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장승은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벅수골)에 위치한다. 방촌리는 조선 정조대왕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린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고택 등 여러 문화재가 산재한 장흥위씨 집성촌 마을이다. 석장승은 관산읍에서 방촌리로 넘어가기 직전의 고갯길 양옆에 서 있는데 오른쪽(서쪽)에 있는 것이 남장승이고 왼쪽에 있는 것이 여장승이다. 2013년 06월 14일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남장승은 벅수라고도 불리며 몸통에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다. 높이 몸통의 폭이 40㎝ 가량 되고 가운데가 부러져서 시멘트로 붙여 놓았다. 얼굴이 있는 위쪽의 폭이 아래보다 조금 넓다. 머리 한쪽이 찌그러졌고 굵다란 테가 둘린 동그란 눈 위로 눈썹 부위가 푹 패어 있어서 어딘가 눈을 찡긋하고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며 코는 펑퍼짐한 개발코이다. 입은 아래로 크게 굽어 있어서 허실허실 웃는 모습인데, 조금 모자란 표정으로 보이기도 하고 생기는 것 없어도 남의 일에 부지런히 참견하는 악의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귀는 없으며 턱수염이 무척 넓다.
진서대장군이라는 명문에는 지세가 허한 서쪽을 누른다는 의미도 있지만, 진북이나 진동, 진남이 없는데 유독 진서만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서쪽인 강남(중국)에서 오는 호귀마마(천연두신)를 물리치려는 뜻이 담겨 있다.
반면에 여장승의 표정은 대단히 퉁명스럽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미륵, 돌부처라 부른다. 전체 높이 1.8m 가운데 얼굴 길이가 절반을 넘는데다 볼살이 투실해서 배짱이 두툼한 마나님 같은 느낌을 준다. 역시 이마에 주름살이 있고 두 눈은 둥그렇게 튀어나왔는데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다. 코는 펑퍼짐하고 입은 꾹 다물었다. 남장승이 네모난 돌기둥 모양인 데 비해 여장승은 위쪽이 둥글게 되어 있고 몸을 한쪽으로 약간 기웃하고 있다.
전해 오기로는 이 장승들은 고려 때 회주고성의 서북문 밖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방촌리는 고려 인조 때 정안현 치소였다. 인근 당동마을에서 인조의 비(妃) 공예태후(任氏)를 배출하여 인조 8년(1130년) 정안현이 장흥부로 승격된 후 다시 회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여말 해안지역에 왜구의 잦은 침입 등으로 다시 장흥부로 강등되었고 임시로 나주 철야현(현재 봉황)으로 치소를 잠시 옮겼다. 1130~1392년 262년간 방촌리 492번지 현 판서공파 종택(위성렬 가옥)이 동헌 터였다.
조선 태조 1년(1392)에 수령현(지금의 장흥읍)의 중녕산에 성을 쌓고 장흥의 치소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관산읍은 1936년까지 고읍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방촌리 일대에는 지금도 옥사정터라는 곳이 있고 논밭에서 기왓장이 나온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설로는 고려 시대에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무운장구를 빌기 위해 세웠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두 장승은 돌의 상태나 생김새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아 함께 세워졌다기보다 미륵으로 불리는 여장승이 먼저 있었고 그후에 벅수가 생겼으리라 추측되기도 한다. 지금은 둘 다 구별 없이 마을 수문신 구실을 하고 있다.
방촌리마을에서는 농악(풍물)이라 하지 않고 "액운(厄運)을 땅에 묻는다"고 하여 "매귀(埋鬼)"라고 칭한다. 400년이 넘게 이어져 온 대동계의 주관으로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장승에 제를 올리고 별신제를 지낸다. 마을 사람들은 새해 초사흘에 마을회관에 모여 부정이나 궂은 일이 없는 사람 가운데 3헌 제관(초헌·아헌·종헌) 유사, 집사 등 제관을 뽑는다. 뽑힌 제관들은 만약 부정을 타면 마을이나 자신에게 좋지 않다고 믿으므로 변소 갔다 와서도 목욕을 하고 제수를 장만하러 장에 갈 때도 목욕을 하는 등 몸조심을 한다. 제수는 보통 관산장(끝수가 3이나 8인 날 열리는 오일장)에 나가 장만한다. 대보름날 점심 후에 깨끗이 장만한 제수를 가지고 고갯길로 나가서 매귀(埋鬼)를 치면서 차려 놓고 ‘벅수’와 ‘미륵’에 각각 절하고 술을 올린다.
별신제를 지낼 때는 정월(正月) 보름날 아침 일찍 마을 입구 벅수에게 매귀(埋鬼)를 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간단히 주잔을 올린 제를 지내고 마을로 돌아온다. 장승이 서 있는 곳이 언덕길(馬士嶝)이라서 차들이 바람을 날리며 내달리는데다 근처에서 굿을 칠 만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천관산에 해가 걸린 오후가 되면 마을 중앙에 위치한 논에 미리 준비한 짚으로 만든 허제비(허수아비)을 논에 세워 놓고 차일을 친 제단에서 별신제(別神祭)를 지낸다. 이때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제주를 나눠 마시며 음복도 한다. 그 다음에는 매귀패를 앞세우고 허제비골이라는 도랑으로 가서 허수아비와 차려 놓았던 제물을 버린다. 이런 의식의 목적은 물론 마을의 액운을 쫓고 한해의 영복(迎福)을 드리고 풍요(豊饒)를 기원(祈願)한다.
(글.사진 : 栢江 위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