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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元老와의 對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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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장소 :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신생약국 /옹의 서재
일 시 : 2016년 3월 6일
대 담 자 : 圓山(正哲 32세, 대종회 씨족문화연구소장

 

대한민국 위씨 가운데 덕운(德雲) 황량(滉良)옹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옹은 1927년(丁卯)생이시니 올해 구순(九旬)이다. 여전히 장흥 위씨를 위한 활동은 끊임이 없어 청장년층이 무색할 만큼 왕성하다. 그러니 전국의 장흥위씨 종인치고 옹을 뵈었거나 소문으로라도 들어보지 않은 종인이 없을 정도라는 뜻이다. 옹의 생활은 오로지 위문의 선양과 발전이라는 일념뿐이다. 하나도 문중, 둘도 문중, 셋도 문중이다. 문중의 일이라면 열일 제백사한다. 혹시라도 개인사와 겹치는 경우에도 가능한 한 문중사를 우선했다. 당연히 시간과 비용도 그에 정비례 할 수밖에 없다. 문사에 지나치게 몰두해 가족들도 처음에는 마땅찮게 여길 정도였다. 어쩌면 옹의 문중에 대한 헌신적인 생애를 한정된 지면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다. 9순의 그 역정이 너무도 오랜 시간이고 그만큼 사연도 많기 때문이다. 옹이 펼친 여러 일은 위선 사업에만 그치지 않는다. 관산과 장흥지역을 위한 공익사업도 헤아릴 수 없다. 그 사업들을 일일이 조명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정도이다. 따라서 위선사업과 공익사업 가운데 다른 매체 즉, 옹의 자서전인 <천관산에 꿈을 싣고>와 <장흥 위씨 요람>의 ‘모선주역’란에 실린 것은 되도록 간단히 다뤘음을 밝혀둔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이전에 다루지 않았던 위선 사업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圓山 연구소장과의 대담은 2016년 3월 6일 옹의 서재에서 이루어졌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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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저보다 건강하게 보이십니다. 도대체 그 건강의 비결이 따로 있으십니까. 아니면 약국을 경영하시니까 좋은 약을 많이 드셔서 그러십니까. 우리 연하들의 한결같은 의아심은 예의 건강입니다. 혹시 비결이 있으십니까.


-영월정 청소와 산책 그리고 규칙적인 운동이 건강 비결-
나의 건강은 별로 비결이랄 게 없어. 평소 여행 등 출타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침 4시30분경에 일어나지. 그리곤 4킬로쯤 떨어진 거리인 장천재로 산책하러 나가. 내가 1992년에 지은 영월정(迎月亭)으로 가서 밀걸레를 빨아 청소를 하면 약 20분정도 걸려. 청소를 마치고 장천재로 가서 이곳저곳 둘러보고 18세 평산 신씨 할머니 묘소를 거쳐 체육공원으로 가서 맨손체조를 하지. 눈과 비, 태풍이 심한 경우를 빼고는 계속하지. 집에 와서 아침을 먹고 당일 일정을 소화하지. 점심을 먹고 게이트볼을 3시간 정도 해. 20여 년 전부터 꾸준히 하는 운동 중 하나여. 그것도 편을 나눠 시합을 하니까 경쟁심도 생기고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주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어. 내가 약국을 하니까 무슨 별난 보약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아니야. 비타민정도는 상복하지만 다른 특별한 약을 먹는 건 아니야. 세상에 약만 먹고서 건강해지는 것은 불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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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생(新生) 약방 및 약국’을 69년 이상 경영하시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더구나 ‘약업은 공익(公益)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신조로 공휴일에도 문을 닫지 않은 별난 ‘약국’이라고 들었습니다. 1년이 365일이니까 69년이면 무려 2만5천여일이 넘습니다. 그 장구한 세월동안 약방과 약국의 문을 열었다니 어쩌면 세계적으로도 드문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릴만한 기록입니다. 어떻게 약업계와 인연을 맺으셨습니까.


-의약제민(醫藥濟民)의 공익 위해 69년간 휴업 안해-
우리 집 형편은 넉넉지 못했지. 조부(錫奎, 1883-1913)께서 독립운동을 위해 24세에 나가셨대. 할머니와 외아들(諱 啓同)만 남았으니 그 살림이 오죽했겠어. 4형제 중 둘째인 나는 심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 다녔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됐지. 어쩔 수 없이 중학과정을 강의록으로 혼자서 공부했지. 그러던 어느 날 회진어협에 다니던 형(彧良)이 일인(日人)이 운영하는 다시료(田代)의원에 다녀보라고 권유했어. 권유를 받은 지 4일만에 다니기로 결심했어. 어쩌면 의료인의 길을 열 수 있겠다 싶은 희망 때문이었지. 1940년 11월 12일로 15세였어. 원장은 “일도 많고 힘드는 데 참을 수 있겠느냐”고 하기에 재삼 다짐했어. 이날부터 오전 7시30분에 출근해 오후 6시30분까지 하루 11시간을 병원의 난로 관리, 텃밭, 토끼와 닭 사육, 우물 물 긷기 등 온갖 험한 일을 했어. 병원 일을 배우기보다 궂은 일을 다 하니 이것은 머슴보다 심했지. 너무 힘들어 몇 번이고 도망가고 싶었어. 그러나 참았지. 한 달을 마치니 8원의 월급을 줬어. 당시 면서기의 월급이 30원이었으니 참으로 약소했지. 형은 월급으로 부모님 보약을 사드리라고 했어. 3원짜리 보약 두통을 사서 부모님께 드렸더니 너무 기뻐하셨어. 두 번째 월급을 타서는 의약인의 길을 가기 위해 관련 서적을 구입하는데 썼어. 국내는 책이 없어 일본본토출판사로 4원50전의 대금을 송금해 조달해 공부했지. 다시료 의사는 나날이 나를 신임했어. 의학서적을 부지런히 읽자 “꼭 의사가 되라”며 격려도 해주었어. 일본이 1945년 2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그는 귀국했어. 그런데 관산은 그가 떠나자 의료 공백이 심화됐지. 1948년 전라남도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약종상 시험을 시행했어. 물론 응시했지. 의사의 집념을 가졌기에 큰 어려움 없이 합격했지. 상호는 ‘신생약방(藥房)’으로 지어 개업해 평생의 직업이 되기에 이른 것이지. 약방과 약국을 경영하면서도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늘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했지. 곧 「의약제민(醫藥濟民)」이란 말이지. 다시료의원 시절의 그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가능하면 약방문을 닫지 않았어. 사람이기에 좀 쉬고 싶지. 그래도 환자들의 입장을 헤아려 문을 열어 놓지. 주민의 보건을 위해 69년 동안 휴업을 하지 않았어. 밤중에도 손님이 찾아오면 일어나. 수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만 제민(濟民)이라는 초심을 생각하지.


3. 평생 동안 위선 사업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문중 일에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그리고 대부분의 종씨들은 위선 사업에 참여했더라도 나이가 들면 그만두십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으시니 그 정열이 어디서 나오신지.


-의재(毅齋) 종조부께서 귀에 못 박히도록 위선 당부-
어릴 때부터 종조부이신 의재공(諱 錫漢)께서는 위선(爲先)의 당위성을 강조하셨어. 상상소학교를 졸업하고, 당신에게 동몽선습, 효경, 명심보감소학 등 한문을 배울 때마다 “장흥 위씨로 태어난 것을 긍지로 여기라”고 당부하셨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존재공에 대해서는 더욱 힘을 주어 말씀하셨어. “선생은 비록 우리의 방조(傍祖)이시지만 학문과 인품은 모든 이의 귀감이 되고, 위씨를 대표할만한 인물이다”라고 설명하셨지. 그때부터 그 당부 말씀을 실천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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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의재 종조부님은 성균관 상임고문으로 도문회 전신인 ‘모선계(慕先契)’ 창립과 사월재 건립에 따른 모금, 청계공(諱 德毅)과 존재공의 타지 사우배향조치 등 문중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왕대밭에서 왕대가 나온다”는 말이 있지요. 의재공께서 보는 눈이 놀랍습니다. 그래 최초의 위선 사업은 무엇이었습니까.


-德庵 조부님 독립운동 기록 추적해 정부의 인정받아-
정부는 1962년에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을 발표했어. 조부님의 항일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였지. 유공자 신청서류를 대충 만들어 1963년 1월 총무처를 찾아가 제출했어. 그곳에서 「600명의 광복운동자 명단」에 조부님도 들어 있었어. 다만 활동란은 백지였어. 당국은 6하 원칙에 의해 서류를 갖추지 않으면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야.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 원칙이 맞지만 유족의 입장은 다르지 않아. 조부님은 집을 나가시면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주머니에 담아 조모님에게 주고 가셨어. 만주로 가신다며 나가셨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 기록이 없었지. 러시아 니콜라니크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와 부고의 부본을 갖춘 서류를 접수했지. 유공자 서류를 접수한지 4개월 만에 심사위원회는 “핵심사항이 없다”는 이유로 반려했어. 투옥 등 활동사항을 보강해서 다시 제출하라는 거야. 그러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만주나 러시아 등 공산국가에서 활동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정부도 잘 알아. 이런 연유로 지역유림 등 297명의 「지사 덕암선생 의열추모시」를 첨부해 또 제출했었지. 심사위는 세 번의 심사 끝에 유공자로 인정했어. 이후 1983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제1668호)을 추서하기에 이른거야. 너무도 기뻐서 8두락을 증조부님 이하 3대와 작은 어머니의 제위답으로 바친 거야.


5. 존재 선생님에 대해 남다르게 천착(穿鑿)하시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종조부(의재)의 당부 말씀을 실천하려는 의지 때문이십니까. 일부 종인들은 “존재 선생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 낯을 내기 위해 그런다”라고 악담까지 하기도 합니다. 존재 선생의 저술인 지제지(支提誌)와 정현신보(政絃新譜)의 출판 등에 얽힌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존재 선생이 빛나면 장흥 위씨도 덩달아 선양돼-
대한민국에서 장흥 위씨가 차지한 비중은 갈수록 미약해져. 조선시대 이름을 떨친 벼슬아치도 없는데다 숫자가 1980년 중반에 70위권에서 최근에는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어. 많은 선조들이 글을 남겼지만 존재 선생처럼 문학, 경학, 경세 등 다양한 방면에 유고를 남긴 대저술가는 없지. 그럼 존재 선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존재 선생을 위해서도 위씨 전체 후손을 위해서도 필요한 필수불가결의 사업이 아닐까 그리 생각했어. 존재 선생의 저술출판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어. 천관산의 별칭인 지제지(支提誌)에 매달린 것은 호남의 5대 명산 천관산을 전국에 알리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어. 기암괴석을 칼라사진과 곁들여 책을 만들어 보급하면 자연히 존재 선생과 우리 성씨의 명예도 떨칠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처음 6개월간 찍은 사진을 버리고 광주 신문사 사진기자를 초청했어. 그와 함께 3년간 300번 이상을 오르며 촬영한 게 감회가 깊지.


6. 위씨들은 선출직에 약하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방의원과 통대의원을 4대나 역임하신 것을 비롯해 새마을금고 이사장 2대, 동 연합회이사와 장흥향교 전교 등 8번이나 출마해 8번 당선된 경력이 있습니다. 그것도 최연소와 최고 득표율로 당선된 기록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장흥의 토반이라는 임. 마.위 가운데 임씨와 마씨는 별로 안 살고 위씨만 남았는데 군수나 국회의원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타성씨 중에는 위씨를 곱지 않게 평가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번번이 당선됐으니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재주는 없지만 어떤 일에도 정성을 다할 뿐-
원래 천학비재해서 남에게 내놓을만한 자랑거리가 없어. 그러니 항상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조심조심하며 살았어. 지방의원이나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도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주변에서 부추겨 나가 당선된 것이지. 29세 때인 1956년 2대, 1960년 3대 지방의원, 1973년 유신시대 통대의원, 1978년 통대의원도 다 그랬어. 귀천 가리지 않고, 상대가 성내도 내가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사니 도와준 것이지. 여러 선출직에 당선됐지만 내가 하고 싶어 먼저 의사표시를 한 것은 아니야. 모두 주변사람들이 나오라는 권유에 못 이겨 나갔는데 몰표를 줘서 당선된 것이지. 그렇지만 당선된 이후로는 전심전력을 다해 지역과 주민을 위해 봉사했어. 의정생활을 하면서 동료 간에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했지. 특히 전남 새마을 금고연합회 이사선거의 경우 싸움이 너무 치열하자 집행부에서 두 경쟁자를 사퇴시키고 무투표로 당선되기도 했어. 우리 성씨들이 선출직에 약한 이유를 어찌 내가 분석할 수 있겠어.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겠지. 굳이 나름의 이유를 찾아보면 가령 국회의원이나 군수 등을 바라보면서 꾸준하게 준비한 종씨를 찾아보기 어려워. 어쩐지 출마 자체를 꺼리는 거야. 위씨는 정치를 싫어하는 체질을 타고 나서 그럴까싶기도 해. 지금까지 장흥에서는 부산면 기동출신이 도의원에 당선된 것이 선출직으로는 최고지. 그리곤 아무도 없어.


7. 존재 선생 동상 건립은 아마 여러 위선 사업 중 가장 돋보이는 사업으로 저희들은 꼽고 있습니다. 만일 전두환 정권 때가 아니고 민주화 이후에 세우려 했다면 과연 동상을 세울 수 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2015년 동상 옆에 장흥중앙로타리클럽에서 「초아의 봉사」라는 비를 세웠습니다. 그 비가 들어서면서 동상은 왜소하게 보이고, 방향도 엇갈려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차제에 동상을 키우고 방향도 바꿨으면 합니다.


-동상의 규모를 확대하고, 방향도 바꾸면 좋겠는데-
존재 선생님은 장흥이 낳은 인물이지. 비록 벼슬은 옥과현감에 그쳤지만 선생은 무려 100권이 넘은 책을 저술하셨어. 이웃 강진에 유배와서 500권의 책을 저술하신 다산에 비하면 적지만 백권의 책을 지으신 학자이셔. 다산은 18제자와 공동으로 저술했지만 존재 선생은 혼자서 지으셨으니 사실은 더 어려운 거야. 그러니 아마 전두환 정권이 아니더라도 동상건립의 대상자로 뽑힐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나는 여기고 있어. 건립을 추진했던 1984년은 규모가 그 정도였어. 지금 보면 좀 왜소하게 보이지만 그땐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 그리고 전면의 방향도 그때는 광주-장흥간 노선버스가 병영을 거쳐서 왕래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지. 그러나 이제는 장흥-강진간의 도로가 확장되고, 작년에 로터리의 비가 들어서면서 동상의 방향이 엇갈리게 보여. 동상규모 확대와 방향이 개선대야 한다는 것은 공감하지만 문중적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로 보지.

 

8. 이른바 ‘존재학회 설립’과 관련해서도 여쭈어 보겠습니다. 학계는 존재 선생의 학문을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학회 설립은 필수불가결하다고 하지요. 그래서 도문회는 2010년 4월 24일 운영위원회에서 학회 설립의 당위성에 공감하고, 2012년 5월 6일 총회에 상정해 그 추진을 운영위에 위임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 후 운영위는 이사진 구성을 두 번이나 의결하고, 위촉된 이사회도 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종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확정된 안건이 휴지조각처럼 번복된 것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존재학회가 발족되지 못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
참으로 가슴 아프지. 위씨처럼 후손이 많지 않은 성씨에서 “우리 할아버지, 남의 할아버지”를 따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보지. 우리 선조 중 누가 후학이 연구할만한 유고를 남겼어. 존재 선생 말고는 없지 않아. 또 학회는 후손의 몫이 아니라는 논리도 옳은 자세라고 볼 수 없어. 우리 조상을 우리가 존경하고 그 어른이 남기신 유고를 공부하지 않으면서 누구더러 연구해달라고 말할 수 있겠어. 그러니 우선 도문회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기념사업회>라도 잘 추진해보고,  ‘학회’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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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장흥 위씨 300년 족보사 가운데 가장 논쟁거리는 ‘보의론’이었습니다. 3대 도문회장으로 취임하시어 산하에 「보의론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켜 ‘세계(世系)’조를 제외하고는 쟁점사항을 완전히 매듭지었습니다. 그 결과 1987년에 건수한 시조공사 적비도 개비(改碑)할 수 있는 바탕을 닦았습니다. 이는 위씨 문중사상 전인미답의 장거를 이룬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때의 결단과 결심의 계기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물론 손수 작성해 당시 도문회 운영위원들에게 통보한 아래의 회의 소집 안내 문안에 결의가 보이기도 합니다만...
『時下 盛夏之節에 尊體日益 淸安하심을 仰祝하나이다. 就告之事는 都門會 運營委員會를 左記와 如히 開催코자 하오니 掃萬 往臨之地를 敬望하나이다. 記 2010年 七月 七日 오전 10:30. 場所 백산재. 附議案件 : 譜疑論의 現實과 事跡碑의 對策論議 도문회장 위황량』


-보의론의 쟁점 해결을 문중발전의 초석으로 여겼다-

세상일은 항상 긍부정의 문제점을 안고 있지. 큰 사안도 작은 사안도 마찬 가지야. 우리 족보의 경우 1759년 기묘(己卯)초보도 역사 사실의 의문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어. 처음 족보를 닦으신 영이재(詠而齋)께서도 그 한계를 알고서 후손이 전거가 나오면 바로잡으라고 당부하셨던 거지. 그러나 초보가 나온 이후 7번 족보를 수보하면서 조상의 업적을 미화하고 싶은 간절한 충정에서 전거가 없는 사실을 첨부해 논란의 씨앗을 키웠지. 그런데 2005년 조선왕조실록 태백산 사고본이 국역돼 판사공 관련 사실이 족보기록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확인된 거야. 이런 관련, 기록을 질문자와 의환 종인 등이 저술한 책자로 발행했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아. 그래 운영위를 소집해 소위원회를 발족, 거의 8개월간 연구한 결과를 문중기구를 통해 확정한 것이지. 비록 세계문제는 풀지 못했지만 300년 논란거리를 해소한 것은 우리시대가 긍지로 삼을 만한 업적으로 평가하지.


10. 옹의 위선사업 가운데 보이지 않은 일도 많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전국의 여러 대학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존재 선생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현지 답사차 관산에 들르면 신생약방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옹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의 희망에 따라 방촌과 장천재 등으로 안내했었지요. 그러면서 음료수와 점심을 대접하는 것도 당연히 몫이라 들었습니다. 끝으로 70년이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위선 사업에 일구월심하셨으니 후진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시리라 봅니다. 사실 위선 사업이란 것이 꼭 나와 상관이 있는 건 아니지요. 그러니 문중사에 관여한 사람은 그 사람 그 사람입니다. 대(代)를 이어 관여한 경우도 허다하지요. 그러나 누군가는 해왔기에 지금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귀감이 될 교훈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특별한 교훈이 어디 있겠어. 나는 위선의 첫 걸음은 한국 위씨 시조이신 경(鏡)자 할아버지가 당나라 한림학사 출신의 도예지사니 그 할아버지 후예답게 예의와 염치 그리고 동족간의 화목이 첫째라고 봐. 또한 우리는 후손이 많지 않으니 문중사를 추진하면서 협동하지 않으면 힘이 나올 수 없으니까 단결과 협력만이 그 대안이라고 생각해서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당부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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