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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 수군 재건로에 관하여

-위성/방촌유물관 명예관장-

 

[차 례]

1. 머리말

2. 보성 열선루 장계의 건

3. 군영구미

4. 향선을 이용한 회령진 이동

5. 결 론

 

1. 머리말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을 맞아 칠천량 전쟁으로 원균이 대패하고 전사하여 백의종군 중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 받아 곡성 구례 순천을 잠행하고(징비록:유성룡) 보성을 들려 장흥 땅 회령진성으로 남하 한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 정유년 기록을 두 본을 남긴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장흥, 보성지역의 연구나 사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은 있었으나 정론화 되지는 못했다. 이 일기 중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장흥 행적”을 2014년도 장흥문화에 필자가 기고하였다. 그리고 2015년 6월에 전라남도에서 주관 하여 조선수군 재건로 안내 해설판을 장흥군 관내에 설치하게 되었다. 필자는 장흥군에 전해온 자료와도 다르고 학계의 검증이 안된 해설판 설치로 인한 혼선이 발생할수 있어 검증 후 설치 할 것을 전남도에 건의 하였으나 검증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조선수군재건로 군영구미에 대한 의견(전남대 호남연구원 노기욱)을 답신 하고 설치를 강행 하였다. 물론 이순신 장군 때와 지금은 시간이 흘러 추정 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료나 사료를 모아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이 모아져야 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필자의 의견을 정리 해 둔다.

 

2. 보성 열선루 장계의 건

연구원 노기욱은 난중일기에 언급이 없고 선조신록에 기록되지 않은 충무공 사후 그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충무공 전서”에 나오는 선조의 수군 폐지론에 대하여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난중일기 8월18일자 김억추를 시켜 전선 파악을 회령진에서함). 라는 장계를 보성군 열선루에서 작성하여 올렸다고 의견을 제시한다(노기욱 저 명량 이순신 190~191p). 하지만 8월 15일자 난중일기 정유록은 8월7일에 성첩한 공문을 연선루에서 받았는데 그 공문 내용으로 영상 유성룡이 경기지방을 순행 중이라는 것은 기록하고 선조의 수군 폐지에 관한 것은 언급이 없다. 영상에 대하여는 기록하며 나라의 큰일이고 임금의 명령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세밀함을 볼 때 사리에 부합하지 못하다. 더 더욱이나 이순신장군이 보성에 도착하여 배설이 12척의 배와 장수들 그리고 칠천량 전쟁에서 피해 나온 사람들과 회령진에 묵고 있다. 라는 소식을 접했다고 8월13일 일기에 적고 있다. 이때에서야 이순신 장군의 행선지가 회령진성으로 정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일은 아직 배설이 회령진에 피신하여 놓은 12척의 배와 군사 상황을 점검하지 못한 상태로 이틀 후 8월 15일 성첩하여 장계를 올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연구의 최고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순신 연구소 교수였었던 노승석교수도 정확한 날짜를 몰라 이 기사를 9월 7일에서 명랑해전 이전 15일 사이에 배치하였다(노승석의 증보 교감완역 2014년).

 

3. 군영구미

위 자료 중 군영구미의 장소설정으로 “이순신장군 연구논총22” 및 글에서 “장흥읍지”(정묘지:1747년)에서 군학을 군영구미라 하였다고 근거로 제시하며 구미, 휘리, 군학이 3개의 촌락으로 구성된 마을이라 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필자가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같은 자료 정묘지에는 군학이 군영구미라 한 언급은 여리와 고적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여리편에 군학은 제일 첫 번째 마을로 휘리는 제일 마지막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구분지어져 있으며 별개의 마을 이었다(191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일리로 편입 두마을은 약 1.5km 떨어져 있음). 정묘지 고적 조사에도 군영구미의 언급이나 폐성터 군영에 대한 언급이 없다. 노기욱은 연구논총에서 군영구미는 백제시대에는 마사량현이라 하였으며 당시 읍치는 회령리라 하였다. 그리고 이 마을이 본격적으로 군영구미라 부르게 된 것은 1457년(세종3년) 이곳에 수군 만호진이 개설됨으로써 군영구미라 부르게 되었다. 1554년 호남진지 중 회령포진지에 의하면 회령면 휘리포라 부른 기록이 있다. 고 역설 하는데, 회령포진지 어디를 봐도 이런 기록은 없으며 이렇듯 확실한 근거라면 별도의 논란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근거가 없고 실체가 없어서 학설로도 존재 값어치가 없다. 군학을 군영구미라 언급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군학마을 왼쪽 옆에 바다 쪽으로 거북이 꼬리처럼 나온 지역을 구미영성이라 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만 가지고는 설득력이 약하다. 이순신장군은 8월 17일 백사정을 거쳐 점심 후 군영구미에 도착 한다. 군영구미에 도착하니 장흥의 군량 감색(양곡을 지키는 책임자)이 군량을 모두 훔쳐 관리들이 나누어 갈 적에 붙잡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필자가 군학에는 창고가 없다고 하니 노기욱은 군영에서 운영하는 적은 창고라고 변명 한다. 각 지역에는 그 관청에서 관리하는 창고가 있다. 보성군에는 조양에 보성 세미 및 군량을 관리 하는 조양창이 있다. 이순신장군이 이곳에 도착 하였을 때 감색과 관리가 양곡을 놔두고 도망가 버려서 정예군사 4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보성으로 간다. 장흥부에는 장흥의 세미나 관청 양곡은 해창에서 관리 하였다. 8월 17일의 주어는 양곡이다. 창고가 있고 그것을 지키는 감색과 관리가 있어야 군영구미가 된다. 분명하게 이순신장군은 장흥의 군량 감색과 그것을 지키는 색리를 지적 하고 있다. 군영에서 관리하는 적은 창고에는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자는 있을 수 있어도 감색과 관리가 여러 명은 아닐 것이다. 또 1747년 정묘지에는 소규모 수군이 해창에 주둔 하였다고 기록 하고 있어서 모든 조건에 군영구미는 해창이 필요충분조건이다.

 

4. 향선을 이용한 이동

명량 이순신의 저자 노기욱은 그의 책 197p등에서 이순신은 군영구미에 수사 배설이 함선을 보네지 않아 출항할 수 없게 되었다. 수사 배설이 회령포로 가버린 것이다(배설이 군영구미를 지나간 것이 아니라 회령진에서 배를 보네지 않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해상 출항 방안으로 보성군학마을 김명립, 해상의병 마하수 등에게 협조를 구해 향선을 동원하여 이동하는 방안을 검토 하였다. 전령을 받고 마하수 백진남 정명렬 김안방 김성원 문영개 변홍원 정경달등이 배를 몰고 .왔다. 라고 하며 이제까지와 달리 처음 군영구미에서 회령진으로 해상 이동을 주장 한다. 그러나 난중일기 어디를 봐도 배를 이용하여 회령진으로 갔다고 적고 있지 않다. 육상으로 갔다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배로 움직였다고 해도 된다. 라는 억지 주장이다. 견강부회도 이런 견강부회는 없다. 일국의 삼도 수군통제사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지척에 목적지를 두고 전시 중에 조그만 고깃배를 이용하였단 말인가. 옛날 기록들이 정확히 날자와 시간 장소를 적으면 좋은데 사건만 기록 하는 일이 많아 이런 주장 저런 주장이 생겨나지만 장흥의 마하수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전해진 사실은 회령진으로 이순신을 찾아간 것으로 전하여 진다. 이순신 장군은 8월 18일 늦은 아침에 회령진에 곧 바로 도착(直到) 하였다고 난중일기에 기록 한다. 한나절도 아니고 아침을 이용 하였다. 그만큼 마음이 조급 했다. 라는 말과 상통 한다. 동행한 인원이 꽤나 많았을 것이다. 정예군사 60명을 비롯하여 수종군과 모여든 사람들을 포함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창(군영구미)과 회령포는 말과 도보로 아침을 이용 할 수 있는 거리기 때문이다.

 

5. 결 론

향토의 역사이던 나라의 역사이던 역사는 과거를 연구한 학문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 사실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전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합리적이어야 하고 사실적 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노기욱은 1747년 정묘지에 군학이 군영구미라고 하고 회령포진지등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나 그 어느 기록에도 없습니다. 이 뒤 누군가 정묘지와 회령포진지의 기록 확인 없이 노기욱이 쓴 기록을 인용하여 군학이 군영구미라고 재생산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을 남겨서 경계(警戒)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시대에 없었기 때문에 추정이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설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지금의 대부분의 학계에서는 실적 위주의 결과물들이 학맥과 인맥의 비호를 받으며 토론이나 검증 없이 여과되지 않은 채 사실인양 통용되며 재생산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더욱이나 이런 일련의 일들이 지역주의에 편승해서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료가 왜곡되고 부풀려져 거짓이 진실인양 재생산 되는 일들이 지역사회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없어지지만 글은 영원히 남아 그 사람에게 책임을 함께 합니다. 아울러 보성, 장흥지역 이순신장군의 행적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같이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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