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6 18:43
2015 중국 본촌 방문기
지난 9월 11일부터 15일까지 4박 5일 간에 걸쳐 중국 하남성 본촌을 다녀왔다. 장흥위씨 대종회(회장 위자형)에서 추진한 위씨 뿌리 찾기와 국제 교류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의 종친 10명이 함께한 행사였다.
10시경 정주(鄭州) 공항에 도착하여 첫날 이루어진 일정은 개봉시의 관광이었다. 개봉(開封)은 위혜왕 31년(BC 340) 상앙이 이끄는 진나라 군에 패하여 원래 수도였던 안읍(安邑, 현 산서성 하현 서북 우왕촌)에서 천도한 곳이다. 즉 BC 445년 9세 위문후(魏文侯)에 의해 안읍에 도읍을 정하였지만, 이후 위(魏)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의 도읍지는 개봉이었던 것이다.
건국 당시의 전국시대 초기에는 가장 강성한 나라였으나, 위혜왕 때 황하 서쪽을 잃어 개봉으로 밀리고, 이후 BC 225년 진나라의 수공에 대량성(大樑城, 현 개봉)이 침수당하면서 위문후 이래 8대에 걸친 221년의 위나라 역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개봉의 유적은 대부분 현재도 호수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는 가이드의 설명이 당시의 참상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는 듯 했다. 개봉은 전국시대 위나라 이후에도 송나라 등 6개 왕조의 수도가 자리 잡으면서 번영한 곳으로, 중국 7대 고도(古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첫 번째로 방문한 포공사(包公柌)는 드라마 포청천(包青天)으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1987년 개봉시민들의 성금으로 건립한 포증(包拯)의 사당으로, 건물들과 주변 경관이 마치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유적지처럼 제대로 꾸며져 있다. 중국인에게 포증은 신과 거의 동급이라는데, 사당의 분위기가 당장이라도 ‘개작두를 대령하라!’라고 호통을 칠 기세이다. 특히 주변을 둘러싼 널따란 포공호가 인상적이었으며, 원래의 포공사는 여러 차례의 홍수로 이 호수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현지 중화요리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청명상하원(清明上河园)이다. 개봉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이곳은 송나라 화가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재현한 테마파크로서, 중국 역사상 높은 문화를 꽃 피운 북송(960~1127년)시대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민속촌과 같은 분위기였는데, 규모는 훨씬 커 보였다. 14억의 인구라는 넓은 시장을 가진 중국이기에 이처럼 대규모 투자가 가능한 것 같았다. 관광지 안에 송나라 복장을 한 1천여명의 직원들이 당시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며, 20여개의 다양한 상설 공연을 통해 북송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개봉의 대표적인 관광지 두곳을 둘러보고 7시를 훌쩍 넘겨 숙소인 정주국제호텔에 도착했다. 호텔로비에는 하남성의 종친들이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주시 종친 대표들과 멀리 고시현에서 온 종친들이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한국과 중국 종친의 소개와 대표의 환영사를 비롯하여 정주시와 고시현 종친회에서 준비한 기념품 증정도 있었다. 중국 환영단 12명과 한국 방문객 10명이 어우러진 호텔 연회장에서의 환영 만찬은 핏줄의 진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둘째날 9월 12일의 일정은 신밀시의 태시조공 동상과 중모현 위혜왕릉을 방문하고 13일 용성현의 망창산 삼공서원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중국 종친들의 권유로 일정을 일부 조정하였다. 신밀시의 태시조공 동상은 사유지에 속해 있어서 접근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정주에서 400㎞ 이상 떨어진 고시현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태시조공 동상을 참배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위혜왕릉은 고시현으로 가는 도중에 둘러보기로 했다.
정주에서 동쪽으로 1시간 이상 이동하여 중모현(中牟县)에 위치한 위혜왕릉(梁惠王陵)에 도착하였다. 황하 남쪽 대평원에 위치한 왕릉은 2,300년의 세월에 침식되어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경주 왕릉보다도 훨씬 더 큰 고분이지만 최근 도굴 흔적도 있고, 심지어 봉분은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동행한 하남성 위씨문화연구회 위회습(魏懷習)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앞으로 이곳의 농경지를 매입하여 복원해서 성역화 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묘비 앞에서 기념 사진 촬영 후 한국 대표인 위자형 대종회장께서 미리 준비해 간 격려금을 전달하였다.
다시 일행은 남쪽으로 고시현(固始县)을 향해 출발하였다. 도중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7시간 이상을 달려 고시현에 도착하자, 고시IC 출구에 20여명의 종친들이 한국 종친들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또 한번 핏줄의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고시 시가지를 지나 한참을 가자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9시간을 달려 처음으로 산을 구경한 것이다. 위나라의 영토였던 중원 땅의 넓이와 풍요로움을 확인하면서 이곳까지 온 것이다.
버스로 안산삼림공원의 정상에 도착하자 웅장한 운소묘(雲霄廟)가 자리잡고 있었다. 운소묘는 당나라 초기 진장군의 부인이며 진원광(陳元光) 장군의 조모인 운소 위경(魏敬) 부인을 모시는 사당이다. 일행은 각각 중국 화폐로 30원(元)씩 주고 향초를 구입해 부인의 사당에 분향하고, 또 일부는 시주금을 내고 스님의 안내에 따라 재차 참배하기도 했다. 이곳은 복건성에 살고 있는 진씨 후예들이 조성했다고 하는데, 부인을 숭배하는 고시현 주민들뿐만 아니라 복건성 주민들도 해마다 제사와 축제 때에 찾는다고 한다. 특히 복건성에는 위경 부인을 숭배하는 운소 사당(雲霄 祠堂)이 2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99 계단을 오른 후에 모습을 드러낸 사당의 규모도 웅장했지만, 산 정상에 위치하여 넓은 중원 땅이 모두 발 아래 펼쳐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다시 하산하여 산 아래 자리잡은 진장군 사당으로 향했다. 해질녁에 도착한 사당은 규모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120개가 넘는 방을 비롯하여 진장군 동상과 위경 부인 내외의 동상을 둘러보고 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기념품을 전해주고, 지역 TV 방송국에서 취재를 하였다. 한국에서 뿌리를 찾아 고시현까지 방문한 것이 대단한 뉴스였던 셈인데, 한국 대표인 대종회장님의 방문 이유에 대한 깔끔한 인터뷰가 돋보였다. 이곳 고시현은 전국시대 위나라가 멸망하자 살길을 찾아 각지로 흩어진 종친들의 일부가 이거하였다고 한다. 2,200년의 이거 역사에 비해 현재 고시현 내에 거주하는 종친들의 숫자는 위씨 전체 600만명 중 8,000명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어둠이 내릴 즈음 고시현 종친들이 마련한 숙소인 요성호텔(蓼城寮館)에 도착하였다. 20여명의 고시현 종친 대표와 4명의 정주시 대표, 그리고 한국 방문단까지 함께한 환영 만찬이 있었다. 고시현 위씨문화연구회 회장과 명예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정주시 위씨문화연구회 회장 및 한국 대표인 대종회 위자형 회장의 인사로 이어진 분위기는 압권이었다. 특히 하남성 위씨문화연구회 비서장은 정주에 위씨 사당을 건립하고, 위혜왕릉을 복원하며, 세계 위씨들의 교류를 활성화하려는 계획을 발표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고시현 종친들의 융숭한 대접 속에 또 다시 핏줄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만찬이었다.
셋째날 9월 13일 고시현 신개발구역에 위치한 고시박물관(固始博物館)을 둘러보았다. 대전의 뿌리공원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단순한 성씨박물관이 아닌 고시현의 종합역사박물관이다. 복건성의 사업가들이 투자하여 건립한 박물관은 화남지방 개척과 중국인의 이동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고시현의 위치가 화북과 화중을 잇는 길목이며, 이러한 화남지방 이주와 개척에 위경(魏敬) 부인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박물관 학예연구원이 알려주었다.
위경 부인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던 중원의 주민 2,700명을 이끌고 고시현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게 개척함으로서, 동행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의 생활도 풍요롭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2차로 주민 4,000명을 이끌고 화남의 복건성으로 이주하였는데, 당시 중국의 최동남쪽에 위치한 복건성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어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복건성 주민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고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으므로 진원광 장군은 왕으로 추앙 받았다. 그 이면에는 위경 부인이 장군을 훈육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정을 베푸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부인에 대한 존경과 추앙이 측천무후에 못지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사실을 관조해 볼 때 마치 4군과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이나, 두 왕자를 데리고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한 서소노 부인을 연상케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위경 부인이 당나라 명재상 위징(魏徵)의 동생이라는 점이다. 두분 모두 비슷한 시기인 당나라 초기에 활동했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장흥위씨 시조공(魏鏡)도 위징 재상과 혈연적 관계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흥미롭게 들렸다. 내친김에 장흥위씨 시조공의 거주지였던 관서(關西) 홍농(弘農)에 대해서도 현재의 위치를 확인해 보았지만, 중국 종친의 대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뒤에 확인한 결과 홍농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과 하남성(河南省)의 경계 지역으로 황하 남쪽에 해당하며, 고대에는 장안성이 있는 관중을 방어하는 최전방 기지인 동관과 함곡관 사이에 있던 지방이다. 암튼 중국 역대 최고의 재상과 주민들에게 가장 숭배를 받는 어른이 모두 종친이고, 이런 훌륭한 분들과 장흥위씨 시조공께서 가까운 혈연 관계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고시박물관과 성씨조형탑을 둘러본 후 10시경 정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더 넓은 대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시간이다. 옥수수밭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리잡은 버드나무들... 바람과 먼지를 막기 위해 심어진 버드나무마저 없었더라면 끝없는 농경지만 이어졌을 것이다. 산도 없고 물론 강도 드문 땅이다. 흙도 비료가 필요 없을 정도로 비옥해 보였다. 따라서 곡식도 고르게 잘 자라고 있었다. 이런 비옥한 땅을 배경으로 위씨들의 선조가 위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일행은 위문후의 개국 이래 221년간 선조들이 다스렸던 중원 땅을 말이나 마차 대신 자동차로 달려온 셈이다.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7시간 이상 달려 정주시에 미리 예약해 둔 식당에 도착하였다. 조선족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하남성 종친 대표들에게 답례하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1,200만명에 달하는 정주시도 퇴근길이 막히는지 각각 시간을 달리하여 15명 정도의 종친들이 모였다. 소박한 식당에서 진행된 연회는 족보 등의 선물을 받은 후, 고급술과 삼겹살을 곁들인 한국식으로 대접했다. 중국 종친들과의 마지막 연회는 ‘위하여’를 자연스럽게 연호하면서 점점 자리가 무르익어 갔다. 두 나라 종친이 하나 되는 핏줄의 뜨거움을 네 번째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3시간 이상에 걸친 화기애애한 자리를 마무리하고 숙소인 정주국제호텔로 이동하면서 셋째날 일정이 종료되었다.
넷째날 9월 14일은 일정 변경으로 미뤄졌던 중원 관광길에 올랐다. 우선 정주에서 2시간 정도 달려 낙양(洛陽)의 용문석굴(龍門石窟)로 향했다. 용문석굴은 불교 미술의 보고로 막고굴,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힌다. 북위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수백년에 걸쳐 조성된 2만여점에 달하는 석굴 속의 부처님은 아쉽게도 대부분이 파괴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도 문제지만 문화혁명 시기에 파괴했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게 했다.
서산의 용문석굴을 지나 건너편 동산의 향산사(香山寺)와 백원(白園)을 둘러보았다. 동산의 정상 능선에 자리잡은 향산사는 자그마한 사찰이지만,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영정을 모신 방문기념관이 돋보였다. 그리고 당나라 시인 백거이(樂天)의 묘소가 있는 백원에는 한국의 백씨 종친회에서 기념비를 세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주에 위씨 사당과 위혜왕릉이 복원되면 한국의 장흥위씨들에게도 참고가 될 것 같았다.
낙양의 향토 음식인 수석요리로 점심을 먹고 난 뒤, 다시 2시간 정도 걸려 등봉현(登封縣)에 위치한 숭산 소림사(嵩山 少林寺)에 도착하였다. 먼저 케이블카(삭도)를 이용하여 숭산에 올랐다. 중악으로 불려지는 숭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여유롭게 조망한 뒤 소림사에 들렀다. 도중에 200여기 이상의 사리탑으로 이뤄진 탑림의 웅장함부터 일행을 압도했다. 소림사는 사찰의 규모도 대단했지만, 나이 어린 무술인부터 차례로 보여주는 무술시범도 인상 깊었다. 특히 넓은 운동장에서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수련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숭산과 소림사를 둘러보고 2시간 정도 걸려 다시 정주로 돌아왔다. 마지막 저녁은 한국에서 함께 출발한 종친들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특히 된장찌개 등으로 차려진 한식이었기 때문에 다소 느끼했던 현지 음식과는 다른 깔끔한 식사였다. 식사를 마친 후 화순의 이량 종친과 재경종친회 승렬 회장의 협찬으로 고급술을 준비해서 정주국제호텔의 대종회장님 방에 모였다. 내일 귀국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로 내내 분위기가 화기애애했고, 마무리가 좋았다. 참석자 모두가 만족해 하는 본촌 방문이었다.
특별히 어렵게 시간을 내어 참가했던 2015 본촌 방문은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장흥위씨에 대한 자부심과 위씨만이 가질 수 있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본촌에서 중국 종친들을 만나 위씨의 뿌리를 제대로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또한 장흥위씨 대종회의 활동을 중국 종친들의 활동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특히 전세계 위씨들의 교류를 위한 장흥위씨 대종회의 국제적인 네트워크 구축은 실로 대단한 성과로 느껴졌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해외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여 이번 행사를 성공리에 마무리한 대종회에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이번 행사를 위해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다. 특히 둘째날 정주화하(鄭州華夏) 위씨문화연구회(魏氏文化硏究會) 위회습(魏懷習) 회장에게 전달된 격려금(1,000$)은 (주)그린내장 대표이사인 위근량 위씨골프회 회장께서 준비해 주었다. 거금을 협찬한 위근량 종친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리고 한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대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이하고 환대해준 중국 하남성 종친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아울러 명쾌한 통역과 성실한 자세로 많은 도움을 준 오향화 가이드에게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