[논어] 선진편의 마지막 장에 나온 공자와 제자들간의 유명한 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승인 공자가 제자들에게 “누가 너희들을 인정하고 등용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물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신의 정치 포부를 밝히는데, 증석(증점)은 비파를 타고 있다가 다소 엉뚱하게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답합니다. 공자는 이 답변에 감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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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 년도 판독 >
崇禎甲申後再辛未秋末旣望
병계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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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辛자 초서자 >

■崇禎甲申後再"辛未"秋末旣望 예수기원 1751년 가을 말(음력 9월) 열엿샛날.

[질문] 1751년 辛未는 존재선생이 병계의 문하로 들어가 속수례를 올리는 해인데 서재의 편액을 써줬을까. 아무래 존존재란 당호 또는 아호를 지어줄때가 아닐까.??

●본 편액상 년도가 1751년이 타당성이 있는가??

*존재 선생 연보**
존재 선생 25세(1751년 辛未)
<是秋自洛下歸 歷謁玉屛溪留數旬 以一絶上呈>
선생께서는 봄에 속수례를 올린 후 귀가했다. 그해 8월 다시 덕산으로 스승을 찾아가 疑禮에 대해 질문하는 등 본격적인 공부를 하고 상당기간 체류하다 귀향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한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또 스승을 뵙고 다음의 절구 한 수를 지어받쳤다고 한다. 그러나 음력 8월은 가을이니 사실은 8월행과 겹친게 아닌가 여겨진다.
하략~
출처- 존재 선생 연보 중에서.

●분석- 존재 선생 연보를 보면 1751년 존재선생은 덕산을 두 번 이상을 갑니다.

첫 번째는 봄에 갔습니다.
두 번째는 가을에 갔습니다.
가을에는 상당한 체류를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서울갔다가 내려오며 들렀습니다.

병계가 쓴 영이재 보조편액에 1751년 가을 말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가을 말이라고 했다는 것은 존재선생 연보에도 존재선생이 덕산을 가을에 갔었다는 거와 맞습니다. 이는 존재선생이 가을에 덕산에 가 병계한테 편액글씨를 받았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속수례를 봄에 가졌습니다. 가을에 상당한 체류도 있었으니 아마 이때 글씨를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면 병계도 속수를 받았으니 제자한테 나름 예를 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병계는 영이재 당호(서재명)와 존존재 당호 또는 서재명을 써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존재 아호는 자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면 병계가 당초 신미년에 존존재 당호를 써준 이후 몇년 지나서 아호를 존재로 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 년도 분석◇
崇禎甲申後再辛未

■신미년이라고 년 표기를 안 하고 본 편액에 숭정갑신후재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숭정(崇禎)
명(明) 제16대 황제 명사종(明思宗) 주유검(朱由檢)의 연호이며 명의 마지막 연호로 1627~1644의 17년간 사용되었다. 숭정 17년(1644) 3월 이자성(李自成)이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지금의 베이징 시청구(西城区, 서성구) 경산(景山)인 매산(煤山)에 올라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며 명은 멸망하였다.

● 숭정은 17년만 썼음.
-따라서 숭정은 마지막으로 쓴 해였기에 표기를 "숭정 후" 신미년이라고 하였고 이를 풀어보면
"숭정갑신년"- 1644년, "숭정후" 신미년-1691년, "숭정후재" 신미년-1751년.

본 영이재 보조편액 판독이 맞으면 崇禎甲申後再辛未은 1751년임.

■신미년
기원전 110년, 기원전 50년, 11년, 71년, 131년, 191년, 251년, 311년, 371년, 431년, 491년, 551년, 611년, 671년, 731년, 791년, 851년, 911년, 971년, 1031년, 1091년,1151년, 1211년, 1271년, 1331년, 1391년,1451년, 1511년,1571년,1631년, 1691년●, 1751년●, 1811년, 1871년, 1931년,1991년, 20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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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백강 위성록, 위이환 글자 판독. *존재 선생 연보는 원산 위정철 씨족문화연구소장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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