烈婦南平文氏行蹟碑
文女史는 有治 名門家인 南平 文桂洲의 딸로서 西紀 1893年 11月 28日 태어났다. 父母로부터 男從之道를 비롯 閨房의 凡節을 익혀 淑女로 자라서 因緣이 닿아 軍資監 判官 雲巖居士 十代孫 魏啓析과 佳緣을 맺어 父母 奉養과 남편을 하늘같이 받드는 婦道를 걸었다. 夫君 啓析은 동갑내기로서 身言書判이 빼어나고 孝悌忠信을 바로 아는 선비였으니 맏형과 동생을 둔 둘째였다. 夫婦之間 금슬의 단꿈은 1914년 22세때 아들을 낳아 28 宿中奎星, 즉 文運星이 이름을 따라 어질고 글 잘하라며 仁奎라 불러 여느 사람과 같이 평탄한 人生항로가 시작됐다. 그러나 順風의 時間은 너무나 짧았다. 1917년 9월에 夫君 啓析이 앓아눕게 된다. 醫員과 藥등 百方으로 至誠을 다했으나 百藥이 無效라. 그해 十월 斷指의 精誠도 헛되이 幽明을 달리하니 父母께는 不孝요, 25세 靑孀의 품에 네 살난 孤子만 안겨 놓았다. 참으로 晴天霹靂에 天崩之痛이런가. 앞길을 생각하니 深山幽谷에 길이 없다. 몇 차례나 自盡을 결심했던가. 그러면 父母 앞에 또 不孝요, 仁奎의 앞날을 생각하며 마음 바꾸어 외로운 烈婦의 길을 구김 없이 걸었다. 4년 뒤 1921년 媤父喪 1946년 媤母喪, 孟母之敎로 기른 仁奎의 成婚 5男 1女의 得孫 長孫 滋炯을 비롯 孫子孫女의 敎育을 위한 길쌈일 등등 세간을 꾸리면서 夫君死後 평생 비단은 물론 고운색옷을 입지 않고 夫君에 대한 愛慕의 精을 一片丹心 간직한 채 75세를 一期로 가셨다. 이에 1961년에 烈婦 洞薦 面薦 및 本鄕 儒林多士의 鄕薦까지 이어져 1966년 長興 丙午誌에 登載된 榮光이 있었으나 이제껏 表하나 못했던 차, 門議가 齋發하여 雲巖門中 이름으로 여기에 烈女碑를 세우니 時代가 變하여 烈婦 란 單語의 뜻이 많이도 희석됐다한들 한 時代의 最高 道德律로 살아간 그때의 烈婦 文女史는 오늘에 와서도 더없이 推仰받아야 할 것이기에.
西紀 1994年 4月 6日
族人 沙月派 魏聖浩 謹識
族人 訓導公派 魏俸煥 謹書
雲巖宗中 竪
長孫 滋炯, 次孫 基形, 光年, 光善, 光五, 鍾順 獻誠
비문 謹書을 하신 훈도공파종중 동곡공(東谷, 諱 俸煥, 1930~2004)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동곡공은 현 신와고택에서 거주하셨죠.. 당대 방촌에서 드믈게 新.舊학문을 하셔 1985~2000년 사이 본향 위문 문중사와 지역유림사 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특히 기묘대동보 편찬시 교정 등 중요 일을 맡아 면밀히 일을 처리하셨죠..제가 중2학년때 서울에서 고향 방촌으로 내려오셔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존경하여 신와고택 집에 자주 들러 많은 가르침을 배웠죠..그때 동곡께서 저의 머리를 늘 쓰다드므면서 격려 하시곤 하였던 일이 생생합니다.~~(백강 위성록)
비문 謹識를 하신 桂沙公에 대해서
譜疑는 “北萬庵 南桂沙”라 해야.
"여기서 우리 문중의 전통적 등식 하나를 바꿔 야 할 지 모른다. 옛날 어른들께서는 전국에 문명을 날친 선조로 남유계항(“南有桂巷”)과 북유만암(“北有萬庵”) 이라 일컬었다. 이런 표현은 18세기를 서셨던 두 분 선조의 학덕을 기라는 칭송일 것이다.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譜疑 문제 하나를 뚝 떼어서 보자면 계사공을 빼놓을 수 없다하여 남유계사 譜疑는 “北萬庵 南桂沙”라 해야~~ (圓山 위정철)
열부 문여사님은 대종회장님(송담 위자형)의 할머님이십니다. 송담회장님의 부친인 인규公과 6손자녀를 바라보며 50년을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아 오셨습니다. 위씨문중의 모든 할머니들이 그렇듯 인고의 세월이었습니다. 희생으로 자식들, 손자들, 동생들을 뒷바라지 한 바로 나의 할머니요, 나의 어머니요 나의 누이의 모델입니다. 이 글을 이 땅의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 누이에게 드리고 역사기록으로 남기려는 차원에서 싣게 되었습니다.(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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