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益鉉(1833~1906)의 제자
면암(勉庵)은 포천에서 출생, 김기현(金琦鉉)과 이항로(李恒老) 등에게 배웠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 병과에 합격, 성균관 전적․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이조정랑․수봉관․언관 등을 역임했다. 1868년(고종 5) 경복궁중건과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른 재정파탄 등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삭직 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로 복직.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 대원군세력과 제휴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실정사례를 열거해 퇴진과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무엄하게 군부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 그 후 2년만인 1875년에 석방됐다. 1876년에는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 통상을 논하자 전문 5조로 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부당성을 역설했다가 다시 흑산도로 위리안치되는 귀양을 갔다가 2년 후인 1878년에 석방됐다. 1895년에는 단발령을 반대하다 투옥되고, 1898년(광무 2)에 궁내부특진관․중추원의관(議官)․의정부 찬정․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됐으나 거부하고 향리에서 후진을 가르쳤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이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하여, 왕의 자문에 응했다. 그는 왕에게 일본의 차관(借款)과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을 갖자 말도록 진언했다. 그리고 친일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 헌병에 의해 두 차례나 향리로 강제 압송됐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토로하는 한편 8도의 사민에게 항일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내고 국민들의 동참을 간절히 촉구했다.
그는 호소문에서 납세거부․철도 이용 안 하기․일본상품 불매 등을 투쟁방법을 제시했다. 한편 74세의 노인인 그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 16조에 이르는 배신행위를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하고, 400여명 의병군을 이끌고 순창에서 일본군에 대항,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했다. 포로로 잡힌 그는 대마도(對馬島)로 끌려가 억류됐다. 이때 적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아 굶어죽기에 이른다.
면암의 전라남도출신 제자는 다음과 같다. 靜齋 金正泰(1867~? 능주)․ 一遇 金鍾冑(1864~? 순천 낙안)․新庵 朴揆秉(1864~? 능주)․畏堂 朴奎鎭(1858~? 장흥)․惺庵 裵炳裘(1883~1967 무안)․圭沙 宋宙勉(?~1910 화순)․蒼隱 梁在海(1855~? 능주)․蘆月 廉在業(1857~? 능주)․金啓洙(1867~? 광가)․愚臾 金元龍(장성)․金熙鎭(1867~? 영광)․文桂泰(1875~? 남평)․修齋 文圭簡(1875~?)․鳳岡 文奎錫(1872~?)․日省齋 文奎政․後山 文洛中(1877~?)․梧棲 文炳斗(1876~?)․鐘山 文濟昌․三坡 文載轍(능주)․復齋 魏啓玟(1855~1923 장흥)․梧軒 魏啓龍(1870~1948 장흥, 瓘植 아들)
宋秉璿(1836~1905)의 제자
연재(淵齋)는 우암(尤庵)의 9대손으로 백부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에게 배웠다. 학행으로 천거돼 제주로 기용된 후 서연관(書筵官)․경연관(經筵官)․대사헌을 역임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에게 시정을 개진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警戒)를 건의해 수용됐다. 그 후 대궐에서 다시 상소하려다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일본헌병에 의해 고향 충남 회덕(懷德)으로 강제 압송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선비였다.
그는 생전에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에 이어 개항(開港)과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끝내는 나라를 잃은 시대를 산 지식인으로 위정척사를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동지들을 규합하고 교유하면서 우국의 집념을 불태웠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왕에게 20여 차례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전국에는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산재해 있다. 전라도 각지의 제각과 정자에도 그의 시가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여서 그의 행동반경을 짐작하게 한다.
전남의 제자는 다음과 같다. 愼庵 具赫謨(1859~? 능주)․蘇海 盧海龍(1856~1940 광주)․止庵 裵元升(1849~? 화순)․晦峯 安圭容(1873~1959 보성)․三希堂 安澤煥(1844~? 능주)․圃雲 梁相曄(1852~? 능주)․弦齋 梁在德(1865~? 능주)․梧軒 魏啓龍(1870~1948, 瓘植 아들)․桂隱 魏大良(1884~? , 啓昌 아들)․重窩 魏洪良(1881~1961, 啓泮,아들)․魏祥良(1874~?,)․益軒 魏俸良(1879~?, 啓玄아들)․訥窩 尹滋鉉(1844~? 능주)․景山齋 鄭樂圭(1850~? 화순)․珠山 鄭淳邦(1891~? 능주)․止菴 鄭仁采(1855~? 능주)
田愚(1841~1922)의 제자
艮齋는 전재성(田在聖)의 아들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이사해서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문하에서 배우고, 신응조(申應朝)․서응순(徐應淳) 등과 교유했다. 퇴계집(退溪集)을 읽고 과거공부를 접고 위기지학에 전념하다 1876년 36세 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黙)과 토론하면서 주심론적(主心論的) 사고를 배격하고 율곡(栗谷)의 성리설(性理說)을 옹호했다. 그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격렬하게 질타했다.
간재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조정은 1883년 선공감 감역․전설사 별제․강원도사, 1895년에는 사헌부 장령, 1896년에는 순흥부사, 1907년에는 중추원 부찬의 등을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08년 9월 전북 계화도(繼華島)에 정착한 그는 우주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은 도(道)로 보고 국가도 도(道) 속에 있다고 여겼다. 그런 만큼 국가를 걱정하는 것은 곧 도를 걱정하는 것이며 국가를 걱정하지 않은 자는 유자가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후학을 가르치다 1922년 82로 타계했다.
전남의 제자는 九拙 姜大基(1887~? 영광)․翼齋 高在鵬(1869~? 광주)․畏堂 高漢柱(1871~? 광주)․鞠東俊(1887~? 함평)․仰山 金東奭(1884~? 광주)․小山 金秉燦(1862~? 함평)․省庵 金容璿(1865~? 함평)․曉山 金在烈(1891~? 무안)․華堂 金鍾八(1869~? 구례)․芝菴 金熙泰(1883~? 광주)․修軒 閔泳柱(1885~? 능주)․守齋 朴菶(1872~? 함평)․重川 朴鎔柱(1899~? 보성)․惺庵 裵炳裘(1883~1967 무안)
畏己齋 宋敬淑(1867~? 고흥)․月軒 宋鳳浩(1864~? 고흥) 斗陽 宋榮善(1880~? 고흥)․蒙庵 申德均(1878~1908 광주)․學古堂 申性植(1854~? 옥과)․剛庵 申允執(1866~? 고흥)․慕巖 沈能均(1871~? 고흥)․艮下 吳學燮(1876~? 장성)․立軒 柳心(1887~? 함평)․立身齋 庾敬求(1873~? 영광)․恥堂 尹哲成(1879~? 함평)․樂川 李敎川(1882~? 보성)․悳峯 張元澤(1893~? 구례)․强齋 田庸淇(1882~? 장성)․ 2016.07.21 圓山
번호 | 제목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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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성씨순위 및 장흥위씨 지역별 분포 내역 [1] | 1710 |
공지 | 회주사 사호 개칭 경위 [1] | 471 |
69 | 8.웅천현감공(諱 廷烈)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 266 |
68 | 9.병조참판공(諱 廷喆) 교첩 4매, 교지 24매, 유서 3매 / 栢江 위성록 | 1267 |
67 | 10.문화현령공(諱 山寶) 교첩 3매, 교지 5매 / 栢江 위성록 | 333 |
66 | 11.상원군수공(諱 東峑) 교지 8매 / 栢江 위성록 | 262 |
65 | 12.귤우헌공(諱 世璜)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 198 |
64 | 13.송와공(諱 世琦)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 207 |
63 | 14.삼수군수공(諱 天會) 교지 9매 / 栢江 위성록 | 306 |
62 | 15.보성군수공(諱 赫萬) 교지 2매, 전령 1매, 유서 1매 / 栢江 위성록 | 313 |
61 | 16.절충장군공(諱 壽徵) 교지 2매 / 栢江 위성록 | 461 |
60 | 17.존재공(諱 伯珪) 교첩 8매 / 栢江 위성록 | 239 |
59 | 18.서계공(諱 伯純)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 123 |
58 | 19.운수공(諱 啓忠) 교지 3매, 교첩 1매 / 栢江 위성록 [1] | 309 |
57 | 20.기타 분재기(分財記)·준호구(準戶口) 등 9매 / 栢江 위성록 [1] | 433 |
56 | 보성군수공(諱 赫萬) 재고증과 직계 후손 300년 제주도 거주 사실 / 栢江 위성록 [1] | 419 |
55 | 이순신장군 수군 재건로에 관하여 - 위성 [1] | 487 |
54 | 分派의 誤謬와 改善方案-원산 | 244 |
53 | 李縡(1678~1746), 尹鳳九(1681~1767), 洪直弼(1776~1852)의 제자 / 圓山 위정철 | 216 |
52 | 奇正鎭(1798~1879)의 제자 / 圓山 위정철 | 371 |
» | 崔益鉉(1833~1906), 宋秉璿(1836~1905), 田愚(1841~1922)의 제자 /圓山 위정철 | 436 |
50 | 天冠山의 地震記錄 / 圓山 위정철 | 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