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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愚頂)위계룡(魏啓龍)(곡성현감공파, 31세, 1921년생) 항일독립운동가, 전남 담양출신(4-1)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살펴보면 위씨문중 출신으로서 국내외 항일, 의병으로 활동하신 6분을 항일독립투사로 그 공을 인정하여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위석규(1878년~1913년)공과 위계후(1884년~1944년)공 두분의 어르신에 대해서는 이미 [위씨요람 / 위정철 편저]에 소개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네분인 위계룡(1921년생)공, 위승환(1881년생)공, 위종관(1909년생)공, 위희정(?년~1922년)공은 알려진 바가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에 공훈록과 일본법원의 재판기록(현재 찾고 있는중)을 중심으로 네분 중에서 우선 우정(愚頂) 위계룡종친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위문의 족보에는 우정(愚頂) 위계룡 종친에 대해 증조부는 영운, 조부는 용조, 생부는 석권이며 백부 기권에게 양자를 갔고, 아들은 정량, 손자는 진환이며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했다고 기록되어 지고 있다. 애족장이란 애국지사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국가보훈처에서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분으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정(愚頂) 위계룡 종친의 본적은 전라남도 담양 昌平面 長奉里 242이고 주소는 釜山市 南區 廣安2洞 146번지이다. [乙種幹部후보생으로 日本軍에 입대 후 美軍 일본 상륙시 합류하기 위하여 동지규합 탈출공작 중 피체되어 8년형을 받고 5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라고 공훈록에 적시하고 있다. 더 자세히 설명하는 기록을 보면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일찍이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고 있던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단말마적 발악을 계속하던 1944년 1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학 중 일본 희로(姬路) 제54부대에 을종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펼 것을 결심하고 미군(美軍)이 일본에 상륙할 때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미군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도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인 학도병 1명과 동포 1명을 동지로 포섭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45년 3월 일본 군법회의에서 소위 국체변혁에 관한 죄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45.3.31 중부군관구군법령의(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문:원산,백강,위신복/글:벽천)

*위승환(魏承煥) (관북파추정, 33세,1881년~?년) 항일독립운동가, 함경남도 함흥출신(4-2)
*위승환(魏承煥) 의병장의 본적(주소)는 함경남도 함흥 南西 四街이다. 의병대장인 홍태영 진영에 소속되어 황해도 인근에서 수차례 일본군과 싸웠고 경기도 등에서 군수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 확인으로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되어 1995년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승환(承煥)종친의 활약상을 정미의병,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김동식 장군]서적기록, 국가보훈처 공훈록 공시내용을 통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승환(承煥)종친은 의병(義兵 / Righteous army)이다. 여러 의병중에서도 승환종친은 정미의병(丁未義兵) 계열에 속한다. 초기에는 한강이북의 황해도 인근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다가 중상을 입은 후 한강 이남의 수도권에서 군수자금관련 업무를 수행하였다. 일본은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어린 순종을 즉위시켜 한국 식민지 공작에 열을 올렸다. 일제는 정미칠조약을 근거로 정치 통치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시켜 한국의 합법적인 무장세력을 제거했다. 이런 사유로 정미의병은 1907년 군대의 강제 해산에 따른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시작되었다. 해산군인의 합세로 의병의 전투력은 크게 진작되었다. 다방면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의병진에 합세해서 산악지대를 근거로 하는 유격전을 수행할 수 기반이 되었다. 이후 정미의병은 세력을 확장하여 중국과 러시아의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대일항전을 계속하여 점차적으로 대한독립군으로 발전되었다. 참고로 (日韓合邦秘史)에서는 3,000여회의 전투에서 구한말 의병으로 전투중 사망자를 약 1만 7천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김동식 장군]의 책자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경북민군은 18일 영천에서 크게 싸워 이겼고, 황해도 민군은 9일 채응연 의병장이 거느린 1천여 명의 민군이 곡산의 일본군을 토벌하여 관아를 접수하였으며, 23일에는 신정희 의병장이 거느린 1천여 명의 민군이 평산의 일본군을 토벌하여 역시 관아를 접수하였다. 이로써 민군의 토벌횟수는 줄었지만 그 전투력은 더욱 막강해서 일본군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확인시켰다. 정탐군의 밀고로 위승환(魏承煥) 의병장이 체포되었다.](글:위신복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홍태영(洪泰英) 의진에 가담하여 황해도, 경기도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이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말살하는 등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하여 갔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에 본격적으로 저항하고,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 주구배들을 처단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위승환(魏承煥)은 이 같은 시기인 1908년 2월 홍태영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홍태영 의병장의 지휘에 따라 황해도 서흥군(瑞興郡)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차례 교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른손을 상실하여 불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계속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의병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09년 9월 서울 종로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수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고란대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9년 11월 9일 경성지방재판소를 거쳐 같은 달 29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을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316, 317면]
*승환(承煥)종친을 족보에서 찾고자 위신복, 위성록 종친과 더불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습니다. 혹시 종친들 중에서 승환(承煥)종친이나 그 후손을 알고 계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자문:위신복,백강/글:위신복,벽천)


*난사(蘭史) 위종관(魏鍾琯) (판서공파, 33세, 1908.8.10~1991.3.12) 항일독립운동가, 장흥 유치 단산출신(4-3)
*[대구지방복심법원 1937.7.19. 선고 형공공 제56호, 판결]에서 위종관(魏鍾琯) 종친은 원심검사의 공소로 인해 대구지방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전남운동협의회를 통한 항일운동 경력을 그 공적으로 인정하여 2008년이 되어서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위종관(魏鍾琯) 종친을 애국지사로 선정하게 되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하여 내지(內地, 일본)와 조선은 하나라는 정책과 더불어 강압통치를 했는데 어린아이가 울면 “너 순사가 잡아 간다”하면 울음을 뚝 그친 것을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탄압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으로 수저부터 문고리와 쟁기 등 쇠란 쇠는 다 가져가는 바람에 마치 구석기시대와 같이 나무와 돌로 공구를 만들어 생활하고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리고 양식을 모두 빼앗아 가는 바람에 조선인들 대부분이 나무껍질과 나물로 주식을 삼아 변비가 심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위씨문중에 6분의 독립운동가가 계셨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위계후공과 위석규공에 대해서는 [위씨요람/위정철 편저]에 게재되어 있고 위계룡공은 [동친동정 67호]에서 이미 소개했다. 이번의 난사(蘭史) 위종관(魏鍾琯) 종친에 대해서 족보, 국가보훈처 공훈록, 전남운동협의회를 중심으로 조명해 보자. 독립운동의 계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미국과 유럽영향을 받은 자본주의계열, 그리고 사회주의사상 계열인데 난사(蘭史)공은 후자의 계열에 속한다.  
*난사(蘭史) 종친에 대해 위문의 족보에는 고조부는 찬조, 증조부는 신권, 조부는 계성, 부는 정규(생부는 계묵), 아들은 면우, 득우, 홍, 봉택, 형택, 명택, 임택, 딸은 선의, 후의이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다. 묘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27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적과 주소는 전라남도 장흥읍 有治面 丹山里 369번지이며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全南 長興郡에서 劉載星등과 같이 農民組合을 組織하여 勞動運動을 展開하며 活動하다 被逮되어 懲役 1年 6月을 받아 獄苦를 치른 사실]이라고 직시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을 보면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1933년 10월 전남 장흥군(長興郡) 관산면(冠山面) 옥당리(玉堂里) 일대에서 유재성(劉載星), 정진수(丁瑨壽) 등과 함께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농민조합을 조직하고 각 부락 농민조합 내에 청년반, 농민반을 두게 하여 노농운동(勞農運動)을 전개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무죄를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불복으로 공소가 제기되어 1937년 7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判決文(1936.12.28 光州地方法院 木浦支廳) ·判決文(1937.7.19 大邱覆審法院)]라고 기술하고 있다.
*난사(蘭史) 위종관(魏鍾琯) 종친이 활동한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대해 살펴보자. 1933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결성된 사회주의운동협의체로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지역전위정치조직의 기반을 만들고자 한 사회주의자들의 협의체이다. 1933년 5월, 해남과 완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활동가인 김홍배와 황동윤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활동하다 농민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을 지도할 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장흥, 강진, 영암 지역에서도 지역활동가들과 연계하였는데, 1934년 2월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나 와해되었으며 사건 관련자가 3천 명, 검거된 자만 558명에 달하는 큰 사건이었다. 이들은 합법적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중속으로 파고들 것을 결의하였다. 영암의 활동가들도 야경단, 농촌진흥회 등 관제 조직 속에서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 치중하였으며, 마을을 단위로 한 소규모 조직을 만드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나 시작단계에 그치는 바람에 크게 조직을 확대하지는 못하였다. (자문:위신복,백강/글:벽천)


*위희정(魏希禎)(관북파 추정, ?세, ?년~1922년) 항일독립운동가/순국열사, 평북 강계출신(4-4)
*희정(希禎)종친을 끝으로 위씨문중내 항일독립운동가 6분의 행적을 정리했다. [위씨요람/위정철 편저]에 소개된 1)장흥 당동출신 청계공파 효자송의 주인공인 위윤조공을 부친으로 둔 덕암 위석규공은 러시아에서 젊은 31세 나이에 병사했고, 2)담양출신 해인 위계후공은 출옥 5년후 1944년에 사망했다. 3)담양출신 곡성현감공파 위계룡공(종친동정 No.67호), 4)장흥 유치출신 판서공파 위종관공(종친동정 No.68호), 5)관북파 위승환공(종친동정 No.69호) 세분은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투사의 형태를 투쟁지역에 따라 국내냐, 국외냐로 국내, 만주, 미주, 일본 등으로 나눈다. 또한 항일방법 등에 따라 의병, 학생운동, 애국계몽운동, 3.1운동, 광복군, 임시정부, 국민부, 국민회, 광복회, 오적주살, 의열투쟁, 군자금모집, 연통제 등으로 나눈다. 희정(希禎)종친은 국외 만주방면과 의열투쟁 계열에 속한다고 보여진다. 희정(希禎)종친의 독립투쟁 활동상을 공훈전자 사료관, 동아일보 기록,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희정(希禎) 종친의 본적은 평안북도 강계로 상세주소는 미상이며 1922년 일제에 의해 피살되었다. [1922年 陸軍駐滿參議府 第1中隊 副士로 中國 奉天省 輯安縣 2道溝에 출장하였다가 中國 土軍의 습격으로 피체된 후 日警에게 인계되어 殉國한 사실이 확인되어 1999년 애족장이 수여되었다.]라고 공훈전자 사료관에서는 공시하고 있다.
*동아일보에서는 당시 상황에 대해 [기미년 삼일운동이후 남북만주에 가서 조선독립운동을 하던 조선인들이 중국관헌의 압박으로 무참히 희생을 당한 사람이 수백명이고 약탈당한 재산도 수백만원이상인데 최근 모처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집안현 중국관리가 체포하여 일본관헌에게 넘기어 그만 희생을 당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판명되었다. 현성희, 최희관, 박지숙, ~중략~ 위희정(魏希禎), 함태욱 등 합이 칠십여명]라고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글:위신복)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평북 강계(江界) 사람이다. 만주지역의 독립군 단체인 참의부(參議府)에서 활동하였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이념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통의부 의용군내 제1, 2, 3, 5중대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한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는 독립운동단체이다. 참의부는 중앙의회를 가지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는 단체였다. 참의부는 활발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제1중대장 백광운과 제2중대장 최석순에 의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백광운이 피살된 후에는 최석순이 참의장 겸 제2중대장으로 있으면서 군사활동을 주도하였다. 참의부의 군사활동은 국내 진격전으로 대표된다. 참의부는 압록강유역과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상은「독립신문」에 자세하게 보도된 바 있다. 위희정은 참의부(參議府) 제1중대 부사(副士)로 집안현(輯安縣) 이도구(二道溝)에 출장 갔다가 토군의 습격으로 피체된 후 일경에게 인계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477面 ·抗日殉國義烈士傳(吳在植, 1958) 337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473面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96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29面 ·東亞日報(1927. 5. 14)]
*희정(希禎)종친을 족보에서 찾고자 위신복, 위성록 종친과 더불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습니다. 혹시 종친들 중에서 희정(希禎)종친이나 그 후손을 알고 계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자문:위신복,백강/글:위신복,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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