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재 액호>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연하동에 위치했었다. 재각의 전신은 충렬재 (忠烈齋)이다. 모암재공(휘 계철, 1840~1913, 괴봉공 10대손)이 1910(庚戌)년에 중수하였음이 장흥군 경술지(庚戌誌)에 확인되나 대동보(大同譜) 등에 기록이 없다. 1925(乙丑)년에 재각 동편에 설단하고 시조공(휘 경)과 판사공(휘 충)의 제사를 지내면서 재각의 명칭을 지명(地名)을 따라 하산재(霞山齋)라 하였다.
1953(癸巳)년에 시설이 낡아 2차 중수하기로 결정하고 안양면 비동리 吉氏 재각을 구입 해체해서 이축하였다. 그 후 1971(辛亥)년에도 시설 보수공사를 하였다. 1975(乙卯)년 평화에 하산사(霞山祠)를 신축한 후 1990년 前까지 제향에 사용되다가 2005년 타인에게 매매되어 철거되었다. 하산재 중건기(霞山齋 重建記)는 1971(辛亥)년 백당공(휘 대환, 1907~1979, 안항공 12대손)이 기술(記述)하다. 충렬공 묘전(墓前)에서 매년 陰
10. 9날 제향 한다. 액호(額號)편액 글씨는 1962(壬寅)년에 설주(송운회)가 썼다.
<충렬공 묘소>
<충렬공 묘소 입로석>
※ 충렬공(휘 계정, 1038~1107) : 중조공(中祖公)의 사세손(四世孫)으로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때 등제(登第)하여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등 역사(歷事) 하시고, 관(官)이 수태보문하시중태사 (守太保門下侍中太師)에 이르러 예종(睿宗) 4년 졸하니 충렬(忠烈)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인종조(仁宗祖) 때 예종묘정(睿宗廟廷)에 배향(配享)되셨다. 묘소(墓소)는 장흥(長興) 제암산하(帝岩山下 : 옛 기록은 사자산(獅子山)으로 되어있음.) 연하동(煙霞洞)에 있다. 묘전(墓前) 제향(祭享)은 陰 10. 9이며, 장흥읍 평화리 소재 하산사(霞山祠)에서는 5월 첫째 일요일에 거행된다. 公은 문장(文章)으로써 이름이 높으셨으며, 당시(當時) 송(宋)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초안(草案)하셨다. 특히 청백리(淸白吏)로서도 청사(靑史)에 빛나면서 前.現 모든 장흥위씨 중 최고 벼슬을 역임하신 분이다.
※ 송운회(宋運會) 이력 : 여산人, 1874~1965, 號 설주(雪舟),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한말의 혼돈기, 일제의 강점기와 민족의 비극 6.25를 체험하면서도 글씨 외에 한순간도 눈을 팔지 않았으며, 1965년 임종 때까지도 붓으로 예도(藝道)를 실천했던 탈속웅필(脫俗雄筆)의 대가였다. 어려서부터 영재 이건창(李建昌, 전주人, 1852~1898, 조선말기 학자·문장가)의 문하(門下)에서 형(兄) 명회(號 小波, 문장가‧시인)와 함께 학문과 서예를 익혔고, 이때부터 中國과 우리나라 명인들의 필법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明나라 문인 동기창(董基昌)의 필법에 심취했다. 설주는 5체에 모두 능했으나 주로 해, 행, 초서를 썼으며 그의 진초는 『仙의 경지에 이른 神筆』이라고 평 받았다. 또한 광복 전의 선전(鮮展), 그 후의 국전(國展) 등에서 그의 작품을 인정받을 기회가 많았지만 서력이나 나이에서 후진들에게 평가 받을 수 없다는 자존심과 강직한 성품으로 野人으로 남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선비이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글씨를 쓸 수 없는 날이 바로 내생명이 다하는 날』이라는 생각으로 일관했고, 주위로부터는 『보성 강물이 온통 설주 선생의 붓 행구는 먹물』이다. 라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설주의 예술 세계는 아들 槿庵(작고), 손자 雪岡, 조카 雪坡, 종손 小汀, 春舫에 이어지면서 보성 설주의 예술 혼(魂)을 밝게 하고 있다.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