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덕산 (玉屛溪) 옥병계
존재(存齋) 위백규의 스승인 병계(屛溪) 윤봉구(1681~1767) 선생이 가야계곡의 아름다운 비경 아홉 곳을 ‘가야 9곡’이라 칭하고 그의 문집에 기록해 놓음으로써 유명해진 장소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이다. 존재공은 1751년 25세부터 스승이 계신 덕산까지 장흥에서 천리를 걸어 학문에 매진하였다. 존재공은 스승을 옥병계(玉屛溪)라고 극도의 존칭으로 예우했다.
一曲觀魚臺 在谷口淸風山之西-1곡은 관어대니 골짜기 입구의 청풍산 서쪽에 있다
二曲 玉屛溪 在壽星峯之北-2곡은 옥병계니 수성봉 북쪽에 있다
三曲 濕雲川 玉屛溪向上少北 小澗之自東北 入於屛溪者也-3곡은 습운천이니 옥병계에서 위로 향해 조금 북쪽에 있다 작은샘이 동북으로부터 병계에 들어오는 것이다
四曲 石門潭 在濕雲之小西 衆仙洞北-4곡은 석문담이니 습운천의 조금 서쪽 중선동 북쪽에 있다
五曲 暎花潭 去石門一轉 在靑龍坊-5곡은 영화담이니 석문을 지나 한번 돌아 청룡방에 있다
六曲 卓錫川 在白塔南-6곡은 탁석천이니 백탑 남쪽에 있다
七曲 臥龍潭 在迦葉峯之東趾 能仁菴下-7곡은 와룡담이니 가섭봉의 동쪽발치 능인암 아래에 있다
八曲 孤雲壁 在靈臺少下溪南-8곡은 고운벽이니 영대 조금아래 계곡 남쪽에 있다
九曲 玉梁瀑 在龍潭北 紫玉峯下 山之僧稱古梁洞者也 示別派也-9곡은 옥량폭이니 용담 북쪽 자옥봉 아래 있다 산승이 고량동이라 일컫는 것은 다른 갈래를 보인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8) 선생이 구곡시를 지었으며 이 구곡의 명칭 가운데 옥병계 석문담 와룡담은 일찍이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1658~1716)가 명명하고 손수 팔분체(八分體)로 써서 암석 표면에 새겨둔 일이 있었고, 나머지 육곡은 병계가 그 아우 석문(石門) 윤봉오(尹鳳五)(1688~1769)와 함께 옥계(玉溪) 아래 복거한 후에 명명한 것이다.(출처:네이트)
존재 선생 25세(1751년 辛未)
屛溪 선생에게 束脩禮를 올리다
선생께서는 이해에 충청도 德山으로 병계 윤봉구선생을 사부로 정하고 속수례(束脩禮)를 올리고 사제관계를 맺었다. 속수례란 논어 술이편에 나온 말로 공자가 "스스로 속수 이상의 예물을 가져온 사람에게 내가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하고 말한데서 유래한다 여기서 존재 선생께서 찬한 艮庵公의 행장을 보자. "윤병계 선생과는 젊었을 때 한 마을에 살았음으로 서로 아는 것이 깊었다.(중략) 병계 선생은 그 자제와 문생들에게 말하기를 이 분이 나의 죽마고우이다"고 소개하셨다. 그리고 간암공이 존재 선생을 친구인 병계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는 서신도 보자. "백규는 어릴 적부터 천품이 質素하고 爲己文學에 뜻이 있어는데 이 멀고 외진 곳에 師友의 덕을 못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혼자서 찰흙 밭은 갈고 어두운 길을 가듯하면서 먼저 깨달음을 얻고 계발된 바 있으나 돌아보건대 사문을 위하여 어디 갈데가 있습니까. 이에 부급 천리하고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청하게 되니 헛된 삶이 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기를 기대합니다"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생은 이로부터 병계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15년간 장흥과 덕산을 오가며 스승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글 제공 : 圓山 위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