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8 18:31
■옥로(玉露) 위성유 魏聖儒 34세, 청계공파, 1970년생, 시인, 現고용노동부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주무관,장흥 관산 옥동출신)
■성유종친은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등 한국문단의 거장을 탄생시킨 문학의 고장 전남 장흥에서 1970년 태어나고 자랐다. 유년시절 주옥같은 시를 접하면서 문학 소년의 꿈을 키워왔다. 2000년 고용노동부에 입사하여 현재 서울 지방고용노동청에 주무관으로 재직 중이다. 시 [인생의 봄날], [태고송], 수필[나의 어머니], [옛날 놈], [팥죽 생각] 등 다수의 작품을 지필하다. 2014년 제36기 신인문학상 [분재소나무외 2편]의 시가 한국 지필문학에 당선되어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공직생활 중 틈나는 대로 삶과 자연을 관조 하며 자기 성찰의 시간을 통해 마침내 첫 시집 [바보당신] 을 세상 밖으로 내려놓게 되었다.]라고 [바보당신]의 시집 과 [위씨네카페/대표 연남 위희량]에서 다소 수정후 옮겨 본다.
■성유종친의 [바보당신]에 내재된 사상과 철학은 김관식 시인이 표현한 “自省的인 삶의 관조와 깨달음의 미학“ 이란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여 보면 기승전결로 승화되는 특징을 지닌다. ”1)원초적인 생명공간의 고향과 부모에 대한 성찰, 2)모정에 대한 재인식과 토속적인 향수의 세계, 3) 인생살이에 대한 깨우침과 동심적인 회억, 4)자성적인 삶의 회한과 세월 의 편린들“로 세분화해 볼 수 있다.
성유종친의 시 한편을 살펴 보기로 하자? 성유종친의 시를 음미하노라면 마치 존재공의 자회가(自悔歌)가 연상되는데 이에서 피의 흐름은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희생적인 부모님의 사랑과 이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자식의 효성을 대비시켜 결국 사랑(피)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 아울러 圓山 위정철 씨족문화연구소 소장의 위씨문학공원 조성에 대한 글도 함께 숙고해 보자?
■바보당신 / 위성유
오월인데 무진장 더운 날입니다.
10동 병실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비좁은 창문 너머로 구슬프게 흘러나옵니다.
꽃내음이 진동하는 계절인데
밀폐된 병실에서 홀로 외로이 굽은 새우등 보이며
하얀 벽을 향해 누워있는 당신을 봅니다.
아픈 허리를 참다가도 당신도 모르게
오매 허리여 오매 내 허리여
나 죽것다 나 죽것네 하며 이리 저리 몸을 뒤척입니다.
긴 한숨소리를 내며 통증을 호소하는 당신에게
십자가를 쥔 간호사는 오늘도 주사 한 대를 놓고 사라집니다.
요 며칠사이, 주사의 내성인지 총총했던 기억조차 혼미해져
다녀간 지인도 기억 못하는 바보 당신이 되어갑니다.
미음을 삼킨 지 얼마 안 돼 여지없이 바보당신은
대기저귀에 대변을 질버덕하게 내지르고 말았습니다.
오줌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꽂힌 바늘 틈사이로 피가 철철 흘려내려도
독한 주사 힘으로 하루를 힘겹게 버티나 봅니다
"내 고향에 가고 싶다 고향집에 가고 싶다"
말씀을 하셔도 먹고 살기 버거운 무능력한 불효 자식 둔 덕에
더 이상 갈 수 없는 고향이 되어만 갑니다.
근무 중에 전화벨이 울립니다.
순간 가슴이 철썩 내려앉고 숨이 막혀 옵니다.
펜을 쥔 손의 힘이 쫙 빠지면서 혹시나 그러면 안 되는데
나만의 지레짐작에 제발 살아만 계셔주라고 중얼거립니다.
병석에 누워 계신 탓에 호강 한번 시켜드리지 못한
당신을 지금은 보내드릴 수 없다며
어찌할지 몰라 끝임 없이 속 기도를 합니다.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건 아닌지 지금 다시 묻게 됩니다.
바보 같은 당신 당신은 옆에 없지만
당신과 함께 한 오늘 하루가 짧기만 합니다.
살만큼 사셨다고 누군가 말들 하지만
그래도 바보 같은 내 당신
영원히 내 마음 빈자리에 두고만 싶습니다.
■[魏氏 文學公園 造成 : 우리 선조들이 비록 벼슬은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학문적 성과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수우옹 (守愚翁) 휘 세직(世稷)의 금당별곡(金塘別曲) 간암공 (艮庵公) 휘 세옥(世鈺)의 임계탄(壬癸歎), 존재공(存齋公) 휘 백규(伯珪)의 자회가(自悔歌)와 연시조 농가 구장(農歌九章)은 학계에서도 평가받고 있다. 최적의 장소는 하산사 앞 공간이다. 현재 주차장 앞 매입가옥에 가사를 돌에 새겨 문학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의 문학적 우수성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문풍(門風)은 문학적 자질이기 때문 이다. 해남 연동과 완도 보길도에 가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작품을 쉽게 감상할 수 있게 해놓 았다.]라고 圓山 위정철 씨족문화연구소 소장은 [위문의 현안과 청사진]에서 위씨문학공원 조성을 촉구하고 있다. (자문:백강 / 글:원산,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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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 옥로 위성유
나는 사랑스런 아내와 토끼 같은 여덟살 된 딸, 그리고 나를 쏙 빼닮은 다섯살 된 아들과 함께 사는 평범한 가장이다.
매일 출근할 때 “아빠! 힘내세요”라는 동요를 불러주는 아들, 딸이 있어 힘이 나고 현관문까지 나와 “여보, 잘 다녀오세요“ 라는 내조의 여왕 배웅에 가족 사랑의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 가족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크면 클수록 내 가슴속 깊숙한 저편에서 밀려오는 왠지 모를 시골 어머님에 대한 죄스럽고 미안함이 나의 발목을 잡곤 한다.
나는 위(魏)씨 집성촌, 장흥 관산이란 작은 마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이웃 면(面)에 사셨던 어머니께서는 만석지기 부잣집 막내아들이란 소문을 듣고 스물넷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연(緣)을 맺고자 우리 마을로 시집을 오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장자(長子)에게 재산 상속하라는 유언에 따라 막내 아들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무일푼 혼자 힘으로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고 어머니께서는 아들도 못 낳는 며느리로서 구박을 받으셨고 서른여섯이란 늦은 나이에 나를 보게 되었다.
논농사를 생계로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논에 농약을 하시다 으실 으실 춥다하시며 몸 저 누으신 후 수 십년간 잦은 병환으로 고생하셨고 이후 우리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께서 도맡아야 했다. 아버지 병원비에 그나마 남은 재산도 거의 탕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도 나의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온종일 집안에만 계신다.
유년시절을 회상해보니 문득 이런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 때 개천 보수 작업하러 몸도 성치 않는 몸으로 울력을 나가셨던 어머님께서는 하루 종일 당신의 덩치만큼 큰 돌을 허리가 휘도록 나르고 나르셨다. 그 대가로 일당 삼천원을 벌어 오셨다. 해가 저물고 어둠 컴컴한 저녁이 되어서야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던 어머니.
당신도 지친 몸이셨지만 검은 봉지 속에는 항상 단팥빵과 우유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울력을 하면서 지급된 오후 간식이었던 것이었다. 철없는 나는 한입에 그 쭈굴 쭈굴해진 단팥빵을 먹고 나서 더 없냐며 어머니께 물었고 내일 또 가지고 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신의 심신도 고단하고 허기지셨을 텐데,,,
그걸 드시지도 않고 못난 막내 아들에게 주려고 싸오셨던 눈물 젖은 단팥빵의 서글픈 추억! 나는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근처에 우리가 일구던 논이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오는 길에 저 멀리서 한 아낙네가 고개를 숙이고 논에 잡초를 뽑고 계셨다. 나는 한눈에 내 어머니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땐 어머님의 검게 그을린 얼굴과 왜소한 모습이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엄마! 하고 소리 한번 외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그만 모른 척 지나쳐버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제가 군 복무 중 어머님께서 환갑을 맞으셨다. 집안 마당에 멍석을 깔고 천막을 치고 동네 어르신들과 친지분들을 모시고 잔치를 열었다. 친지분들이 다함께 한목소리가 되어 ‘어머니의 은혜’를 불렀다. 어르신부터 차례로 절을 올리고 마지막에 막내인 내가 부모님께 절을 드릴 차례가 왔다. 넓적 무릎을 꿇고 절을 드리는 순간, 난 그만 나도 모르게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힘든 군 생활로 인해 훌쩍 철이 들어버린 까닭일까? 어머님의 일생(一生)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무슨 죄를 당신에게 그토록 많이 지었길래... 당신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었다. 이 좋은 날에 왜 우냐며? 어머님께서는 나를 다독거리셨다.
나의 어머님을 아시는 동네 어르신들은 항상 내게 이렇게 말을 하신다. “네, 어머님한테 잘해라, 네 어머님 같은 분은 세상 천지에 없다”고...
이런 내 모(母)에게 고향 길 멀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안부전화로 대신하는 이 철없는 막내 자식. 바쁜 세상을 핑계로 부모님을 잊고 살면서 명절이나 휴가 때나 찾아 뵙는 못난 자식이건만, 당신께서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손주 녀석 돌잔치에 천리 길 마다않고 한숨에 달려오지 않았던가?
하루 하루 고단한 삶에 힘들고 지쳐서 누군가에 기대고 싶어 질 때 뒤돌아가 서서 그리움에 불러보는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이름, 어머니!
철없던 당신의 막내아들이 이제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여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에서야 당신의 깊은 속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농부로서 가난의 되물림에 한없이 미안해 하셨던 당신. 그러나 정작 당신도 여자였던 것을 난 모르고 살았다. 어머님도 어머님만의 인생이 있다는 걸 난 잊고 살았다. 홀로 감당해야 할 평생의 짐이 얼마나 크셨길래 허리수술을 두 번씩이나 하셨는지,,, 수술 중 그 고통을 참다못해 홀로 내시던 한 맺힌 울음소리를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님께서는 막내 아들보다 손주 녀석 전화목소리가 듣고 싶나보다. 오늘도 “내 손주 동규 잘있냐”며 물으시는 어머님의 안부 전화를 기다려본다. 지금 이순간도 내 새끼 무탈((無頉)하길 냉수 한 사발 떠놓고 성주님께 빌고 계실 내 어머님께, 이 못난 불효자가 가슴에만 품고 단 한번도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이제야 하려한다.
어머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만수무강(萬壽無疆)하세요
돌아온 주말에는 내가 태어나고, 어머님의 삶의 터전인 내 고향 장흥에 다녀 오련다. 그곳에도 내가 희망하고 부모님이 소원하는 따스한 봄날이 성큼 다가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