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다산등 언덕에는 장흥 위씨 시조 등 오현조(五顯祖)의 위패를 모신 하산사가 있다. 여기서는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이면 전국의 종친들이 모여 시조공 휘 경(鏡), 중시조공 휘 창주(菖珠), 5세 휘 계정(繼廷), 14세 휘 충(种), 15세 휘 덕룡(悳龍) 할아버지 등 다섯 분의 선조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다.
여기에 우리 위씨의 사우나 재각이 들어선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오헌(梧軒)은 대동보 지장록(p.65)에 “우리 선조 습독공(習讀公) 묘소가 장흥 치소의 남쪽 10리 못되는 곳 평화촌 다산등(嶝)에 있었고, 그 아래 옛 제실이 있었는데 어느 때 세운지 알 수 없다”고 적고 있다. 다만 오늘의 사우가 되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우리 위씨와 다산등과의 인연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마 위씨의 원래 보금자리인 읍내 동동리(東洞) 장원봉(壯元峯) 밑에 장흥의 치소가 들어서면서 이씨조선의 소개명령에 따라 이곳을 제2의 보금자리로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18세 휘 유형(由亨) 할아버지의 정자와 초가제각과 선인들의 유택(幽宅)이 많이 있다는 점에서 추정되고 있다.
1, 습독공의 산정재(山亭齋)(지장록p.95)
습독공은 자량(自良)의 손자이자 종복(宗复)의 아들이다. 판사공의 고려조 회복모의가 발각돼 조선조정은 위씨 등 관련자 후손의 출사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성계는 집권에 성공하자 금고형을 풀어줬다. 그럼에도 공은 선대의 유지에 따라 출사포기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산정재(山亭齋)를 짓고 주변에 죽백(竹栢)을 삥 둘러 심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 건너편에 있는 치소(治所)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증조 때 살던 집을 빼앗긴 앙금이 말끔히 사라질 리 없다. 그리고 치소에서 산정이 보여서 좋을 리도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어쨌거나 습독공은 주로 산정에서 생활했다. 존재공이 쓴 충의록에는 산정에서 기거했다고 적고 있으니 여름 한 때 사용하는 정자는 아니다. 그는 그곳에서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나 영천(靈川) 신잠(申潛·1491~1554) 등 고을 토박이보다는 외지인과 어울렸다. 추강과 영천은 모두 조정으로부터 배척당하거나 귀양 보내진 인물이다.
추강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1481년 문종의 왕후 권씨의 소능을 복위할 것을 상소, 세인들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벼슬할 생각을 않고 전국을 유랑하고 다녔다. 영천은 1519년 문과에 급제, 한림에 선발됐으나 1521년 안치겸 옥사사건으로 장흥에서 17년간 귀양생활을 했다. 이런 전후사정을 미루어보면 습독공의 생년은 1455~1460년쯤으로 추정된다.
1), 습독공이 남추강과 영천자와 종유했던 기록(지장록p.1134)
習讀公南秋江酬唱詩
(1), 秋江先生原韻(本題孟夏與聚餘慶遊魏習讀山亭)(押 苔 嵬 醅 開 回)
『漠漠松陰護翠苔 奈崖忽斷勢崔嵬 前臨大野平如掌 望盡長江絲絲醅 村宴但知園菜足 俚歌猶覺客愁開 主人高論能留我 坐待蒼然暮色回』
해설: 막막한 소나무 그늘은 푸른 이끼를 보호한데 달려온 비탈 문득 끊어져 형세가 높고 높네. 앞에는 넓은 들에 임하여 손바닥처럼 평평하고 긴 강을 바라보니 출렁이는 푸른 물결 술 괸 듯 하네. 마을 잔치는 단지 남세 밭 채소로도 족할 것이고 시골 노래는 오히려 객수를 일깨우네. 주인의 높은 이론 나를 머물게 하니 앉아서 창연히 석양빛이 돌아오길 기다리네.
(2), 남추강에게 화답함
『草亭蕭瑟傍江濱 落日殘秋送故人 別後情懷猶不耐 雷聲何處更傷神』
해설: 초당이 쓸쓸하게 강빈 곁에 있는데 해 저문 늦가을 석양에 고인을 보내구나. 이별한 후 정회를 오히려 견디지 못하는데 피리소리 어디서 부는지 내 마음을 상하게 하네.
이 수창시로 미루어 보면 산정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추강이나 귀양 온 영천은 당대의 문장가들이다. 따라서 습독공도 이들과 겨룰 수 있는 인품을 갖췄던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비슷한 처지라 잘 어울렀는지 모른다.
2, 산정재와 다산재(茶山齋)중수
산정재는 주인 습독공이 타계한 후 어떻게 됐을까? 산정재와 다산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혹시 습독공이 돌아가신 후 재각으로 쓰면서 이름을 다산재로 바꿨을까. 이에 대한 사연을 알려줄 기록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산등에는 습독공이 돌아가신 후에도 재각이 있었다.
그 재각이 산정재란 이름으로 유지되다 백산재로 바뀌었는지 아니면 산정재는 없어지고 백산재를 세웠는지 알 수없다. 오헌(梧軒)의 다산제각 중수기에는 1926년(丙寅)에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 문의(門議)로 6동을 세우니 옛날 것보다 조금 넓은 듯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지금의 재각은 1936년(丙子)에 세워졌다. 그 전의 재각(草家)은 너무 낡아 쓰러질 지경이었다. 다시 당시의 중수(重修) 상량문을 보자. 춘헌공(春軒公)은 “나무로 지탱하기 어렵고, 집을 이루지 못한지 3년이나 됐다”며 탄식하였다. 그는 이어 “아무리 방도를 마련하려해도 선책이 없었는데 원량(元良)이가 일을 해결해 줬으니 어질다”고 적고 있다.
하산사 강당인 백산재(栢山齋)는 회은(晦隱) 휘 원량(元良,1882~1945)의 희사로 이루어졌다. 운암공(雲岩公)의 11대 손인 그는 장흥군청이 1895년(乙未)에 신축한 동헌건물을 1934년 철거하자 그 건물을 부(府)당국으로부터 구입, 해체해 자기 집 사랑채로 이축했다. 이 사랑채를 다시 1936년 붕괴 직전의 재각으로 문중에 헌납했다. 그는 이축비 만여금(萬餘金)를 부담하고, 날마다 현장감독을 해서 지어 바친 것이다.
1), 하산사(霞山祠)의 연혁
(1), 하산재의 전신은 충렬재
5세 충렬공(忠烈公) 휘 계정(繼廷)의 묘각인 하산재(霞山齋)는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연하동(烟霞洞)에 있었다. 이 재각의 전신은 충렬재(忠烈齋)다. 충열재는 장흥군이 1910년 발행한 경술지(庚戌誌)에 “충렬재:재제암산동록연하동충렬공위계정묘각후손계철중수(忠烈齋: 在帝岩山東麓烟霞洞忠烈公魏繼廷墓閣後孫啓哲重修)”라고 적혀있는데서 확인되고 있다.
중수자인 계철(啓哲)은 누구인가. 그는 괴봉공 31세손이며 행원출신이다. 자는 치선(致善)이며, 호는 모암(帽巖)이다. 그가 언제 충렬사를 지어 문중에 희사했는지는 대동보 등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그러나 군지에 실린 기록이라면 그 또한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관련기록p.)
(2), 설단(設壇)과 명칭변경
하산재는 1925년(乙丑)부터 기록이 있다. 문중에서는 시조공과 판사공의 제사를 재각동편에 설단해서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재각의 명칭도 소재지의 지명을 따라 하산재(霞山齋)라 했다. 그러나 충렬사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달량진사변(達梁津事變)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사변 당시 왜적에게 전사한 장흥부사 한온(韓蘊)의 사우 이름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3), 하산재(霞山齋) 2차 중수
하산사는 한 20년쯤 지나자 낡아졌다. 비가 새고 벽이 허물어져 제사지내러 찾아온 종원들이 하루 밤이나마 지내기가 점점 옹색해졌다. 문중은 1953년(癸丑)회의를 열고 재각을 중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도 신축이 아니라 남의 재각을 뜯어 옮겨 짓기로 했다. 공사비는 문중에서 십시일반으로 추렴해서 충당하기로 했다.
그래서 군내 안양면 비동에 있는 길씨(吉氏)재각을 구입했다. 그 재각을 해체해서 지었다. 공사는 새 집 짓는 기간보다 오히려 더 걸렸다. 재각은 18년 후인 1971년(辛亥)에도 낡아 2차 보수공사를 했다. 이런 사실은 백당(栢堂)의 하산재 중건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그 기록에는“1953년(癸丑) 문중에서 추렴해서 1954년(甲午) 2월 6일 착공, 3월 1일 상량 등의 공정을 거쳐 공사를 마쳤다. 이어 1971년(辛亥)에도 2차 보수공사를 한 바 있다”고 적혀있다.
(4), 평화에 하산사 신축
하산재는 재각에 외진 곳에 있어 시제에 참여하는 종원이 해마다 줄어갔다. 사람이 적어 제관분정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70년대 초부터 논의되어 오다 1974년 문중회의에서는 평화로 이단해서 시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사우를 짓고 싶어도 문재(門財)가 빈약해서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마당에 황량(滉良) 종원이 신실 신축비를 자담하고 나섰다.
문중은 그가 희사한 230여만원과 종원 606명으로부터 모은 8백12만을 들여 1975년 2월 9일부터 신실 건축과 부대공사에 착공, 4월 25일 신실 신축공사를 끝내고 이틀 뒤인 27일 종친 248명이 참석한 가운데 예성식(禮成式)을 가졌다. 아울러 신실이 완료되자 계상(啓祥)과 성기(聖基) 종원이 각각 3마지기의 제답을 희사. 제향을 원만히 치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丙辰) 3월 13일에 개최된 문중회의에서는 제향일을 음력 3월 29일로 확정했다. 나머지 신실로 통하는 축대 및 계단공사와 백산재강당 기와공사도 3월 27일 완공했다. 도문중은 이를 자축하기 위해 3월 29일 전국의 종친 303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제향을 올렸다.
이어 1977년(丁巳) 3월 25일에는 사우 건립의연비와 독지가 3인의 공적비를 제막했다. 1992년 5월에는 제향일을 다시 양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했다. 이는 3월 29일이 농번기라 좀더 한가한 시기로 바꿔 잡은 것이다.
※ 하산사 설립일지(長興魏氏霞山祠事實錄)
·발기인대표
△ 부산면 啓炎, 賢良,
△ 관산면 錫漢, 一煥, 悳良, 容喆,
△ 장흥읍 秉良, 聖均
△ 용산면 聖哉
△ 율촌면 亨良, 尙复,
△ 서울 燦鎬
·1974년(甲寅) 10월 9일: 시조공과 판사공 평화이단결의
·1975년(乙卯) 1월 28일: 문중대표자회의 사우신축결의
2월 8일: 사우착공 및 9일부터 모금활동
3월 16일: 사우 상량식 거행
4월 25일: 신실 및 내삼문 준공
4월 27일: 신실 예성식 거행(종친 248명 참석)
·1976년(丙辰) 3월 13일: 제향일 매년 3월 29일 확정
3월 27일: 사우계단 및 백산재 번와공사 완료
3월 29일: 사우신축 후 첫 대제거행(303명 참석)
·1977년(丁巳) 3월 25일: 사우건립의연비 및 독지가 공적비 제막
※ 모금 및 제위답 헌성내용
·출연종인: 607명
·황량종원: 2,386,000원(신실신축비)
·총모금액: 10,506,385원
·제위답헌납: 啓祥, 聖基 각 3두락
(5), 시조공 사적비 건립사업
사우를 신축한지 11년 뒤에도 위씨의 성지를 다듬는 대역사가 있었다. 즉 시조공사적비건립, 충렬공 재각 이건, 백산재 외삼문 신축, 광장 및 주변정리, 진도묘비 건수 등 5대사업이 그것이다. 1986년 10월에 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명칭은 ‘회주군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로 임원은 다음과 같이 선임됐다.
△명예위원장= 燦鎬
△위원장= 民煥
△총무위원= 彧良
△재무위원= 龍良
△섭외위원= 石良, 聖浩, 星煥
△전례위원= 圭复, 焌
△감사= 鍾鎰, 聖文, 玉煥
추진위는 전국의 종인을 대상으로 1구좌에 1백만원 이상의 출연을 독려하고 적당한 크기의 비석감을 구하러 나섰다. 비석감을 수소문한지 7개월만 1987년 4월 충남 보령군 웅천면에서 9척에 달하는 석재를 구입, 대천을 거쳐 보성석재공장으로 운반했다.
백산재 외삼문 신축공사와 철거한 기존 외삼문을 제기고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가 착공됐다. 축대, 백산재 계단, 옛 우물 관정사업, 전체건물 도장 등 공사가 동시에 진행됐다. 사적비문은 이가원(李家源) 박사에게 의뢰해서 음각했다. 공사는 1987년 4월말까지 완료됐다. 추진위는 1987년 5월 3일 사적비 제막식을 1천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
※모금액: 53,000,000원(희사자 48명) 사적비 투자액: 17,000,000원
2), 편제록(扁題錄)(편제록p.61)
(1), 다산제각(하산사 강당급백산재) 중수 상량문
茶山祭閣(霞山祠 講堂及栢山齋) 重修 上樑文
①『엎드려 생각하건대 아무 언덕 아무 물은 선인께서 오르고 내렸던 혼령(魂靈)이 여기에 있고 우리의 크고 작은 언덕에 오늘날 건축하니 규모(規模)가 옛 보다 더 하였네. 제각을 새로 지으니 산천도 달리 보이네. 공경하옵게도 우리 선조가 계시니 합문판사공(閤門判事公)께서 절의(節義)를 지켜 두문불출(杜門不出)한 뒤에 승문습독공(承文習讀公)은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오른 처음 분이로다. 독곡(獨谷)위에 터 잡아 산정(山亭)을 지어놓고 일찍이 남추강(南秋江)과 같이 종유(從遊)하던 곳이요 정화소(丁火所)에서 조상께서 소요(逍遙)함은 대개 신령천(申靈川) 유화(遺化)의 고을을 취함이다.
② 이곳에서 살다가 이곳에서 늙으니 의리(衣履)를 감춘 곳 삼척분묘(三尺墳墓)요, 옛적도 이와 같고 지금도 이와 같으니 향화(香火)는 천추토록 끊어짐이 없으리라. 겸하여 참군공(叅軍公)의 단(壇)도 같이 위에 있으니 또한 이 다산등(茶山嶝)의 분묘와는 오보의 사이로다. 수호의 규칙을 둔 까닭은 또한 재목(齋沐)의 장소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밤낮으로 일하고 생각한 것이 진실로 장구(長久)한 좋은 계책이 아니며 하물며 비바람에 창벽(窓壁)이 젖고 처져 허물어질 염려가 있을까 두렵도다.
방금 세태(世態)는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어 천하가 쟁전(爭田)하니 사람들이 모두 을보명(乙普明)이요, 또한 아교와 황칠처럼 된 분중(盆中)의 의장(義庄)이니 누가 다시 범문정(范文正)이고, 기울어짐에 ‘일목(一木)으로 지탱하기가 어렵고 집을 이루지 못한 지가 삼년이나 되었구나, 혹은 인구수(人口數)를 계산하여 추렴하라는 부득이한 의론도 있었으나, 또한 가가호호마다 설득할 수 있는 선책이 없었으니 어찌하리요, 어찌도 다행인가 원량(元良)이가 아버지의 일을 맡아 종사(從事)하니 어질도다.’
바야흐로 운암공(雲巖公)도 후손이 있어 조상의 사업을 이어받으니 능히 어질다고 하리라. 띠 집을 바꾸어 기와를 이어 기리 천백년동안 견고(堅固)하길 도모하고, 사랑채의 동량(棟樑)을 철거하되 수만금의 비용을 받지 아니하였네. 진성갈력(盡誠竭力)하여 즐겨 묘역의 밑에 집을 지어 노심초사(勞心焦思)하여 주책(籌策)을 마음속에서 옮기네. 오직 그 낮고 그 선명함에 자재(梓材)를 보니 빛이 있고, 차마 폐하지 못하고 차마 거칠게 아니하여 안정(顔亭)을 쳐다보니 부끄러움이 없네.
반석(盤石)은 완전하니 공고(鞏固)할 것이고, 천양(天壤)이 불폐(不獘)하면 영존(永存)하리라. 훤칠하게 들어남에 새가 날개 펼쳐 훨훨 나는 것 같고 장 하도다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소나무도 무성한 것 같구나. 예양강(汭陽江)이 넓고 넓으니 낙침(落枕)해도 경효(警效)를 기댄 듯 하며 사자산 높고 높으니 주렴사이로 정채(精采)를 가상(可想)하리, 연하동(烟霞洞)이 미첩(眉睫)위로 들어오니 충렬공(忠烈公)의 영령(英靈)을 가히 내가 갱장(羹墻)한 듯하며, 또한 장원봉(壯元峯)이 지척간(咫尺間)에 있으니 추밀(樞密)의 유허(遺墟)는 실로 우리의 고향이네.
밝음이 이에 오리니 효사(孝思) 길이 말하리라. 내가 드리고 내가 받드니 추원(追遠)하여 덕이 후한데 돌아가고 여기에 살고 여기에 처하니 겨레를 모아 정이 더욱 돈독(敦篤)하리. 주복(珠腹)은 누가 가호(賈胡)가 아니며, 사정(思亭)은 그대 홀로 견씨(甄氏)로다. 어찌 다만 선조 필분(苾芬)의 장소만 되리오, 박속(薄俗)의 모범된 가옥이라 할 것이다.
영인의 도끼 멈추지 아니하니 닦은 들보 이에 들어 올리리라. 감히 문의에 따라 어기어차로 도우리라. 어기어차 들보를 동으로 던져라 학사(學士) 당년(當年)에 처음 해동에 왔네. 백리의 회주(懷州)골 하사받은 땅이니. 면면히 천재(千載)토록 무궁하게 이으리라. 어기어차, 들보를 남으로 던져라. 서울에서 어느 해에 남으로 표박(漂泊)했나. 절의지켜 두문(杜門)하니 가법(家法)이 옛 스럽고 혹은 음직(蔭職)이니 뜻이 어찌 달랐으리.
어기어차 들보를 서로 던져라. 종동(鐘銅)이 상응(相應)하니 동서에서 응답하네. 촌료(村醪)와 원채(園采)로 성기(聲氣)를 돋우니 오직 남방에 도의가 가지런하네. 어기어차 들보를 북으로 던져라. 일념으로 천손(天孫)이 북두성(北斗星)을 떠받드네. 집집마다 글 읽고 외우는 소리 시례(詩禮)를 지키니, 청전(靑氈) 백세토록 긍식(矜式)하고도 남으리라. 어기어차 들보를 위로 던져라. 오르내린 영령(英靈)께서 위에 앉아 계시네. 제물을 올림에 예로부터 예문(禮文)이 있었으니 이를 좇아 일을 하니 어찌 어기며 잊으리오.
어기어차 들보를 아래로 던져라. 화려(華麗)한 당을 선영하로 옮기었네. 단신 독력(獨力)으로 부당함이 이 같으니 능히 인간에게 부자(富者)임을 깨우치네.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上樑)한 뒤에 효자는 끊어지지 않고 세덕(世德)은 이뤄지기를 구하리라. 이에 만년(萬年)토록 기울지 않고 무너지지 않음은 이는 풍우(風雨)를 잘 제거함이요, 자손들이 번창하여 능히 인하고 능히 사하여 조빈(藻蘋)을 캐리라.
꽃은 장춘(長春)하고 해는 불개(不改)하리라』
병자(丙子) 1936년 7월 상순(上旬)에 후손(後孫) 계반(啓泮)이 기술하다.
③ (2), 다산묘각중건기(茶山墓閣重建記)
조상이 사당을 떠나게 되면 보본(報本)의 정성을 펼 곳이 없다. 이러므로 묘제(墓祭)가 있다. 이미 묘제를 지내게 되면 제수(祭需)를 장만하는데 정성을 드려야 하고 조촐하게 장만해야 하는데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러므로 묘각(墓閣)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 또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용납(容納)되여 마지아니할 바다.
이에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사대부의 벌족한 집안들은 대개 열성조(列聖朝)께서 효로 다스리고 예로 이끌어온 교화(敎化)를 입어 더욱 더 선조를 받들고 원조(遠祖)를 추모(追慕)하는 절차를 서로 권장(勸獎)하여 반드시 묘소에다 제각을 만들어 정성스럽게 고하고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못하듯 정성을 펴지 못한 것 같은지라.
아! 아름답도다. 우리 선조 습독공묘(習讀公墓)가 장흥치소(長興治所)의 남쪽 10리 못되는 곳 평화촌(平和村) 다산등(茶山嶝)에 있었고 그 아래에 옛 제실(祭室)이 있었는데 비록 어느 때에 세운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그 곳이 낮고 좁아 제계하며 잘 수 없음을 근심하였다. 지나간 병인(丙寅)년에 문의(門議)의 결정으로 육동(六棟)을 세워 새롭게 하니 보기에 옛날 것보다는 조금 넓은 듯하였다.
그러나 겨우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수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바야흐로 질기와로 덮을 것을 계획하는데 운암공(雲岩公) 11대손으로 원양군(元良君)이 있어 훌륭하였다.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니 천성(天性)이라 선조를 위하고 일가를 도와주기를 숭상하였으며 궁한 이를 구제(救濟)해 주고 가난한 분을 도와주는 것이 또한 사람들의 생각 밖에서 나오니 간간히 외출하다 돌아오면 횃불을 들고 기다린 자가 거의 손꼽아 셀 수 없는 정도였다.
우리 문중의 각 묘소 중 연하동(烟霞洞) 장천재(長川齋) 운주동(雲珠洞)의 세제시(歲祭時)에 방차일(方遮日)이며 향로합(香爐盒)이며 반기(飯器) 잔대(盞臺) 수저 변두(邊豆) 등 물건을 일그러질 때마다 보충하지 않을 때가 없으니 일문중이 이미 칭찬하여 물건이 쌓여졌다가 사라지고 한 지가 오래되었다.
군이 진즉 그 바깥사랑채를 지었는데 그 장려(壯麗)함이 말할 수 없었다. 이윽고 선비는 감히 할 바가 아님을 갑자기 깨닫고 철거하려고 하니 이에 원매자(願買者)가 만금을 더하여 사려고 계속 드나드나 끝내 듣지 아니하고 다산묘(茶山墓) 아래로 옮기기를 청하니 문중 의론이 엇갈려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지난해 장천재(長川齋) 문회(門會)때에 군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전임하였는데 와서 단연(斷然)히 혼자 힘으로 이건하겠다고 말한지라.
아! 사람의 인심(仁心)을 누가 능히 막으리오. 금년 봄에 문재(門財)로 옛집을 좌우로 나누어 옮겨 직실(直室)과 익랑(翼廊)을 세우니 옛터가 넓고 큰지라 이에 군이 만여금을 출자하여 이건하니 하루아침에 묘하에 우뚝 솟아 산천도 모양을 바꾸었고 초목도 빛을 더하였다. 이 전후의 경비가 흡족히 누만금(累萬金)은 될 것이다.
아! 세상에 다시 이런 사람이 있으리오. 가만히 세상의 윤옥자(潤屋者)를 보건대 대체적으로 재물을 기르는 데만 풍요(豊饒)롭고 베푸는 데는 인색하여 하지 아니하니 마원(馬援)의 이른바 수전노(守錢虜)요 양자(楊子)의 이른바 사슴 우리에다 난간(欄干)을 만든 자 거의 드문지라 이 소문을 들은 자 땀이 촉촉이 이마를 젖어들어 마침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하루는 문중(門中)의 여러분들이 내게 이르기를 묘각의 상량문은 춘헌옹(春軒翁)께서 여러 사람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이미 써 놓았으니 건축의 전말은 오자가 기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신지라. 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능하지 못한 일에 능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하나 조금 있으니 장하도다.
이 사람이여! 아름답도다. 이 사람이여! 세인은 이익에 임해서는 얼마간의 이익에도 다투는데 이 사람은 누거만(累鉅萬)을 아끼지 않았으니 홍범(洪範)에 이른바 부(富)하고 또한 착하다함은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孟子)가 인용한 바 부(富)를 위하여 불인한 자가 과연 세인을 위하겠는가 하였으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아! 효하도다. 이와 같은 사람이여! 인하도다. 이와 같은 사람이여! 진실로 마땅히 대서특필을 한번만 써서 그칠 것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이 이 어떠한 시절인가 삼강(三綱)이 윤몰(倫沒)되고 구법(九法)이 패퇴(敗頹)되어 부자가 서로 원수 되고 형제가 서로 원수를 삼은 자 목덜미와 등을 서로 바라본 이러한 때에 이 사람은 이에 원조(遠祖)를 추모(追慕)하여 능히 이 일을 판출(辦出)하니 더욱 가히 복을 받을 것이다. 옛날 송현(宋賢)이 말하기를 두기공(杜祁公)이 재물을 쓰는 데는 나도 따라갈 수 있으나 그의 마땅히 쓸 곳에 쓰는 데는 내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만약 송현이 이 사람의 쓰는 곳에 있었다면 어떻다고 말하였을까?
이와 같은 일들이 그 근본 한 바가 있으니 군은 문학이 있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제사(祭祀)를 받들되 예로써 하고 자손을 가르치되 의로써 하였으며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동복(僮僕)을 부리는데 이르기까지 지적하건대 하나도 그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불인하고서 능하겠는가? 아름답구나. 이 사람이여! 사람마다 모두 이 사람 같다면 우리의 문중이 어찌 반드시 창대(昌大)하지 않겠는가. 시에 이르기를 영원히 효를 생각함에 효를 생각함이 법이 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효자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고 기리 복과 자손을 준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이로써 군을 위한 송도(頌禱)를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쓰노라. 호산(湖山)의 환공(環拱)과 운연(雲煙)의 탄토(呑吐)며 죽수(竹樹)와 날짐승 물고기며 천석(泉石)과 화목(花木) 등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이 제각(祭閣)에 올라와 보면 알 것이다. 가히 간략하게 쓴 것이 마땅하며 또한 미칠 겨를이 없다. 때는 공부자(孔夫子) 탄강(誕降) 2487년 병자(丙子) 오월 하순이다.
습독공(習讀公) 13대손 계룡(啓龍)은 삼가 기술(記述)하다.
(3), 하산재 중건기(霞山齋 重建記)
하산재는 우리 위씨의 중조 고려태보(高麗太保) 충렬공(忠烈公) 묘하의 재계(齋戒)하고 자는 장소인데 근고에 또한 재의 동편에 설단하여 시조(始祖) 회주군(懷州君)과 고려말(高麗末) 충신(忠臣) 지후공(祗侯公)을 향사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패(頹敗)되었고 자손(子孫)들이 번창(繁昌)하여 수용(收容)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지나간 건국 계사(癸巳) 1953년에 드디어 혁신(革新)하고 확대하였으니 대저 이 같은 큰일을 마침은 이 같은 합력이 아니고는 불능한 것이요, 이 같은 합력은 원조(遠祖)를 추모함이 깊지 아니하면 불능한 것이니 이를 가히 쓰지 아니할 수 없다.
그윽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충렬공은 4대 왕조를 차례로 섬기면서 계옥(啓沃)이 크고 많았으며 곧은 절의와 맑은 덕은 조정 백관들을 벌벌 떨게 하였으니 나라에 있어서는 실로 주석(柱石)이요, 겨레에 있어서는 이 산두(山斗)(태산(泰山)과 북두(北斗))였다. 능히 휘업(徽業)을 열어 수10세를 빛나게 하였으니 조선께서 묵묵히 후덕을 내려 천여년 후예(後裔)를 비호(庇護)해 줌이 태산과 교악(喬岳)같음이 있으니 비록 그 운동은 나타나지 않지만 공리(功利)가 물에 미친 자 넓고도 길다.
이에 고려조에는 명경(名卿)과 대료(大僚)가 대대로 선혁(嬋爀)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관작(官爵)이나 문벌(門閥)이 고려조보다는 못하나 충의와 문장 도학으로 당시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차지한 자 세상에 드물게 태어났으며 그 나머지 문무의 백관은 손으로 다 꼽을 수가 없으며 지금에 이르러 비록 세상에 현요(顯耀)한 이는 없으나 장자는 오직 효우와 학문으로써 그 자제를 힘쓰게 하고 소자는 또한 떳떳함을 쫓아 순박함을 다스려 스승의 가르침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그 조상의 후손됨을 잃지 않으려고 기약하니 이에 향린(鄕隣) 여러 고가(故家)의 해범(楷範)도 일찍 우리 장흥 위씨보다 먼저 하지 못하니 대저 누가 시켜서 그랬을까.
우리 조상께서 덕을 기르고 인을 쌓은 보답과 후손들이 근본을 두텁게 하고 사실에 힘쓰는 효과가 아니겠는가! 이는 실로 백배나 옛 보다 많으나 다만 이제 한갓 귀현(貴顯)함이 잠시 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세변(世變)이 날로 심함이 하루 같은지라 무릇 우리 조상의 후손된 자 또한 마땅히 옛 보다 배나 추선하고 유후(裕後)한데 힘을 쏟는다면 하늘에 계신 영혼(靈魂)께서 항상 복을 내릴 것이요, 재를 같이한 겨레도 기리 그 아름다움을 받을 것이며 재가 끊임없이 이어져 보존됨은 다음 일이다.
우리 춘곡(春谷) 진사부군께서 찬술한 공(公)의 갈명(碣銘)에 경사를 후손에게 내려주시고 멀고 깊을수록 커지며 산악(山岳)처럼 기울지 않기를 천억년(千億年)이라 하신 말씀 또한 헛되지 않을 것이다. 연하동(烟霞洞) 산악(山岳)의 장려(壯麗)한 영구(靈區)와 임천(林泉)의 청정(淸靜)함은 대인군자의 만년 유택(幽宅)임이 마땅하고 현조의 후손은 백세토록 재숙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재각이 이미 완성됨에 문중의 부형이 불초에게 명하기를 그 사실을 기술(記述)하여 지금과 후손들에게 보이라고 함으로 감히 글할 줄 모른다고 사양하지 못했으며 이 일에 후손인 하식(夏植)과 계훈(啓勛) 양씨께서 실로 노고가 많았으나 또한 제종이 위촉(委囑)함이다.
단기(檀紀) 4304년(1971) 신해(辛亥) 입추절
후손 대환(大煥)은 삼가 기술(記述)하다.
(4), 하산사기(霞山祠記)
우리 위씨의 시조신라회주군과 고려말 충신지후공을 고려 태보 충렬공(忠烈公) 묘각의 동편 하산단(霞山壇)에 동향(同享)한지 이미 몇 년이 되었다. 문중의론이 그 곳이 외지다하여 지난봄에 비로소 평화의 백산(栢山)에다 이단하기로 정하고 또 단을 바꾸어 사우를 짓기로 의결하였으나 실은 출전(出錢)하기가 어려웠다.
어찌도 그리 다행인지 우리 종친 황량(滉良)이 독력으로 자담하겠다고 청(請)하여 230여만원을 내놓아 이 사를 두 달 동안에 완성하였고 충렬공(忠烈公)을 추향하였으며 사의 외형은 옛것을 따랐으니 그것은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대저 선조를 위해서 거재(鉅財)를 내놓음은 비록 부자라도 또한 어렵거늘 이제 황량은 부자가 아니면서 능히 해내니 어려운 가운데서도 더욱 어려운 일이다.
황량의 6대조 관암공(冠庵公)이 죽천사(竹川祠)를 중수하였는데 존재선생이 칭찬하기를 금인이 누가 능히 대의를 알아 전재를 아끼지 아니하고 이렇게 쾌활(快活)하리오 하시고 드디어 모를 청계옹(聽溪翁)의 초손(肖孫)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이제 황량이 그 조상의 자취를 이어받아 이런 아름답고 큰일을 갖추니 공은 비록 공의 초손이라 하여도 또한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어서 또 계상(啓祥)과 성기(聖基)가 각각 제토 삼 두락씩을 희사하여 제자(祭資)를 도움으로써 이제야 의물(儀物)이 능히 갖추어졌다. 옛 어진 이의 말에 두기공(杜祈公)의 용재에는 가히 미칠 수 있으나 마땅히 쓸 곳에 쓰는 데는 가히 따를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제 모두가 조선의 봉향한 곳에 쓰니 사용함이 이보다 더 큰대는 없을 것이다. 아! 어질고도 효성스럽도다. 공(功)이 있으면 반드시 포상(褒賞)하는 것이 옛날의 제도(制度)다.
각각 그 성명을 돌에다 대서특필해서 앞으로 백세토록 보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요, 사의 제기나 담장이나 계단이나 전로의 확충 축조에 있어서는 제족이 희사한 거액(鉅額)을 사용하였으니 또한 그 시종과 근로를 열서(列書)함이 마땅할 것이요, 그 돈을 거두어 사용함으로써 그 공사를 감독하여 이룬 자는 해의재공(奚疑齋公)의 5대손 용철(容喆)이다.
공은 죽천사(竹川祠) 중수한 일에 참으로 독실하였으므로 존옹께서 또한 칭찬하였는데 이제 그 손자가 능히 유풍을 지켜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으니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현량과 성균(聖均) 계당(啓瑭)도 또한 이 일에 힘썼으니 아울러 기록한다. 백산재(栢山齋)는 본래 습독공(習讀公)의 묘각이었는데 사의 강당으로 겸용하니 곁에 있는 제종들이 어찌 감탄하지 아니하리오. 대환(大煥)이 본래 속문(屬文)에는 익숙하지 못하는데 문중의 부로가 대환(大煥)에게 기록을 명함으로 대략 그 전말을 서술한다.
광복후(光復後) 정사(丁巳) 중삼절(重三節)
후손 대환(大煥) 삼가 기록(記錄)하다.
(5), 하산사 신실 상량문(霞山祠 神室 上樑文)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조상의 적덕(積德)과 누인(累仁)이 당일까지 유휴(流庥)하고 음호(陰護)하여 주심은 진실로 이치가 있으므로 당연한 것이요, 자손이 축실하여 사채(舍采)함에 무궁토록 추원보본함은 또한 하늘에서 정한 상도(常道)의 발로이다.
공경하옵게도 시조이신 아찬공은 신라의 명신이요, 대당의 학사로다. 모토(茅土)를 나누어주고 벼슬을 받았으며 회주(懷州)의 채읍(采邑)에 봉되었고, 공덕을 세우고 선치(善治)하여 성명이 사기에 찬란하다.
충렬공(忠烈公)은 수세를 역사(歷事)하면서 강직하여 죽음으로 군왕을 간쟁(諫爭)하였고 만춘(萬春)의 사치하고 화려함을 배척하였고, 지후공(祗候公)은 구방(舊邦)의 회복을 생각하고 종용(從容)히 신복(臣僕)되기를 거절(拒絶)하여 신왕(新王)의 형장(刑杖)과 유배를 입었다.
천안절(天安節) 글은 문장의 병랑(炳烺)함을 보겠고 자릉대(子陵臺)의 글귀는 절의의 쟁영(崢嶸)함을 알리라. 구묘(邱墓)의 수전(守傳)을 잃어 일찍 단선(壇墠)을 쌓았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또한 흩어졌고 추향(秋享)에 분필(芬苾)을 드렸으나 매양 눈바람에 서 있어 깊은 탄식이 자연히 생기었네. 많은 자손들이 궁벽(窮僻)한 지역임을 꺼리어 이에 신실을 이축하기로 결의하였다.
황량이 떨치고 일어나 홀로 자금을 담당하니 어찌 이 군간(窘艱)을 고려(顧慮)하였으며 용철이 부지런하여 이에 공사를 감독하였으니 조석으로 노고를 견딤이 애처롭다. 재목은 다른 지역에서 가져왔으니 박로(欂櫨)나 외얼(椳闑)이 모두 그 마땅함을 얻었고 터는 백산(栢山)을 선택하였으니 천석(泉石)과 연하(煙霞)가 어느 곳이 이곳보다 승지라 하리요.
진실로 귀서(龜筮)가 길일을 도왔고 이에 장석(匠石)이 마음을 다했네. 경영한지 일년이 지남에 우리 일가는 자나 깨나 마음속에 있었고 갈고 닦은 지 수개월이 못되어 이 집이 우뚝 솟아 안전(眼前)에 나타났네. 준분(駿奔)하여 관장(灌將)하니 이에 많은 후손들의 덕이 후한대로 돌아가고 힐향(肹蠁)하여 척강(陟降)하니 거의 세분 선생의 영혼이 영원히 편안하리라.
감히 6위의 노래를 불러 긴 들보를 들어 도우리라. 어기어차 들보를 동으로 던져라. 부상(扶桑) 솟은 해가 단충(丹衷)을 비치구나. 대대로 충효를 전함이 가문 위한 계책이니 손꼽아 보아도 남주(南州)에서 누가 같을 소냐? 어기어차 들보를 서로 던져라. 석제(石堤) 비온 뒤에 풀이 무성하다. 서호(西湖)는 막막(漠漠)하여 어찌 그리 가득한가. 슬프다. 우리 중생 희미한 길 같구나.
어기어차 들보를 남으로 던져라. 억불산(億佛山) 옥립봉(玉立峯)이 청람(晴嵐)에 둘러있네. 지금의 뭉친 정기 만천년을 이어가니 길러냄이 몇 명의 사나인가. 어기어차 들보를 북으로 던져라. 무수한 중성(衆星)이 북두성(北斗星)을 떠받드네. 우리 조상 당년에 모훈(謨訓)을 남겼으니 지금처럼 어찌 가히 모칙(模則)하지 않으리오. 어기어차 들보를 위로 던져라. 우주를 바라보니 기운이 청랑(淸朗)하다. 창창(蹌蹌)하고 제제(濟濟)하게 정성을 드릴 때에 정령(精靈)이 방불(彷彿)하게 오르고 내리구나.
어기어차 들보를 아래로 던져라. 저 구구(區區)하게 반측(反側)한 자 흘겨보네. 의(義) 행(行)하고 강(綱) 붙들어 나완(懦頑)함을 깨우치고 면면히 천재(千載)토록 향화(香火)를 이어가세.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한 뒤에 계산(溪山)이 빛을 더하고 첨우(簷宇)가 항상 새로우리. 천지의 요기(妖氣)를 소제(掃除)하여 거의 황하(黃河)가 다시 오늘에 맑아질 것이요, 충효의 아름다운 행실을 일과처럼 책임지고 우리 성씨가 장차 천추토록 떨칠 것을 기다린다.
단기(檀紀) 4310년 정사(丁巳) 입하절(立夏節)
후손 석한(錫漢)이 근술(謹述)하다.
※ 다산재(茶山齋) 명칭의 실종(失踪): 1975년 평화에 시조공의 사우가 들어서면서 장흥군 장동면 연하동 충렬공 묘각 이름인 하산재의 법통를 이어간다는 뜻으로 신실의 이름을 하산사(霞山祠)라 했다. (지장록p.1078)
하산사 예성축문(禮成祝文=大煥 撰)에 전략 “이제 백산재(栢山齋)에 사우를 만들어 태보충렬공을 추배하였으며, 백산을 하산이라 한 것은 근본을 잊지 않으려함이요 3세를 1체로 하여 사우를 같이 하니 이는 마땅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습독공 이후 1974년까지 불러오던 ‘다산재’라는 제각명칭을 어떤 이유와 근거로 폐기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아울러 하산사 강당을 어떤 이유에서‘栢山齋’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는지도 밝히지 않고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하산사’라는 이름을 계승하더라도 기존 강당의 이름인 "茶山齋"를 바꿔야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