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7 12:07
1. 임형택교수의 추정
임계탄이라는 가사문학작품(歌辭文學作品)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성균대 대동문화연구원장 임형택(林熒澤)교수이다. 그는 2002년 관산에서 이 자료를 발굴했다. 임계탄은 2002년 11월 20일자 한겨레신문에 「영조 초기 현실비판 가사 첫 공개」제하로 세상에 알려졌다. 임교수는 이어 민족문학사연구지(2003년 제22호)에 그 해제를 게재하면서 학계에 비상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임교수는 논문에서 임계탄을 다음과 같이 약술하고 있다.
『현실비판기사로 임자․계축년(영조 8~9, 1732~1733)에 연이어 흉년이 들어 대기근이 발생한 참상 및 관의 부패와 무능을 서술한 내용이다. 제목은 그 배경시대를 취해서 붙인 것인데 창작연대 또한 바로 그 무렵으로 잡혀지는 것이다. 현재 알려진 현실비판기사로서 시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작가의 비판의식은 매우 심각하면서 구체성을 얻고 있다.
'나라히(이) 나라 안여 백성이 나라히요,/ 백성이 백성안여 의식(衣食)이 백성이리,/ 백성 다 업스니 이 시절 어이 될고?' 이렇듯 애민우국의 정신이 절정에 다다른 상태에서 위기감과 함께 민(民) 주체의식이 상승하고 있다. 작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향촌의 유교지식인일 터인데 진술로 미루어 호남의 장흥부 관산(冠山)에 거주한 선비임이 확실하다.』무신자본(戊申字本, 현종 9년 처음주조)으로 보이는 「통감」(少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권 5~7의 책장 이면에 쓰여져 있다.
이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저자(著者)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주(註)를 달고 있다.
『작중에서 지역적 배경을 '五十三州 湖南의 長興은 海邑이라/ 土出도 됴커니와 山海珍味 시고/ 冠山 삼긴 후의 樂土아 有名 터니' 라고 하여 작자가 장흥 고을의 관산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壬癸歎」의 작가는 1730년대 관산의 인물 중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여겨 진다. 관산은 남쪽의 바닷가지만 魏世稷(1655~1721)의 「金塘別曲」魏伯珪(1727~1798)의 「自悔歌」등의 작품이 산출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관산은 가사를 짓고 향유하던 말하자면 가사문학의 고장이었다. 필자는 이런 사실에 유의해서 조사를 해 보았으나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잠정적으로 위백규의 부친인 魏文德(1704~1784, 자 懿汝, 호 春谷․詠而齋, 進士) 에게 그 가능성을 주어 보았다. 위문덕은 문집으로 「詠而齋遺稿」7권 3책을 남겼던 바 여기서 「임계탄」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성격은 철저히 유교적이고 정의감이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그런 한편 음악을 좋아해서 '(막내 아들) 伯獻이 雅歌를 잘해서 술을 자신 연후에나 달밤이면 왕왕 平羽調의 노래를 부르도록 하고 혹은 여러 자손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화답하거나 혹은 당신 스스로 화답하곤 하였다. (중략) 선비는 가곡을 일삼아 할 일을 아니로되 전혀 입도 방긋할 줄 모르면 마음의 답답함을 풀길이 없다' 고 말씀하시었다. (思成錄, 詠而齋集 권7, 장17~18) 위문덕의 이런 면모는 임계탄 같은 가사를 지을 수 있겠다고 보게 한 것이다.』
임형택교수는 2005년 12월 15일「가사문학을 통해본 옛 사람들의 내면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임계탄을 비롯해 장유가(壯遊歌)․선서별곡(仙棲別曲)․기가(碁歌)․방화타령(訪花打令)․경세가(警世歌)․전별가(錢別歌)․효열가(孝烈歌)․군가(軍歌)․학교가(學校歌)․열가집(烈歌集) 등 새로 발굴된 가사문학작품을 묶어 책으로 발간했다.(소명출판사)
또한 민족문학사연구 同誌에 게재된 「18세기 전반의 농민현실과 임계탄(壬癸歎)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이형대(李亨大)교수께서 임계탄을 주해한 논문으로 우리 장흥 지역의 역사와 사회적 배경, 그리고 장흥가단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가사문학을 연구한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우리 장흥의 문학사 연구에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임교수의 입장에서는 임계탄 작자를 누구라고 단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 있는 관산의 옛 선비는 주로 삼족당(三足堂)․영이재(詠而齋) 등 존재공 가계 이상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들도 존재공을 제외하면 별로 없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까 영이재공이 임계탄의 작가일 가능이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2. 壬癸歎 著者는 艮庵公 確實
임계탄의 저자는 간암(艮庵) 위세옥(魏世鈺)임이 거의 확실하다. 공은 휘 동전(東峑)의 제3자로 1689년(己巳․肅宗 15) 서울에서 태어나 1721년(辛丑․景宗 2) 33세 하향, 주민들을 위해 노력하다 1766년(丙戌)에 타계했다. 공은 1734년 왕에게 상소문, 1752년에 고금도관왕묘수호를 감사에게 건의하는 등 의 활동을 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핀바 있다.
공이 임계탄의 저자일 가능이 크다는 것은 여러 정황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공은 성격적으로 불의를 용납하지 않은 인물이다. 보통 사람이면 한양출신이 벽촌으로 거주를 옮기겠는가. 내려와 보니 지방관서의 행정이 부패하기 그지없었다. 여기다 중앙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하급관리의 위세가 눈에 거슬러 참고 지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정을 요구하는 글을 관찰사나 목사 그리고 부사에게 여러 번 올린 바 있다.
시국도 매우 어지러웠다. 공이 세상물정을 모를 나이 때도 왕비 민씨 폐비․희빈 장씨 왕비책봉․희빈으로 강등․가뭄으로 아사자 속출․전염병으로 1만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20대 이후에도 홍역으로 수만 명이 죽고 괘서의 변과 이린좌의 난이 일어나고 1730년대로 접어들면서 전라도 해안지방에 심한 가뭄과 도적이 발호해 민생이 도찬에 빠져있었다. 그렇지만 조정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탐관오리의 부패는 극에 이르렀다.
이를 온몸으로 체험한 공은 인민들의 참상을 가사(歌辭)로 적었다. 그것은 임금에게 상소문을 쓰기 위한 자료였다. 그러기에 공의 6조(條)7실(實)의 상소문과 임계탄은 대단히 유사점이 많다. 예컨대 상소문의 서론부분인 '구궁궁궐이 비록 일월같이 밝을지라도 어찌 이러한 참상을 다 비추리오. 신은 화공(畵工)의 솜씨가 없어 정협(鄭俠)의 그림처럼 정성을 본받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하며 그림솜씨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임계탄 마지막 부분에 이런 가사가 있다. '주민(周民)의 황금가(黃金歌)와 상전가(傷田歌) 일편시(詩)를 유민도(流民圖) 한 가지로 이 끝에 그려서…님 계신 구궁궁궐의 들어볼까 하노라' 고 읊은 것이다. 여기서 정협(鄭俠)과 유민도(流民圖)가 주목된다. 중국 송나라 때 정협은 흉년이 들어 거리에 유민들로 가득 메워진 실상을 그대로 그려 황제에게 바치고 아울러 상소문을 올린 고사을 인용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를 우연으로 돌리기는 적절하지 않다. 더구나 임계탄의 저자가 마지막에 님 계신 구궁궁궐을 들여다볼까 하노라 한 것은 상소문을 올려 임금을 만나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에 가사의 저자는 상소문을 올린 간암공이다. 특히 임계탄은 1732년(壬子)과 1733년(癸丑)의 참상이고 상소문은 1734년(甲寅․英祖 11)에 올렸기에 정황상으로 확실한 동일인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영이재공이 가사의 저자가 아님은 그의 성격에서 짐작되고 있다. 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과 조정에 대해 직언을 할 수 없는 성격이다. 내면적으로 는 매우 정의감이 투철했는지 모르나 삶의 족적을 더듬어 보면 매우 자상하나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영이재공의 일생은 아들 존재공을 뒷바라지 하는 것과 문중의 족보를 처음으로 만드는 일을 꼽을 수 있다. 그런 일도 알려진 자료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마무리했다.
또 영이재공의 나이와 가훈에서도 가사의 저자로는 부적절하다. 우선 그는 가사의 작성연대인 1732년에 28세로 과거준비에 바빠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시험을 앞둔 선비가 비록 목불인견의 참상을 목도하지만 그것을 언문으로 기록할 여유도 성격도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그는 아들과 손자들에게 12계훈을 강조했는데「無侮慢官長」과「無交謫客」 즉 관리를 건들지 말고, 귀양 온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것은 임계탄내용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임교수가 보다 일찍이 간암공(艮庵公)을 알았다면 바로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임계탄은 간암공의 6조7실의 상소문만 보면 작자가 누구일까 저주할 필요가 없이 자명해지기 때문이다. 상소문은 임계탄을 중심으로 구성됐고, 임계탄은 상소문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교수 등 학계에서 임계탄의 저자를 하루라도 빨리 고증을 통해 확정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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