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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元老와의 對談

`三知`를 당부한 매서운 `警告`  종보 20년 편집한 松堂 載亨翁의 회고송당 옹 대담.PNG

 

송당 옹 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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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위씨 가운데 가장 원로를 들으라면 송당(松堂) 재형옹(載亨翁)이요, 대한민국 위씨를 위해 가장 노력하신 한 분을 들라면 빼놓을 수 없는 어른이 또한 송당이시다. 언제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인자함은 옛날의 선비를 연상하게 한다. 송당께서는 1924년 태어나셨으니 흔히 말하는 "묻지 마라 甲子生" 이시다. 1981년 「장흥 위씨 관북종친회」결성과 1983년 재경 위씨종친회 결성에 이어 1990년 대전 유성호텔에서 대종회를 결성하면서 30여년 동안 종친회에 깊이 발을 딛게 됐다고 한다. 1986년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 옛 사월방(沙月坊) 그 자리에 있는 사월재(沙月齋) 마당에 관북입조이신「성균생원공 휘 자공(自恭) 유장비」를 건수하면서 그 감격을 기록으로 담아놓기 위해 자청해서 관북종친회보「月明頌」을 제작한 이후 그 인연으로 작년(2010년)까지 월명송 8집, 「장흥 위씨 종보」16호를 발행하였으니 어언 한 세대가 흐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살아 계시는 「위씨의 기록」이시다. 올해 처음 바통을 이어 받은 圓山이 2011년 3월 12일 대종회에서 어른을 만나 30년 세월을 되돌아본다. (편집자)

1. -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금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었는데 그 동안 이상난동이라며 겨울이 겨울 같지 않았는데 날씨가 왜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살아오시면서 이런 겨울을 경험하신 일이 있으신가요.

- 금년 추위 마치 개마고원 황초령 칼바람 같아 -
▷ 이번은 쉬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책임지는 답변을 하겠습니다. 여기 내려 온지 60년이 넘는데, 올겨울 추위는 정말 대단합니다. 여기도(서울) 해마다 10도로 떨어지는 추위가 한두 번은 있었지만, 2011년(辛卯) 새해 아침에 -9,9℃라 하더니만 이런 추위가 두 달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1월 16일 아침이 가장 내려간 -18℃였지요. 처음 겪어보는 무서운 추위입니다. 제가 이북에서 소학교 다닐 때가 회상됩니다. 함흥벌에서 개마고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황초령(黃草嶺, 1200m)이라 하는데, 황초령 바람이 워낙 칼날처럼 매서워요. 더욱이 눈이 온다하면 폭설인데, 황초령 모진 바람에 날린 눈이 길에 쌓여 산처럼 길을 메우지요. 이런 자연환경이 그쪽 아이들을 강인(强忍)하게 만들죠. 학교 갈 때는 두툼한 바지저고리(저는 고학년이라서 대체로 양복을 착용하였음) 방한모를 쓰고 책보자기를 매고 귀마개까지 하지 않으면 밖에 나가지 못해요. 신발은 까만 고무신인데 눈길에 맞지 안죠. 옛날 아이들은 참 불쌍 했지요. 영하 15도쯤의 추위는 일상인데 올겨울 추위가 우리 고향 추위를 닮았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불쑥 듭니다.

2. - 송당께서는 대종회가 창립되기 이전인 1985년부터 거의 매년 하산사 대제에 관북종친들과 함께 참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그런 결정을 하셨습니까. 혹시 그 이전에는 그런 제사가 있는지 모르셨습니까.

- 관북 종친들 1985년부터 하산대제에 참례 -
▷ 1981년에 관북종친회가 창립되고 1982년 9월 26일부터 저는 총무 일을 맡아봤는데, 그때 제 생각은 이제 고향가기란 틀린 일이고, 여기서 뿌리를 내려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장흥(長興)과 교류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게 제 주장이었지요. 마침 작고하신 위욱량(魏彧良)씨께서 관북종친회장 앞으로 시조공 제사 때 한번 오라는 편지가 왔지요. 웬 일인지 나이 많은 분들은 `장흥행`을 꺼리고 있었지만,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1985년 5월 17일 종친회 임원과 그 가족으로 구성된 14명을 모시고 난생 처음으로 장흥 땅을 밟게 되지요.
계사(桂沙) 위성호(魏聖浩)씨를 처음 만나 뵙고 훗날 자공유장비(自恭遺莊碑)를 사월재(沙月齋) 마당에 세우고, 종보 월명송(月明頌)이 세상에 나옵니다. 옥천(玉泉) 덕운(德雲) 같은 분은 `이북 사람들이 여기 나오더니만 큰 일 치는구만` 하시며 놀라신 것은 사실이지요. 실향(失鄕) 피난유민(避難流民)인 저는 소박한 심정으로 장흥 위씨의 원초적(原初的) 본향(本鄕), 장흥과 가까워지려고 했고, 무슨 다른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피난 관북종인들이 본향 어른으로부터 멸시를 당한다 할까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종인들을 단속했고, 훗날 이북에 남겨 놓은 부모형제를 보면, 이남(以南)에서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드리자고 굳게 마음 먹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자공유장비였고 월명송이었지요. 제 집안이 신흥훈(新興郡)에서 주북면(州北面)으로 이거한 정삼파(鼎三派) 장손집이어서 1년이면 지내는 제사가 많았습니다. 어릴 적에 곤하게 자다가 제삿밥을 먹지 못할 때는 다음날 아침에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요. 함흥사범을 다닐 때 지방쓰기는 제몫이었지요. 어릴 적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란 저는 제사에 관해서는 정서적으로 퍽 익숙한 편이었고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특이한 일이라고 보지 않았지요. 하산사 제사에 일찍이 참석하게 된 것은 성장과정의 정서(情緖)로 보아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요. 자연히 종친회 차원에서 종인들과 동행하게 되고 나중엔 부인들도 참가했지요. 제가 소학교 다닐 때 어느 해인가 선친과 신흥군 월명사(月明祠)에 제사지내러 간 적도 있습니다. 저로서는 먼 길 나들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장손집안의 가풍(家風)이었지요. 선친께서 장흥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어릴 적에 들어서 하산사 제사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죠.

3. - 금년으로 대종회가 창립된 지 벌써 만 21년째가 됩니다. 송당께서는 대종회를 조직하신 주역 중의 주역이십니다. 그때 어떤 과정을 거쳐 대종회가 창립되었는지 그 과정과 에피소드도 아울러 듣고 싶습니다.

- 1990년 대종회결성은 위씨들 한마음된 巨事 -
▷ 제가 대종회 창립주역이란 표현은 과장된 이야기고, 당시 `대종회창립준비위원회`란 공식 기구가 있었지요. 관북회장 위대선씨가 위원장에 추대되었고요. 1990년 11월 3일 전국에서 72명의 대의원이 대전(大田) 유성호텔에 모여 대선 위원장 사회로 회의가 진행되었지요. 대종회 정관을 먼저 통과시키고 회장 선출에서 재경종친회장 위찬호씨가 만장일치로 선출됩니다. 이어 부회장에 위황량? 위자형 위재형이 선출되고요. 각본대로 일사천리의 진행이었지요. 대의원들은 그저 시조 위경(魏鏡) 할아버지께서 동래(東來)하신 후 1300여 년만에 탄생하는 전국규모의 대종회 창립을 감격 속에 맞이했지요. 완전히 경축일색이었죠. 참가자들은 과거 설음을 털었으니 곧 행운이 열릴 것이란 기대가 컸지요. 이날 위씨들은 '한마음'이 되는 장한 모습을 보여준 겁니다. 재경종친회는 1983년에는 창립되었는데, 그때 총무가 위봉환씨였지요. 어느 날 봉환씨가 만나자고 전화를 주셨지요. 생면부지의 두 사람은 만나서 얼굴을 익히고 곧 10년 지기(知己)처럼 가깝게 지냈지요. 봉환씨 요청으로 관북은 1986년부터 재경종친회 총회에 나갑니다. 그랬더니 재경종친회 사람들도 관북총회를 찾게 되었죠. 이것이 남북종인들의 역사적인 교류의 시발이지요. 교류는 점점 심화되고요. 찬호씨는 재경종친회가 창립되기 1, 2년 전부터 관북 쪽에 연하장을 돌렸습니다. 전화번호부 책을 보시고 등재돼 있는 위씨에게 보낸 것이죠. 물론 저도 받아보고 웬 사람인가 했지요. 그러나 `위찬호`란 이름은 뇌리에 남았죠. 이 일이 그분의 `對關北事業`의 1호쯤이 되겠지요. 그분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연하장을 돌린거죠. `관북을 잡으면 전체를 얻는다`는 포부의 발동이었죠. 위찬호 대종회장은 재임시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관북총회에 참석해서 이산(離散) 유민(流民)인 관북조인들을 가엽게 여기시고 위로하며 격려해 주었죠. 그 정성이었기에 위찬호란 이름을 모르는 관북인은 없었지요. 찬호 회장은 관북이 빠지면 어떤 일도 성사할 수 없다는 걸 남종(南宗) 누구보다도 일찍이 알고 있었지요. 그런 면에선 선각(先覺)하신 분이지요.

4. - 대종회에 관여 하시면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일들을 참으로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그 중에서도「장흥 위씨 종보」를 16년 동안 편집해 발행하시고, 관북종친회의 종보인「월명송」도 격년제로 8집까지 발행하셨습니다. 이런 정신작업을 왜 맡으셨습니까.

- 위씨에 대한 애정은 모두 사월재에서 나왔다 -
▷ 제 경우 장흥에 대한 애착이나 친근감은 모두 사월재에서 나왔다는 게 진실입니다. 종보 편집은 단독(憺) 자진(自進)해서 `월명송`제1집을 펴낸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만, 남쪽으로 넘어온 운명에 따른 것이라 순순히 받아들이고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늘 보람과 즐거움 속에서 작업을 했지요. 그런데 남북 종보 28권을 편집하면서 불상사가 있었지요. 한번은 위성호씨의 `뒷마무리`란 글을 대종회에서 거부해서 오랫동안 옥신각신하다가 3년 후 `월명송` 7집(2003년 발행)에다 실은 일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성호씨 글을 실으면 종보를 모두 찢어 버린다는 협박 전화를 제사 전날 밤 받은 일이 있었죠. 저로서는 대종회에 알리고 성호씨에게도 심각성을 알렸지요. 장흥 종인의 소행인데 이름은 밝힐 수 없고 결국 공갈로 끝났지만, 저는 그해 장흥행을 단념해야 했죠. 세월이 무심히 흘러가니 다 옛날이야기가 됐군요.

5. - 작년 16호를 발행하시고 편집후기를 통해 종인들에게 고별사를 남겼습니다. 그러시면서 월명송으로 시작된 종보편집 23년을 회고하셨습니다. 종보에 대한 감회가 어찌 한 번 읽어보고 마는 건성 독자와 같겠습니까. 털어버린 소회부터 듣고 싶습니다.

- 종보애착 ``인생은 짧고 종보(예술)는 길다``-
▷ 나이를 먹다보니 지나간 일들이 모두 아름다운 추억거리로 남는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무리 험난하다 해도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에 또 있을까. 무신론자(無神論者)인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 자살(自殺)은 제일 큰 죄악이라 생각합니다. 월명송 제1집을 낼 때 낮에는 학교근무요, 종보에 관한 일은 퇴근 후 처리해야 했는데, 처음하는 일이라 생각도 많았죠. 그러니 어떤 때는 새벽 1시, 2시까지 매달리다 보니 집사람 걱정이 아주 컸습니다. 뭣을 시작하면 쉬이 끝장을 보겠다는 버릇이 있는데, 좋게 말하자면 옛날 선비들의 벽(癖)이라는 게 아닐까 싶군요. 1986년 4월 자공조(自恭祖) 숭모사업(崇慕事業)을 끝내고 곧 월명송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해 9월에 월명송이 나왔어요. 그때 기쁨이란 표현하기 어렵군요. 처음 해본 일이었으니까 월명송은 달랑 300부를 찍었고 비용이 827,076원이 들었는데, 지금은 절품(絶品)상태입니다. 저는 소장한 책이 몇 권 되지도 않지만 책장에 꽂아 있는 종보를 보면 괜히 웃음이 나요. 그 속에 제가 살아온 자취가 고스란히 있으니 말이죠. 어느 날 28권의 종보를 꽂은 채 재봤더니 고작 16,5㎝였지만 그래도 웃음은 그냥 나요. 그 속에「魏門」으로서는 귀중한 보배 같은 글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달리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월은 가고 종보만 남는다`는 감회(感懷)에 잠기게 됩니다. 세월이 가면 사람도 가는 것. 인생은 짧고 예술(종보)은 길다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6. - 종보의 편집책임을 맡으면 여러 가지를 1년 내내 챙겨야 하지요. 연중 진행된 각종 행사의 내용과 관련된 사진 등 신경 쓰실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연세에 그걸 혼자서 하셨습니다. 과연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는지요.

- 칼라 화보집 못 만든 아쉬움이 편집인의 여한 -
▷ 사진을 적절히 넣지 못한 아쉬움들은 늘 있었지요. 여태까지 실은 사진의 경우 기고자가 보내준 것인데, 제가 직접 찍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표지 사진만은 특히 중시하고 사진이 나쁘면 다시 찍어 보내라고 한 적은 있어요. 저는 소심해서 그랬을까 비용을 먼저 생각하곤 했는데, 앞으로 칼라 화보집을 몇 번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니 꼭 그렇게 하세요.

7. - 지금까지 발행된 종보로 인해 우리 장흥 위문은 정말 엄청난 발전을 견인했다고 평가됩니다. 편집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분석하고 평가하신지요. 그리고 혹시라도 더 좋은 종보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보완해야 되는지 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 모든 종인이 참여하는 하의상달의 종보 되길 -
▷ 장흥 위씨처럼 종보를 계속 16권이나 발행한 성씨는 거의 없을 줄 압니다. 과연 장흥 위씨는 문화씨족(文化氏族)이란 자긍심을 가질만 합니다. 저는 가끔 종보에 관한 전시(展示)행사라도 있었으면 우리 종보가 수상(受賞) 팀에 끼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만 편집인의 과욕일테지요? 대종회든 관북종친회든 종보는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게 장흥 위씨를 지상(至上)의 사명이라는 것을 강조해 둡니다. 대종회 종보의 초장에 나오는 대종회 소식란은 거의 사무국에서 정리한 내용인데, 싱싱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모든 종친회, 모든 종문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종보의 질을 향상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의상달(下意上達)의 방편으로도 활용하시기를 권장 합니다.

8. - 장흥 위문은 252년 족보사에 항상 문제가 된 보의론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송당께서는 종보를 편집하고 그리고 신라시대 위홍 등이 우리 방계조상이 아니라 `김씨`임을 확인해서 1999년에 발행된 대동보부터 삭제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번 보의문제의 마무리에 대한 의미를 평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보의론의 모순 반드시 바로 잡기를 바랍니다 -
▷ 보의(譜疑)문제에 관해 제가 마지막으로 작업한 대종회 종보 제16호에다 원산(圓山)의「판사공 족보기록과 왕조실록」이란 연구논문을 싣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귀한 글을 종보에 싣고 물러난다는 게 절묘(絶妙)한 행운(幸運)이지요. 월명송 제4집에 실은 계사(桂沙)의「14세 판사공 충조의 진도 유배 진위 및 묘소 진위의 제정립」이란 연구논문과 쌍벽을 이루는 역작(力作)입니다. 원산께서는 지금 장흥 위씨 보의론을 바로 잡으려는 `장흥 위씨 보의론 연구위원회` 핵심 연구위원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시고 `보의론`을 반드시 바로 잡겠다는 평소의 투철한 신념을 꼭 관철하시기를 바랍니다. 원산께서 언젠가 말씀하셨지요. `위씨들은 돈은 없지만, 돈 많은 성씨들이 갖추고 있는 것은 다 갖추고 있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시운(時運)이란 게 있다고 하는데, 바로 지금 장흥 위씨에게 천기(天機)가 열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보의문제에 따른 작업을 깨끗이 해결하면 위씨들은 더 당당하게 더 크게, 더 높게 발전하리라 굳게 믿습니다. 원산께서 심혈을 기울어 정리한「장흥 위씨 보의론총」이란 책자의 판권장(版權張)이 다음과 같습니다.
발행인 : 장흥 위씨 도문회
편저자 : 위정철(원산)
감 수 : 위재형(송당)
감 수 : 위성호(계사)
발행처 : 송정문화사
저는 책을 보았을 적부터 이 판권장을 보고 특히 호흡이 맞는 세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실린 것 때문에 무슨 현묘(玄妙)한 계시(啓示) 같은 걸 느끼곤 했는데, 서툰 훈수(訓手)라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송당공은 3월 12일 대종회 운영위원회에서도「보의론 연구윈회」기묘초보가 발행된 이후 251년 만에 그 동안 논란을 일으킨 문제를 정리한 것을 죽기 전에 본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고 평가하셨다. 그러면서 편집자에게도 격려의 말씀을 남기셨다. 힘을 내십시오!

9. - 끝으로 위문의 발전을 위해 당부하시고 싶은 충고 같은 것이 있으시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여주시기 바랍니다.

- 후임에게「三知」의 당부는 간담 서늘한 충고-
▷ 지금 우리들은 인생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중입니다. 활동을 못하면서 오래 산들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나이든 분들은 특히 건강에 유의하시고, 함부로 남의 마당을 기웃거리지 마시고, 知足 知分 知止의 지혜를 몸소 익히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아울러 원산께서 종보 편집인에 취임한데 대해 축하드리고 탁월한 솜씨를 십분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송당께서 후임 편집자에게 "이웃 마당을 기웃거리지 말라"고 이르시고「三知」를 당부하셨을까. 공의 마지막 작품인 종보 16호「회장이취임과 공로패」기사 끝에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雍也篇)과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學而篇)」를 상기하며 새겨보라 일렀다. 이 공자의 말씀은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그리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보통「知足」은 현재 가진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라 또는 분수를 알라 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知分」은 자기 분수나 본분을 앎이다. 마지막으로 「知止」는 지나치지 않게 그칠 줄 아는 것이다. 구구절절 모두 마음에 와 닿는 충고이다. 작년에는 전 회장에게 올해는 후임자 편집자에게 같은 충고가 필요했던 것일까? 오유지족(吾唯知足)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이는 "口"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상하에 각각 글자가 모여 한자(1개)의 글자를 이루고 있다. 이 말은 `너와 내가 만족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뜻이란다. 곧 '나는 오직 족함을 안다.''나는 현재에 만족할 줄 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라. 쓸데없는 욕심을 버려라.'1519년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34세 때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죽어나갈 때, 동부승지의 자리에서 쫓겨나 고향에 정자를 짓고 팔여거사(八餘居士)라 불렀다. 팔여(八餘)란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는 뜻인데, 녹봉도 끊긴 그가 “팔여”라고 한 뜻을 몰라 친한 친구가 새 호의 뜻을 묻자, 정국은 웃으며 말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고,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하게 맡는다네. 또 하나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길 수 있기에 ‘팔여’라 했네』
김정국의 말을 듣고 그 친구는 자신을 팔부족(八不足)으로 화답했다. 별로 넉넉지 못한 처지에서「여유」의 깊은 뜻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8개의 부족을 지적한 것이다.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삶이네. 진수성찬으로 배불리 먹어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겼지.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함을 걱정한다네.” 그려

한나라 장량(張良)이 知止를 알아 유방(劉邦)의 화를 면했고, 노자(老子)도「知止不殆」즉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의미를 당부하였다. 당부의 속내는 자못 적지 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터인 데 어찌 새작이 대붕의 감추어진 뜻을 알 수 있겠는가. 그저 자중자애로 받아들이고 여생을 살라는 충고로 여기려 한다. 그러나 가얄프지만 만고풍상을 겪으신 우리 장흥 위씨의「宗寶」어른께서 한 10년만 젊으셨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절절하니 어쩌랴. 또한 계사어른의 소회도 듣고 싶은데 그 안에 쾌차했으면… 이 또한 `三知`를 잊은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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