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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장흥위씨 시조 회주군 사적비

장흥위씨 시조 회주군 사적비(長興魏氏 始祖 懷州君 史蹟碑)

 

1. 명칭 :  장흥위씨 시조 회주군 사적비(長興魏氏 始祖 懷州君 史蹟碑)

2. 소재지 : 전남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3. 건립일 : 1987년, 이후 譜疑로 改碑

4. 건립자 : 장흥위씨 도문회(長興魏氏 都門會), 위민환

5. 글 : 진성 이가원(眞城  李家源)

 

◇ 始祖公 史蹟碑 全文

公의 諱는 鏡이요 본시 關西弘農人으로 六三八年 신라 善德女王께서 唐太宗에게 道藝之士를 請함에 房魏洪睦奇殷吉奉 등 八學士를 파견하였다. 諸公은 떠나던 날 서로 七言一句씩을 읊어 一律을 이루었는데 魏公은 信步層岩近太陽이라했다. 경기 唐項을 거쳐 入國한 後 벼슬이 阿湌에 이르고 高麗 忠宣王 때 懷州君에 追封되었다. 회주는 長興의 옛 이름으로 公이 곧 長興 魏氏의 시조가 되며 그 후 二九八年間 失系되었다.
고려초 侍中 菖珠를 一世로 세워 中祖로 받들어왔다. 그 아들 澾은 監察御使와 門下承宣을 지냈고, 三世 原補는 中郞將으로 紫金魚袋를 받았으며, 四世 耆老는 顯宗 九年 등과하여 門下侍中에 올라 金紫光祿大夫가 되었다. 五世 繼廷은 文宗 때에 登科하여 네 임금을 섬겼고 三重大匡門下侍中守太保에 이르렀다. 卒後 忠烈 諡號를 받고 睿宗廟廷에 배향됐다. 六世 紹는 戶部員外郞과 僉議政丞을 봉직했으며 三兄弟를 두었는데 장남 元凱는 장원급제하여 翰林學士와 樞密院副使로 봉직하다가 出家하였다. 法諱는 沖止로 松廣寺 六代 祖師가 됐다. 입적 후 圓鑑國師 諡號가 내려졌고 그 詩集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 차남 文凱 또한 이듬해에 장원급제하여 翰林學士를 거쳐 平陽郡事와 補闕을 지냈다. 삼남 信凱도 문과에 급제하니 사람들이 바위 아래 오두막집에서 天池의 여러 龍을 길러낼지를 누가 알았으랴 하며 부러워했다. 마을 뒷산 세 봉우리 중 높은 두 峯을 壯元峯이라하고 다음 峯을 居末峯이라 한 것은 宋나라 蘇洵 三父子에 견주어 붙인 이름이다. 文凱의 아들 克謙이 右直諫이었고, 아들 景孝는 門下評理였으며, 아들 溫은 門下侍中同平章事로 紫金魚袋를 받았고 修文殿學士로 東國史記를 편수했다. 十一世 仁鑑은 戶部尙書요, 十二世 脩는 扞城郡事다, 十三世潤琦는 龍虎將軍이요, 十四世 种은 閤門判事다. 恭讓王 三年 侍中 金宗衍 등과 기울어가는 고려 왕권을 회복하려다 西京千戶 尹某의 告變으로 杖流됐다. 李太祖 受禪 後 罔僕하다가 太宗의 强勸으로 出仕하여 判內贍寺事 別侍衛牌頭를 봉직했다. 十五世 悳龍은 通善郞으로 太宗 때 府廳의 이전에 따라 누대의 세거지를 떠나 平化에 터를 잡았다. 아들 自溫 自良 自恭 自儉 四兄弟를 두었는데 첫째는 綾州, 둘째는 長興에 머물고, 셋째는 차손 頓과 더불어 咸興으로 이거했다. 다만 넷째는 四代 이후 孫이 끊겼다. 이것이 약 四八○여년에 걸친 장흥 위씨 盛衰의 역사다.
一九七五年에 霞山祠를 移建하고 懷州君을 主壁으로 中祖公 忠烈公 判事公 通善郞公을 配享하여 五顯祖를향사하고 있다. 一九八七年은 회주군 東來 一三五○年이 되는 해다. 後孫 각 파는 성금을 모아 始祖公의 史蹟을 새긴 큰비를 장흥 옛터에 세우기로하고 건립위원회 有司가 그 시말을 적어 漢江 넘어 不佞家源에게 碑銘을 청했다. 唐나라는 天下의 대국이요 세상살이 또한 더없이 평안한데 父祖의 유업과 祖上의 분묘와 좋은 벼슬을 두고 萬里 他國으로 떠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凡夫라 할지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건만 公은 결연히 天涯의 땅을 이웃처럼 생각했고 뱃길 風波를 평지와 같이 여겼다.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이 遠大한 抱負를 펼치니 어찌 百世의 豪傑이라 아니하겠는가. 여기 그사실을 가지런하게 쓰고 이어 銘으로써 내 느낀 바를 적어본다.
學士의 높은 氣象 뛰어나도다. 唐나라 초엽 文化는 성하고 웅려한데 황농씨의 후예 翰苑에 높이 올라 날개 짓 하네. 한가로이 道藝를 즐기며 부족함이 없었거늘 어찌 훌쩍 멀리 떠날 수 있으리오만 노을 구름 바라보며 가슴조이다. 聖賢의 말씀을 좇아 七學士와 함께 길을 떠났네. 天風에 기대어 詩를 읊으며 귀한 손 異域 계림에서 懷州를 얻으니 山水는 맑고 아름답기 그지없어라. 노래는 千年歲月이 흘렀건만 그 遺風 오히려 오늘에 이어져 樵夫牧童이 듣고 길가는 이가 이를 가리키니 하물며 어진 子孫이 어찌 이를 잊을 소냐. 마침내 큰비를 깎아 고향에 세웠네. 내 公의 발자취를 더듬어 이글을 새김에 길고 긴 感懷 그칠 새 없어라.
翳學士之翹翹兮黃農氏之神裔値大唐之初葉兮文華盛而雄麗登翰苑而翶翊兮固優游乎道藝羌有餘而無不足兮何飄飄然高揭聖欲居而人願生兮望雲霞而勞我思七學士與同途兮倚天風而賦詩遘賓異於鷄林兮得懷州而委蛇懷之山水淸且美兮歌於斯而詠於斯曠千載而溯遺風兮草樹猶聞剩芳行路爲之指點兮矧慈孫之敢忘琢穹碑而載巋兮是幷州之故鄕拒實事以雕余銘兮印惑緖之孔長
一九八七年 仲春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撰
前面陽記 咸安后人 雲菴 趙鏞敏 謹書
都門會는 족보의 오류를 바로 잡기위해 譜疑論 硏究委員會를 설치하고 그 연구결과에 따라 李家源撰의 原碑文을 補正國譯하여 이를 改書하다.
二○一二年 五月 日 長興魏氏 都門會

 

(글제공 :  圓山 위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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