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

사이트검색

baeksanje_0422.jpg

 

baeksanje_0423.jpg

 

 

 

편액(扁額)이란 일상에서 널빤지나 종이․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거는 액자를 말하며 흔히 현판으로 통칭되고 있다. 위문 내 백산재 등 주요 사우 편액의 작명자가 단일 동일인으로 추정되어 종친들의 판단을 구하고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작명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사우(祠宇)
1) 백산재 (栢山齋) : 위문의 성지 하산사 강당으로 장흥읍 평화리 69번지에 위치한다. 1934 (甲戌)년 회은공 (휘 원량, 1882 ~1945)의 헌재로 이축(移築)하였다...하산도문중 소유

2) 장천재 (長川齋) : 습독공 (휘 유형, ~ ?)의 配 평산申氏 묘각으로 관산읍 옥당리 산 92번지에 위치한다. 4차 중수로 1873 (癸酉)년 다암공 (휘 영복, 1832~1884), 농포공 (휘 송, 1832~1875)주도로 ‘工,자 형태로 준공하였다. 매년 陰 10. 15일 宜人 평산申氏, 통선랑공 (휘 진수, 1480~1564), 강릉참봉공 (휘 진현, 1483~1564), 웅천현감공 (휘 정렬, 1580~1656)등에 대해 제향한다...장천문중 소유

3)운곡재 (雲谷齋) : 통선랑공 (19세, 휘 진수, 1480 ~1564)의 묘각으로 용산면 운주리 봉황동에 있었다. 1937 (丁丑)년 신축 후 1994년까지 묘전 제향하고 이후 장천재에서 합제하고 있다. 장천문중 소유였으나 2005년 타인에게 매매하여 편액은 방촌유물관에 소장

4)추원재 (追遠齋 ) : 진사공 (휘 곤, 1515~1582), 판서공 (휘 덕화, 1551~1598)의 묘각으로 회진면 대리에 위치한다. 창건 연도 미상, 1990년도까지 재각으로 활용하였으나 현재는 폐가이며 陰 10. 01 진사공, 판서공 墓前에서 제향한다. 편액은 방촌유물관에 소장...장천문중 소유

5)운산재 (雲山齋) : 안항공 (휘 덕후, 1556~1615)의 묘각으로 관산읍 농안리에 위치한다. 1995 (乙未)년에 신축 하여 매년 陰 9. 15 長子 청금공 (휘 정훈, 1578~1652)과 제향...안항공파종중 소유

6)다산재 (茶山齋) : 삼족당공 (휘 세보, 1669~1707)의 서재용 건물로 관산읍 방촌리 다산등에 위치한다. 후손들은 1950 (庚寅)년 서재를 재실로 변경하고, 1984년 사우를 건립해서 다산사로 바꿨다. 2002년 관리사의 과실로 전소된 후 후손들의 헌성과 장흥군청의 재정 지원을 받아 2003년에 준공하였다...안항공파 웅천종중 소유 (※ 다산재 전경 사진은 이해를 쉽게 하려고 舊 재각 사진을 게재함.)

7)이필재 (二必齋 ) : 직장공 (휘 대방, 1550~1617)의 재각으로 강진군 군동면 평덕리에 위치한다. 1954 (甲午)년 이축하였고 이필재 상량문 축시와 편액을 극암 (성산人, 李基允, 1891~1971)께서 작명했다. 제례문화 변화에 맞춰 매년 陰 11월 둘째주 일요일에 직장공 이하 선조에 대해 合祭 제향한다..직장공파종중 소유


2. 의문점 발견 경위
필자는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대리 진사공, 판서공 묘소를 정기적으로 찾으면서 마을 내에 위치한 추원재를 둘러보았다. 그 때만 하여도 추원재는 마을 아낙들의 쉼터로 이용되었고 방 한쪽에는 祭器가 있었으나 2000년도로 접어들면서 아낙들의 출입이 끊어지면서 폐가로 방치된 추원재를 삼량 (1946~2012, 판서공파 11대손) 대부님과 2006년 이른 봄철에 찾았는데 추원재 편액이 큰방 문 위에 대못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떼지 못하였다. 대부님께서는 편액이 극암(克菴) 선생의 서체라고 하여 처음 "극암"이라는 號를 들어 머리에 새겨 두었다. 다음 해 판서공파종중에서 편액을 떼어 두어 현재는 방촌유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후 필자는 본향 여러 선대의 제향 등 행사에 참여 해오면서 재각을 사진 촬영해왔다.
특히 스마트폰 출시로 휴대폰과 카메라 기능이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카톡, 밴드 등 종친들과 교류를 통해 필요한 사진을 상호 제공하다보니 백산재 등 7곳 사우의 편액 작성 서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최근 혜암(환, 강진 평덕 거주) 도문회장님과 문사 관련 전화 통화하면서 “이필재”에 대해 궁금한 사항을 문의하니 편액을 극암께서  齋號 하셨다고 하여 1999년 기묘보 편제록과 장흥위씨요람 (원산 編著)을 확인 하였다. 백산재, 장천재, 운곡재, 추원재, 운산재, 다산재, 이필재 등의 모든 편액 글씨가 동일 서체로 일부 편액이 극암 (克菴)이란 낙관이 확인되었다. 또한 방촌 유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운곡재와 추원재의 편액을 다존 (성) 명예유물관장에게 의뢰 사진을 요청하여 편액이 극암의 작품임이 입증 되었다.


3. 견해
1)혜암 (환) 도문회장님 : 극암께서는 경북 대구사람으로 정확한 년도와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광복 (1945년) 전후에 강진군 칠량면 송산리에 정착 거주 (대략 1940~1960년 간)하면서 선친 경보공 (휘 삼량, 1911~1991)이 잘 따라 각별한 緣이 되어 이필재 이축에 관여하게 되었고 강진, 해남 등의 타 성씨 사우 작명에도 많이 참여 하였다고 한다. 혜암 회장님께서 15세쯤 때 외지인 극암과 송산리 주민들과 불편한 일이 발생되어 경북 대구 수성동에서 딸, 아들이 와서 고향으로 모시고 간 후 혜암 회장님께서 17~18세쯤 되어 극암의 대구 집을 방문하여 2개월간 기거한 일을 소개 하면서 극암의 아들이 1명이 있는데 늦게 얻어 혜암 회장님과 동년배인 1939년 (기묘)생 "이일영" 이라면서 젊은시절 검사를 역임하였다고 하면서 극암 선생과 관련 지난 일을 소회하였다.

2)덕운 (황량) 고문님 : 젊은시절 이라서 극암 선생을 접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지만 졸헌공 (휘 계본, 1907~1993, 안항공파 10대손, 웅천종중)께서 다산재 편액과 다른1곳의 편액을 가지러 경상도로 가셔 편액 글을 받아왔다고 하면서 극암께서 쓴 편액이 맞다고 하였다.

3)원산 (정철) 씨족문화연구소장님 : 사진을 보고 동일인의 서체가 맞다. 특히 “집 재자 끝마무리의 세개의 점이 다 같이 동일함을 지적”하였고 극암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4)야운 (이환) 씨족문화연구위원님 : 극암께서 위문의 중요 여러 사우의 편액을 쓰셨다는 것에 매우 놀랍다면서 “묏 산자 가로획을 살집 있게 두껍게 처리 한 것”은 극암의 개성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특히 추원재의 편액 낙관 분석 본 낙관은 정말 특별한 게 많다면서 "보통" 위에가 성명 인이고 아래가 아호 인이다. 아호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배자가 되고 성명인은 오른쪽 귀퉁이에서 반시계방향으로 배자가 된다. 그런데 본 낙관은 위에 아호낙관이고 아래가 성명낙관이다. 가장 특이했던 게 성명낙관의 배자로 성명낙관은 오른쪽 귀쪽부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李基印允 (원래는 李基允印)으로 배자하였습니다. 즉 李와 印을 "대각선"으로 배자하는 특이한 형태라고 했다.아호는 극암 (克菴 또는 克庵)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추원재 편액은 극암(克菴) 이기윤 (李基允) 친필이 거의 틀림없다.
글씨는 사람마다 성향에 따른 습관이 있고 기교를 내는 방법도 각각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만 보더라도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본 편액들은 낙관도서를 남겼습니다. 판독만 하면 누가 썼는지 자명해진다. 본 편액은  齋자의 하단부분 처리에 있어 示를 ( ''' ) 세 점으로 처리하였다. 이 기교가 일관되며 개성으로 보인다. 또亅갈고리하는 방법인데 안진경체의 특유의 글체로 일관된 기교로 하고 있다. 乀파임도 기교가 같다. 전체적으로 살 집있게 잘 썼다. 필세가 당당하고 기운미가 대단하다. 현판글씨로는 최고라고 볼 정도이다. 중국 최고의 명필가 안진경의 필체가 전체적으로 있다.

5)필자 : 평화 백산재의 경우 1934년 상량하여 편액을 걸은 후 극암이 본향과 강진에서 활동한 시기에 현 편액으로 교체하였을 거라 추정 해본다. 현 장천재 경우 신축하여 현재까지 14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도중 중간에 편액이 낡아 보수 필요성 제기 등과 극암이 위문 문사에 깊게 참여 활동한 시기에 맞춰 현 편액으로 교체 되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4. 극암의 이력(履歷)
- 성명 : 이기윤 (李基允)  - 생졸년 : 1891~1971 - 본관 : 성산인 (星山人)
자 (字) 집중 (執中), 호 (號) 극암 (克菴), 거 (居) 성주 (星州) 대포 (大浦)
정현 (廷賢)의 후손, 익희 (益熙)의 자 (子)로 장석영 (張錫英)의 문인, 어려서 영민 (英敏)하여 16세 성균과 박사가 되어 독서 (讀書)하였고 스승의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왜정의 모든 행위에 대항하여 불굴의 뜻을 지켰다. 자질 (子姪)의 유계에 규모의근졸 (規模宜謹拙) 지기필각력 (志氣必刻曆)하라 하였으며 서법 (書法)이 경건(勁健)하여 초년(初年)에 청천 (晴川), 회연서당 (檜淵書堂) 편액을 수서 (手書)하였고 이외의 당 (堂), 루정 (樓亭) 헌각 (軒閣)의 글씨를 많이 남겼다. 문집 17권이 전한다.


5. 결론
우리 후손들은 여태까지 門財인 사우를 보면서 선조님께서 창건하였다고 생각하고 세심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위문의 중요 사우인 백산재를 비롯한 7곳의 편액을 현장답사와 원로들의 실존 언동 등을 통해 작가가 극암선생으로 위문 문사에 깊게 참여한 것을 확인하였고 1999년 기묘대동보, 장흥위씨요람 등 고증 자료를 통해 극암의 높은 가치를 평가할 수 있었다.~~


판서공파 13대손 栢江

 

 

 

로그인 정보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