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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곤 종친의 국회의원 당선의 의미

제주도 서귀포시 국희의원 후보로 출마한 위성곤 종친이 드디어 당선됐다. 그의 당선은 개인은 물론 우리 장흥 위씨의 축복이자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객지나 마찬가지인 외로운 서귀포에서 허다한 역경을 딛고 당선된 후보자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먼저 축하와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한 사람의 인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물심양면의 꾸준한 투자가 전제돼야 한다. 성곤 종친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의 당선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기적이 아니다. 남들이 놀 때나 잠잘 때 보이지 않게 뛰어다닌 결정체인 것이다. 한 표 한 표가 그냥 수 만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씨족의 역사는 결국 인물사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위씨의 인물은 어쨌는가. 고려시대에 많은 인물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문종조에 출사한 충렬공(휘 繼廷)은 참으로 충중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이후 고종조 때 춘위예부시에 장원한 원감국사 형제들을 꼽을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엔 고려보다 화려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존재공은 늘 수 백년간 삼품관이 없다면서 「삼벽(三僻)의 한」을 토로하곤 했다. 그러나 삼품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별시위패두를 역임한 충(种), 북도능전지를 편찬한 창조(昌祚)등은 삼품관이었으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이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70년간 장흥 위씨는 선출직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성곤 종친 이전까지 그 기나긴 세월동안 도의원 3명을 배출한 것이 전부였다.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 가운데 어쩌면 가장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씨족에 속할지도 모른다.
이제 위씨도 성곤 종친으로 말미암아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인물은 농사와 화원의 꽃, 그리고 나무처럼 가꿔야 자란다. 물주고 거름 주고 잡초 제거해주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내 것 네 것, 내파 네파라는 파당은 가장 금기해야 한다. 인재는 하루아침이 솟아오르지 않는다. <2016. 4. 14 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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