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학문세계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 1727∼1798)는 호남 3천재로 호칭되던 학자의 한 사람이다. 누구에 의하여 호칭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오래 전부터 조선왕조 중엽 이전에는 호남에 3걸(傑)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3천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높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문학이나 학문에 큰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하게 생을 마쳤던 사람들이 3걸로 호칭된다. 화순의 동복에 살았던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 1483∼1536), 해남의 유성춘(柳成春 : 유희춘의 형), 고산 윤선도의 선조인 귤정(橘亭) 윤구(尹衢 : 1495∼1542)가 바로 그들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옥당 벼슬에 호당에 들어간 명사들이었으나, 사화(士禍)에 좌절하고 말았기 때문에 세 걸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남 3천재는 순창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申景濬 : 1712∼1781), 고창의 이재 황윤석(臣頁 齋 黃胤錫 : 1729∼1791), 존재 위백규가 그들이니 바로 18세기의 한 세기를 살아가면서 조선 후기의 찬란한 실학이라는 학문을 꽃피운 3대 천재 실학자들이었다. 신경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에 올라 세상에 큰 이름을 날렸으나, 황윤석과 위백규는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학문적 업적 때문에 임금의 은혜로 시골의 재야학자로서는 그래도 낮은 벼슬이나마 역임할 수 있던 행운을 얻기도 했었다.
오늘날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언급하려면, 의당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기호지방에 근거지가 있던 분들이 거론되는데, 유독 호남의 3천재는 호남이라는 시골에서 특별한 실학관계 학문의 연원도 없이 자생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문에 도달했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빛나는 업적으로 다루게 된다. 위백규와 황윤석은 비슷한 연배로 서로 교류까지 하면서 학문을 논하였고, 기호학계 성리학의 대가들의 제자이기도 했다. 위백규는 병계 윤봉구(尹鳳九 : 1683 ∼1767)의 문인으로 성리학에도 밝았지만, 시대적 진운에 눈감지 않고 실학에 전념했던 학자였다. 이재 황윤석은 미호 김원행(金元行)이라는 노론계 성리학자의 제자로 실학에 큰 업적을 남겨 이채로운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 위백규의 생애 -
한말에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역임하여 문장과 학문으로 큰 명성이 있던 전재 임헌회(全齎 任憲晦)는 ‘존재집’(存齋集)이라는 위백규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지은 서문(序文)에서 간략히 위백규의 삶을 서술했다. “존재는 2세에 육갑(六甲)을 외웠고, 6세에 글을 지을 수 있었으며, 8세에 ‘주역’을 공부했다. 10세 이후에는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복서(卜筮), 율력(律曆)·선불(仙佛)·병법(兵法)·의약·관상학·배와 수레·공장(工匠) 등 온갖 기술에까지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모두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천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25세에 병계 윤봉구 선생에게 집지(執贄)한 제자가 되어 잡다한 예전의 학문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성리학에 침잠했다”고 하여 벼슬할 생각보다는 자신의 수양에 더 치중하는 학문에 힘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침내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건질 방책까지 강구하여 체용(體用)이 구비된 학문에 통달했으니 대표적인 저서가 ‘정현신보’(政絃新譜)라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임헌회의 스승이자 기호지방 노론계의 대표적 문장가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 : 1776∼1852)은 산림(山林)으로 형조판서에 오르고 시호가 문경(文敬)이었는데, 위백규의 ‘묘지명’(墓誌銘)에서, 호남의 학문은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을 이어서 손재 박광일(朴光日)과 목산 이기경(木山 李基敬)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의 학맥을 이은 대학자가 바로 위백규라며 높은 찬사로 그의 학문 수준을 평가했다.
홍직필의 대선배로 노론계 큰 학자이던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는 위백규의 ‘행장’(行狀)에서 일생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높은 수준의 성리학과 뛰어난 실학의 학문업적을 남겼다고 밝혔다. 39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거주하던 장흥군 관산읍 다산(茶山)에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것이 41세 때부터였다.
- 벼슬길이 열리다 -
위백규의 저서 ‘환영지’(寰瀛誌)는 실학자의 독창적인 책이었다. 높은 학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방관들이 위백규를 등용할 것을 임금에게 상주하자 69세 때부터 벼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부사용(副司勇)의 낮은 벼슬이 내려지면서 저서인 ‘환영지’를 나라 임금에게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70세에는 나라로부터 ‘환영지’ 이외의 모든 문집을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고, 지은 글을 모두 올렸더니 선공감(繕工監) 부봉사(副奉事)라는 벼슬이 내려졌고, 오래지 않아 학행으로 천거받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으니 70고령의 노년기에 임금의 알아줌을 입었었다. 지금이야 담양군 옥과면이지만, 당시에는 당당한 고을인 옥과현이었으니, 시골의 선비에게 수령의 벼슬이 내리는 일은 역시 대단한 학자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해는 정조대왕 20년으로, 인재 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임금이 전라도 끝인 장흥의 천관산 아래 숨어살던 위백규를 발탁한 자랑스러운 벼슬살이였다. 노병으로 오래 근무하지도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72세인 11월2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정조대왕 22년이었다. 위백규가 세상을 떠난 그해에는 장흥에서 멀지 않은 순창에서 노사 기정진이 태어났고, 위백규가 세상을 뜨고 3년 뒤인 순조 1년 1801년 겨울에는 장흥에서 멀지 않은 강진에 40세의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로 도착했다. 실학자 위백규의 학풍이 장흥·강진 일대에 퍼져 있을 때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살이가 시작되었던 것은, 구체적 교류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어떤 영향이 있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9세에 시를 짓다 -
아홉 살의 어린 위백규는 어른들을 따라 고향의 명산인 천관산(天冠山)에 올라서 시를 지었다. “천관산의 절에 이르자/ 공중으로 사다리 놓으면 하늘 끝에 오르겠네/ 인간들이 사는 세상 굽어보니/ 3만리에 티끌이 끼었네.” (發跡天冠寺 梯空上春昊 俯視人間世 塵埃三萬里) 어린이의 시로는 통이 크기 짝이 없다. 원대한 꿈을 지녔고 뜻이 큰 사람이었음을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꿈이 크고 뜻이 높았던 위백규는 나라를 경륜하고 인류를 구제하려는 포부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살아가던 조선 후기는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전정(田政)이 문란하여 서민들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나라 안에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평소에 율곡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존중했던 그는 임금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나 ‘봉사’ 등에는 제도를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과 애민정신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 정치경제 사상 -
위백규는 학문이 깊고 사상이 온축된 65세에 그의 대표적 저서인 ‘정현신보’를 저술하고, 옥과현감에 제수된 70세의 완숙한 노령에야 임금에게 올리는 정책 건의서인 ‘만언봉사’라는 장문의 글을 지어 자신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견해를 밝혔다. ‘만언봉사’를 읽어본 정조대왕은 높은 경륜에 감탄하여 간략한 답변을 내렸다. 그 답변에 나타난 내용으로도, 위백규의 경륜과 학문이 어느 정도인가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첫번째의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라는 주장은 칭찬할 만하다. 나의 뜻이 세워지지 않아 백성들의 뜻이 하나로 모아질 수 없었다. 바른 학문이 밝혀지지 못하자 사학(邪學 = 천주교)을 종식시키지 못했으니 내가 반성할 부분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답한 내용에서 위백규의 주장을 알게 해준다. 그러면서, “그대의 건의를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고 다짐까지 하는 정조의 마음에서 위백규의 학문이 보이고 있다.
“어진 사람을 발탁하여 등용시키라는 그대의 주장도 옳다고 여긴다. 사람을 천거하여 임금을 섬기게 하는 것이 대신(大臣)들의 책임이다. 그렇지 못하는 요즘의 정승들에게 사람 천거를 바랄 뿐이다”라는 대목에서도 인재발탁의 중요성을 주장한 위백규의 사상을 알 만하다. 그러면서 정조는, “3항, 4항, 5항, 6항의 주장 등은 말마다 절실하고, 시대의 패악상에 적중되는 말이다”라고 답하고 당시의 세상에는 사유(四維 : 禮·義·廉·恥)가 확산되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도덕성이 확산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한다는 정조의 답변을 끌어냈으니, 위백규의 건의가 얼마나 시의적절한 주장이었음을 금방 알게 해준다. ‘만언봉사’에서 위백규는 여섯 조항의 정책을 건의했다. 첫째 성지(聖志)를 세우고 성학(聖學)을 밝힐 것, 둘째 보필할 신하를 제대로 고르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라고 했다. 셋째 염치를 장려하고 국가의 기강을 떨쳐야 한다고 했다. 넷째 선비들의 습관을 바르게 하고 지나친 경쟁심을 억제토록 했다. 다섯째 탐관오리들을 의법처리하고 사치풍조를 금해야 함을 논했다. 여섯째 옛날의 옳은 제도를 살려내고 폐단 많은 법제는 뜯어고치자고 주장했다. 마지막 법제개혁의 주장은 200년 전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면서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야만 나라가 제대로 통치된다는 경세논리를 펴고 있었다.
- 율곡의 개혁사상을 본받다 -
여섯 조항의 큰 줄기 강령을 열거하고, 그 강령의 세부적 실천논리를 개진한 내용이 다름 아닌 ‘만언봉사’였다. 여섯 조항 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두고 주장한 대책은 바로 마지막 조항인 법제개혁의 논리였다. “혁폐(革弊)의 주장은 율곡 선생이 오래 전에 누누이 설명했습니다. 지금 그분의 문집을 가져다가 고찰해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만약 그 당시에 율곡 선생의 대책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임진왜란의 화란도 그처럼 혹독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법제의 폐단은 율곡 선생 때보다는 백배나 더 심한데,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단 한 사람도 율곡 선생의 주장을 임금에게 진언하는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분노에 찬 주장을 계속하였다.
율곡이 누구인가. 위백규보다는 한 세대 선배인 탁월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오래 전에 율곡의 위대함을 넉넉하게 설파하였다. “근세의 율곡 선생 같은 분은 법제개혁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당시의 집권자들은 옳지 않다고 말했지만, 지금 다시 고찰해보면 너무나 명쾌하고 절실한 대책이었다. 그러니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대체로 조선왕조 이래로 현실적으로 처리할 일을 가장 잘 알던 분은 율곡이었다”라고 성호는 그의 글 ‘논경장’(論更張)에서 설파하고 있다. 위백규 역시 실학자답게 율곡의 경장(更張)이론에 영향을 받아 당시의 부패한 제도와 무너진 국가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펴고 있었다.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新我之舊邦)라고 외치며 국가개혁의 마스터플랜인 ‘경세유표’를 저작한 다산 정약용은 위백규의 한 세대 뒤의 후배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연면한 사상을 총정리하고 종합하여 실학을 집대성한다.
- 위백규의 유적지를 찾아서 -
전라도의 땅끝 마을 장흥. 장흥읍 입구에는 존재 위백규의 동상이 우람하게 서있다. 육지의 땅 끝에 가장 우람하게 서있는 산은 장흥의 천관산이다. 천관산 산자락을 제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게 자리한 마을이 장흥군 방촌(傍村)이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방촌마을은 수백년 동안 장흥위씨(長興魏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했던 마을이다. 산이 좋고 물이 좋은 탓인지, 마을의 어느 구석에도 가난은 보이지 않고 부귀의 모습만 보이는 마을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마을 앞의 넓은 들판을 건너 마주보는 천관산은 현인들의 거주지임에 의심을 지니지 못하게 하였다. 산자락에 쭉 이어져 벌려있는 기와집, 최상단에 위치한 우람한 기와집에 존재 위백규의 선조들이 살아왔으며, 거기서 존재가 태어나 오래도록 생활했던 가옥이다.
존재라는 호는 스승 윤봉구가 위백규에게 써준 ‘존존재’(存存齋)라는 세글자에서 따온 호이고, 마을이 계항산(桂港山) 아래의 계항(桂港)에 자리잡고 있어서 계항일민, 계항운민 등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지난해 추석 무렵 우리 일행은 위백규의 유적지를 찾아 존재의 생가를 들렀다. 땅끝 장흥의 관산 바닷가에서 충청도의 덕산(德山)에 살던 스승 윤봉구를 찾아다닐 수 있었다면 당시 위백규 집안의 살림 형편을 짐작할 만하다. 가세가 그만큼 넉넉하였기에 그만한 와가가 생존시부터 지금까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 강진의 다산초당과 장흥의 다산정사 -
장흥군과 강진군은 군청 소재지로 보면 불과 4~5㎞의 거리다. 장흥군 방촌 마을의 뒷산 자락 한 부분이 다산(茶山)인데, 강진의 만덕산 아래 산자락의 한줄기가 또 다산이다. 장흥의 다산에서는 존재 위백규가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학문에 힘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강진의 다산초당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위백규는 전라도 출신의 큰 실학자였고, 정약용은 경기도 출신이지만 다산초당에서 학문을 완성하였다. 이런 우연도 있는 것인가. 세상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위백규는 노론계통의 학자였고, 정약용은 남인계열의 학자였다. 귀양오기 3년 전에 타계하여, 위백규의 학풍이 다산이 살아가던 곳에도 남아 있었겠지만, 다산의 저서에 위백규는 언급된 바가 없다. 이 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계항 마을 출신으로 위백규에게는 방손(傍孫)인 위황량(魏滉良)씨의 안내로 생가도 둘러보고, 다산정사에도 올라가 위대한 학자, 천재학자의 흔적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다산정사의 바로 곁 산등성이에는 위백규의 묘소가 있었고 선대의 묘소도 쭉 이어져 있었다. 1798년에 세상을 떠난 존재, 200년이 훨씬 넘게 그곳에 잠들어있으나, 묘역은 정말로 초라했다. 높은 학문에 비교하여 겨우 현감이라는 낮은 벼슬 때문에 신도비도 세울 수 없고, 화려하게 묘역을 치장할 신분이 되지도 못했다. 그래서 재야 선비의 묘소로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곳 어디에 무슨 지령이 있었기에 이만한 천재가 이곳에서 태어나 그만한 학문의 업적을 이룩했을까. 존재의 아버지는 진사(進士)로 호가 영이재(詠而齋)이던 위문덕(魏文德)이었고, 조부는 삼족당(三足堂) 위세보(魏世寶)로 시·서·화 3절로 유명했던 당대의 문사였다고 한다. 글과 시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가문의 유풍을 이어받고 다산의 산자락에 자생하는 차가 자랐기에 그런 향기로운 운치를 타고나서 그만한 대학자가 탄생했으리라. 계항산 속 다산정사에서 은자로 숨어살면서 희대의 실학사상을 완성한 존재의 풍모가 그려졌다. 다산사(茶山祠)에는 존재의 신주가 모셔져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 문집인 『존재집』과 많은 저서 -
학문이 높고 실학에 뛰어난 학자라는 명성이 서울까지 울리자, 정조 20년인 1796년에 70세 노인의 저작이 상자에 곱게 담겨 임금에게로 전달된다. 이 때의 문집은 위백규 자신이 정갈하게 편집하여 제책한 24권이었다. 내각(內閣)에 보관되었을 그 문집은 뒷날 잃어버려서 후손들의 손에 의하여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다시 편집하여 1875년에 활자로 인쇄하여 책이 간행되었다. 24권에 12책으로 꾸며져 오늘까지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는 문집이다. 이 문집을 원집(原集)이라 부르고, 간행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고금’(古琴)과 ‘환영지’ ‘황명사략’(皇明史略) 등의 서적이 있는데, 근래에는 모두 영인되어 ‘존재전서’로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문집을 살펴보면 넓고 깊은 존재의 학문세계가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경세학자도 경(經)에 밝지 않고는 정통의 학자가 될 수 없었음은 그 시대의 엄연한 사실이었다. ‘독서차의’(讀書箚義)라는 글에는 대학·논어·맹자·중용 등의 사서(四書)에 대한 골똘한 연구결과가 모두 담겨 있고, 서경(書經)에 대한 연구결과로 ‘요전설’(堯典說), ‘우공설’(禹貢說) 등의 글을 통해 정리되어 있다. 이런 학문의 밑바탕을 튼튼하게 닦은 결과로 그의 실학사상이나 경세학(經世學)의 실용논리도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 만덕사(萬德寺)에서 노닐던 존재 -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는 만덕사라는 절이 있다. 다산초당에서 오솔길을 따라 등선 하나만 넘으면 있는 절이다. 18년의 귀양살이 동안에 다산 정약용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절이다. 그렇게 절친했던 스님 혜장선사(惠藏禪師)가 머물던 절로, 만덕사 또는 백련사라고 부르던 절이다. 위백규도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다산이 찾아오기 이전의 일이었다.
동백꽃 떨어져 푸른 잔디를 덮자
금모래 위 게으른 걸음으로 명승지 찾았네
한 곡조 뱃노래에 강위 해가 저물자
사람들 홀연히 동정루(洞庭樓)에 오르네
(山茶花落綠莎縐 懶步金沙選勝遊 一曲漁歌江日晩 忽然人上洞庭樓)
‘만덕사’라는 제목의 위백규의 시다. 만덕사의 동백꽃 군락지는 세상에 유명한 경관이다. 위백규가 찾았던 그때의 만덕사에도 동백숲은 우거져 꽃이 지고 피었나보다. 이런 시를 짓고 만덕사에 노닐었던 위백규가 세상을 떠난 3년 뒤에 강진으로 다산은 귀양왔고, 그 8년 뒤에 다산초당에 은거하면서 수시로 백련사에서 노닐었다. 정약용의 동백꽃 시는 너무 많아 인용할 수도 없다. 당대의 실학자들이 노닐었던 만덕사에는 지금도 동백숲이 푸르게 우거져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학술과 정치·경제의 중심지 서울에서는 천리의 외딴 바닷가 시골에서 조선후기 학문을 대표하던 호남 3천재의 학문은 중심이 실학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존재 위백규의 학문은 정통유학의 맥을 이으면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학문영역을 개척하였다.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노론 학맥, 권상하의 큰 제자가 병계 윤봉구였다. 윤봉구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시대를 넘어 새로운 학풍을 열었던 존재는 그의 천재성과 눈을 감을 수 없는 부패한 현실이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후배 학자 매산 홍직필은 존재의 ‘묘지명’에서, “천관산 높고 높아/ 전라도 전체에서 우러러보네/ 울창한 다산이여/ 가을 동백도 시들지 않네”(天冠峨峨 一路仰止 有鬱茶山 秋栢不死)라고 읊으며 존재의 유풍여운(遺風餘韻)은 천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만큼 그의 실학사상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논리라는 해석을 내렸다고 여겨진다. 72세로 영면한 그의 혼은 아직도 장흥 고을의 곳곳에 학풍을 식지 않게 하고 있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