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7 12:33
(1부에 이어).......
4. 現實認識의 二重性
충지는 출가할 때 무슨 마음으로 집을 나왔을까? 그의 출가는 단순한 출가가 아니라 10년 동안 부모를 설득하고 졸라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여늬 승려의 출가와는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거주지 근처의 사찰도 아닌 장흥(수녕)에서 멀고 먼 강화도 선원사(禪源社)로 출가했다. 그가 스승 원오국사를 찾아갈 때는 분명 나름대로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불가의 귀의는 곧 성불(成佛)이 되고자 함이다. 세상의 온갖 인연을 끊고 절대자유에 이르는 해탈의 경지 곧 열반에 이르는 것일 것이다.
그럼 충지는 그런 경지에 이렀는가? 불가에 귀의했다고 해서 바로 득도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반도의 역사상 가장 살기 어려운 때였다. 이미 살핀바와 같이 거란과 금나라가 자주 침입해서 고려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징키스칸의 몽고제국이 등장하면서 28년간 7차례나 전쟁을 해야 했다. 전쟁은 백성의 생명과 재산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혀 기아(飢餓)에 허덕여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부마국(鮒馬國)으로 전락, 사실상 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당했다.
난세(亂世)를 살기가 어려운 것은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몽고를 배경삼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무리들이 날뛰는 세태에서 지식인들의 입장은 더욱 곤혹스럽다. 충지 또한 비록 승려라고는 하지만 약관에 최고 인재 등용문을 장원급제해서 10년간 공직생활은 했던 인물임이랴. 더구나 승려들의 생명줄인 사찰의 토전을 몽고에 징발당한 처지에서는 체면보다는 당장 호구지책이 문제였다. 전쟁준비를 위해 양식과 노동력을 강제로 빼앗겨야 하는 농민들의 참상도 안쓰러워 차마 볼 수 없었다.
이제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그의 세계관(世界觀)과 현실인시(現實認識) 그리고 대인관계(對人關係)를 살펴보자. 글을 보면 그가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곳곳에서 이중적(二重的) 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인 모순에 당황스럽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청전표문은 상상을 초월한 단어를 총동원한 듯하다. 그런가 하면 당시 민중과 호흡을 같이한 탐라도의 삼별초에 대해서는 거친 거부감을 나타내 역시 보수층의 의식을 대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時流에 便乘한 表文과 詩
(1)上大元皇帝表(曹溪山修禪社復田表代本社作)(p.266)
『其興也勃風雲千載之都兪盍往乎來玉帛諸侯之奔走照臨所洎蹈舞悉均恭惟皇帝陛下舜厥聰明湯其齊聖化流蠻貊四方咸歸于仁信及豚魚萬物各得其所大功不帝盛德難名伏念臣支連竺土之一枝脉嗣松巒之五葉竊喜適逢於華旦常切觀光迺緣邈處於荒陬謾勞延頸惟此修禪精舍創從普照聖師是小邦選佛之場禪流不減於數千指抑大國祝君之地梵席無虛於二六時然以僻在林泉遠離城市春種秋收之盖闕午餐晨粥之難支昔邦君錫近邑之土田永充齊費令天使尋別宮之版籍將備兵糧勢同失水之鮒呼情迫聞天之鶴唳儻蒙皇帝陛下廓包容之度迴覆育之私詔下我國達魯花赤及管句兵糧使佐勅令別護我叢林永錫我田壤鎭作參玄之禪藪絡爲奉福之道場則臣敢不益勵熏功倍輸忠懇五雲影裏長懸魏闕之心一炷香中常罄華封之祝』
<해설> 그 일어남이 활기차매 風雲 千年만에 都兪이거니 어찌 가지 않겠습니까? 玉帛의 제후들은 분주한데 햇빛이 미치는 곳엔 모두 뛰고 춤을 춥니다. 삼가 생각하니 황제폐하의 총명은 舜임금 같고 제성(齊聖)은 탕(湯)임금 같아 그 교화가 만백(蠻貊)에 흘러 사방이 仁으로 돌아가고 믿음은 돈어(豚魚)에까지 미쳐서 만물이 각각 제자리를 얻었으니 큰 공덕을 주장하지도 않고 성덕(盛德)은 이름붙이기도 어렵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臣의 사지(四支)가 축토(竺土)의 가지와 연(連)했고, 맥(脉)은 송만(松巒․修禪社)의 5세를 이었습니다. 그윽이 화단(華旦) 을 만남 것을 즐거워하며 항상 간절히 빛을 바라보았으나 궁벽한 먼 곳에 처해 있어서 부질없이 목만 빼는 수고로움이었습니다.
생각하면 수선사(修禪社)는 보조성사(普照聖師․1158~1210)가 창건하면서 소방(小邦)의 선불(選佛)의 장소가 되어 선류(禪流)가 수천명이 있으며, 大國 祝君의 장소로 범석(梵席)이 12시간에 빈 적이 없습니다. 궁벽한 임천(林泉)에 있으면서 성시(城市)를 멀리 떠났음으로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秋收)하는 것이 거의 없어 낮에 밥 먹고 새벽에 죽 먹는 것도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옛날에 임금님께서는 가까운 고을의 토전(土田)을 주셔서 오랫동안 재비(齋費)에 충당하였는데 이제 천사(天使)가 별궁(別宮)의 판적(版籍) 을 찾아서 병량(兵糧)을 준비한다기에 형세는 물을 잃은 붕어의 부르짖음같고, 정황(情況)은 하늘에 들리는 학의 울음처럼 절박합니다.
진실로 황제폐하께서 널리 포용하시는 도량으로 덮어기르시려는 사은(私恩)을 돌려 우리나라 달로화적(達魯花赤) 및 관구병량사좌칙령(管句兵糧使佐勅令)에게 조칙을 내려 특별히 우리 총림(叢林)을 보호하식, 우리에게 아주 토지를 주시어 그윽한 이치를 참구하는 선수(禪藪)로 만들고, 복을 받드는 도량이 되게 하신다면 신이 감히 훈공(勳功)에 힘쓰고 충성스런 정성을 배로 드리지 않겠습니까.
오운(五雲)의 그림자 속에 길게 위궐(魏闕)의 마음을 걸고 한 가닥 심지의 香 가운데 항상 화봉(華封)의 축원을 기울이겠습니다.
(2)上大元皇帝謝賜復田表(p.268)
『澤下層霄春迴枯알凌兢失措荷戴難任恭惟皇帝陛下德冠百王功高萬世闡一視同仁之化丕冒海隅得四方嚮內之心光宅天下謳歌沸於中外蹈舞均於邇遐伏念臣性行迂疎襟靈淺鄙猥以祖門之踵後濫爲釋苑之指南玆寺也五世叢林六和淵藪代弘禪髓恒令象席以無虛素乏土毛常患食輪之不轉頃蒙先后之憫此載割公田而錫焉自玆支命以聊生謂可安身而弘道及値使華之初屈點出軍須迺尋官籍之舊傳例收田稅衆多食寡事迫勢窮然外國邈隔於辰居恐下情難聞於天聽豈意皇帝陛下廓包荒之量廻燭遠之明知臣祝聖之積勞念臣弘法之微效優垂新綍俾復舊田恩旣出於尋常感何忘於頃刻臣敢不倍輸誠而戴仰益勵衆以熏修誓將蒲柳之殘年恭薦椿欞之遐算』
<해설>은택은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봄은 마른나무에 돌아오니, 능경(凌競)하여 어쩔 줄 모르매 하대(荷戴)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생각하니 황제폐하는 德이 모든 왕 가운데 으뜸이시며 功은 萬歲에 높습니다. 일시동인(一視同仁) 의 교화를 펴서 바다 모퉁이에 까지 크게 입히고 사방(四方) 향내(嚮內)의 마음을 얻었으니 그 빛이 天下를 덮습니다. 칭송소리가 중외(中外)에 비등하여 기뻐 뛰고 춤춤히 멀고 가까운 데가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신은 성행(性行)이 우소(迂疎)하고 금령(襟靈)은 천박하고 비루한데, 외람되이 조문(祖門)의 뒤를 이어 석원(釋苑)의 지남(指南)이 되었습니다. 이 사찰(현 송광사)은 5대째 총림(叢林)으로 육화(六和)의 연수(淵藪․사물이 많이 모이는 곳)며 대대로 禪의 진수를 넓혀 항상 大衆의 자리를 비게 하지 않았으나 토모(土毛)가 토모가 모자라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함을 걱정하였습니다.
지난번에 先后께서 이것을 민망히 여겨 公田을 베어 주셨으니 이로부터 목숨을 지탱하고 生을 유지하여 몸을 편안히 하고 道를 펼만하다고 했더니, 使臣이 처음 이르러 군수(軍須)를 찾아낼 때 옛날에 전한 관적(官籍)을 찾아내어 전세(田稅)를 례대로 징수하니 大衆은 많고 먹을 것이 적어 사세(社勢)가 급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外國(元)은 진거(辰居)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하정(下情)이 천청(天聽)에 들리지 않을까 걱정했더니 어찌 뜻했겠습니까. 황제폐하께서는 널리 황벽(荒僻)을 포용하는 도량으로 먼 데를 밝히는 총명을 돌리시어 신의 축성(祝聖)의 적로(積勞)를 알아주시고, 신의 불법(佛法)을 홍포(弘布)한 조그마한 공을 생각하시어 새로 윤음을 내리시어 옛 토지를 되돌려 주셨습니다.
은혜가 보통에서 벗어났으니 감사함을 어찌 잠간인들 잊겠습니까. 신은 정성을 배(倍)로하여 우러르고 더욱 大衆을 격려해 훈수(熏修)하여 맹세코 포유(蒲柳)의 남은 생을 갖고 삼가 춘령(椿欞)오랜 목숨을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3)上大元皇帝謝賜復田表(p.270)
『日月恒升容光必照乾坤覆燾無遠不包凡屬母臨悉均嬰慕恭惟云云居域中之大爲天下所宗德合好生則百姓咸蘇仁汸緩遠則九幽率服蕩蕩也巍巍也盛業四於三王昭昭然炳炳然休光隻於千古人入大平之域家騰旣醉之歌伏念臣法海微波禪林老幹邈居外國獲承一視之私其在下情敢忽三呼之祝伏望廓包容之度迴旁燭之明念臣奉福之勤諒臣嚮化之懇賜爲願刹宣降德音則臣敢不倍蟻垤以裨山吐螢光而增日益竭微誠於香火仰祈景祚於岡陵』
<해설>일월이 항상 떠오르매 용광(容光)도 반드시 비추고, 건곤(乾坤)이 덮어주고 실어주니 멀어도 포용하지 않음이 없어, 무릇 부모 같은 자애를 받은 이는 모두 어린이 같이 사모합니다.
공손히 생각합니다. 운운. 큰 성중(城中)에 居하셔서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셨습니다. 덕(德)이 호생(好生)에 합하매 백성이 모두 살아나며 仁이 먼 곳을 편안케 하매 구유(九幽)가 복종합니다. 탕탕(蕩蕩)하고 외외(巍巍)한 성업은 3왕에 보태 4왕이 되고 밝고 빛나는 아름다운 빛은 千古에 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太平의 세계에 들어가고 집들은 은혜(恩惠)에 취(醉)한 노래를 부릅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신하는 법해(法海)의 가는(微) 물결이고 선림(禪林)의 늙은 줄기라 멀리 외국에 계셔도 보살펴 주시는 사은(私恩)을 받았으니 하정(下情) 에 삼호(三呼)의 축수(祝壽)를 소홀히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노니 넓은 포용의 도량으로 두루 비추이는 밝음을 돌리시어, 신의 逢福의 부지런함을 생각하시고, 신의 교화를 펴는 정성을 양찰하소서. 願刹이 되도록 하시어 德音을 내려 펴시면 신은 개미집만한 흙으로 산을 북돋우고 반딧불을 토하여 햇빛에 보태며, 미미한 정성을 향화에 다 바치고 큰 복이 岡陵처럼 되라고 우러러 빌기를 배로 하지 않겠습니까.
(4)賀新豋寶位表(p.271)
『風雲盛際龍飛千載之一時玉帛駿奔燕賀諸侯之五服照臨所洎蹈悉均恭惟云云敎自稟成王之胎生不勤文后之傅累經雁漠始成梁楚之交歡終叫鳳占爰復唐虞之釐降兩朝盛事千古罕聞近者瑤臺之駿足未廻鼎水之號弓忽墮輿情是懼共憂大寶之久虛天蹕言還僉喜丕圖之益固家四海而無外冠百王而居先乾坤歸再造之神功日月布重興之瑞彩慶流率土訟溢普天伏念臣早承睿眷於先朝今覩休光於盛代林泉繫跡旣無地以瞻依香火翹誠空望天而蹈舞』
<해설>풍운이 성할 때 천년에 한번 龍이 나르고, 玉帛이 분주할 때 諸侯의 오복(五服)이 제비처럼 축복하오니 햇빛이 비치는 곳에 모두 뛰고 춤을 춥니다. 삼가 생각합니다. 云云. 가르침은 成王이 胎를 품부(稟賦)하시고 生은 文后 의 스승을 무색하게 하셨습니다.
여러 번 안막(雁漠)을 지나 비로소 梁.楚의 교환(交歡)을 이루시고 마침내 봉점(鳳占)을 부르짖어 唐虞(요순2대)의 리강(釐降)을 얻었으니 두 조정의 盛事는 千古에 드문 일입니다. 근래 瑤臺(옥으로 만든 臺)의 준족(駿馬)이 돌아오지 않고정수(鼎水)의 호궁(號弓)이 갑자기 떨어지매 여정(輿情)이 두려워하여 大寶가 오랫동안 비게 됨을 근심했더니, 천필(天蹕)이 귀국한다니 비도(丕圖)가 더욱 더욱 공고해질 것을 모두 기뻐합니다.
四海를 집으로 만드니 밖이 없고 百王의 우두머리가 되어 앞에 계시니 건곤이 재조(再造)의 신공(神功)을 돌리시고, 일월이 중여(重輿)의 서채(瑞彩)를 펴시니 경사가 온 영토에 퍼져 찬송이 온 천하에 넘칩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신이 일찍 先祖에 사항을 입었는데 이제 盛代의 아름다운 빛을 봅니다. 임천에 자취가 매여 우러러 귀의할 길이 없아오니 향 사르는 간절한 정성은 부질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발 구르고 춤을 칩니다.
(5)賀大駕還朝表(p.273)
『淸蹕帶鶯聲而始動行指北庭彤輪將雁翅而齊飛却迴東土照臨所曁抃躍悉均恭惟皇帝陛下天挺英姿日新盛業以舜德之升聞荷堯恩於降嬪戀積帝閽爰擧兩宮而往覲榮參戚里豈同五服之例朝旣相接相愛之盡歡乃言告言歸而戒道歎遲遲於魯國歌緩緩於臨安行塵纔及於郊圻瑞日己輝於寰宇矧布帝恩之優渥旋令國界以淸寧喜氣浮天懽聲匝地伏念臣身居林壑目極雲霄縱把葵心竟絶瞻依之分徒憑筆舌粗陳蹈舞之誠』
<해설> 맑은 행차가 꾀꼬리 소리를 띠고 처음으로 움직여 北庭(원나라)을 향해 가셨다가 붉은 수레바퀴(彤輪) 기러기 나래와 함께 가지런히 날아 동토(東土.高麗)로 오시니 햇빛이 미치는 곳은 모두 똑같이 손뼉치고 좋아하여 뜁니다.
삼가 생각하니 황제폐하께서는 하늘이 주신 영민한 자질과 날로 새로운 盛業으로 순임금의 덕이 위에 들림으로써 강빈(降嬪)하는 요임금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황제의 궁궐을 사모함이 쌓여 , 양궁(兩宮)께서 근친(覲親)하매 그 영광스럽게 위리(威里)로써 참여하였거늘 어찌 오복(五服)이 일반 조회(朝會)와 같겠습니까.
서로 접하고 서로 사랑하여 즐거움이 다하매 돌아가기를 고하는 계도(戒道)하니, 노국(魯國)에서 더디고 더딤을 탄식하고 임안(臨安)에서 느리고 느림을 노래하다가 행차의 티끌이 겨우 교기(郊圻)에 도착하자 상서로운 햇빛이 빛납니다. 하물며 황제의 우악(優渥)한 은혜를 펴시어 국경을 편안하게 하시니 기쁜 기운이 하늘에 사무치고 즐거워하는 소리가 대지에 퍼집니다.
엎드려 생각하면 신은 몸이 임학(林壑)에 있지만 눈(目)은 운소(雲霄)에 아득하여, 비록 해바라기 마음을 가졌지만 우러러 귀의할 형편이 아니기에 한갓 필설(筆舌)에 의지해 대략 기뻐 춤추는 정성을 아룁니다.
(6)東征과 三別抄 관련 詩
◊東征頌(p.73)
皇帝御天下 =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神功超妨勳 = 신공은 帝堯(방훈)보다 뛰어났네
德寬包有截 = 너그러운 덕 단절(斷折)도 포용하고
澤廣被無圻 = 넓은 은택 경계없이 입히네
車共千途轍 = 수레는 천도의 바퀴와 함께 했고
書同九域文 = 글은 구성의 문장을 같이 했네
唯殘島夷醜 = 오직 추한 섬 오랑캐가 남아서
假息鼎魚羣 = 잠시 솥안의 고기처럼 살았네
但恃滄溟隔 = 잠시 푸른 바다가 사이에 있는 것만 믿고
仍圖疆場分 = 영토 나누기를 도모했다
苞茅曾不入 = 제사 지내는 것(포모)는 들어오지 않았고
班瑞亦無聞 = 반서 또한 들어본 적 없네
帝乃赫斯怒 = 황제가 이에 노하여
時乎命我君 = 그 때에 우리 임금에게 명령했네
一千龍鵲舸 = 천척의 용작(군함)의 배와
十萬虎貔軍 = 십만의 호비군으로
問罪扶桑野 = 부상(일본)의 들에게 문죄하고
興師合浦濆 = 합포(마산)의 물가에서 군사를 일으켰네
鼓鼙轟巨浸 = 북소리 큰 바다를 진동시키고
旌施拂長雲 = 깃발은 먼 구름을 떨쳤다오
驍將皆趨死 = 용감한 장수들은 모두 죽음을 맹세하고
英雄競立勳 = 영웅들은 공훈을 다투었네
江思韓信背 = 강가에서 한신의 배수진을 생각하고
舟欲孟明焚 = 배에서는 맹명같이 화공하려 했네
係越奚專美 = 월나라 없앤 것만 어찌 훌륭한가
平吳不足云 = 오나라 평정은 만족하지 않으랴?
斫營應瞬息 = 순식간에 군영을 파괴하니
獻捷在朝曛 = 승첩은 아침저녁에 달려 있네
玉帛爭修貢 = 옥백으로 다투어 조공하고
干戈盡解紛 = 간과로 분쟁을 모두 해결했네
元戎錫圭卣 = 원융은 보물과 술통을 받고
戰卒返耕耘 = 병졸은 전묘로 돌아가네
快劒匣三尺 = 삼척의 날랜 칼은 칼집으로
良弓櫜百斤 = 백근의 좋은 활은 칼집으로
四方家浩浩 = 사방엔 노래소리 널리 퍼지고
八表樂欣欣 = 팔표엔 즐거움이 충만하네
烽燧收邊警 = 변경에서 봉수는 걷히고
當觀聖天子 = 성스런 천자를 보라
萬歲奏南薰= 만세로 남훈 태평가를 아뢰리
※ 麗元聯合東征軍은 두 차례에 걸쳐 日本을 침공했다. 1차 정벌은 1274년(甲戌 忠烈王1) 10월 도독사 김방경, 몽고군은 홀돈을 도원수, 홍다구를 우부원수, 류복형을 좌부원수로 삼아 몽고군 25000명, 고려군 8000명, 수로안내 67000명 등 모두 31700명이 合浦(마산)에서 900척의 전함에 분승, 대마도와 일기도를 거쳐 하카다항(博多港)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으로 11월 철수했는데 생존자는 13500명에 불과해 66%가 희생된 것이다.
2차 동정군은 1281년(辛巳 忠烈王7) 5월 1차 때의 지휘관에 박구, 김주정 등이 포함됐다. 麗元연합군의 규모는 정벌군 996명, 초군 및 수군 97029명인데 이들도 대마도와 일기도를 거쳤다. 그런데 홀로물탑(忽魯勿塔)이 지휘한 몽고수군 113명과 초병 36명이 돌연 행방불명된 사건이 발생했다. 김방경은 처음에는 상당히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지휘관이 죽고 11월 생환한 연합군은 1,939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寄知兵馬金尙書碩(p.93)
萬騎重來鎭海涯 = 만기가 거듭 와서 해변을 진압하니
威風先向橘州馳 = 위풍은 먼저 귤주(제주)를 향해 달리네
一鞭尙可笞蠻越 = 채찍 한번으로 만월(삼별초)을 칠 수 있거늘
小寇雖往不足疑 = 조그만한 도적 사나와도 문제될 것 없네
紫髥金甲氣凌雲 = 붉은 수염 금 갑옷의 기상은 구름을 능가하네
餘事篇章亦不群 = 그 밖의 문장도 무리를 뛰어났네
往日松巒還恨在 = 가난한 송만(송광사)에서 남은 한이 있는데
一燈何夕細論文 = 어느 날 저녁 등잔 밑에서 자세히 글을 논하리
※ 1258년 3월 고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최의를 타도함으로써 4대 63년에 걸친 최씨 정권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아직 무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대몽강경론은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태자가 몽고로 입조하는 것을 반대하며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다시 몽고의 침입을 유발하여 1258년 4월 몽고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몽고군은 서 북 지방을 거쳐 경기, 황해, 충청 지방을 제압할 뿐만 아니라 동북 지방으로 남진하여 1259년에는 인제 방면까지 진출하였다. 피해는 극심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낀 끝에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군에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몽고군은 강화도 건너편 경기지방에 공격을 집중하여 이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강화를 고립시키자, 고려는 드디어 1259년 3월 태자의 직접 조공을 조건으로 한 휴전에 합의했다.
1259년 4월 약속대로 태자 이 몽고로 출발하였다. 6월, 고려에서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몽고와의 전쟁으로 보낸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7월에는 몽고 황제 헌종도 병사하였다. 고려와 몽고의 새로운 계승자인 전과 쿠빌라이가 개봉에서 만났고, 양국 간의 전쟁은 이로써 종식되었다. 몽고로부터 돌아온 세자 전은 1260년 3월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원종이다. 어쨌든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되자, 이를 실질적으로 성사시킨 국왕 원종과 문신관료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무신 세력이 도태된 것은 아니었다. 강화도에서는 무신 김준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국왕을 배제하고 개경 환도를 늦추면서 세력기반을 확충하려 하였다. 이에 몽고는 개경 환도를 재촉하면서 김준을 소환하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강화 이후 위축 되던 무신들은 몽고와의 재대결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뒤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 의 재대결을 기도했다.
이에 원종은 몽고에 원군을 청하였고, 강화도에서 문신관료들이 임연의 아들인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1270년 무신들의 정권은 완전히 종식 되었다. 그러나 모든 고려인이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조정에서 강화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경정하자, 이를 몽고에 대한 항복과 종속으로 받아들이고 강력히 반발했다.
이들은 원종의 해산명령을 무시하고 몽고군과 굴욕적인 유전에 반대 하며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원래 최우가 수도의 치안유지를 위해 창설한 야별초로부터 시작했다. 야별초는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고와의 항전기간 동안에는 몽고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온 장정들로 신의군을 조직하면서 삼별초가 됐다.
최씨정권을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사적으로 양성한 군대가 있었음에도 불가하고 국가의 공병조직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둘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자기 가문의 사병들과 별도로 국고에 의해 운영되는 공병으로서 삼별초를 육성하여 정권의 무력기반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수족으로서만 가능하였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대몽항쟁 기간 중 그래도 국가의 공병으로 몽고군과 교전을 벌인 집단이 바로 이 삼별초이다.
삼별초는 백성들이 농성 중인 산성이나 섬 방어별감과 함께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파견되어 함께 싸우기도 하고, 때로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몽고군에 대항해 함께 싸운 경험은 훗날 삼별초의 항쟁에 농민들이 적극 호응하게 되는 배경이 됐다. 농민들은 천민계급인 자신들과 함께 침식을 같이하고 생명을 나눈 삼별초군을 동지로 여긴 것이다. 1270년 6월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승화후 온을 옹립하고 강화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을 순수한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것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별초의 반란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원종이 삼별초의 해체를 명한 데 있었으며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활용되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삼별초 항쟁은 부분적으로 배제되어 가는 무신정권의 잔여 세력들이 왕권강화와 친정체제 구축을 시도하는 원종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원종의 이런 정치적 움직임은 몽고의 후원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반대편에서 움직인 삼별초는 자연히 반몽적(反蒙的)인 민족 항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6월 3일 강화도의 삼별초군은 1천여 척의 함선을 타고 진도로 이동했다.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을 제압하였고 제주도까지 장악하였다. 삼별초의 반란에 당황한 것은 개경의 원종 조정이었다.
반란 당시 이를 진압할 병력조차 제대로 없었던 개경 조정 은 몽고에 원군을 요청, 1270년 11월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 앞바다에 진출하였으나 울둘목에서 삼별초군이 반격으로 대패하였다. 삼별초군은 수차의 전투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방심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271년 5월, 삼별초군 중 상당수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 개경의 정부군과 몽고군은 기습적으로 진도에 상륙, 공격을 감행했다.
한 때의 승리에 도취된 삼별초는 너무 자만했다. 기습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삼별초군이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사이도 없이 진도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했다. 진도라는 거점을 잃고 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지도자로 하여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했다. 1272년부터 삼별초군은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그 위력은 상당히 위축돼 있었다.
1273년 2월 여몽연합 군 1만여 명이 제주의 삼별초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끝까지 용전분투하였으나 지도자 김통정은 산중으로 도피하였다가 죽고, 나머지도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됨으로써 3년여에 걸친 항쟁도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의 기층민들은 개경의 조정보다는 삼별초에 보다 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2) 農民과 같이 우는詩
◊ 憫農黑羊(p.77)
農事須及時 = 농사는 모름지기 때가 있는데
失時無復爲 = 때를 놓치면 어찌할 수 없네
農時苦無幾 = 농사 때란 얼마 안 되니
春夏交爲期 = 봄 여름 바뀔 때가 가장 적기이네
春盡夏己生 = 봄이 다가고 여름이 되니
農事不可遲 = 농사일을 늦출 수 없네
上天解時節 = 하늘이 시절을 알아서
膏澤方屢施 = 은택을 자주 사방으로 베풀지만
東征事甚急 = 일본 정벌이 시급해서
農事誰復思 = 농삿일을 누가 다시 생각하랴
使者恒絡繹 = 사신은 끊이지 않고
東馳復西馳 = 동으로 서로 달리네
卷民空卷閭 = 백성들이 전역(戰役)에 가니 고을은 비었고
馬驅向江湄 = 말은 달려 강으로 향하네
日夜伐山木 = 밤낮으로 벌목하여
造艦力己疲 = 전함 만들다 힘을 다했고
尺地不墾闢 = 척지도 개간하지 못했으니
民命何以資 = 백성들은 무엇으로 연명하랴
民戶無宿粮 = 가구마다 묵은 양식은 없고
太半早啼飢 = 태반은 벌써 굶어서 우노라
況復失農業 = 하물며 다시 농업을 잃었으니
當觀死無遺 = 당연히 다 죽음만 보겠네
嗟予亦何者 = 슬프다! 나란 무엇하는 사람인가?
有淚空漣洏 = 공연히 눈물만 흘러내리네
哀哉東土民 = 슬프다! 동토의 백성이여
上天能不悲 = 하늘마저 슬퍼하지 않네
安得長風來 = 어찌 장풍이 불어와서
吹我泣血詞 = 나의 읍혈시를 불어가려나
一吹到天上 = 한번 부니 천상에 이르러
披向白玉지 = 임금 계신 뜨락에 이르나니(뜨락지)
詞中所未盡 = 시로서 못다 한 말들
盡使上帝知 = 상제로 하여금 다 알게 하리
◊嶺南艱苦狀 二十四韻(p.67)
嶺南艱苦狀 = 영남지방의 간고한 모습
欲說泲將先 = 말하려 하니 눈물이 먼저 흐르네
兩道供軍料 = 두 도(경상.전라)에서 군량을 준비하고
三山造戰船 = 세 곳의 산(변산.천관산?)에서 전선을 만들었네
征徭曾百倍 = 부세와 요역은 백배나 되고
力役亘三年 = 역력은 삼년이나 뻗쳤네
星火徵求急 = 징구는 성화 같이 급했고
雷霆號令傳 = 호령은 우레처럼 전하네
使臣恒絡繹 = 사신도 항상 계속 되었고
京將又聯翩 = 서울의 장수는 잇달아 있네
有臂皆遭縛 = 팔은 있어도 모두 묶여있고
無胰不受鞭 = 채찍 받지 않은 등심 없었네
尋常迎送慣 = 맞이하고 보내는 것은 보통 익숙해졌고
日夜轉輪連 = 밤낮으로 수송이 이어졌네
牛馬無完脊 = 우마는 완전한 등은 없고
人民鮮息眉 = 인민도 쉬지 못했네
凌晨採葛去 = 새벽에는 칡 캐러 가고
踏月刈茅還 = 달빛 맞으며 띠풀 베어 돌아오네
水手驅農畝 = 수수(水夫)는 밭고랑으로 몰고
梢工卷海堧 = 초공은 해변으로 가네
抽丁擐甲冑 = 하인 뽑아 갑옷 입히고
選壯荷戈鋋 = 장사 뽑아 창 메게 하네
但促尋時去 = 단지 시간이 촉박하니
寧容寸刻延 = 어찌 촌각이라도 지연이 용납되랴
妻孥啼躄地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父母哭號天 =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自分幽明隙 = 유명이야 다르지만
那期性命全 = 성명(목숨)이 온전함을 어찌 기약하랴
孑遺唯老幼 =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 뿐
强活尙焦煎 =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村村皆廢田 = 마을마다 전지가 모두 황폐했네
誰家非索爾 = 어느 집인들 수색하지 않으며
何處不騷然 =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랴?
官稅竟難免 = 관세도 면하기 어려운데
軍租安可蠲 = 군역을 어찌 덜겠는가?
瘡痍唯日甚 = 백성의 질고는 날로 심하고
疲療曷由痊 = 피곤과 병을 어찌 회복하랴
觸事悉堪慟 = 접하는 일마다 모두 슬픔을 견디려니
爲生誠可憐 = 삶이란 정말로 가련하구나
雖知勢難保 = 비록 형세 보존키 어려움을 알지만
爭柰訴無緣 = 하소연 할 곳 없음을 어찌하랴
帝德靑天覆 = 황제의 덕은 푸른 하늘처럼 덮었고
皇明白日懸 = 황제의 밝음은 대낮 같구나
愚民姑且待 = 어리석은 백성은 진실로 기다리니
聖澤必當宣 = 성택은 반드시 베풀어지리라
行見三韓內 = 삼한 안에서 볼 수 있으리
家家尊枕眠 = 집집마다 베개 높이 베고 잠잘 수 있기를
3) 高官들과의 交流 詩
◊次朴按廉恒 題密城三郞樓詩韻(p.9)
湖上靑山山上樓 = 호수 위에 청산, 청산 위에 삼랑루
美名長與水同流 = 아름다운 그 이름 오랫동안 물과 같이 흘러갔네
傍洲沙店排蝸殼 = 물가 모래밭의 가게 달팽이 껍질처럼 진열됐고
逐浪風船舞蠲頭 = 물결 좇는 돛배 날으는 새처럼 춤추네
桑拓煙深千里暮 = 뽕나무 숲 연기 짙어 천리가 저문데
芰荷華老一江秋 = 마름과 연이 무르익어 온 강이 가을이네
落霞孤鶩猶陳語 = 저녁노을 외로운 따오기도 진부한 말
故作新詩記勝遊 = 짐짓 새로이 시 지어 승경놀이 기록하리
※ 朴恒(1227~1281) : 춘천 박씨 시조,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忠州牧使.右正言.承宣.贊成事역임. 동정 때 몽장 忻都.洪茶丘의 행패가 심하자 원 세조에게 글을 올려 견제함. 시호 文懿.
◊寄按廉金侍御詩幷書(p.22)
「伏蒙提刑學士閣下 按轡之初 先訪山居 不勝感荷 强成山語 寄呈行軒 仍邀再訪云」(제형학사각하(안찰사)의 안비(고관의 행차) 초에 먼저 산거를 방문하였음으로 감격하여 거치른 말을 억지로 써서 행헌에 부쳤더니 다시 방문하면 맞아달라고 했다)
州君爭瞻怨後子 = 주군이 서로 다투어 나보다 뒤진 것을 원망하였네
廉公先訪老僧居 = 염공은 먼저 이 늙은 승려의 거처를 방문해줬네
通宵軟語雖云足 = 밤이 다하도록 다정한 말 어찌 다하랴
積日幽懷尙未攄 = 날이 쌓여도 그윽한 회포 다 풀지 못했어라
髣髴高吟猶在耳 = 방불한 고음 귓가에 쟁쟁한데
殷勤淸夢自隨車 = 은근히 맑은 꿈은 저절로 수레 따르네
一麾早晩重相過 = 한 깃발 들고 조만간 다시 방문한다기에
月楊風欞己掃除 = 달 비치는 책상 바람찬 창을 이미 청소했네
◊復用前韻寄金提刑(p.22)
一軸詩來忽起予 = 한편의 시가 홀연히 나를 일으키니
十分光彩輝山居 = 충만한 광채는 산거를 빛나게 하네
感情己借灯心結 = 느끼는 정은 정심을 빌어 맺어지고
戀意空憑筆舌攄 = 사모하는 생각은 공연히 필설을 의지해 풀리네
堆案簿書妨宴寢 = 책상에 쌓인 문서 편안한 잠에 방해되고
滿街旌旆시征車 = 거리에 가득한 깃발 나그네 수레를 씨끄럽게 하네
何如暇日尋僧話 = 날을 택해 중을 찾아와 이야기 나누면서
萬種塵緣盡屛除 = 온갖 가지 속세의 인연 모두 씻어버리면 어떠하리
※ 金提刑(미상, 提刑은 관직명)
◊戱答分揀 金侍郞晅(p.33)
嶺外初聞杖節行 = 고개 밖에 장절이 행차한다는 소문을 처음 듣고
幾廻魂夢役長程 = 몇 번이고 혼과 꿈이 먼 길의 역을 돌았던가
使君何惜一郵吏 = 그대가 어찌 한 사람의 역리를 아끼겠는가
不獨山僧似簿情 = 오직 산승에게만 정이 엷은 것 같이는 않네
昔向關東万里行 = 옛날 관동(函谷關 以東)을 향해 만리를 갈 때
遙將老淚洒歸程 = 멀리서 늙은 눈물을 돌아가는 길에 뿌렸네
此廻重見眞如夢 = 이번 돌아오면 다시 뵈오리니 정말 꿈만 같아라
何害停車話舊情 = 수레 멈추고 옛정 이야기하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復次前韻答採訪金侍郞晅(p.50)
千峯影裏小堂幽 = 일천 봉우리 그림자 속에 작은 초당이 고요한데
獨坐寥寥白日悠 = 홀로 앉아 있노라니 적적하고 백일은 끝이 없네
滿篋新詩經幾閱 = 상자에 가득한 새로 지은 시 몇 번을 읽었던가
一灯淸話憶曾遊 = 한 등불 아래 많은 이야기 옛적 놀던 생각일세
却因有限逢時樂 = 유한한 만남의 즐거움 때문에
剩得無窮別後愁 = 이별 후의 무궁한 근심을 얻었으니
莫負松巒重會約 = 송만(조계산)에서 다시 만날 약속 저버리지 말게
良辰應不爲人留 = 좋은 때란 응당 사람 위에 머물지 않으리
◊戱答鈍才金公晅(p.171)
爲人幸自甘無用 = 사람됨이 다행히 쓸모 없음을 달갑게 여겨
卜地仍兼要不爭 = 자리 잡을 곳도 다툴 필요가 없건만
叵耐業風吹落此 = 업의 바람 불어 이곳에 떨어지게 함도 견딜 수 없어
平生雅志未能成 = 평생의 우아한 뜻 이루지 못했네
一時鋒鏑今何怪 = 한 때의 봉적(창과 살촉) 이제 무엇이 이상하리
六代衣盂古亦爭 = 육대의 의발 옛날에도 다투었나니
縱使毘嵐敢搖落 = 설사 비람풍(폭풍)이 흔들어 떨어뜨리려 해도
少林花果本圓成 = 소림의 꽃과 열매(禪風)는 본디 원성한 것을
※ 金晅(1234~1305)=1250년 문과급제, 1269년 聖節使 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을 때 林衍이 왕을 폐하고 安慶公 淐을 세우자 원제는 세자 諶(충렬왕)을 東安公으로 책봉, 임연을 치려 하자 훤의 권유로 중지함. 김훤은 금주 방어사.예부낭중.도호부사 등을 역임했다. 그의 남행은 1270년대 초로 보임.
◊西原牧伯尙書李公(p.33)
「西原牧伯尙書李公 送至布川慈氏院 臨別之際 不勝悒悒 强綴蕪辭 奉呈左右二首」서원목백인 상서 이공이 포천의 자씨원(논산군)까지 전송함으로 이별할 때 섭섭함을 이기지 못해 어설픈 말로 억지 시를 지어 좌우에 바치다.
道喪人誰肯斷金 = 도 잃은 사람 누가 깊이 사귀기 원하리
感公恩愛久彌深 = 공의 은애 오랠수록 깊어감에 감동했네
仰憑慈氏靑蓮眠 = 미륵보살의 천연면(佛의 눈)을 의지하여
質我平生一片心 = 내 평생의 한 조각 단심을 맡기려네
閑忙相聚勢誠難 = 한가하고 바빠 서로 모이기 정말 어려우니
世故年來況漸艱 = 세상일은 근래로 점점 어려워지네
此去重逢應未易 = 이번 기회 놓치면 다시 만나기 어렵나니
臨分可免涕淚湲 = 이별에 다다라 눈물 흘러내림 면할 수 있을까?
※李敖(李淑眞)=中書舍人으로 1270년(원종11) 郎將 尹吉甫와 仇浦에서 三別抄를 공격, 전과를 오리고 1271년 按廉使로 있을 때 方甫 등이 진도의 삼별초와 내응하려 하자 공격하여 討平했다. 충지와는 막역한 친구다. 그가 1275년 3월 원나라를 방문하라는 왕의 조서를 받고 가다가 아프다는 구실로 포기하고 李公의 주선으로 華井寺에서 下安居를 했던 곳이다.
◊寄西原李尙書敖(p.34)
相從語軟思華井 = 서로 만나 부드러운 말 화정사를 생각하니
遠送恩深記布川 = 멀리 전송한 은혜 깊어 포천(논산)을 기억하네
別恨感情渾入骨 = 이별의 한과 감정이 뼛골까지 스며들어
達人說着便潸然 = 사람 만나 말하려 하자 눈물이 흐르네
◊奉似牧伯尙書李公(p.34)
「至元十三年十二月 受請重到西原 寓居玄巖蘭若 奉似牧伯尙書李公」(지원 13년(1276) 12월 청을 받고 다시 서원(淸州)에 도착하여 현암란약에 우거하면서 목백 상서 이공에게 드림)
去年華井小軒中 = 지난해 화정사 작은 집에 머물면서
旦夕相從笑語同 = 아침저녁으로 서로 만나 담소하였네
別淚未乾重到此 = 이별의 눈물 마르기도 전에 다시 온 것은
只緣恩愛少如公 = 은애로운 인연 공과 같은 사람 없기 때문이라오
◊西原道俗出城泣送(p.39)
大都餞客意難中 = 대개 손님을 전송할 때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爲有從前繾綣情 = 전부터 깊은 정이 있기 때문이네
底事滿城緇與白 = 무슨 일로 성에 가득한 승려와 신도들이
一時揮涕送吾行 = 일시에 눈물 뿌리며 내가 가는 길을 보내는가?
◊相國儱西公寄呈行幕(p.168)
「相國儱西公 伴上朝中使 監督嶺南 東征兵艦 夜半躬訪山居 不勝感荷 作惡詩一篇 寄呈行幕」(상국 儱西公이 원나라 사신과 영남지방의 동정군함 건조실태를 감독하러 왔다가 밤중에 몸소 산속을 방문했음으로 그 고마움을 견디지 못하여 조악한 시를 지어 행막으로 보냈다. 儱西公은 청주 牧伯 李敖)
世人定交貴勢利 = 세상 사람의 사귐은 세리를 귀하게 여닌데
誰敢施恩不報地 = 누가 감히 은혜 베풀고 갚지 않으리
相公獨與時俗異 = 상공은 홀로 시속과 달라
出處升沈心不二 = 진퇴와 성쇠에 두 마음이 없었네
我曾逃世脫塵累 = 나는 일찍 세상을 도망쳐 속진의 번뇌를 벗어나
踪跡便向雲山寄 = 발자취는 구름 산을 향해 붙였지만
公乃遭時得其志 = 공은 때를 만나고 뜻을 얻어
歷盡淸資登相位 = 두루 청자를 거쳐 정승 자리에 올랐네
閑忙旣己兩殊致 = 한가하고 바쁨이 이미 양쪽이 다르게 되었나니
况我疎頑無可記 = 하물며 나는 소홀하고 둔해 쓸 만한 것이 없네
公猶眷眷不遐棄 = 공은 사랑하여 멀리 버리지 않으시고
終始恩情等昆季 = 시종 베푸는 은정은 형제와 같았네
何當一廻得相値 = 어떻게 하면 한번 서로 만날 수 있으리
北望時時苦瞻企 = 북쪽을 바라보며 때때로 괴롭도록 보고 싶어 했는데
上天元不逆人意 = 상천은 원래 사람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다기에
苟有所欲必敎遂 = 진실로 바라는 일을 반드시 이루게 했네
前春來伴天子使 = 지난 봄 천자의 사신과 같이 와사
因向松巒廻玉轡 = 송만을 향하여 옥 수레 고삐를 돌렸나니(轡:고삐 비)
我時聞之卽馳至 = 나는 그 때 (소식) 듣고 곧장 달려가
一夕攀陪償宿冀 = 하루 저녁 모시면서 옛 소망 이루었네
忽忽未暇話心事 = 바쁜지라 심사를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握手無言但相視 = 손잡고 말없이 서로 보기만 했었지
別來遺恨滿胸次 = 이별 후 남은 한 가슴에 가득해
時復懸懸勞夢寐 = 때때로 그리워서 꿈속에서도 괴로와했네
俄有人來傳信字 = 잠시 후 어떤 사람이 편지를 전하네
又向江南監戰備 = 강남을 향해 전쟁준비를 감독하고
此行當須訪山寺 = 이번 행차에 산사를 방문하는데
爲報主人且相遲 = 좀 늦을거라고 주인에게 알리라 하네
開緘喜閱至數四 = 편지 뜯어보고 기뻐서 세 번 네 번 읽었고
急掃風軒望來墍 = 급히 풍헌을 소제하면서 와서 쉬기를 바랐네
方將中使馳馹騎 = 중사를 데리고 말로 달린다기에
竊恐尋僧誠不易 = 중을 찾기란 진실로 쉽지 않을까 두렵네
何期半夜踏山翠 = 어찌 밤중에 푸른 산 밟고 와사
叩門驚我禪餘睡 = 참선 후 자던 나를 문 두드려 놀라게 할 줄 기약했으리
倒屣欣迎促座侍 = 신 거꾸로 신고 반가이 맞아 좌석에 모시고
徒容半日論情思 = 조용히 한나절 정을 나누었네
平生幾度受恩賜 = 평생 몇 번 은혜 받았으나
此廻此惠固無譬 = 이번 이 은혜와 비교할 수 없네
歡娛未足促飛駟 = 즐거움 만족하지 않았는데 말 재촉해 달리니
斗覺梅酸先入鼻 = 먼저 코끝이 찡함을 깨달았네
中心兀兀漸如醉 = 심중이 뒤흔들려 점점 취한 것 같고
使我一朝顔色倅 = 하루 아침에 나의 안색을 초췌하게 하나니
感情離恨無與誶 = 감정괴 이별의 한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獨坐誰知抆雙淚 = 혼자 앉아 두 줄기 눈물을 닦을 줄 누가 알리
◊寄天安府守韓郎中珪(p.36)
君鬢靑靑我未鬚 = 그대 귀밑머리 청청하지만 나는 아직 수염도 나지 않아
幾年相逐共相娛 = 몇 년이나 서로 좇으며 서로 즐기었던가?
莫言今日閑忙異 = 이제 한가로움과 분주함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交道寧隨象服殊 = 사귀는 도 어찌 복상(장식) 따라 드르랴!
◊按廉潘公再訪山中(p.63)
每歲觀風閱兩番 = 해마다 관풍(지방풍속)을 두 번씩 겪나니
淸平誰有似高軒 = 청평하기 그 누가 반공 같은 분이 있으랴
閭閻枕穩聞爭賀 = 여염의 베개가 편안해 축하소리 다퉈 들리고
囹圄庭空絶滯寃 = 감옥이 비었거니 원통한 일이 없어졌네
憂國日添鬚髮皓 = 나랏일 걱정으로 휜 털이 날로 생기고
訪僧時許笑談溫 = 승려 찾으매 때론 따뜻한 담소도 허락하네
定看褒詔徵還旆 = 산중에서 책상 마주해 나누던 이야기 잊지 말게
◊寄呈都統洪相國幕下(p.69)
嶧陽佳處碧梧高 = 역양산 아름다운 곳엔 푸른 오동나무 높나니
能致來儀鳳九包 = 아홉 마리 봉황이 위엄을 갖고 깃들이네
幽谷空餘荊棘樹 = 깊은 계곡에 부질없는 가시나무만 남아
年年唯見野禽巢 = 해마다 들새들의 둥우리만 보게 됐네
◊寄呈睡齋洪相公座右(p.172)
「來詩云 自從主席曹溪後 楓岳無由一破顔 故云」(보내온 시에 '조계에서 주석한 뒤로 풍악에서 한 번도 웃을 길이 없었네'라고 했음으로 금강산을 가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그 韻을 따라 좌우에 드림)
但使身心觸處安 = 다만 신심을 거처한 곳마다 편안케 할 뿐
不須棲息要名山 = 사는 곳이 꼭 명산일 필요는 없네
我生况與雲無定 = 내 생애 구름처럼 정처 없거니
楓嶠何難得解顔 = 풍악에서 웃음짓기 어찌 그리 어려우리
千里來書枉問安 = 천리에서 편지 보내 문안하시니
淸風髣髴到窮山 = 맑은 바람이 궁벽한 산에 이른 것과 흡사하네
雖然不涉根塵事 = 그렇다 해도 근진(5境)의 일은 간섭할 수 없나니
爭似相逢一睹顔 = 어찌 서로 만나 얼굴 한번 본 것만이야 하리
※ 洪子藩(1237~1306)=문과에 급제, 남경유수판관.廣州通判.忠淸 慶尙全羅道 按察使.戶部侍郞.부승지.知密直司事로 東征艦建造指揮.知僉議府事世子貳師.僉議贊成事.判典理司世子師.1305년 원나라에 갔다가 모함으로 귀국 못하고 그곳에서 타계함.
◊元帥相國復用前韻寄呈(p.125)
負郭何須二頃田 = 성곽을 등졌는데 두 이랑의 밭이 무엇에 필요하여
金章玉佩兩爭鮮 = 금장과 옥패 둘이 아름다움을 다투는가
不敎聖主憂南紀 = 성주로 하여금 남방의 기강을 근금치 않기 위하여
故輟文衡出鎭邊 = 문형을 거두고 진변으로 보냈으리
摧殘槁木不知春 = 꺾이어 쇠잔한 마른나무의 봄을 알지 못하고
點撿餘生死己濱 = 남은 인생 점검하니 죽음이 가까웠네
幸値南巡猶未遇 = 다행이 南巡했으나 만나지 못했으니
也應無復謁高人 = 응당 다시는 높은 사람 만날 수 없으리
※ 金周鼎(?~1290)= 대장군 金吾衛의 아들로 1264년 문과장원, 吏部侍郞.1274년 文府卿左司議大夫.金方慶귀양 석방운동.좌부승지.1281년 2차 동정 때 昭勇大將軍右副都統.知密直司事를 역임했다. 그가 南巡한다는 소식을 듣고 충지는 두 번 글을 보냈는데 그는 자신의 부관을 보내 방문하지 못함을 알리자 앞의 운을 사용해 시를 지어 보낸 것임.
◊謝李相國寄惠葉茂實(p.90)
「謝李相國 寄惠柯山葉茂實 所製佳墨一鋌」(이상국이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가산 엽무실이 마든 먹을 한개 보내준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함)
柯山妙手天下獨 = 가산의 묘한 솜씨는 천하에서 제일인데
壓倒廷珪與潘谷 = 정규(南唐易水人)와 반곡(宋歙人)을 압도하네
一技翠餠百金輕 = 한 가지 푸른 떡은 백금을 가볍게 만들었거니
奚啻隨珠兼卞玉 = 어찌 수주와 변옥에 견줄 수 있으리
自從柯山上昇去 = 이제 가산 쫓아 올라 간다지만
當世求之不易得 = 이 세상에선 구하려 해도 쉽게 얻지 못하는 것을
況今時遙風土殊 = 하물며 이제 시대가 다르고 풍토가 다른데
而我何由致其墨 = 어떻게 그 먹이 나에게 왔는가?
昨朝忽得相公信 = 어제 아침 홀연히 상공의 편지를 받았네
書中有語誠款曲 = 편지 가운데 간곡한 정성이 있었네
謂言燕都獲此墨 = 말하기를 연도에서 이 먹을 얻어서
分寄曹溪與鷄足 = 조계산과 계족봉으로 나누어 붙인다고 했네
開緘龍麝香滿手 = 편지를 개봉하니 용사(사향)의 향기는 손에 가득하고
光彩瑩澤驚人目 = 빛나는 광채는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네
波紋數寸縮溟渤 = 물결무늬 수치에는 큰 바다가 웅크리고 있는데
中有雙龍戱相逐 = 그 가운데 두 용이 희롱하며 따르네
仲將點漆何足珍 = 중장(삼한시대 魏人)의 점칠벽이 무슨 보배가 되며
承晏軟劑非所欲 = 승안묵의 연한 재료도 갖고 싶지 않네
十襲藏爲篋中寶 = 열겹으로 싸 상자에 보관하여 보배로 삼을 뿐
不敢磨硏書簡牘 = 편지 쓰는 데는 이 먹을 사용하지 않으리
相公厚意何以酬 = 상공의 깊은 뜻 무엇으로 갚으리
但把爐煙勤薦祝 = 다만 향로 안고 축수를 기원하리니
顯公千春又萬春 = 원컨대 공은 천년만년 오래 사시어
兩鬢長如點蛾錄 = 양 귀밑털은 길어 아록(눈썹)으로 그린 것과 같아지리
※ 李尊庇(初名 仁成)=일찍 부모를 여위고 외삼촌 밑에서 자라 원종 때 문과급제, 내시를 거쳐 密直副使로 원나라 聖節使.1287년 일본정벌 때 경상 전라 충청도 巡問使로 병량과 병선조달의 임무를 수행하고 判密直司事를 역임.
◊次韻答韓小卿謝奇(p.173)
「次韻答韓小卿謝寄 在燕京所寄」(平陽郡守(順天)를 지낸 바 있는 소경 韓謝奇가 연경에 있으면서 보내준 시에 '此生重面是何時' 즉 이 생애 어느 때 다시 얼굴 볼 수 있으랴 라는 운에 따라 답함)
去歲春風慘別離 = 지난해 봄바람에 이별 슬프더니만
至今空有夢相隨 = 지금도 부질없이 꿈속에서 서로 따르고 있네
但能善保千金重 = 천금같이 중요한 몸 잘 보전하노라면
一笑寧無再面時 = 한번 웃음짓는 재회의 때가 왜 없으리
◊韓侍郞聞予嗣席曹溪(p.139)
「韓侍郞 聞予嗣席曹溪 以詩寄賀 次韻答之」(한시랑이 내가 조계의 자리(社主)를 계승했다는 것을 듣고 시를 지어 축하함으로 그 운을 따라 답함)
誰敎窮予濫傳家 = 누구가 궁자에게 외람되이 가계를 전하게 했던가?
愧把巴音續郢家 = 파음을 잡아 영가(천한 음악)를 이는 것 부끄러워라
若問山中何事業 = 만약 산중에 무슨 사업이 있는가 묻는다면
一盂蔬了一盂茶 = 한 발우의 나물과 한 사발의 차라 하리
◊答竹堂李中舍混(p.139)
瑞羽靈芝出海東 = 서우(鳳凰) 영지(瑞草)가 해동에 생산되거니
嘉聲時復及山中 = 아름다운 소리 때때로 산중에 들려오네
自嗟朝野成胡越 = 조정이 호월(호국 월국) 이루는 것 슬퍼하나니
無計同分一楊風 = 한자리의 바람 같이 나눌 계획 없네
紅輪杲杲曉昇東 = 붉은 태양 아름답게 새벽 동녘 하늘에 떠오르네
雲翳渾消六合中 = 가린 구름 천지에 사라지리니
若信十萬都一照 = 온 세상이 하나의 빛이라 믿는다면
便知千里亦同風 = 단지 천리가 같은 바람인 것을 알텐데
※ 李混(1252~1312)=1268년 문과급제, 廣州參軍.國學學正.僉議舍人.우부승지.서북면도지휘사.동밀직사사.판밀직사사 역임. 銓選 때 뇌물로 재산을 모우다 寧海로 귀양가서 지은 舞鼓가 樂府에 전함.
◊寄賀新承宣李公混(p.183)
高爵當早取 = 높은 벼슬은 일찍 얻어야 하리
衰年亦何求 = 늙은 나이에 또 무엇을 구하리
嘉公未四十 = 훌륭하다 공은 사십도 안 되어
獨步拜龍候 = 홀로 용후(承宣)에 제배 되었네
錄鬢連頳頰 = 푸른 귀밑머리 붉은 볼에 이었고
紅腰映紫矜 = 붉은 허리에 옷깃이 비치네
遙知拜龍寵 = 멀리서도 임금의 사랑 받음을 아나니
光彩動詞林 = 광채가 사림(翰林의 별칭)에 울림을
富貴順人情 = 부귀가 인정을 따르면
能令擾方寸 = 방촌(마음)을 어지럽게 하리
願公猛提撕 = 원컨대 공은 맹렬히 노력하여
愼勿遭折困 = 꺾이어 곤궁함을 당하지 말게나
◊寄安集權侍御宜(p.70)
截鐙留鞭歲月移 = 등자 끊고 채찍 머물러 둔지 오래지만
平陽舊澤尙淪肌 = 평야의 옛 은혜 아직도 살갗을 적시나니
今來再謁雖堪喜 = 지금 와서 다시 만나니 기쁘기는 하나
暫遇還離最可悲 = 잠시 만나도 다시 이별하는 것 가장 슬퍼라
戀意難將千古盡 = 사모하는 뜻 천고에 없어지기 어렵나니
感情唯冀兩心知 = 이 감정은 서로 알아주기를 바라네
願公終始恩前好 = 원컨대 공은 시종 앞의 좋은 일만 생각하여
在在時時永不遺 = 어느 곳 어느 때나 영원히 저버리지 마시길
※ 權宜=문신으로 내직에 있다가 承旨 廉承益과 친해 慶尙道按廉使로 재직할 때 재물을 탐해 파면됐다 뇌물을 주고 다시 正郞으로 복직됐지만 또 유배됐다 1287년 全羅道王旨別監되고 이어 版圖摠郞에 오른 인물.
◊次韻奉答廉相國(p.138)
郡王倚作濟川舟 = 군왕의 부탁으로 내를 건너는 배가 됐으니
獻替何曾得暫休 = 헌체(바른 건의)하기에 언제 잠시인들 쉬었으랴?
莫爲一身思獨善 = 한 몸을 위해서 독선을 생각하지 말라
魚龍方喜泳洪流 = 어룡은 큰물에서 놀기를 좋아하나니
十載華亭空艤舟 = 10년간 화정에 의주(華亭和尙)가 비었는데
豈期黃蘗得裴休 = 어찌 황벽이 배휴를 얻을 줄 기대했으리
若無大手隄防力 = 만약 제방을 막을 큰 손의 힘이 없다면
爭使曹溪不倒流 = 어찌 조계가 거꾸로 흐르지 않으리
※ 廉承益(?~1302)=초명 惟直, 병을 佛供으로 治癒하며 기도하는 것을 일삼다 李之氐의 천거로 충렬왕의 총신이 되어 1278년 必闍赤로 저택을 지어 大藏寫經所로 삼음. 1284년 副知密直司事로 경상 전라 충정도 都巡問使.1287년 僉議評理.1293년 충렬와을 수행 원나라에 다녀와 1302년 승려가 됨.
◊南原趙太守見訪(p.136)
「南原趙太守 見訪 有特 次韻謝之 予曾寄南原詩云 千里同風便故人 何須目擊始相親 誰知鷄足山中老 曾是龍頭會上賓 南原是處故再云 在定慧寺」(남원의 조태수가 방문하면서 시를 주기에 그 운을 따라 사례함. 내가 남원(조태수)에게 준 詩에 '천리에 풍류가 같음은 바로 고향사람인데 어찌 보고야 친하리, 누가 알랴 계족산 가운데 이 늙은이 일찍이 용두회상의 손님인 것을'이라고 하였는데 남원이 바로 그곳임으로 다시 말한 것이다. 정혜사에서)
再捷龍門第一人 = 두 번이나 용문(春場과 殿試)의 제일인에 올랐으니
便將忠孝奉君親 = 충과 효로 임금과 어버이를 받들었네
欲窮世出世間事 = 세간과 출세간의 일을 다 알고자 하거든
來作鷄足山裏賓 = 와서 계족산 정혜사의 손님이 되어라
我本疎頑人外人 = 나는 본래 소완하여 인간 밖의 사람이니
世間誰復肯來親 = 세간의 그 누가 찾아와도 즐거이 친하리
不知今日亦何幸 = 알지 못했느니라! 오늘에 어찌 다행하여
坐致玉皇門下賓 = 앉아서 옥황문하의 손님이 되겠네
※趙得珠=春場에 장원한데 이어 1262년(원종3) 殿試에서도 장원급제한 수재로 남원태수를 거쳐 珍島縣令으로 재임 중 1282년(충렬왕8) 李英柱장군이 州郡을 순력할 때 관리의 賢.不肖를 살펴 上聞할 때 罷免됨. 아마 삼별초를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못한 책임으로 보임.
4) 兄弟들과 관련된 詩
충지는 文凱․信凱 두 동생이 있다. 그러나 동생들과 관련된 시는 두 수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圓鑑集에는 여러 수의 시가 있고 아버지의 관직 그리고 동생들의 다른 정보도 글속에서 확인되고 있다.
◊築舍弟文凱就官韻(p.192)
「元凱之弟擢魁科官至 平陽郡守文凱有詩云」(아우 문개가 장원급제하여 평양군수가 되었음으로 원개가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그러나 장원급제 후 바로 군수에 임명된 것은 아니므로 수긍하기 곤란한 대목이 있음)
月宮丹桂最高枝 = 월궁의 계수나무 가장 높은 가지를
去年今年兄弟折 = 거년과 금년에 우리 형제가 꺾었구나
黃金榜首吾曾占 = 황금의 장원급제 일찍이 내가 차지했는데
丹桂魁科子亦收 = 장원의 월계관을 그대 또한 거뒀네
千萬古來稀有事 = 천만 고래에 드믄 일이라
一家生得二龍得 = 한 집에서 두 마리 용을 길러 얻다니
◊舍弟平陽新守에게 준 詩(p.26)
「舍弟平陽新守文凱 將抵治州 先到山中 是夕會有雨 相與話盡十餘年睽離之意 不竟至天明 因記蘇雪堂贈子由詩中 所引韋蘇州 何時風雨夜 復此對床眠之句 作一絶以贈之」(아우 平陽守(순천) 文凱(文愷)가 州를 다스리기 위해 부임하다 먼저 이 산중에 찾아왔다. 이날 저녁 마침 비가 내려 서로 10여 년간 이별의 뜻을 나누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그리하여 蘇雪堂이 子由에게 준 詩 가운데 인용한 韋蘇州의 '어느 때 비바람 치는 밤에 다시 잠자리를 같이 할까'라고 하는 句를 기억하고 一絶을 지어 아우에게 주었다)
與君相別十三年 = 그대와 이별한지 13년
洛北江南雨杳然 = 낙북 강남으로 서로 묘연했네
那料鷄峯風雨夜 = 어찌 생각했으랴 계봉의 비바람 치는 밤에
白頭今復對床眠 = 흰머리로 이제 다시 잠자리 같이 할 줄을
◊燕京에서 舍弟에게 보낸 詩
「近者舍弟補闕 寄示閣下在松都時所贈盛作三 其末章云 鷄峯夜話未忘情 松下尋常夢裏行 爲我殷勤傳一語 大悲恩似邇來輕 讀至于此 且驚且感 時復諷詠 想望不能己 次韻强成山語二首 因風有寄云 公時在燕京」 (근래 아우 보궐(補闕)각하가 송도에 있을 때 보내 준(侍郞 韓謝奇便) 훌륭한 시 3편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 글귀에 '鷄峯의 밤 이야기를 잊지 못하여, 언제나 꿈속에서 소나무 아래로 가네, 나를 위해 은근히 한마디 말을 전하오, 큰 자비와 은혜 근래 가벼워진 것 같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읽고 놀라고 감격하여 때때로 읊으면서 그리워함을 마지못했습니다. 韻을 따라 억지로 거친 말로 2首를 지어 인편에 보냅니다. 충지는 1275년 원나라 세조의 요청에 따라 연경(북경)에 있었을 때이다)
屢通寒淑豈無情 = 여러 해 지났다 해서 어찌 무정하리
誰爲山僧告此行 = 누가 산승을 위해 이 행차 알렸는가?
莫把道交方世友 = 道의 사귐을 세상의 벗과 비교하지 말라
兩心相契固非輕 = 두 마음 서로 일치됨이 가볍지 않나니
地隔誠難寄遠情 = 땅이 막혀 멀리서 情 보내기 어렵고
嶺梅猶阻附人行 = 嶺梅조차 인편에 소식 보냄을 방해하누나
早年厮結眉毛在 = 일찍부터 만나 가까이 사궜는데
聚散何曾有重輕 = 모이고 흩어짐에 어찌 무겁고 가벼움이 있으랴
※ 嶺梅(大庾嶺에 있는 매화), 眉毛厮結(서로 만나는 것, 對面 또는 접촉)
◊季弟樞院堂이 兄에게 보낸 詩
「季弟樞院堂後璇(信凱) 聞前詩 次韻見寄 復用其韻答之」(두 형이 계봉 즉 定慧寺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막내 동생 추원당 璇(信凱)이 앞의 시에 次韻하여 보낸 詩다)
世亂今年勝去年 = 세상 어지러움 금년이 지난해보다 더하니
四方何處不騷然 = 사방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리
陟岡謾自勞相望 = 메뿌리에 올라 부질없이 바라보기도 괴로운데
盖被無因得共眠 = 이불 덮고 같이 잘 인연도 없어라
◊맏형(元凱)의 答詩
「前東閣舍人于公 亦次韻寄示 用其韻答之』,『公會守梁州 予住甘露 往來相從 公爲黃山江爲西湖」(전 동각사인우공이 앞의 운<동생의 시>을 따라 詩를 지어 보내주었음으로 그 韻을 사용하여 답함) 한편 공은 일찍이 양주군수(信凱)로 있었고, 나는(맏형) 甘露庵에 머물면서 서로 왕래하였다. 따라서 이 시를 통해 막내 동생도 梁州郡守였습이 확인된 것이다. 공은 黃山江(金海)을 西湖했다. 원감집의 역자 진교수는 脚註에서 作詩年代를 1273년이라고 했으나 1272년에 정혜사로 떠났기 때문에 맞지 않음)
出處睽離二十年 = 나아가고 물러가면서 등진지 20년
西湖會合豈徒然 = 서호에서 만났으니 어찌 헛된 것이랴
朅來鷄足峯前寺 = 계족봉 앞의 사찰(定慧寺)을 걸어 오가며
空憶當時對楊眠 = 부질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던 당시를 생각하네
※ 睽離 (서로 등져 떨어짐), 朅來 (發語辭, 왕래의 뜻)
西湖一別幾經年 = 서호에서 한번 이별한지 몇 년이 지났는가
往日遺蹤尙宛然 = 지난날 남은 자취 아직도 완연 하구나
士林應不棄長條 = 사림에서는 응당 이 좋은 점 버리지 않으리
簡篇堆案世緣少 = 책이 책상에 쌓이니 세상 인연 적고
蘭玉滿庭春色饒 = 꽃다운 난초 뜨락에 가득하니 봄빛이 풍요로와
天遺窮愁知有意 = 하늘이 절박한 근심 보내는 것 의미 있거니
要君氷雪琢三條 = 그대 어음과 눈(雪)에서 세 가지를 쪼아라
※ 三條 = 三條椽下, 僧堂單位의 別稱
座中但使淸樽凸 = 좌중의 맑은 술항아리 넘쳐나거니
鏡裏何憂白髮饒 = 거울 속의 백발 많은 것 왜 걱정하리
高臥北窓無一事 = 높이 북창에 누어 아무 일도 없는데
門前五柳自千條 = 문 앞의 오류는 천 가지나 늘어졌네
5. 禪.敎觀을 나타내는 詩
출가 이전부터 보통사람들과 의식이 달랐을 그는 스승 원오국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승려의 길을 걸었다. 그가 걷는 승려의 길은 생각보다 어려웠던 모양이다. 시 한 대목을 보자.(상략)…'세상살이 어렵고 편안함만 알았지 어찌 승려생활 배나 어려운줄 알았으리'(하략) 그 자신도 출가하면서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고 예상은 했을 것이다. 하지 만 막상 겪어보니 세속에서 예상했던 어려보다 훨씬 심했음 토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고려는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조정의 숭불(崇佛)정책도 불구하고 몽고의 침략과 지배는 민생을 3중의 고통에 빠지게 했다. 사찰 또한 생계의 조달방법인 토전을 전비조달을 위해 징발당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의 생애는 태어나면서 타계할 때까지 내우외환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허덕이는 그런 시대였다. 그런 모진 시대적 환경은 그의 선교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비굴하게 아부하고, 한편으로는 처절한 민생의 참상에 함께 울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고관대작들과 교분을 두텁게 쌓아가는 승려의 삶이 여러 곳에 묻어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고매한 승려의 면목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생(儒生)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진리는 하나이듯 그 어떤 하나에 이름을 느낄 수 있다. 이제 그의 선교관을 알아보자.
◊幽居(p.7)
棲息紛華外 = 번잡하고 화려한 세상을 벗어나 살면서
優游紫翠間 = 푸른 산속을 한가로이 노이나니
松廊春更靜 = 소나무 회랑 봄기운이 더욱 고요해
竹戶晝猶關 = 대나무 사립문 낮에도 빗장 걸렸네
檐短先邀月 = 처마 짧으니 달을 먼저 맞이하고
牆低不礙山 = 담장 낮으니 산이 가리지 않네
雨餘溪水急 = 비온 뒤 시냇물소리 급히 흐르고
風定嶺雲閑 = 바람 고요하니 고갯마루 그름 한가하네
谷密鹿攸伏 = 골짜기 깊으니 사슴이 엎드려 있고
悠然度晨暝 = 유연(구애받지 않음)히 아침저녁 지내면서
聊以養疎頑 = 애오라지 그럭저럭 살아가리
◊閑中自慶(p.10)
日日看山看不足 = 매일 산을 보아도 보는 것이 부족하고
時時聽水聽無厭 = 때때로 물소리 들어도 듣는 것이 싫지 않아
自然耳目皆淸快 = 자연히 이목이 맑고 상쾌하니
聲色中間好養恬 = 일체만경(萬境) 가운데 편안함을 기르네
◊入定慧作偈示同梵(p.10)
「至元9年壬申三月初入定慧作偈示同梵」(지원 9년(1272) 壬申 3월초에 정혜사에 들어가 偈를 지어 동범에게 보임)
鷄足峯前古道場 = 계족봉 앞 도량(정혜사)
今來山翠別生光 = 이제와 보니 푸른 산 빛 유별나네
廣場自有淸溪舌 = 맑은 시냇물소리 저절로 장광설(훌륭한 설법)인데
何必喃喃更擧場 = 무엇 때문에 수다스럽게 들어내 보이리
◊閑中偶書(p.29)
平生嗜幽獨 = 평생에 한적하고 외로움을 즐기나니
窮谷寄衰嬴 = 쇠약한 몸을 궁벽한 골짜기에 붙여 산다네
地僻花開晩 = 땅이 궁벽하니 꽃은 늦게 피고
山高日出遲 = 산은 높아 해는 늦게 솟아오르네
蕉心抽不盡 = 파초 줄기는 끝까지 자라지도 못했는데
溪舌吼無時 = 시냇물소리는 언제나 조잘조잘
此樂少人會 = 이 즐거움 아는 사람 적나니
塔然空自怡 = 멍하니 부질없이 스스로 즐거워할 뿐
◊惜花吟(p.36)
臘月念六初入郭 = 섣달 26일 처음으로 상안에 들어와서
轉頭春己七十有三日 =머리 들어보니 봄은 이미 73일째
去年今年同逝川 = 지난해도 금년에도 냇물은 똑 같이 흘러갔고
昨日今日甚奔馹 = 어제께도 오늘도 역마처럼 분주히 흘러가네
今日看花花始開 = 어제 꽃구경 땐 꽃은 피려하더니만
今日看花花欲落 = 오늘 꽃구경 땐 꽃은 떨어지려 하네
花開花落不容惜 = 꽃피고 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말라
春至春歸誰把捉 = 봄이 오고가는 것을 누가 붙잡아두리
世人但見花開落 = 세상 사람들은 다만 꽃피고 지는 것만 보고
不知身與花相若 = 자신이 꽃과 같은 신세인줄은 알지 못하네
君不見朝臨明鏡誇紅諺 =그대 아침에 거울에 비친 홍안을 자랑하다가
暮向北邙催紼翣 = 저녁 때 북망을 향해 재촉한 불삽(상여)을 보지 않았는가
須信花開花落時 = 모름지기 꽃피고 지는 것을 믿어야 하나니
分明說箇無常法 = 분명 저 무상의 법을 말하는 것이려니
◊絶句(p.50)
林茂鳥聲樂 = 숲이 무성하니 새우는 소리 즐겁고
谷深人事稀 = 골짜기 깊으니 사람 왕래 드무네
夢廻寒瀑落 = 떨어지는 차가운 폭포에 꿈은 감돌고
目送斷雲飛 = 떠도는 조각구름에 눈(目)을 실어 보내네
◊禪餘得句書示同袍(p.84)
塵刹都盧在一庵 = 티끌과 정토가 모두 한 암자에 있나니
不離方丈遍詢南 = 방자을 떠나지 않고도 남방을 두루 순방했네
善財何用勤劬甚 = 선재동자(求道者)는 무엇 때문에 각고하면서
百十城中枉歷參 = 백십성을 두루 순방했던가?
◊臂短歌(p.130)
世人之臂長復長 = 세인의 팔은 길고 또 길어
東推西推無歇辰 = 동.서로 구하기에 쉴 때가 없네
山僧之臂短復短 = 산승의 팔은 짧고 또 짧아
平生不解推向人 = 평생 남을 향해 구할 수 없네
大凡世上臂短者 = 무릇 세상에 팔 짧은 이에겐
人皆白首長如新 = 사람들의 모든 흰머리도 새롭게 나니
而況今昨始相識 = 하물며 어제 오늘 서로 안 사이
肯顧林下窮且貧 = 숲 속의 빈궁한 나를 돌아보겠나
我臂旣短未推人 = 내 팔은 이미 짧아 구하지 못하나
人臂推我誠無因 = 내가 사람 구하는 것 진실로 인연 없으랴?
鳴呼安得吾臂化爲千尺與萬尺 = 아! 어찌 내 팔이 천자 만자나 되어
坐使四海之內皆吾親 = 앉아서 천하 사람들 모두 내게 친하게 하리
◊拙語布懷示表兄之禪老(p.131)
歲月如逝水 = 세월은 흘러가는 물과 같아
刹那不少止 = 순간순간 그치지 않나니
若以無常觀 = 만약 무상으로 본다면
朝夕保亦難 = 아침 저녁 보전키 어렵네
縱復免殤夭 = 비록 어려서 죽은 것을 면해도
古來七十少 = 예부터 70세 살기는 드물고
況我早衰嬴 = 하물며 나는 일찍 쇠약했나니
七十安可期 = 70세를 어찌 기약하리
儻或登七旬 = 혹시 70세를 산다 해도
前去纔十春 = 앞으로 겨우 10년 뿐이니
餘齡能幾時 = 남은 생명이 그 얼마인가?
不卜亦自知 = 남은 생명이 그 얼마인가?
何苦徇時俗 = 어찌 시속을 따라 고생하면서
營營不知足 = 악착같이 만족함을 모르리
黙坐細思惟 = 묵묵히 앉아서 자세히 생각하니
掩泣難勝悲 = 얼굴가려 울면서 슬픔을 견딜 수 없어라
安得好山谷 = 어찌 훌륭한 산골짜기를 얻어
深栖伴麋鹿 = 깊이 숨어 살면서 사슴과 짝하고
耳畔絶是非 = 귓가에는 시비가 끊어져서
目前無順違 = 눈앞엔 순위가 없어지리
요然常獨行 = 요연(빠른 모양)히 항상 홀로 다니면서
尋常抱此志 = 언제나 이 뜻을 품어
寤寐曾不二 = 자나 깨나 일찍 변하지 않았네
天明心下燭 = 하늘은 마음의 촛불을 밝혀주니
寧不從我欲 = 어찌 나의소망 쫓지 않으리
憂來書寸情 = 근심 일면 조그마한 이 심정 글로 써서
持以示吾兄 = 이것을 나의 형에게 보이네
◊演棗伯論(p.143)
「演棗伯論次 有偈示同梵諸德」(조백론을 설명하던 차에 게송(偈頌)을 지어 동범제덕에게 보임. 조백론은 순선(純禪)에 이르지 못하고 문자 정도를 희롱하는 것을 말함)
曹溪水漲毘盧海 = 조계의 물이 비로의 바다를 넘치게 하고
小室山開解脫門 = 소실산에 해탈문이 열렸나니
脚下踢廻摩竭國 = 발아래 摩竭陀國을 차서 돌이키고
手中斷取給孤園 = 손 안에 給孤獨園을 끊어 가졌고
百城差別詢皆遍 = 일백 성의 차별을 모두 돌며 묻고
九會莊嚴儼尙存 = 구회의 장엄은 엄연히 존재하나니
箇裏若能深得妙 = 그 가운데 만약 깊이 묘한 뜻 얻으면
便知禪講本同源 = 선강(禪講)이 본래 하 근원임을 알리
◊棗伯論(p.144)
「棗伯論 演畢之日 鷄峯 投以長句四韻 次答之」(조백론의 강(講)을 마치던 날 계봉(定慧寺)에서 장구 4운을 줌으로 차운하여 답함)
痛信斯門己有年 = 이 法門 깊이 믿는지 이미 여러 해
將期畢命廣弘宣 = 이 목숨 다 할 때까지 널리 포교하기 기약했나니
敎兒獅子機雖妙 = 새끼 가르치는 사자의 지혜 묘하건만
負乘牛王力未全 = 법을 짊어진 우왕의 온전하지 못하네
痴習難廻蠅叩紙 = 어리석은 습관 되돌리기 어려워 파리가 창호지 두드리네
渴心猶似驥犇川 = 타는 마음은 준마가 냇가로 달리는 것 같고
瓦爲主伴從今始 = 서로 주반(主賓)이 되는 것 지금부터 비롯되거니
伴夏同熏豈小緣 = 夏安居를 지내며 같이 수행하거니 그 인연 어찌 적으리
◊侍者求偈書以贈之(p.163)
吾常呼汝汝斯應 = 내가 늘 너를 부르면 너는 대답했고
汝或訊吾吾輒酬 = 네가 혹 내게 물으면 나는 대답했지
莫道此間無佛法 = 이 사이에 불법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從來不隔一絲頭 = 종래부터 한 오라기 실만큼도 간격이 없네
◊惜春吟(p.164)
春風大無情 = 봄바람은 너무도 무정해
棄去不我顧 = 떠나버리곤 나를 되돌아보지도 않고
垂楊從有絲 = 늘어진 버드나무는 실만 있어
贈不解繁駐 = 가는 세월 묶어 머물게 할 줄은 모르네
紅桃怨春歸 = 붉은 복숭아는 돌아가는 봄을 원망하여
朝來空泣露 = 아침 오면 부질없이 이슬에 울고
山鳥亦衰呼 = 산새도 슬피 우나니
似欲向人訴 = 사람을 향해 하소연 하는 것 같네
幽懷無以寫 = 그윽한 회포 표현할 수 없어
細履繞園圃 = 조용히 동산을 거닐면
群芳掃己盡 = 온갖 향기 다 사라지고
綠葉滿林樹 = 푸른 잎만이 숲 사이 진펀하네
春歸也任歸 = 가는 봄이야 가는대로 맡겨두리
爭奈催衰暮 = 늙고 쇠약함을 재촉하는 대야 어찌하리
人生宇宙間 = 인생은 우주 사이에
何異暫羈寓 = 잠시 한쪽 구석에 머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置之不用悲 = 그만두어라 슬퍼할 것 없네
代謝固有數 = 신진대사는 진실로 이치가 있는 법
聊乘化歸盡 = 애오라지 조화를 따르다 죽음으로 돌아가리
姑以信天賦 = 진실로 하늘의 성품을 믿어야 하리
◊山中樂(p.184)
- 상 략 -
一竹杖一蒲團 = 대 지팡이 하나 방석 하나
行亦禪兮坐亦禪 = 걷는 것도 참선이요 앉은 것 또한 참선이리라
山中此樂眞有味 = 산중의 이 즐거움 참맛 있나니
是非哀樂盡忘筌 = 옳고 그름과 슬픔과 즐거움 모두 잊었네
山中此樂諒無價 = 산중의 이 즐거움 진정 귀중하나니
不願駕鶴又腰錢 = 학 타고 또 허리에 돈 차는 것도 원치 않네
適自適無管束 = 자적이 다녀 속박이 없나니
但願一生放曠終千年 = 일생 방광(자유)하여 천수 마치기를 바라네
◊入寂詩
충지는 1292년(壬辰 충렬왕18) 8월초부터 미질(微疾)로 앓다 1293년(癸巳) 1월 7일 위중했다. 그는 3일후인 1월 10일 새벽에 삭발과 목욕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는 門人들에게 '생사가 있는 것은 인간세상의 예사일이다. 나도 마땅히 갈 것이니 너희들은 잘 있어라(有生死人世之事 吾當行矣汝等好住)'하였다. 이어 未時에 시자 心璇에게 일러 焚香上祝을 마치고 가사(袈裟)를 수한 후 소선상(小禪床)에 걸터앉아 불자(拂子)를 들어 '설함에 본래 설함이 없다(說本無說)'하였다. 그래도 문인들이 굳이 게송(偈頌)을 청하자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閱過行年六十八 = 지나온 세상 먹은 나이 68이라
及到今朝萬事畢 = 오늘 아침에 이르러 모든 일 마쳤네
故鄕歸路坦然平 = 고향에 돌아가는 길 평탄하여
路頭分明未曾失 = 그 길이 분명하여 잃지 않았네
手中纔有一枝笻 = 수중에는 겨우 지팡이 하나지만
且喜途中脚不倦 = 기쁘도다 도중에 다리 아프지 않으리
라 하였다. 이에 萬浩長老가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신 길이 평탄하다 하시니 그 길이 어디 있습니까?(故鄕歸路坦然平 路頭在什麽處)'하고 물으니 그는 '착안하여 보아라(着眼看)'하였다. 다시 장로가 '착안하여 보란 말씀은 무엇을 이르신 것이기에 오고가지 아니하여 갈 때도 가지 않는 것입니까?'묻자 '알면 되었느니라. 알면 되었느니라(知則得 知則得)'하고 말끝을 흐리면서 홀연히 입적했다.
6. 맺은 말
이상의 遺詩를 통해 충지의 일생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생애는 출가라는 결단을 통해 이미 비범성을 나타낸 것이다. 700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역시 그의 宇宙觀은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1275년 3월 몽고 황제의 요청으로 연경을 가기 위해 북상하는 길에 청주에 이르렀다. 거기에 이르자 친구인 西原牧伯 尙書儱西公(李敖)이 인근에 있는 華井寺 방을 치워주며 머무르기를 권한 것이 아닌가.
출가할 때부터 서울은 가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한 그라 칭병(稱病)하고 주저앉았다. 왜 그런 다짐을 했을까? 어디에도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아마 무인정권 등 권력의 공신력이 보기 싫어 내린 각오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아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쉬어가라는 친구의 권유를 받고 華井寺에서 夏安居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순천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 때 충지는 孟子 梁惠王 하편의 '가는데도 그 무엇이 가도록 하여 주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만두게 하는데도 그 무엇이 그만두게 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가게하고 그만두게 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行或使之 止或尼之 行止 非人所能也)'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적고 있다. 그 깨우침은 그의 禪.敎觀의 줄기를 이루어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p.31)
그의 우주관이 함축된 시 한수를 보자. '손님 떠난 절 뜨락 고요한데 바람 부니 소매가 시원코나 촉루(髑髏)의 즐거움을 진실로 안다면 임금지위도 별 것 아니리(客去庭院靜 風來襟快凉 信知髑髏樂 不慱南面王)'라는 偶書라는 제목의 시다. 즉 '지도(至道)의 입장에서 보면 死中에 生이 있고 生中에 死가 있다. 그러므로 해골에 喜怒哀樂의 정이 없다 할 수 없다'(碧岩錄 二則)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 충지의 우주관이 응축돼 있는 것이다.(p.126)
극적인 깨우침의 순간은 바로 入寂 직전의 게송에서 나타난다. 보통사람의 경우 마지막 순간 몇 마디 유언을 하기도 하고 한마디 말도 못하고 떠나기 일쑤다. 그런데 그는 삭발.목욕재계.옷을 갈아입고 문인들에게 고별인사를 했다. '생사가 있는 것은 인간 세상의 例事이다. 내 마땅히 가는 것이니 너희들은 잘 있거라'했다.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면서 인사를 하는 것을 어찌 예사로 볼 수 있는가?
그게 범인이 아닌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小禪床에 앉아 승계를 상징하는 拂子를 들고 「說本無說」을 즉 '설함에 본래 설함이 없느라'라고 했다. 이 말은 설은 본래 설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운명의 순간에도 그는 후학들에게 이미 여러 가지를 행동으로 보인 바 있다. 가눌 수 없는 일으켜 삭발하고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불자를 들고 소선상에 앉아 설본무설까지 언급했으면 문인들은 알아먹어야 한 것이다.
그럼에도 문인들은 굳이 게송을 청한 것이다. 조금은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자 그는 '세상 나이 68세라. 오늘 아침에 이르러 모든 일 마쳤다. 고향에 돌아가는 길 평탄해서 그 길이 훤해 잃지 않았네. 지팡이 하나 있으니 다리 아프지 않겠다'며 감회를 털어놓은 것이다. 생각해 보라. 범인이면 죽음의 순간에 이런 게송을 말할 수 있는가. 아미 정신이 혼미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생을 마쳤을 게 분명하다.
문인들의 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萬浩長老는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 평탄하다 하시니 그 길이 어디 있습까?'하고 다시 물었다. 이 물음은 살아있는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일지 모른다. 자신들도 미후에 가야할 그 길을 충지의 체험을 통해 알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최대관심사는 죽음 이후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세계를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궁금한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답한다. '착안하여 보아라(着眼看)'했다. 무슨 뜻인 줄 알 수 없음으로 만호장로는 다시 '착안하여 보란 말씀은 무었을 이르신 것이기에 오고가지 아니하여 갈 때도 가지 않는 것입니까?(着是什麽道 不來去 去時不去)'하고 다시 물었다. 문인들의 질문은 참으로 집요하다. 세상에 운명을 앞둔 사람에게 저승길의 내용과 모양을 이렇게 묻고 대답한 사례가 인류역사상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하지만 역시 禪答으로 막을 내린다. 그는 '알면 되었느니라. 알면 되었느니라(知得則 知得則)'라며 말끝을 흐리고 입적했다. 착안하여 보라니 과연 무엇을 착안하는 것인가? 최후 순간까지 문인들에게 법문을 설했지만 산자들은 그 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알면 되었느리라' 하면서 이해했을 것으로 간주하고 열반에 들었다. 역시 죽음은 산자가 풀 수 없는 영원한 화두가 아닌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2007,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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