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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술자료

59(1785 乙巳)茶山草堂 精舍 개칭하다
지난해(1784
甲辰) 겨울부터 이축공사에 착수한 「다산초당」을 이해 봄에 마무리 짓고「다산정사(茶山精舍)」라 명명했다. 다산정사는 「영이재」로부터 시작해 1775(乙未)에「다산초당」에 이어「다산정사」가 된다. 詠而齋重建記事(국역 존재집 6 63)에는 1700년부터 76년간 영이재, 다산초당은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간이다. 다산정사의 완성은 본격적인 강학 저술기(55-71)를 알리는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과거와 사강회로 인한 오랜 상심을 털고 심기일전해 허다한 경학 관련, 저작들을 이곳에서 산출하기 때문이다.
『나는 8, 9세 때부터 경서는 사람다움을 만드는 신방(
神方 妙方)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요어(要語)를 초록(抄錄)하여 좌우에 놓아두거나 차고 다녔으며, 담장, , 문에 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20세 이후 의지가 나뉘고 게을러졌으며, 30세 이후에는 세상에 희망이 끊어져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을 버렸다. 40세 이후에는 더욱 비분한 감정이 복받치고 방탕하여 드디어 평생을 그르치게 되었다. 지금 63(1789 己酉)에 처지가 곤궁해지고 나서야 근본으로 돌이켜 회상해보니 떨리고 슬퍼서 한 밤중에도 회한(悔恨)의 눈물을 쏟아낸다』

 60
(1786
丙午)
스스로 기뻐할 때 읊은다
5
월 단오(
端午)를 기해 신주를 고쳐 쓰고 제사(吉祭)를 지냈다. 향사례를 베풀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북송시대의 강절(康節) 소옹(邵雍)의「首尾吟」을 차운한 수미음(首尾吟)이란 한시를 다시 차운해「續首尾吟」을 지었다. 두 사람의 수미음은 모두 130구가 넘은 장편이다. 그러나 선생의 수미음은 78구만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이 수미음을 통해 선생의 작시관(作詩觀)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생이 시를 읊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첫째, 천명(
天命)을 알아 스스로 기뻐할 때 시를 읊은다고 했다. 과연 무슨 뜻일까. 함축하는 의미가 너무도 크다. 곧 진리를 깨우칠 때의 그 경이로움과 희열 등을 느낄 때에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둘째, 관물(觀物)할 때 우러나온다고 했다. 곧 사물을 관찰할 때 시상이 떠올라 시를 짓는다는 말일 것이다. 셋째, 근심스러울 때 스스로 울어 나온다고 한다. 왜 근심스러울 때 시상이 떠올까? 이 말에는 희로애락을 모두 포함한 의미로 해석된다.

續首尾吟(78 8)
子華非是愛吟詩 자화가 시 옲기를 즐기는 것은 아니로다
詩是子華自愍時 시는 자화가 스스로를 근심할 때 울어 나온다
欲爲大人空白髮 대인이 되려다가 백발의 몸이 되었고
稟生偏氣負良知 편협한 기질을 타고 나서 양지를 저버렸다
千年有友空書籍 천년의 벗이 있거늘 헛되이 서적만 뒤적이다가
一世何之坐呆凝 한 세상 어딜 가려 했기에 얼간이로 나앉았는가
若見仲尼吾不悔 그렇지만 만약 중니를 본다면 난 후회 않으리
子華非是愛吟詩 자화가 시 읊기를 즐기는 것은 아니로다

 61
(1787
丁未)
不孝 후회하며 自悔歌를 짓다
봄에 32(1758) 때 저술한 환영지(
寰瀛誌)의 개정 및 출판 작업에 착수했다. 일종의 세계지도인 환영지는 29년 전인 1758년에 저술한 것인데 친구인 생원 성도(聖圖) 하희서(河羲瑞)와 함께 내용의 일부를 고치고, 출판을 위해 판목(版木) 10여판을 새겼으나 자금사정으로 중단하고 말았다. 이때 출판을 위해 하희서와 공동으로 작업한 목판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하희서는 선생의 댁에서 상당한 시간을 머물면서 득량만 등 바닷가와 천관산 등을 유람했다.
선생의 연보에서 친구가 집에 와서 지낸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와는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였던 모양이다. 다만 하희서의 신상은 알려진 게 없으나 그와의 우정을 생각하며 4편의 7언 율시를 지어 주었다. 자괴(
自愧)의 회한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5월에 보성 조양(朝陽)의 문씨에게 시집간 누이가 타계했다. 겨울에 돌아가신 양친을 그리워하며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도를 후회하면서 부모를 섬기는 방도를 담은「자회가(自悔歌)」를 지었다.
선생은 소옹(
邵雍) 元會運世說 인용해 三代()에 태어나지 못함과 一元(129600)의 소진기(消盡期)에 태어났음을 한탄한다. 23년 전인 38(1764)에 읊은 같은 시제 遣懷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삼벽(三僻)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을 강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주순환법칙으로 풀이하고 있어 대조적이다.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의 삼세설(三世說)은 거란세(據亂世소강세(小康世대동세(大同世) 등이다.

自悔歌

第一項 父母恩功
아비되고/어미히되샤/하내어/이몸이 삼겨시니/셜워길너낼제/슈고도긋지업다/집질리알/눌위여알시며/이라깃부신가/일을보랴시고/몰은잘이날을주고/저즌자리올마가며/낫분밥을덜러주고/을놀나/곱풋가졋즐주고/치울넌가품의안하오좀의내을맛고/춤조차됴히보니/쳔상의봉인/구롬속의학인/면안시고/나가면도라보고/어이량이/그대지깁돗던고/의픔의나고/의문의나이/가염녀/파려할가밥념녀/얼을런가웃념녀/쥬야렬두/손냐

아비는 하늘 되고 어미는 땅이 되사/ 피와 살을 나눠내여 이 몸이 생겼으니/ 배설워 길너 낼제/ 수고도 끝이 없다/ 집 자리 알는 배는/ 뉘를 위하여 알았으며/아들이라 기쁘던가/ 무슨 일을 보려시고/ 마른자리 나를 주고 저진 자리 옮아가며/나뿐 밥을 덜러주고 오는 잠을 놀나깨여/ 배곱을가 젖을 주고 추울 넌가 품에 안어/ 오줌똥 냄새 맡고 코춤조차 좋이 보니/ 천상에 봉인 듯이/ 구름 속에 학인 듯이/ 앉으면 안으시고/ 나가면 도라보니/ 어히한 이 사랑이 그다지 깊으던가/ 세살에 품에나고 열살에 문에 나니/ 상할가 염려하고 병들가 근심하며/ 패로울가 밥 염려/ 주야 열두 때를/ 한신들 잊을소냐

第二項 忘恩不孝
第三項 老後悲哀
第四項 天運猜忌
第五項 風樹之嘆
第六項 善行縣親
第七項 孝行勸
第八項 再錄祝願

贈河上舍
<
自道>
男兒身世苦棲遲 남아 신세가 한 곳에서 조용히 살기 괴로워서
百里曾謠五羖皮 백리회도 일찍이 오고피라 불렀지
早識聖學全性命 성학이 성명을 온전히 한다고 일찍이 알렸으니
肯求溫飽養膚肌 배부르고 따뜻함 구하여 육신을 기르겠는가
多年悔念殆成病 여러 해 동안의 후회는 자못 병이 되었고
古譜淸彈未得師 오랜 악보의 맑은 곡조도 악사를 얻지 못했지
弊箒千金猶自惜 몽당 빗자루도 천금으로 소중히 여기며
柳塘微雨獨吟時 버드나무 못가 가랑비에 홀로 옲조리네

<
>
知君居窶任委遲 가난할 때 편히 지냄을 그대 알아야 하니
問術還羞訪子皮 방법을 찾으려 범려를 찾는 건 부끄러운 일
世人誰識金緘口 세상사람 가운데 금함구를 누가 알리오
筆法漫稱玉作肌 필법이 옥결 같은 문체라 부질없이 말하네
詩文獨娛元因性 시문 홀로 즐기는 건 원래 천성으로 인한 것
非是都忘自得師 잘잘못 모두 잊고서 자득한 스승이 되었지
怊悵離筵無限意 아쉽구나 이별의 자리에 가없는 뜻이여
海雲深處獨歸時 바닷가 구름 깊은 곳으로 홀로 돌아갈 때로다

遣懷
自歎存誠無素功 존성에 쌓은 공력 없음을 자탄하노라
尋常難使此心空 심상하는 이 마음을 비우기가 어렵다오
三代過去人生晩 삼대는 이미 가 버렸으니 태어남이 늦는 게요
一元催消物態窮 일원도 소진에 가까웠나니 만물도 궁태로구려
登高放歌天地寬 높이 올라 소리쳐 노래하니 천지는 넓고
對酒開懷古今通 술을 들며 회포를 여니 고금이 통하는구려
禮樂詩書多少事 예락시서에 관한 이러저러한 일들로
蕭然江海白頭翁 쓸쓸히 강해에 늙어가는 할아비구료

述懷贈河上舍
朝鏡無端暎鬢霜 무심코 아침에 거울 보자 희 머리 비치나니  
吾儒意氣本踈狂 우리 유학자의 의기는 본래 소탈하다오
身謀早覺行吾素 처신은 일찍부터 내 본분 따를 것을 깨달았지만
世事猶難任被蒼 세상일은 저 푸른 하늘에 맡겨 두기가 어렵구려
書舍往還稀舊伴 글방을 오고가던 옛 벗들도 거의 없고
海山遊覽易斜陽 바닷가 유람에 해는 빨리도 기우는구나
送人一朔從容後 그대를 보낸지 한 달이 되도록 조용하니
雲影磯前流水長 장천팔경 운영기 앞에 길게 물이 흐르네

疊韻送河羲瑞單道別懷
幾歲江湖葭有霜 몇 해 동안 강호 갈대에 서리 내렸나
春山入到見淸狂 봄 산에 사람 찾아들어 청광을 보겠네
琴傳古譜歌調壯 거문고 옛 악보 전해지니 곡조 씩씩하고
筆抹齊烟却海蒼 붓 끝으로 안개 젖히자 큰 바다는 푸르렀지
對飮自懸多白髮 대작함에 백발이 많아 부끄러웠고
論懷惜未趁靑陽 회포를 논함에 젊은 시절 쫓지 못해 애석했지
是非淸遣從君戒 시비를 가리지 말라는 그대의 충고 따르리니
可保韓中日月長 한가로운 긴 세월을 보존할 수 있으리

又疊韻
四千歲去一番春 사천년의 흐름이 한 차례 봄날과 같으니
目下荒年未必嗔 눈앞의 흉년을 군이 불평할 것 없다네
小麥團蒸兒意氣 보리떡 찌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이요
弊衫牽補婦經綸 해진 옷 입는 것은 부녀자의 경륜이라
奴尋隱沽愆朝課 사내종은 몰래 술집 찾느라 아침 일을 빼먹고
婢撤殘籬備夕薪 계집종은 해진 울타리 거둬 저녁 땔감 준비하니
惟有老翁無事事 오직 늙은이의 한가로운 일은
坐看羲易岸烏巾 앉아서 두건 젖혀 쓰고 주역 보는 것이라오

又疊韻
稱爲梅霖古或然 매림이라고 일컫더니 옛날에도 혹 그랬나
翻盆浹旬秪今年 금년에도 열흘이나 동이로 쏟아 붓는 듯하누나
農民愁死其如歲 농민들 근심으로 죽을 지경이니 어찌하랴
大陸橫侵莫間天 넓은 땅 마구 잠겨도 하늘에 따질 수 없구려
賢聖有言吾自慰 성현의 말씀이 있어 내 스스로 위안되지만
爨炊無計婦堪憐 밥 지을 대책이 없어 부녀자만 불쌍하구나
化翁戱劇應靡己 조화옹의 심한 장난 그치지 않으니
且喚家僮看防川 다시 가동을 불러 제방을 보도록 이르네

寫懷
)過六十一年春  예순 한 해 동안 헛되이 다 보내고
孤負聰明男子身 총명한 남자로 몸을 외로이 지고 있네
到老全知曾不孝 늙어 가매 일찍이 불효한 것을 알겠고
看書每覺我非人 책 볼 때마다 사람 노릇 못 한 것을 깨닫네

事爲半是名場誤 한일의 절반은 과거장의 이름으로 그르쳤고
朋友空憑戱語親 벗은 헛되이 말놀음으로 친했다 뿐이네
仍復醉迷其奈爾 이에 다시 술이나 취해 다녀 어쩌겠는가
從今節飮養,天眞 이제부터 덜 마시고 천진을 기르리

日日知非自少時 소싯적부터 날마다 잘못을 깨달았으니
于今五十九歲知 지금까지 59년 동안이나 깨달았구려
偶同伯玉年堪愧 우연히 거백옥의 나이와 같아 부끄럽구나
覺後眞成一呆痴 이렇게 깨친 뒤에 어리석은 한 사람이 되었네

 62
(1788
戊申)
茶山精舍, 落成式 베풀다
2
29일 다산정사를 완공한 후 낙성식을 겸해 향사례를 베풀었다. 58세 때인 1784(
甲辰)에 대대적으로 확장한 공사를 4년 만에 준공했다. 서재용인 영이재(詠而齋)는 자신이 두 번 수리하고, 세 번째로 규모를 넓힌 공사를 벌인 끝에 드디어 완공, 이날 준공식을 가진 것이다. 이날은 낙성식과 향사례까지 겸한 행사라서 원근에서 많은 손님이 참석했다. 양친을 여윈 이후 처음을 치른 향사례는 누구를 주빈으로 모셨는지 모른다. 연치로 보면 선생이 아닐까 짐작된다.
다산정사를 완공한 이후 그 동안 사강회 등으로 비롯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경학 관련 저술에 착수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그래서 이듬해인 63(1789
己酉)부터 66(1792 壬子)까지 3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터득한 것을 주위에 동료도 없이 쓸쓸히 살면서 딱히 할 일도 없기에 소기를 썼다라고 밝힌 글(堯曰篇)에서 확인되고 있다. 다산정사는 선생이 타계한 이후도 강학장소로 이용된다. 11월 차남이 차손(次孫), 12월에는 장남이 아들을 낳았다.

 63
(1789
己酉)
耆老會員 天冠山 오르다
1
월 관산기영회(
冠山耆英會) 회원 11명과 천관산을 유람한 후 관사(冠寺)에서 여러 날 머무르며 승려 황지실(黃芝實) 7언 율시 4수씩을 주고  받으며 수창했다. 그리고 선당(禪堂)에 십일노회(十日老會)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선당은 승려들이 참선(參禪)을 위한 당인데 유학자가 모임을 발의한 것은 파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선생은 이날의 모임을 내년에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나타내기도 했다. 밤을 새며 승려와의 수창으로 불교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황지실의 화시를 보면 시적인 소양이 대단해 보인다.
가을에는 거병서를 지었다. 거병은 큰 누이의 아들이자 생질의 이름인데 생후 몇 달 만에 어머니를 여위고 외가에서 자랐다. 생질이 병약해서 자주 아프니 외숙인 선생이 생질의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로 거병이라 부르고, 세상을 살면서 경계할 교훈을 담아「
去病書」라 제명했다. 그런 전후내력으로 저술된 거병서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경계할 일종의 교훈서이다. 곧 선생이 평생을 살면서 공부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모든 교훈을 망라한 책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거병서에서 선생은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고 저술에 몰두할 결의를 확인한다.

冠山耆英會韻
杖藜相喚上嶙 지팡이 잡고 서로 부르며 높은 산에 올라
俯視齊州點點烟 굽어보니 고을에는 점점이 연기 피어오르네
白髮情懷閑得逸 백발노인의 마음은 한가로이 편안함을 즐기고
叢林景物暖將春 숲마다 경물에는 따뜻한 봄이 오려하네
少年過去其何我 지나간 젊은 시절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今日如斯見在身 오늘날 이처럼 현재의 나 자신만 있을 뿐
擊鼓吹笙仍飮酒 북 치고 생황 불며 이어서 술을 마시니
還應猜惹赤松嗔 도리어 적송자가 화내며 시기하리라

與黃芝實冠寺酬唱韻 (8)

<
存齋>
莫耐塵間摠醉狂 모두 취해 미쳐 풍진 사이서 견딜 수 없었는데
天風吹我上山忙 하늘 바람이 내게 불어 산에 오르기에 바쁘다네
留連數日仙應遇 여러 날 머무르니 신선도 만날 것이니
直去三洲路不長 곧장 삼주로 가면 길은 멀지 않겠구려
男子襟懷開海岳 남자의 가슴은 해악에서 열리니
大冬風物有松篁 한 겨울 풍경 속에 솔과 대가 있구나
人生意氣難知足 인생의 의기란 만족을 알기 어렵기에
纔到時成又擧觴 겨우 시를 지어 완성하자 또 술잔을 드네

<
芝實>
手摩牛斗豁氣烟 두우성을 매만질 듯 구름 모두 걷혔으니
宿抱如今可問天 가슴속 포부를 이제 하늘에 물을 수 있을까
眠下何僧礙俗物 눈앞의 속된 물건에 어찌 얽매일 수 있을까
人間始信有神仙 인간 세상에 신선이 있다는 것을 이제 믿으니
只緣遐陬無人見 다만 먼 고을이라 보는 이가 없기에
不及元封檢玉年 처음 봉선할 때 옥검을 만나지 못하였네
大夢由來吾自覺 큰 꿈은 원래 내 스스로 깨어난 것이라
臨風浩嘯益翛然 바람 마주하고 휘파람 불며 더욱 초연하네

<
存齋>
禪堂勝會偶從容 절간의 훌륭한 모임 때로 조용한데
談屑亹亹幾點鍾 담소 이어지니 몇 차례 종소리가 울리네
南國名區分甲乙 남쪽 고을 이름난 곳 우열을 나누는데
雪天星漢轉衫松 눈 내린 날에 은하수는 삼송을 감싸주네
詩僧踈態催濡筆 시승은 소탈한 모습으로 시를 쓰라 재촉하고
遊客餘情撫短 나그네는 넘치는 정에 지팡이를 어루만지네
此事明春能再否 이런 일 내년에도 다시 할 수 있을까
金剛天亹又仙峯 금강석 같은 일천 겹은 신선의 봉우리네

<
芝實>
<
存齋>
<
芝實>
<
存齋>
<
芝實>

參禪        
若敎爾學佛     그대로 하여금 불교를 배우게 한다면
雙手捉取西江月 두 손으로 서쪽 강에 비친 달을 잡게 했지
不許學不許不學 배울 것도 배우지 말 것도 허락할 수 없으니
天地靑山滿江月 대지의 푸른 산과 강의 달빛만 가득하네
若敎爾不學佛   그대로 하여금 불교를 배우지 못하게 한다면
一斧蹋倒須彌嶽 도끼 하나로 수미산을 내려치리라

再參
鑽古紙         묵은 종이를 꿇으니
八萬大藏添六塵 팔만대장경도 육진을 더 하는 거라
觀空寂         공적을 보려면
三世如來總魔神 삼세의 여래 모두 마귀가 되니
茶罷晴窓惺午睡 차 마시고 맑은 창가에서 낮잠을 깨니
鳥啼花發一般春 새 지저귀고 꽃이 피어 여느 봄과 다름이 없네

三參
如何是非佛     어느 것이 부처가 아니던가
蓮花臺上跏趺坐 연화대 위에 가부좌지
如何是眞佛     어느 것이 참 부처이던가
大地羣生皆菩薩 대지의 중생들이 모두 반야이지

去病書題辭

저술


   

 64(1790庚戌)
無忮契序文 지어주다
이해에 무기계(
無忮契) 서문을 지었다. 1767(41)부터 시작한 사강회가 1780(庚子)에 해체되고 새로운 조직인 무기계가 이미 출범했음을 반증한다. 사약(社約)과 무기계의 출범은 뚜렷한 기록이 없다. 춘파(春坡) 휘 관식(瓘植, 1843-1910) 무기계명첩중수서(無忮契名帖重修序)에서 증조 원취당(願醉堂) 휘 도순(道純, 1774-1816)이 처음으로 제정하고, 족고조 존재 선생이 명명(命名)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결성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기계라는 동네 조직은 제자인 원취당이 만들고, 명칭은 선생께서 지어준 것이다.
그럼
무기(無忮)라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논어(自罕篇) 남을 해치지 않으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 어찌 착하지 않겠는가(不忮不求 何用不滅)하는 뜻이다.()의 명칭을 통해서 선생이 13년 동안 이끌어 온 사강회에 대한 감회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이 사강회 후신 격인 조직의 이름으로 무기를 골라준 속에는 동족과 지도자에 해당된 구성원들에 던지는 섭섭함이 응축되어 있다. 곧 사강회로 말미암아 동족 간에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우회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뜻하는 풍토는 가시지 않고 있다.

漫吟
讀罷禪窓有所思 절 방에서 글 읽다 문득 생각이 나
二更鍾後獨吟詩 밤 중 종소리에 홀로 시를 읊어 보네
上房釋子懸燈宿 상방의 승려가 등을 걸고 잠드는데
虛閣風來葉下時 빈 누각에 바람 불고 낙엽 지는 때로다

無忮契序 저술
冠山耆英會序 저술

 65
(1791
辛亥)
萬戶 金塘島 유람하다
4
월 회령진 만호 조충배(
趙忠培)의 초청으로 둘째 동생 백신(伯紳)과 함께 해상유람에 나섰다. 영안진(永安鎭)에서 배를 타고 산이도(山伊島)와 평이도(平伊島)를 거쳐 금당도(金塘島)를 유람했다. 붉은 절벽과 푸른 바위가 마치 귀신이 만들고 깎아놓은 듯했으며, 조대(釣臺)와 석첨(石簷)은 기괴하여 몹시 기이했다. 이때「금당시」,「금당유운」,「금당선유운」,「금당도선유기」를 지었다.
김석회 교수는 선생의 작품 중
동일한 소재를 놓고 5언 장편, 7 4, 5언 절구 등 다양한 시체(詩體)를 찾기 어려운데 아마도 시주(詩酒)를 함께한 작시기행 때문이다고라 했다. 이들 금당도 관련, 작품들을 《존재전서》에 수록되어 있어 국역되지 않았기에 소개하지 못한다. 겨울에는 33(1759)에 찬한 정현신보 19조목을 수정하고, 시서차의(四書箚義)와 격물설(格物說)을 저술했다.
그러나 사서차의 등을 이해(1791)에 지은 것으로 보나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은 방대한 분양이이다. 이를 1791(
辛亥 한해)에 혼자의 힘으로는 완성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선생의 경학 관련 저술은 다산정사를 완성한 이후 1795(乙卯) 정조(正祖)에게 환영지 등 24권의 서책을 상달하기 이전까지 꾸준히 이루어진 작업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贈暉上人
櫳雲去山生影 서까래에 구름 걷히자 산 그림자 생겨나고
夜閣風來磬有聲 밤 누각에 바람 불어 풍경 소리 울리네
若向靜虛論實理 마음을 고요히 비춰 진리를 논해 본다면
迦葉應輸自信情 가섭도 스스로 믿는 마음 되리라

金塘詩(5언 장편)
金塘遊韻(7 4)
金塘船遊韻(5언 절구)
金塘島船遊記
獅子山同遊記
政絃新譜, 總論, 總論後敍
四書箚義(大學, 論語, 孟子, 中庸)
格物說  




66(1792壬子)
分賑節目 方略 지어주다
7
월 태풍이 서남해 연안을 휩쓸어 큰 피해를 냈다. 인명피해는 물론 전답의 유실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장흥부사 원영주(
元永周)은 선생에게 이재민을 효과적으로 규휼할 방도를 요청했다. 부사의 요청으로 진휼(賑恤)을 위해 분진절목을 찬해 줬다. 선생이 제시한 방략은 부자들로 하여금 나누어 부담하는 권분(勸分)과 진휼의 규정 등 절목하는 방안을 담고 있어 매우 상세했다.
원부사는 절목에 따라 원만하게 이재민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당시 장흥부 관내 태풍피해 이재민을 효과적으로 구재한 분진절목이 산실된 것이다. 이해로부터 2년 뒤 다시 태풍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는데 서영보 위유사가 선생을 왕에게 천거하며 저서를 내각으로 송부토록 했다. 그때 분진절목도 포함됐는데 왕의 갑작스런 서거로 어디론가 산실되고 만 것이다.  

分賑節目 저술
晩翠亭
金雨昌序

 67
(1793癸丑)
밤낮 같아도 死別은 슬프다
1
월 셋째 동생(
伯純)의 부인 백씨(白氏)가 타계했다. 사별의 가족사는 49(1775)에 시집 온지 10개월만에 둘째 며느리(道及), 55(1781)에 어머니 평해 오씨, 57(1783) 42세된 막내 동생 백헌(伯獻), 그리고 58(1784)에 아버지의 타계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째이다. 이해에도 무작년이다. 연보에 나타난 특징의 하나는 가족과의 사별하는 해에는 저술이 없었다.
그래서 일까. 제수씨가 돌아가신 해도 저술이 없다. 평소
생사는 밤낮이 바뀌는 것과 같다라는 우주관을 가졌어도 초월하기가 어려웠음일까. 비록 달관(達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가족 간의 사별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아닐 수 없다. 그 것도 거의 매년 잇단 사별에 만사가 귀찮아 지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11월 장손녀가 영광 이택규(李宅珪)에게 출가했다.

 68
(1794
甲寅)
慰諭使 왕께 啓目 올리다
8
월 해일로 서해안 6개 고을이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피해의 중심지가 곧 장흥 등 인근 지역이었다. 정조는 검교직각(
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를 파견, 이재민을 위유하게 했다. 서 위유사(慰諭使)는 내려오기 이전에 이미 선생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도착한 이후 세평과 문집을 보고 임금에게 천거키로 마음을 먹었다. 비록 70에 가까운 고령이지만 임금이 찾는 인재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때 위유사는 선생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그날 밤에 선생의 선조 기일이었는데 부인들이 제주로 밀주를 담갔다가 소동이 일어났다. 내용인즉 당시는 국법으로
밀주를 담지 못하게 됐는데 소량이나 술을 담은 것이다. 그러자 선생은 화를 내면서 그 밀주를 마당에 쏟아 버렸다. 이를 목도한 서 위유사는 선생의 강직한 인품을 더욱 평가하고 왕에게 계목(啓目)을 올렸다 한다.
이해 가을에 노인의 어려움 즉,
난설(難說)70여개 조()에서 부모를 추모하는 글을 지었다.난설의 마지막 장에 지금 어려운 것은 이전에도 어려웠으니, 「시경」에 이르기를, 날이 밝도록 잠 못 들고 돌아가신 두 분 부모님을 생각하네(明發不寢 有懷二人)라고 했다. 생존 시에는 매년 3, 6, 9, 12 15일「四時會飮定日」로 정해 부모님을 모시고 음례(飮禮)를 베풀어왔다.
 
難說

徐慰諭使 啓目

장흥의 진사 위백규는 병계(屛溪)의 고제이며, 관산의 일민(逸民)으로 문장이 우장(優長)하여 성경현전(聖經賢傳)에 넓게 통하고 젊었을 때는 과거공부를 하여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나이가 이제 70세인데, 그가 집에 있을 때나 향주에 출입할 때에 참으로 행의(行誼)가 있고, 가정생활이 조금 넉넉하여 종족을 잘 도왔다.
저술한 글과 경서의 차의(
箚義)와 그 밖의 다른 저술도 또한 의리에 근거함이 많아 저축한 바가 엄박(淹博)하니 이런 현사가 매몰되어 표창되지 못함은 극히 가석(可惜)한지라 익산 사인(士人) 이득일(李得一)의 행의와 문학이 일향의 추앙한 바가 크니 아울러 해당부서에 명해서 등용함이 어떠하실지요라며 건의했다.  


 69
(1795
乙卯)
副司勇 付職하라 下敎하다
4
월 장남 도립(道立)과 조카 도전(道佺)과 함께 생애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영광 불갑사(佛甲寺)와 함평 용천사(龍泉寺)이다. 왜 두 사찰을 목적지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선생은 여행을 하면서「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觀日落)」와「산을 넘으며(유척(遊陟)」을 읊었다. 불갑사와 용천사는 불갑산 안팎의 기슭에 자리한 상사화 (相思花)군락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정조는 위유사의 계목을 접수한지 1 3개월 후인 11 27일 선생에게 군직인 부사용(
副司勇)에 부직(付職)하라는 하비(下批)를 전라감사에게 하교했다. 아울러 입궐을 하명하는 한편「환영지」등 저술을 찾아서 궤짝에 담아 올려 보내라 했다. 전라감사로부터 지시를 받은 장흥부사는 임금의 하교를 선생에게 알렸다. 12 7 <환영지>등 몇 권의 저술을 보냈다.
그러나
위백규 본인은 여행 후유증으로 앓아 부름에 응할 수 없다라고 보고 했다. 임금은 12 23,위백규는 병세의 차도를 보아 따뜻한 내년 봄에 입궐하라 이르고, 환영지 이외의 저술도 찾아 보내라라고 했다. 1796 1 6일 선공감 부봉사로 임명했다. 정조의 전갈을 받은 선생은 몸도 편찮은데 임금에게 올릴 책을 찾아 봉송하느라 이중고를 겪었다.  

觀日落
天邊猶是若木東 하늘가 바로 해가 뜨는 동쪽이니
人在天東望空濛 사람들은 하늘 동쪽에서 자욱한 안개 바라보네
自小視大恒難盡 작음으로 큰 것을 보는 건 늘 다하기 어려우니
爭言太陽落此中 태양이 이곳으로 진다고 다투어 얘기하네

遊陟
未雨到上界 비 오기 전에 별계에 도착하여
閑襟把仙眞 흉금을 풀어놓고 신선의 참뜻 생각해보네
若非催行早 서둘러 일찍 오지 않았다면
終日霧裏人 종일토록 안개 속에서 헤맸을 텐데

 70
(1796
丙辰)
初任縣監, 積弊 革罷하다

1)
縣監 除授 過程
임금이 <환영지> 이외의 저술을 찾아 보내고, 본인은 내년(1796) 봄에 입궐하라고 했으나 선생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1796(丙辰) 1 6일 선생은 저술한 책 가운데 중요하다고 여기는 저서를 찾아 모아서 궤짝에 담아 장흥부사에게 전달했다. 이때 내각으로 보낸 책은 환영지(寰瀛誌), 분진절목(分賑節目), 해도지(海島誌), 예설수록(禮說隨錄), 경예문답(經禮問答), 경사문답(經史問答), 경서조대(經書條對), 도소진영(陶蘇眞影), 명사평(明史評), 거병서(去病書) 13권 등 모두 24권을 내각으로 보냈다.
1
25 2 2일 임금은 즉시 입궐하지 않았다 하여
만일 제때에 입시하지 않으면 해조(該朝)의 판서와 당상관을 엄히 다스릴 것이며, 하리(下吏)는 금추(禁推)하되 선소(宣召)를 받은 지방관청의 노비로 하여금 충정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2 9일 왕은 위백규를 불렀는데 입궐하지 않았다. 추위가 아직 남아 본인의 힘으로는 길을 떠나지 못해서 그러는가? 이렇게 지체하니 참으로 미심쩍고 답답하다. 급히 올라오도록 하라했다.
2
16일 선생은 성치 않는 몸을 무릅쓰고 차남 도급(
道及)과 조카 도전(道佺) 등을 대동, 상경 길에 올랐다. 집을 떠난 지 17일 만인 3 3일에야 한양에 도착했다. 3 6일 내각에 입궐을 신고하자 밤을 새워 상소문을 써서 내일 아침까지 제출하라 이르렀다. 남감하기 그지없었다. 맨몸으로 상감을 알현할 것으로 알았는데 느닷없이 상소문을 쓰라니 억장이 무너졌다.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차남 도립이 1777년과 1778년에 장흥부사 황간(黃幹)의 요청으로 저술해준「봉사」를 지참해 와 크게 도움이 됐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만자(
萬字)에 이르는 상소문을 써야 했다. 물론 예문관에서 상소문을 쓰는데 필요한 지필묵과 13명의 일꾼들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17일 동안이나 길을 오는데다 상소문을 쓰느라 밤을 새워서 정신이 혼몽해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왕을 알현한다는 긴장감으로 간신이 버텨내고 있었다. 7일 아침에 밤을 새워 쓴「萬言封事」를 상달했다. 그랬더니 저녁밥을 먹고 입시하라 했다.
지시대로 저녁밥을 먹고 궐문 밖에서 도착을 알렸다. 그러자 승정원(
承政院)에서는 내각의 대기실에서 그대로 기다리라는 지시가 내렸다. 왕을 알현하리라고 여겼으나 술시(戌時)에 이르러서야 비답(批答)이 내려졌다. 왕은 알현하지도 못하고 비답만 내린 것이다. 비답에는 만언봉사에 대한 소견과 다음날 정사(人事)에서 고을 수령에 제수한다는 전교가 있었고, 물러가 대기하라 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왕의 비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뜻을 세우고 배움을 밝히라는 대목은 내가 가상(
嘉賞)하게 여긴다. 내 뜻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의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정학(正學)이 바르지 않은 까닭에 사학(邪學)이 멈출 줄 몰랐으니, 내가 반성할 데가 아닌 곳이 없도다. 깊이 생각하겠다.
둘째, 보필(
輔弼)할 사람을 고르라 하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라는 대목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인재 등용을 통해 임금을 섬기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니, 덮인 풀을 베어내듯 가려졌던 인재를 등용하라는 일은 오늘의 암랑(巖廊) 즉 의정부에 바라는 바이다.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조목도 하는 말마다 적절하여 시폐에 들어맞는다. 요즘 같이 사유(
四維)가 펼쳐지지 못하고 나라의 기강을 떨치지 못한 적이 없었다. 매일 깊은 밤 생각에 잠겨 탑전(榻前)을 맴도느라 잠을 못 이루며 스스로 초심(初心)을 돌아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대는 사람의 발길이 드문 먼 시골에 살면서 이렇게까지 의논했으니, 과연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보탬이 되는 길이로다. 바로 묘당(廟堂) 곧 비변사로 하여금 상세히 검토하고 보고하여 실제로 효과가 있게 하겠다.  
그대는 일흔 살의 나이에 내 부름을 받고 올라왔으니, 만일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냥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진실로 이른바 보고 들은 것 없이 오가기만 했다는 격이 될 것이다. 또한 벼슬자리가 날 때를 기다려서 그대에게 벼슬을 시키자니, 그것은 노년에 중랑(
中郞)으로 있었던 한()나라 풍당(馮唐)보다 더 늦은 감이 있다. 그대에게 한 고을을 맡길 것이니, 그 동안 쌓아둔 바를 베풀어보도록 하라고 분부했다. 이어서 내일(8) 정사(政事)에서 수령으로 치송토록 이조(吏曹)에 전교하라 하고 하명을 내렸다.
이에 해조(
該曹)에서 기장(機張)현감을 의망하자, 전교하기를 칠십 노인을 어찌 먼 곳에 부임하게 하는가. 호남의 명성과 공적이 있는 문음(門蔭) 수령 중에서 바꾸도록 하라고 하교했다. 그래서 태인(泰仁)현감 조항진(趙恒鎭)과 서로 바꾸도록 의망했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태인도 노령(蘆嶺) 위에 있고, 집에서 멀다. 그러니 옥과(玉果)현감으로 임명하라고 이르고, 그날로 하직하게 하면서 말을 주어 서둘러 부임토록 했다. 현감을 제수 받고 한양을 떠난 지 12일 만인 3 20일에 옥과현감으로 부임했다.
4
월 태학(
太學)의 유생들이 선생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비난했다며 권당(捲堂) 즉 동맹휴업을 했다. 사학(四學)도 통문(通文)을 돌리는 등 소동을 벌였다. 조정의 관리들도 만언소의 내용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헐뜯고 성토했다. 승지 尹叔 헌납 韓興裕근래 하늘의 재앙은 관작의 남월에서 기인하며, 남쪽 선비로써 白徒之人 곧 바로 민사(民社)에 제수한 것을 한 례로 드는 한편 위백규는 시골구석에 쓰는 말로 임금의 귀를 더럽혔다고 성토하고 나섰으나 왕의 만류로 중지하기에 이르렀다.

2)
赴任 縣政 改革
선생은 임지에 도착해 바로 향약(鄕約)을 설행했다. 아울러 화속지(火束紙)를 없애고, 승려들로부터 받아들인 삭지(朔紙)를 줄여 폐해를 줄였다. 삭망에 공물(供物)로 내는 삭망어(朔望魚)와 날짜별로 내는 일차어(日次魚)를 감해 어촌의 부담을 가볍게 했다. 특히 어민들의 고질적 부담인 생은어(生銀魚) 진상의 폐단을 상급관청에 요청해 현금으로 납부하게 했다. 여기다 관청에 머물면서 물품을 만든 유장(鍮匠)철장(鐵匠)석장(錫匠)목공(木工)의 손실금과 삼품(三品) 요역의 5분의 4를 덜어줬다.
또한 관청의 계방(
契防 철폐해서 주민들을 편안하게 했다. 조선시대 각 관아에서는 아전들이 주민들의 부역이나 군역을 면제해주거나 기타 지원을 받고서 아전들에게 현금이나 물품을 바친 관행이 있었다. 이는 일종의 법외(法外)의 조세나 마찬가지였다. 그밖에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는 원두(園頭)관기(官妓)와 시장의 세금에 관련된 자잘한 폐단도 제거했다. 장교의 군사훈련인 강무(講武)와 병기의 수선, 관청건물의 수리, 권학의 규칙, 환곡법(還穀法) 등도 모두 조리에 맞게 개선해 시행했다.
1796
년 윤 6월에도 고과(
考課) 즉 치적 평가가 있었다. 그해(1796) 12월 이조(吏曹)로부터「하필구비(何必求備)」라는 항목의 평가를 받아야 했다. 관원평가(考績)에 있어서「구비(求備)中考 下考」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다. 이런 평가를 받으면 당연히 체직해야 한다. 이조는 임금에게 중고(中考) 를 시행함이 어떻습니까? 하니 감사가「구비」라고 하는 것이나 경들이「중고」로 성적을 깎는 것이나 모두 잘못이다. 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전교했다. 선조는 선생의 개혁을 두둔한 것이다.
현감 시절에도 적잖은 작품을 저술했다. <합강정성유가(
合江停船遊歌>는 생애의 마지막 가사작품이다. 당시 전라감사가 순시하러 와 섬진강에서 배를 타고 가무를 즐긴 모습을 비판한 내용이다. 현감의 입장에서 찬술한 서와 기 등은유읍중제생문(諭邑中諸生文) △향약서윤음대지대판서(音大旨揭板序) △옥과연무정중수기와 선생을 왕에게 천거한 위유사 서영보에게 보낸 편지여서영변 영보(與徐寧邊 榮輔)등이다.  

合江停船遊歌

船遊悲感
귀경가자/귀경가자/ 합강정(合江亭)/귀경가자/시유구월(時維九月)/염이일(念二日)/길일(吉日)인가/가절(佳節)인가/관풍찰속(觀風察俗)/우리순상(巡相)//선유(船遊) /청추성절(淸秋盛節)/즐거우나/창오모운(蒼梧暮雲)/비감(悲感)/북궐분운(北闕紛紜)/몽외사(夢外事)/남쥬민막(南州民)//음쥬우산(飮酒遊山)/조흘시고/추사방극(秋事方極)/고렴(顧念)/강통도(塞江通道)/올적의/일월공역(一月貢役)/드다말가/착산통도(鑿山通道)/올적의/어민가(漁民稼穡?)/단말가/호원(呼冤)/저 구신(鬼神)/풍경(風景)/ 타시로다/범갓탓/우리 슌상(巡相)/생심(生心)이나/원망(怨望) /


다음은「합강정선유가」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이다.
1792(정조 16)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가사. ‘합강정가(
合江亭歌)’라고도 한다. 전라북도 순창(淳昌)과 남원(南原) 사이로 흐르는 적성강(赤城江) 부근의 합강정에서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를 비롯한 여러 고을 관장(官長)들이 모여 호화로운 뱃놀이를 하는 광경을 보고 노래한 작품이다.
삼족당가첩(
三足堂家帖)에 게재돼 있는 등 여러 정황과 근거로 존재 선생의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지금까지도 작자미상이로 방치되고 있다. 더구나 선생이 옥과현감에 취임한 1796 9월 전라감사 정시민의 순시 때 인근 지방관장을 대동해서 섬진강에서 기생들과 흥청망청 선유하는 정경을 고발한 가사임에도 1792년의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을 정도이다. (筆者 )

苛斂享樂
守令揶揄
冠蓋相望
官人接待
泰平祈願
竭力輔民

輓浩然亭主人 沈光亨
遯齋退雨兩老子 돈재와 퇴동 두 어르신
去歲暮春先後沒 지난해 늦봄 모두 세상을 떠나셨기에
我來梅閤藏瑤琴 내 와서 매합에 요금을 간직하였으니
爲誰開出和白雪 누구를 위해 다시 꺼내 백설가에 화답하리오
幸有伯仲吹壎篪 다행이 그대 형제 있어 서로 주고받으니
玲瓏浩然亭上月 영롱하도다 저 호연정 위의 달이여
浩然亭之山     호연정 저산은
秀眉而峛崺     아름다운 눈썹처럼 우뚝우뚝 솟아 있고
浩然亭之水     호연정 저 물은
浩森而     가득찬 물결로 넘실거리며
花發樹綠黃 꽃피고 녹음 들어 꾀꼬리 지저귀면
焄酒可以烹肥 술 대우고 살찐 쏘가리 끓였고
秋水盡時寒潭淸 가을 물 다할 때 차가운 못이 푸르러지던
菊花淸醪賞芳潔 국화꽃에 청주로 그 향기를 감상하네
五斗綠米解惱人 다섯 말의 녹봉이 사람을 괴롭히니
簿書桁揚絆老骨 문서와 형구가 늙은이를 옭아매
春日和緩出不得 따뜻한 봄날에도 나갈 수 없어
困臥衙窓吟風疾 괴롭게도 관아 창가에 누어 풍질에 신음하네
歸去來兮遲留客 돌아가자 오래도록 머뭇거리는 객이여
猶可賞秋浩歌發 가을을 감상하고 호연가를 부를 수 있으니
誰謂天不以友生 하늘이 마음의 벗 주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나
晤我襟懷忘白髮 내 심정을 알아주어 흰머리도 잊었거늘
仲氏捨我從汗漫 중씨가 나를 버리고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棣床凄凉琴斷絶 처량한 책상에는 줄 끊긴 거문고뿐이구나
當世如君難復見 지금 세상에 그대 같은 이 다시 보기 어려우니
使我老淚空酸切 늙은 내 눈물을 시리고 절절하게 만드는구나
靑山何處擧銘旌 푸른 산 어느 곳에서 명정을 들까
白雲泱泱違執 하얀 구름 피어날 때 상엿줄도 못 잡았는데
伯氏悲我病伏 백씨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나는 병들었으니
誰賞浩然亭上月 누가 호연정 위의 달빛을 감상하랴
亭上月         호연정의 달빛이여
長照兩心之結 두 사람의 번민 사라지게 길이 비추소서

輓栢峴金友
南國文章世有聲       남쪽에서 문장으로 대대 명성 자자했고
伯仲迭吹鳴天籟       형님 아우 번갈아 천뢰를 울렸지
大音月庭調舞鶴       큰 소리는 달빛 뜰에서 춤추는 학과 어울렸고
小音秋空遏流靄       작은 소리는 가을 하늘 구름을 멈추게 했지
東華塵土迷人耳目     동쪽 땅 진토가 사람들 이목을 현혹시키더니
不早導汝之兮鎖圍     일찍이 그대를 이끌지 못해 문이 닫혔구나
噫噫中途征鴈連枝   슬프다 기러기가 중도에 형제를 부르니
孤吟蓽戶怨落暉       누추한 집에서 외로이 지는 해 원망하네
七十而慕於公見       칠십에 부모님 사모함을 그대에게 보았는데
追製斬衰             뒤늦게 상복지어 입고
赤幸有賢季共索幃     다행히 어진 아우 있어 빈소 지키네
顧天生彛則之爲貴     천성을 따르면 귀하게 되니
世間榮富非性分之固有 세상 부귀영달이 본성의 고유함은 아니라네
小學一秩平生書       소학 한권은 평생을 읽어야 할 책이라
不虛百年何求         평생 헛되이 살지 않을 방도 어디서 구하겠는가
又最是化翁終無賴     무엇보다 조화옹도 끝내 힘이 되지 못하여
不纔浮槎之南土一阜   뗏목 타고 떠날 만한 남쪽 땅 언덕 하나 없었네
卄載契闊空斷琴       이십년 멀리 떨어져 살다 부질없이 거문고 줄 끊으니
白雲長兮風飀飀       멀리 떠난 흰 구름이여 세차게 부는 바람이여

與徐寧邊 榮輔
玉果 鄕約序
音大旨揭板序
玉果鍊武廳重建記

 71
(1797丁巳)
下考 風患辭職하다

1)
縣政考課 最下考
1797
2월 초순께 담양군수 이헌유(李憲儒)이 아들의 관례(冠禮)에 빈()으로 초청을 받았다. 둘째 동생 백신(伯紳)과 동행했다. 2월 중순부터 중풍으로 오른쪽이 마비되면서 남의 부축을 받아야 거동했다. 앉고 서는(起居)는 물론 먹고 마시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즉시 감사에게 사직장을 올리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 와서는 그 동안 스승께서 보낸 편지를 배접하고, 첫 판에 계상(溪上) 가택을 모사하여 모셨다.
임금은 사직서를 반려했다. 임금이 고제(
考題) 즉 성적표를 보고 위백규의 치적은 신병과 상관없이 높이 평가할 일이다. 더구나 도적을 안정시킨 시정은 상을 줄 일이지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그의 치적을 하고(下考)라고 평가한 것은 무른 땅에 말뚝 박은 식으로 그의 세력이 없다 해서 성적을 낮춘 것이다. 어찌 이렇게 흠만 잡는단 말인가? 감사라는 자가 지극히 놀랍다. 종중추고(從重推考)하라. 위백규의「하고」평가는 일단 없는 것으로 치고 경직(京職) 자리가 나면 복직시켜 등용시키라라고 하교했다.
9
16. 장원서별제에 임명하라는 비답이 내렸다. 그러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10 6일 이조에서는 아뢰기를
위백규는 기한이 지난 지 오래인데도 아직 숙배하지 않았습니다. 관례에 따라 고쳐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위백규는 학문이나 식견은 일단 놔두더라도, 그 사람의 집안 행실이 극히 온전하게 잘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다. 만약 포부를 품고 있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라며 질타했다.
정조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조정에서 위백규에 대해 진정을 다하는 것이 어찌 위백규에 대한 사사로운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결코 이대로 벼슬을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엄중하게 강조했다. 전라감사와 이조(吏曹)에서는 그가 중풍으로 인해 더 이상 공무를 수행할 수 없다라고 아뢰었으나 왕은 한사코 관직에 앉히고 싶었다. 정조로서는 선생만큼 행실이 갖추어진 인재를 찾기 어려워 본보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1)
辭職狀

전라감사를 통해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는 사직장을 올렸다. 전후 5차례()나 되지만 문집에는 2건만 게재돼 있다. 선생이 사직을 청하기는 옥과현감으로 부임한지 2개월이 안된 1796 5 7일 첫 사직장을 제출한다. 그는 자신의 상소문인 만언봉사의 문투(文套)로 말미암아 승지 윤숙과 헌납 한흥유가 白徒之人이라고 성토하고, 이에 편승해서 성균관 유생들마저도 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임을 결심한 것이다. 동생에게 보낸(與舍弟 進士伯純) 편지(1 446)에는 5 1일자로 사직장을 제출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감영에서는 반려했다. 그러다 건강상태가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자 1797년 늦봄에 현청(縣廳)을 떠나 귀가한다. (필자 주)


저는 젊은 시절에 문장을 잘한다는 명성이 제법 있었습니다만, 제 분수를 스스로 잘 알아 옹졸함을 지키며 소과로 과거시험을 마감했습니다. 바닷가 집에서 문을 닫고 교우관계를 끊으며 기꺼이 경서에 파묻혀 글이나 보는 책벌레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권세가에게 명함을 내민 적이 없었고, 일찍이 관장(
官長)과는 잠깐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바닷가의 누추하고 가난한 집에 살면서 세상에는 담을 쌓았습니다. 비록 같은 도내 사우(
社友)라도 방문하여 친분을 맺은 사람은 없습니다. 변변치 못한 제 나이가 거의 70생에 가까워 백면서생으로 말라 죽는 것을 분수인양 여기며 결단코 명성이나 추구하려는 요행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천만 뜻밖에 임금께서 제 이름을 들으시고, 내리신 은총이 제 분수에 지나치게 넘쳤습니다. 신하된 의리와 관련된 사안이기에 감히 제 의견을 아뢰지 못하고, 한 고을의 수령직을 제수 받았습니다. 낯 뜨겁게 수령이라는 직책을 맡고 보니, 평소에도 재능이 뒤쳐졌는데 늙어 혼매함이 특히 심하여 아침저녁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잠잘 때나 쉴 때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 부득이 관아에 앉아 있는 지 지금 이미 40일로, 달로 계산하면 두 달이 체 안 됩니다.      
애당초 처음처럼 사직을 청하려 차에 어제 한양의 조보(
朝報)를 보니, 성균관 유생들이 제가 올린 상소의 문구로 인해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하여 권당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학제(學製) 시험이 이틀간 파방되고, 마침내 중신의 상소문에까지 저를 배척한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매우 보잘 것 없는 제가 중신이 올린 상소문 안에 함께 거론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저녁에는 이부자리에 부끄럽고, 낮에는 그림자에 부끄러워 깊은 방 안에서도 감히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데, 더구나 관아의 문을 열어 백성들과 서리를 대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늙고 병든 몸 상태가 더욱 심해져 뼈마디가 쑤시고, 정신이 어지러워져 도저히 관복을 입고 폭염 속에서 정무를 돌볼 수가 없습니다. 민망하고 절박한 심정을 견디지 못해 이에 번거롭게 우러러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용서하시고 살펴주시며 가없게 여기셔서 장계(
狀啓)로 임금께 아뢰어 제 관직을 파직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흉년이 든 고을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주시고, 한편으로는 초야에서 제 분수에 맞게 살도록 해 주십시오. 이는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말로, 으레 드리는 하소연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잘 헤아리시어 처분하소서.  

(2)
再辭狀
제가 올린 만언소는 지난 을사년(1785, 정조10)에 쓴 초고를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일반 백성들 속에서 평생을 살아 민간의 고충을 대략이나마 알고 있으며, 농사짓고 나무하는 틈틈이(三餘) 그래도 독서하는 재주 정도는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헌근(獻芹)의 충심은 천성에서 연유했고, 주제넘게 혈위(恤緯)하는 미천한 정성은 외람되어 시사(時事)를 알기에 붓 가는 대로 함부로 휘둘러 소회 그대로 문장을 지었습니다.
바닷가 백발 늙은이가 어찌 대궐문에 들어가 임금님의 질문에 대답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때문에 말을 가리지 않아 주위 사람들을 거슬리게 하고 표현이 고르지 않아 몹시 저속하였는데 이를 가지고 그대로 임금께 주달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감히 생각지도 못한 임금님의 큰 덕으로 저는 태평성대를 버려진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하신 임금님의 은혜가 넘쳐 고을 수령이라는 중임을 맡으라고 명하셨는데 변변하게 하직 인사조차 못하고 그저 직소에서 처분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부임한 이후 조석으로 근심 걱정만 하여 정신은 더욱 피폐해져 장부(
朱墨)를 처리했지만 처리가 어긋났고, 부지런히 세금을 독촉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언제나 부끄러워 견딜 수 가 없었습니다.
은혜에 보답하려는 계획은 더욱 멀어지고, 직무에서 허물이 더욱 쌓여만 가니, 어찌 감히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 이 자리에 있으면서 어진 사람이 등용됨을 막겠습니까. 30년 동안 서울과 고향을 왕복하면서 단 한 차례도 권세가에게 명함을 내민 적이 없었고, 30년 동안 누추한 집에 살면서 출세한 벗과는 만나서 인사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 귀한 자리(
負乘致寇)에 있어 허물이 더욱 드러나며, 총애가 분수에 넘쳐 그렇지 않아도 처세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더욱 곤란해졌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을 견딜 수 없어 감히 진심을 아뢰오니, 용서하시고 살펴주시기를 우러러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장계를 올려 파직시킴으로써 제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2)
慶基殿令 除授
임금은 본도의 묘() 즉 경기전령(正五品)과 바꾸도록 감사에게 분부하고, 위백규가 직임을 맡도록 엄하게 일러라. 그런 뒤에 장계(狀啓)를 통해 상황을 보고하도록 단단히 하명했다. 이렇게 하면 그도 어찌 감히 곧바로 직임을 맡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임금의 전교가 간곡했으나, 선생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아 길을 나설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없었다.
선생은 자신의 몸 상태를 직감하고 감사에게 여러 차례 문서와 장계를 올려 파직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전라도감찰사는 전날 임금에게 추고를 당했기 때문에 주저하면서 감히 장계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말인 1797 12월 보름이 지난 뒤에 해조에서 위백규의 병세가 호전될 가능성이 없음을 왕에게 간곡하게 아뢴 뒤에야 비로소 교체되었다.  

縣監除授 遞職 日誌




       
內容



       
內容
94
8

서남해 태풍 해일피해
96
2
18
입궐을 위해 상경

10

서용보(검교직각) 천거

3
6
내각방문, 소 작성지시

11
27
副司勇 임명, 저술탁송하명

3
7
만언봉사 내각에 제출
95
12
7
환영지 등 탁송

3
8
옥과현감 부임차 출발

12
23
타저술탁송지시, 입궐 유예

3
20
옥과현 도착 현감 부임
96
1
6
海島誌, 24권 탁송

5
7
성균관 권당에 사표 상달
96
1
6
繕工監 副奉事 임명
97
2
15
중풍으로 사표내고 귀가

1
25
왕이 입궐지연을 힐책

9
16
장원서별제, 경기전령


3)
마지막 좌우명
敬義
선생은 말년에 스승께서 써준「敬義」휘자로 가리개를 만들어 붙이고, 짧게 명()하기를 성학(聖學)의 핵심이니, 돌아가신 스승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이다라고 적었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 위주로 하여 안을 곧게 하고, 지켜서 바깥을 방정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했는데 유가에서는 학문을 하는 방법으로 인용하곤 한다. 정사년(1797) 여름에 소자가 적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앉든 눕든 항상 자리 오른쪽에 두고 추모했다. 南冥 曺植 선생도 경의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생애의 마지막에도 글을 짓는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현감을 사직한 후 자신의 진실을 알리려 여러 관련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들 서간에서 선생은 만언상소에 대한 언관(
言官)과 성균관 유생들의 지적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 이 상소문의 저본은 1785년에 작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곧 다산정사를 완성하고서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서 평소에 임금을 알현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4월 손자 영간(榮幹)이 이종백의 딸과 혼인했다.

答崔知事夢年齡別 座右銘

年歲
西紀
干支
               
座右銘
 7
1733
癸丑
不善非人, 不孝非人子라는 文句 휴대하며 警戒
 8
1734
甲寅
孔顔曾思孟 써 놓고 讀書龜鑑으로 삼음
 9
1735
乙卯
孔子像 그려 침실 벽에 걸어놓고 朝夕으로 敬拜
10
1736
丙辰
조신의 표어로 與其視人寧自視, 與其聽人寧自聽  
11
1737
丁巳
휴대한 분판에 言行 으로 評價 操身
12
1738
戊寅
萬物皆備於我矣(맹자 진심상)
15
1741
辛酉
綸天地而縕胞萬物而同體
16
1742
壬戌
軒房 벽에 「多言」이라고 써서 붙이고 警戒
71
1797
丁巳
屛溪선생이 써준「敬義」를 가리개로 만들어 操身


與兪參奉 孟煥 別紙
與兪參奉
與舍弟伯純
不知軒序李潭陽憲儒
玉果詠歸祠宇
竹川書院重修記

 72
(1798戊午)
出仕 따른 無理 永眠하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던가. 사람의 수명은 하늘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은 몇 가지 무리에서 앞당겨진 듯하다. 만일 장흥에 재해의 피해가 없었다면 위유사의 파견도 없었고, 선생을 왕에게 천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련의 사태는 1794 10월 서영보 위유사의 천거, 1795(乙卯) 11 27일 군직인 부사용(副司勇) 제수했다. 그해 12 7일 환영지 탁송과 함께 노환으로 입궐하기 어려움을 알렸다. 이후 상경을 독촉하면서 무리가 반복됐다.
첫째, 왕은 환영지가 탁송되고 몸이 아프다는 전갈을 받은 후인 1795 12 23일 다른 책도 보내라며
본인은 내년 봄에 입궐하라했다. 그러고는 이듬해 1 6일 해도지(海島誌) 24권의 저술이 도착한 이후 1 25일 다시 입궐 지연을 힐책했다. 불갑사 여행 이후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왕의 성화에 못 이겨 2 18일 상경을 위해 무리하게 집을 나섰다.
두 번째는 3 6일 입경한 후 7일 내각에서 밤을 새워 <상소문>을 써오라는 지시로 인해 성치 않은 몸을 더욱 쇠약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천리 길을 오느라 무리를 했는데 밤을 새워 만자의 글을 쓰게 한 것이다. 이 부분은 선생 자신이
정신이 혼미 했다라는 표현으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승정원의 승지들이 상소문을 써오라고 지시한 것이 긴장을 가중시킨 것이다.
세 번째는 8일 현감을 제수하고 즉시 떠나게 한 것도 무리를 가중시켰다. 선생은 전날 밤에 한숨을 자지 못하면서 상소문을 썼다. 70고령의 노인이 밤을 꼬박 새웠으니 과연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피로를 풀 여유도 없이 바로 부임하란 한 것이다. 처음부터 무리가 가중되면서 건강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결국 출사에 따른 무리가 겹쳤던 셈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현감 재임 2년차인 1797 2월 중순 중풍으로 몸을 운신하기 어려워 늦은 봄에 귀향했다. 다산정사나 동생들의 집을 왕래할 때라도 남여(
藍輿)를 이용하지 않으면 오갈 수가 없었다. 편지 한통을 쓸 때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으나 식사를 허거나 물을 마실 때는 물론 화장실에 가고 올 때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했다. 남들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기쁜 일은 그해 2월에 셋째 동생 백순이 생원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던 소식이다.
11
21일 중풍에 감기마저 심해졌다. 선생은 아들에게 유언을 했다.
내가 저술한 어떤 책 어떤 대목은 반드시 고쳐라는 당부하고는 유시(酉時)경에 숨을 거두었다. 유년기에 천재와 신동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선생은 11 25 72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성현을 닮고자 하는 수기와 작은 고을이지만 옥과현의 목민을 위한 치인(治人)의 모범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도 남았다. 1799(己未) 2 6일 가족묘지인 다산동(茶山洞)에 묻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선생의 출사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룰 수 있다. 위유사의 천거로 현감을 역임한 것은 행운이라는 평가이다. 비록 정6품인 현감에 그친 벼슬이지만 그래도 현직이니 안한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도 의미가 분명 있을 수 있다. 아무리 하찮은 벼슬이라도 현감을 누구나 할 수 있는 벼슬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기회가 아니면 출사는 불가능했기에 서 위유사의 천거와 정조의 배려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현감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후세에 훨씬 각광을 받을 것이라는 평가이다. 만일 서영보의 천거나 정조의 부름이 없이 그대로 초야에서 지냈다면 더 많은 저술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경학과 관련된 저술을 주로 60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저술을 썼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내각으로 올라간 저서도 그대로 남았을 것이다. 출사로 인한 무리가 선생의 수명을 단축시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중요한 저술을 잃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특히 정조는 빨리 입궐하라는 불호령과 알현도 않은 이중성은 이해하기 어렵다. 선생이 몸이 아파서 상경할 수 없는데 처음에는
따뜻한 내년 봄에 입궐하라했다가 조금 지연되자 왜 빨리 안 오냐며 신경질을 냈다. 그런 그가 정작 밤새도록 만언봉사를 써가지고 입권하자 알현하지도 않고 비답만 내렸다. 물론 정조는 고가 평가가 부당하다며 장원서 별제와 경기전령을 제수하며 크게 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련의 행위는 앞뒤가 안 맞은 모순이다.  
결국 선생의 타계는 출사의 무리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이는 기존 관료집단의
왕따에 기인한다. 만언봉사에서 자신들을 공격한 것과 생 은어 상납관행을 혁파한 것 등이 그 원인이다. 그래서 왕의 알현을 막고, 비답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白徒之人으로 폄하하고, 인사고과에서 최하로 평가해서 체직하게 했다. 요새 문제가 된 방산(防産)비리도 관료집단의 고질이다. 그의 양친은 80세에 돌아가셨다. 이를 보면 장수할 내림인데 무리가 겹친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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