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上에 대한 享祀와 追配
2016년 7월 7일 도문회 운영위원회는 6세 첨의정승공(僉議政丞公) 휘 소(紹)와 7세 정랑공(正郎公) 휘 문개(文凱) 두 조상을 회주사에 추가로 배향(配享)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지내는 회주사 대제의 배향 위(位)는 종전 5현조에서 7현조로 늘어났다. 조상의 향사역사를 알아보자.
조상에 대한 향사는 17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문회(門會) 도유사 영이재공(詠而齋公) 등이 1740년 제암산에서 충렬공(忠烈公) 묘소를 찾고 1741년(辛酉)부터 묘전시제를 지내면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각파의 파조에 대해서만 시제를 지낼 뿐 시조 등에 대해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후 묘소 아래 하산리에 제각을 지었는데, 충렬공에게만 제사를 지냈다. 어쩌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1925년부터 제각 동쪽에 시조공과 14세 판사공 제단을 설단, 향사했다. 그런데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 제사에 참례하는 후손이 줄어 문중차원의 대책을 논의하다 백산재에 설단해 향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1975년 백산재 언덕에 신실을 짓고 시조공, 충렬공, 판사공 3현조를 향사했다. 이어 1992년 중시조와 15세 통덕랑을 추배했다. 이번에 추배키로 한 6세 7세 부자는 족보에 기록된 상계 11위의 조상 가운데 사서(史書)에 활동상황이 비교적 확실하고, 우리 모두가 그 후손이라서 추배한 것이다.
僉議政丞公 魏紹
호부원외랑 위소(魏紹)의 생졸년은 미상이며, 배는 원방대부인 송씨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23권 고종 18년(1231) 9월 계묘조에 용주부사(龍州副使) 위소(魏玿)가 몽고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소(紹)와 소(玿)는 동명 2인인가 아니면 동일인인가? 하는 의문이 나온다.
이에 대해 2002년 9월 29일 송광사 원감국사 학술대회에서 원감국사 충지의 생애와 현실인식이라는 주제를 발표한 중앙대 사학과 진성규(秦星圭)교수는 소(玿)와 소(紹)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물론 서로 다른 한자(漢字)라 동명이인(異人)일 수 있으나 거의 동일인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장흥 위씨 대동보도 소(紹)로 기록되어 있는데 충지(冲止)에겐 소(玿)보다는 소(紹)로 기록된 것이 정신적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이름 소(玿)를 소(紹)로 남겨 비명을 쓴 김훈(金曛)과 족보를 편찬한 후손으로 하여금 오기토록 유도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을 하고 있다.
결국 紹와 玿는 동일인임이 분명하다. 다만 용주부사는 고려 관직에서 정3품으로 확인된다. 그럼에도 역대 족보에서는 정6품인 호부원외랑으로 적고 있다. 주목할 것은 아들 원감국사가 연곡린(鷰谷鄰)선사에게 보낸 서간이다. 여기에 아버지는 皇朝에서 대우를 받아 지위는 政丞에 이르렀다. 고 했다. 곧 첨의정승을 말한다.
正郎公 文凱
문개공(1228~1289?)은 1246년 춘위예부시에 장원급제했다. 이후 국자박사(國子博士), 보궐(補闕) 등을 거쳐 평양군수(平陽郡守)로 부임할 때 정혜사로 형을 찾아가 하루 밤을 지내며 수창한 시가 전하고 있다. 정랑(正郎)으로 재임할 때인 1283년(癸未) 9월 24일 김위량(金位良)과 만주지역 개원로(開元路)에 파견돼 유민을 추쇄했다. 이후 황해도 해주의 군수로 재임할 때 병으로 타계했다.
堂後公 信凱
막내인 신개공(信凱公․1230~?)은 장원은 아니지만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급제 이후의 행적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큰형의 「계제추원후(季弟樞院堂後)」제하의 시로 보면 중추원(中樞院) 정7품인 당후관으로 재직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舍弟 平陽新守에게 줌 (원감집 p.26)
「舍弟平陽新守文凱 將抵治州 先到山中 是夕會有雨 相與話盡十餘年睽離之意 不竟至天明 因記蘇雪堂贈子由詩中 所引韋蘇州 何時風雨夜 復此對床眠之句 作一絶以贈之」
아우 平陽郡守(順天) 文凱가 州를 다스리기 위해 부임하는 길에 먼저 이 산중에 찾아왔다. 이날 저녁 마침 비가 내려 서로 10여 년간 이별의 뜻을 나누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蘇雪堂이 子由에게 준 詩 가운데 인용한 위소주(韋蘇州)의 어느 때 비바람 치는 밤에 다시 잠자리를 같이 할까라는 句를 기억하고 一絶을 지어 아우에게 주었다.
위응물(韋應物, 737-?)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젊어서 임협(任俠)을 좋아했고 호방한 성격이라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관계에 진출하여 저주, 강주, 소주 등지의 자사(刺史)를 지냈으므로 위강주(韋江州) 또는 위소주(韋蘇州)라 부른다.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유종원(柳宗元)과 더불어 ‘왕맹위유’(王孟韋柳)라고도 부르며, 도연명과 함께 ‘도위’(陶韋)라고도 부른다.
백거이(白居易), 고황(顧況), 유장경(劉長卿), 교연(晈然)과 시를 주고받았다. 5언시(五言詩)를 잘 지었는데 시풍은 도연명, 왕유와 비슷했다. 그의 시는 산수자연을 위주로 노래한 것으로 언어가 간결하고 담백하다. 또한 당시의 정치와 민생의 괴로움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 가운데도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전해진다. 시집으로는 <위소주집(韋蘇州集)> 10권이 있다.
與君相別十三年 그대와 이별한지 13년
洛北江南雨杳然 낙북 강남으로 서로 묘연했네
那料鷄峯風雨夜 어찌 생각했으랴 계봉의 비바람 치는 밤에
白頭今復對床眠 흰머리로 이제 다시 잠자리 같이 할 줄을
燕京에서 舍弟에게 (원감집 p.120)
「近者舍弟補闕 寄示閣下在松都時所贈盛作三 其末章云 鷄峯夜話未忘情 松下尋常夢裏行 爲我殷勤傳一語 大悲恩似邇來輕 讀至于此 且驚且感 時復諷詠 想望不能己 次韻强成山語二首 因風有寄云 公時在燕京」
근래 아우 보궐(補闕)각하가 송도에 있을 때 보내 준(侍郞 韓謝奇便) 훌륭한 시 3편을 받아 보았다. 그 글귀에
鷄峯夜話未忘情 계봉의 밤 이야기를 잊지 못하여
松下尋常夢裏行 언제나 꿈속에서 소나무 아래로 참아가네
爲我殷勤傳一語 나를 위해 은근히 한마디 말을 전하오
大悲恩似似邇來輕 큰 자비와 은혜 근래 가벼워진 것 같네
라고 했다. 이것을 읽고 놀라고 감격하여 때때로 읊으면서 그리워함을 마지못했다. 韻을 따라 억지로 거친 말로 2首를 지어 인편에 보냈다. 충지는 1275년 원나라 세조의 초청에 따라 연경(北京)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나 수선사의 토전을 되돌려 준데 감사의 예를 표했다.
屢通寒淑豈無情 여러 해 지났다 해서 어찌 무정하리
誰爲山僧告此行 누가 산승을 위해 이 행차 알렸는가?
莫把道交方世友 道의 사귐을 세상의 벗과 비교하지 말라
兩心相契固非輕 두 마음 서로 일치됨이 가볍지 않나니
地隔誠難寄遠情 땅이 막혀 멀리서 情 보내기 어렵고
嶺梅猶阻附人行 嶺梅조차 인편에 소식 보냄을 방해하누나
早年厮結眉毛在 일찍부터 만나 가까이 사궜는데
聚散何曾有重輕 모이고 흩어짐에 어찌 무겁고 가벼움이 있으랴
※ 嶺梅(大庾嶺에 있는 매화), 眉毛厮結(서로 만나는 것, 對面 또는 접촉)
季弟 樞院堂의 詩 (p.27)
신개공(1230~?) 맏형이 정혜사에 주석하고 있는데, 둘째 형(문개공)도 평양(순천)군수로 부임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시를 보면서 자신이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던 것을 표현했는데, 국사의 유고집에 있다. (p.27)
「季弟樞院堂後璇(信凱) 聞前詩 次韻見寄 復用其韻答之」(두 형이 계봉 즉 定慧寺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막내 추원당 璇(信凱)이 앞의 시에 次韻하여 답한 것이다.
世亂今年勝去年 세상 어려움 금년이 작년보다 더하니
四方何處不騷然 세상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리오
陟岡謾自勞相望 메뿌리에 올라 부질없이 바라보기도 괴롭네
盖被無因得共眠 이블 덮고 같이 잠 잘 인연도 없어라
2016.07.12 圓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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