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재(栢山齋)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장흥 위씨 소유의 건물로는 관산읍 옥당리 천관산 기슭에 있는 지방문화재 제72호인 장천재(長川齋)에 이어 두 번째로 문화재가 됐다. 선조들의 숨결이 스며있는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우리의 자랑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장흥 위씨의 시조 등 오현조의 위패를 모신 성지(聖地)의 중심건물이고 보면 더욱 감개무량하고 가슴 뿌듯한 일이다.
강당이 있는 평화리의 유래를 알아보자. 평화하면 어쩐지 마음이 포근하다. 차분하고 정감어린 말과 소리로 느껴진다.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난리나 전쟁 같은 개념이 아니고 태평(泰平)스런 이미지인 평화(平和)가 있는 마을처럼 편안함을 준다. 사람들에게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리라. 우리 국민은 너무도 많은 난리를 겪고 살았기에 평화라는 말을 소중하게 여긴지도 모른다.
장흥 위씨의 성지라 할 평화는 평할 평(平)자와 될 화(化)자의 마을이다. 평화마을은 해발 518m 억불산(億佛山) 자락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읍에서 동남쪽에 뻗어있는 산의 모양은 국내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기묘한 자태를 보인다. 어찌 보면 잔잔한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편안한 말(馬) 등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영화속의 그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평화라는 이름은 신씨들로 인해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때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억불산 연대봉(396,7m)의 봉수대를 관리하는 책임자인 신경원(申敬源)이 조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손자 신원수(申元壽)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평산인(平山人)의 화속지(化屬地)라는 의미를 줄여서 평화촌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600년 이어온 平化村과의 因緣
장흥 위씨와 평화마을과의 인연은 조선초지로 올라가야 한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장흥읍 동동리 현재 법원과 검찰청사 자리에서 살았다. 그 터는 백제 때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신라 때 마읍(馬邑), 고려 때 수령현(遂寧縣)으로 이름이 바꿔지면서 영암의 속영이었다. 1156년 정안현이 장흥부로 승격되면서 편입되고 회주목, 장흥부, 조선건국과 함께 장흥도후부 치소가 됐다.
존재공(存齋公)이 기록한 방촌(傍村)과 장흥부(長興府)의 연혁을 보자. 이 기록을 보면 지금 방촌지역은 백제 때 오차(烏次), 신라 때 오아(烏兒), 고려 때 정안(定安)이라 하였고, 고려 예종(睿宗) 때 공예태후의 출신지라 해서 장흥부로 개칭됐다. 그후 원종(元宗) 6년(1265 乙丑)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됐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회주목을 장흥부로 환원됐다고 한다.
장흥부로 승격은 정안현과 수령현의 통합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안현이 장흥부로 승격되면서 수령현이란 행정구역이 증발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치소는 정안현의 방촌으로 통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로 미루어보면 우리 조상들은 장흥부 승격시점을 전후해서 옛 수령현의 치소에 보금자리를 잡았다고 보인다. 적어도 원감국사 3형제는 여기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말로 판사공이 이성계세력을 뒤엎으려다 적발돼 고초를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중령산(中寧山) 인근에 있던 1414년 장흥부가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비좁다는 이유로 선조들이 살고 있던 자리를 내주고 나와야 했다. 수령현 자리에서 약 200여년간 살다 쫓겨난 것이다. 이 수난시대의 주인공은 14세 판사공과 아들 15세 통선랑공, 16세 자온 자량 자공 자검 등 3대라 할 수 있다.
평화로 이사한 후 위씨들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최대의 변화는 분파(分派)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외줄로 내려오던 자손이 수령현 마을에서 평화로 이사한 이후에 이루어진다. 즉 16세 자온계는 능주(綾州) 자량계는 관산, 행원, 여천, 자공계는 사월파, 관북파로 갈리게 된다. 다만 막내 자검계는 현손대(玄孫代) 이후 손이 끊기면서 계파를 이루지 못하고 소멸되게 된다.
또 하나의 변화는 생활의 무대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 때까지 조상들은 사는 곳이 다르지 않았다. 항상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식구가 불어나면서 더 이상 한집에서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결혼 등 여러 요인을 감안해서 흩어 졌다. 자공(自恭)의 경우 용산면 사월방(沙月坊)으로 가서 손자까지 두었으나 사민(徙民)정책에 따라 천리타향 함경도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평화에는 관산과 행원파인 18세 유형(由亨)과 유정(由貞) 형제와 여천파조 용(庸) 등이 살았다. 형인 습독공(習讀公)은 다산등(茶山嶝)에 산정재(山亭齋)를 짓고 자손들을 가르쳤다. 한편 공은 당대의 문사들과 종유하고 지낸다. 그들 가운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과 귀양 온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 등과 수창하기도 했던 곳이다.
栢山齋의 來歷과 文化財 指定
오늘 문화재로 지정된 백산재(栢山齋) 강당과 습독공이 15세기와 16세기에는 산정재가 공의 묘소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 정자 또는 재각이 언제 어떤 연유로 없어졌는지는 알 수 가 없다. 그 후 현재 백산재 자리에 초가지붕의 재각인 다산재(茶山齋)가 있었다. 다산재는 너무 낡아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문중의 원로들은 신축을 꾀했지만 뾰쪽한 방법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회은공(晦隱公) 원량(元良 1882~1945)은 자기 집 사랑채를 문중에 헌납하기로 결심했다. 문제의 사랑채는 1895년에 지은 장흥부의 동헌(東軒)건물이었다. 이 건물을 1934년 일제(日帝)가 장흥경찰서를 신축하려고 철거한 것을 회은공이 구입, 일단 부산면 기동(基洞) 자신의 집 사랑채로 이건한 것이다. 그러나 회은공은 붕괴직전의 재각을 보고 모른척할 수 없었다.
이미 옮겨지었지만 사랑채를 문중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1936년 다시 사랑채를 뜯어 옮겼다. 초가인 다산재 재각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이축(移築)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축에 따른 비용과 공사감독도 자신이 맡아했다. 그가 공사를 하면서 고구마로 시장기를 때웠다니 아마 그해 늦가을로 짐작된다. 그렇게 해서 이건공사를 마친 후 문중에 헌납한 것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과정과 이유를 보자. 도문회는 2007년 장흥군을 통해 전남도에 문화재지정을 요청하는 공문을 접수했다. 그러나 서류미비 등으로 반려됐다. 그 후 서류를 보완해 다시 접수했다. 사계의 전문가들이 현장을 답사하고 사실여부를 조사했다. 그것도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루었다. 그런 연후에 4명의 전문가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백산재는 문중의 재실(齋室)이다가 장흥 위씨 문중의 사우인 하산사의 강당으로 함께 활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원래 조선후기 장흥부의 관아(官衙)건물로 2차(二次) 이건(移建)을 통해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것이다. 당시 이건 과정에서 거의 원형 그대로 옮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산재는 건축부재나 결구수법(結構手法)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인 19세기경의 건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된 본 건물은 비록 이축과정에서 다소 변형된 구조기법을 보이기는 하나 넓은 대청과 온돌방 등 조선후기 관아건물 구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들보 등 사용부재도 매우 장대하고 견실하며,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5량 가구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백산재는 조선시대 행정관아의 건물이 거의 없는 터에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관아건물 연구 자료에 도움이 되고 장흥부 관아의 복원측면, 공공기관 건물이 장소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용도가 변화되는 점을 알 수 있는 측면, 문중의 지속적인 보존노력으로 새롭게 사우 강당으로 정착한 측면 등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전라남도는 2008년 12월 26일 문화재지정을 위한 지정예고 1개월(2009년 1월 25일)의 공고기간을 거쳐 전라남도는 문화재보호법 제72조와 전라남도 문화재 보호조례 제 3, 5, 7, 9조와 동시행규칙 제 3조의 2호 등의 규정에 따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지정대상 제272호로 지정한 것이다. 이어 전남고시 제2009-126호로 지정 고시된 지정문화재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의 지정구역(보호구역) 지형도면을 토지이용규제기본법 제8조 동시행령 제7조에 따라 고시했다.
農民軍에 全燒된 東軒의 後身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서 비롯된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항전지는 장흥이다. 1892년 2월 대궐 앞 시위가 효시가 됐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1894년 백산(白山)에서 2차 봉기 후 3월 21일 고부관아를 점령한다. 이후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어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군이 경복궁을 점령, 노골적인 침략야욕을 보이자 전봉준은 3차로 9월 13일 삼례에서 봉기한 후 일군을 응징하기 위해 북상하다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해 궤멸됐다.
장흥인의 동학입문에 두 설이 있다. 하나는 1891년 해월로부터 수도설(受道說)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 접수로서의 수도설이다. 그러나 이방언(李芳彦) 이인환(李仁煥) 구교철(具敎徹) 이사경(李士敬) 강봉수 등은 전봉준의 2차 격문에 따라 가담한다. 강진에서는 김병태(金炳泰) 남도균(南道均) 안병수(安炳洙) 윤시환(尹時煥) 윤세현(尹世顯) 등이 동참한다. 장흥에서는 이사경이 접주로 6월에 용계면(龍溪面, 현 夫山)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활동했다.
동학사태의 안핵사(按핵使)로 임명된 부사 이용태(李容泰)의 후임으로 1894년 7월 30일 박헌양(朴憲陽)이 부임했다. 그는 장흥의 동학을 다스리기 위해 향교의 유림들과 토벌계획을 마련하는 한편 수성소(守城所)를 설치, 도당을 체포하면 포살했다. 전봉준의 농민군이 북상할 당시 이방원 휘하병력은 5천명이 넘었다. 박부사가 강경책을 쓰자 10월 16일부터 장평 사창(社倉)으로 집결했다. 11월 중순에는 웅치. 회령. 대흥 등지에도 수천명이 웅거함을 확인했다.
주력부대는 목촌(木村)에 이방원, 용계(자라번지)는 이사경, 웅치는 구교철, 고읍(관산)은 김학삼(金學三)이 접주였다. 당국은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북상할 틈을 이용하려 했다. 광주에 머문 손화중과 최경선은 나주 수성군과 접전했으나 그때마다 패해 12월 1일 남평과 능주로 후퇴해 그 일부가 장흥까지 내려왔다. 이 때문에 전북 금구출신 김방서(金方瑞) 화순 김수근(金秀根) 능주 조종순(趙鍾純) 등이 합세하면서 장흥의 농민군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사창에 집결된 이방원부대 1만명은 12월 1일 벽사역(碧沙驛)으로 진격했다. 찰방 김일원(金日遠)은 가족을 데리고 성안으로 대피했다. 그는 농민군에게 성이 함락될 것을 직감하고 병영으로 찾아가 병사 서병무와 나주 초토영에게 다급하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자신들도 위태롭다며 거절했다. 농민군은 벽사역을 불태웠다. 12월 5일 새벽에는 어산 접주 이방원, 용계면 이사경, 웅치 구사철 부대 3천여 병력이 동동리 소재 장흥부청을 향해 쳐들어왔다.
농민군은 천주(天主)부적을 그린 수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주문을 외면 죽창을 들었다. 박부사는 중과부적으로 대적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모두에게 "살길을 찾으라"며 혼자 동헌을 지켰다. 농민군이 쇄도해서「선화당」에 앉아있는 그에게 인수(印綬)와 병부(兵簿)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는 "줄 수 없다" 거절했다. 그러자 그를 끌고 동헌 밖에서 죽였다. 박부사의 시신은 12월 7일 유림 김용후(金容厚)와 박우인(白禹寅)이 수습, 모래사정에 가매장했다.
농민군에게 함락된 장흥성은 완전히 불바다가 됐다. 모든 부청의 건물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들이 벽사역과 장흥부청에 대해 크게 앙심을 가진 이유는 전임 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임명되면서 찰방의 병력을 데려가 농민군을 가혹하게 다루고, 신임 부사도 지방의 도당을 발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강경일변도로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부는 장흥부의 관아를 이듬해인 1895년 신축했다. 그 가운데 백산재의 전신인 동헌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강제로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후 국사는 일본의 의도대로 추진됐다.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작업이 강력히 추진됐다. 그 가운데 지방조직도 대폭 개편됐다. 종전의 감사. 목. 부. 군.현제도가 시와 군으로 개편되고 치안은 경찰서가 전담하게 됐다. 그래서 시군에 경찰서가 들어섰다. 장흥도 1934년 동헌자리에 경찰서 건물을 세우게 됐다. 한식인 동헌을 뜯어내고 양식건물을 신축하기 위해서다. 동헌건물의 목재를 회은공이 자신의 사랑채로 앉히기 위해 구입해서 이건했던 것이다.
그러니 백산재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소된 장흥부의 동헌건물로 1895년에 신축→1934년 회은공의 사랑채→1936년 장흥 위씨 재각→강당을 거쳐 114년 만에 문화재로 지정됐다. 한 개의 건물이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변신을 거듭한 경우는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그러기에 다른 어떤 건물보다 가치가 있는 건물일 수 있다. 앞서 전문가들의 평가대로 19세기 조선 관아의 건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건축양식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살아 있는 건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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