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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歷史의 人物  兵曹參判公  晩悔齋  魏 廷 喆
                             
병조참판공(諱 廷喆, 號 晩悔齋 1583∼1657)의⟪瀋陽往還日記⟫는 丙子胡亂이 일어나기 전인 1631년 3월 19일부터 그해 4월 30일까지 公께서 仁祖(조선의 16대왕 재위 1623∼1649)로부터 병조참판의 임시직첩을 받고 回答別使(회답별사)로 後金(淸나라)의 수도 瀋陽에 파견되면서 귀국하기까지 41일간의 使行日記(사행일기)이다. 학계에서는⟪왕환일기⟫가 公에 앞서1630년 12월 18일에 파견됐다 후금의 칸(태종)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春信使(춘신사) 朴蘭英(박난영)의 일기로 잘못 알려진 것을 전남대학교 신해진 교수에 의해 확인 되어 2014. 08월에 출판된 것으로 학술적 가치 평가 및 종원들의 이해를 돕고자 병조참판공에 대해 재조명 해본다.  


1. 주요 行狀(행장)
1)존재공 작성 忠義錄 내용 (기묘보 지장록 p 118)
訓鍊正을 지냈고 判書에 贈職된 德和의 子요 進士 鯤의 孫子며 參奉 晉賢의 曾孫이다. 志氣가 弘偉하고 見識이 超邁(초매)하여 21세때 武科에 합격하여 장차 ①赴防(부방)할제 公이 奮然(분연)히 스스로 격려하기를 男兒가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직업으로 택하였다면 마땅히 萬人의 적을 당할 수 있는 兵法을 배워야만 한다 하고 드디어 武經七書와 古今陣法의 圖說을 휴대하고 한번만 읽으면 손바닥을 보듯 환하게 다 알았으며 또 옛날 名將들의 成敗한 事績을 記錄한 書冊을 빠짐없이 두루 보았다. 또 말하기를 南쪽 왜놈들을 조심하고 北쪽 되놈들을 살피는 것은 바로 朝夕의 일이니 만일 山川과 道路 ②嶺阨(영액)과 ③關防(관방)에 足目이 미치지 못하다가 倉卒間에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형세를 살피고 계책을 세울 수 있으리오 하였다. 드디어 西北쪽 七邑 六鎭과 東南쪽으로는 全羅道와 慶尙道에 이르기까지 해변에 설치한 돈대와 邑의 治安이 성하고 쇠함과 鎭堡의 험하고 평이함을 두루 돌아다녀 眞想을 파악하여 나름대로 추측하고 합치한 점을 찾으니 모든 사람들이 萬人의 병사를 가슴속에 감추었다고 하였다. 光海 庚戌 1610년에 ④宣薦(선천)에 잠시 머물렀다가 例規에 의하여 宣傳官에 任命되었고 監察로 승진되어 咸平懸監으로 부임하였다. 仁祖 丁卯 1627년후로 되놈(淸나라를 말함.)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계속해서 우리나라를 침범하고 明나라 毛將軍(모문룡을 말함.)이 또 椵島에 웅거하여 西邊에 일이 많아 永柔島(영유도)에 원님이 비어 있었다. 朝廷에서 永柔島가 椵島(가도)와 이웃하여 적합한 사람을 고르기가 어려웠는데 公을 선택하여 任命하니 公이 單騎로 赴任하여 일 때문에 椵島에 들어가 義理로서 깨우쳐 교만하고 제멋대로 한 횡포를 꺾고 살아갈 길을 찾도록 수단과 방법을 제공하여 毛將軍의 歡心을 얻으니 다시는 그 사람의 威喝(위갈)로 거듭 나라의 근심을 끼치지 아니 하였다. 뒤에 通信士 朴蘭英이 瀋陽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淸나라가 禮物을 물리치고 同行한 軍官들을 잡아 가두었으며 사자가 와서 恐嚇 한다고 하였다. 朝廷이 특별히 근심하여 公에게 兵曹參判이란 職責을 임시로 주어 回答別使를 삼으니 公이 命令을 받들어 瀋陽에 들어가 沿道邊의 물정이나 소문에 따라 모르는 것을 물어가며 찾아내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들은 대로 임금(인조)에게 아뢸 글을 만들어 보냈고 가지고 간 물품의 목록을 드려 보내니 마침내 막은 일이 없었는데 우두머리인 汗(한)이 물품(즉 貢物) 全種目을 削減하여 和親할 생각이 점점 해이해졌다고 말하고 또 漢人에게(明나라를 지칭함.) 양식을 도와줌으로서 前約을 지키지 않았다고 떠들어대며 서로 핍박하였다. 이에 여러 酋長들이 역마로 달려와 여러 가지 일들을 傳해오니 우두머리의 생각대로 고함을 지르고 꾸짖어 事件이 많이 발생하였으나 公이 辭理를 분명히 가려내며 덜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으며 기회를 따라서 더욱더 실가닥을 풀듯 일을 풀어나가 마치고 돌아왔다. 얼마 않되 西北兩道巡察使에 任命되어 亞營을 새로 開設하고 軍務를 經理하여 혹은 兵制를 改革하니 이로써 吉州의 責任者로 任命되었으나 능히 부임하지 못하고 仁祖 丙子 1636년 봄에 永興府使를 겸한 防禦의 責任者로 任命됨에 兵卒을 訓練시키고 兵器를 수선하여 조심스럽게 적의 陣地를 대하듯 하였는데 겨울에 과연 급한 警報가 있어 바야흐로 南兵使 徐佑申과 같이 合同作戰을 하기로 하였는데 문득 들려오기를 오랑캐 萬餘騎兵이 陽德地境으로부터 北路를 犯한다 함으로 부득이 군사를 駐屯(주둔)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公은 衆寡不敵으로 山에 올라가 陳을 치고 佑申은 平原에다 陣을 쳤는데 오랑캐들이 鐵甲을 입은 騎馬兵으로서 徐兵使 陣地를 짓밟아 破하고 또 山위로 오르고자 함으로 公이 돌을 날려 어지럽게 내려 던지니 오랑캐들이 太半이나 죽고 數日을 서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오랑캐 병사가 갑자기 와서 두 나라가 講和했다는 文書를 傳하니 公이 통곡하면서 군사를 파하고 永興府로 돌아왔다. 그 후에 계속해서 肅山, 甲山 그리고 滿浦鎭의 責任者로 任命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여 就任(취임)하지 아니하고 仁祖 甲申 1644년 뒤로는 매양 3월19일을 당하면 문득 北向하여 통곡하더니 얼마 안있어 病으로 終하였다. 原從一等勳에 記錄되고 屛溪 尹先生이 墓碣을 撰하였다.

※ ①赴防 (부방) : 다른 道의 군대가 서북변경을 방위하던 일.
  ②嶺阨 (영액) : 고개길의 좁은 목.
  ③關防 (관방) : 적을 막기에 좋은 목의 방어.
  ④宣薦 (선천) : 새로 무과에 급제한 사람 중에서 선전관이 될만한 사람을 후보자로 추천하는 일로 신분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함.

2) 仁祖大王(인조대왕) ①諭文(유문) - - - 永興大都護府使兼 咸鏡南道 防禦使 魏廷喆에게 내림 (기묘보 지장록 p 934)
卿(경)이 한 지방을 委任 받으니 責任이 가볍지 아니하리라. 무릇 兵士를 動員할 때는 機會를 보아 應하되 百姓을 편하게 하고 敵을 制壓(제압)할 것이요 한결같이 普通일에 應할 때는 자연히 舊法에 따라 할 것이요 혹시 나와 卿이 獨斷(독단)으로 일을 處理할 때는 ②密符(밀부)가 아니면 가히 施行하지 말 것이요 또 뜻밖의 奸邪(간사)한 計策에는 가히 豫防 안할 수가 없으니 만약 非常의 命令이 있을 때는 兵符를 합쳐보고 疑心이 없는 뒤에 마땅히 命令에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21번째로 수결한 兵符를 내리니 卿은 받아 깨우치라.
①諭文 (유문)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
②密符 (밀부) : 留守(유수), 兵使, 監司, 水使, 防禦使에게 때를 가리지 않고 곧 應할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리는 兵符를 말함.


2. 주요 履歷(이력) 및 심양왕환일기 內容(내용)
1)履歷
 1583년 판서공(諱 德和)과 貞夫人 죽산 安氏의 長子로 태어남, 1603년 무과급제, 1610년 宣傳官, 함평현감, 곤양군수, 1624년 李适(이괄)의 亂 관련 참여로 振武原從一等功臣, 1629년 영유수령, 1631년 후금 회답별사로 심양 사행, 만포첨사, 1635년 절충장군行 용양위 부사직, 1636년 영흥대도호부사 겸 남도방어사 일시 파직 후 숙천부사로 복직, 1638년 사간원 탄택으로 일시 파직, 1642년 갑산부사를 제수 받았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양, 1643년 만포첨사, 1644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방촌)후 1657년에 終하셨다.

2)內容
⟪심양왕환일기⟫는 丁卯胡亂과 丙子胡亂 사이에 後金(淸나라)과 朝鮮간의 외교적 교섭에 관한 중요 史料라 할 수 있다. 淸의 人物, 外交的 交涉과 諜報, 예단전달, 國書에 대한 回答과 開市에 관한 사항, 포로 쇄신과 전마(戰馬)에 관한 문제, 椵島(가도)의 明軍(모문룡 장군)에 대한 식량지원 중단, 瀋陽에 官軍을 남기는 문제 등 당시 양국 간의 外交的 摩擦을 풀기 위한 여러 상황이 狀啓형식으로 거의 매일 기록 정리되어 있다. 이 귀중한 일기는 公의 9대종손 죽암공(諱 啓文, 1865∼1951)이 1936년에 이전의 필사본을 보고 목판본을 남겼으나 판서공파 宗家에는 보관되지 않고 오헌공(諱 啓龍, 1870∼1948)댁에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심양왕환일기.jpg
※차이점 : 병조참판공의 영흥대도호부사 임명 교지에는 崇禎 9년(1636년 仁祖 14년 丙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999년 “己卯譜 誌狀錄”에는 영흥대도호부사겸 방어사 임명 前에 병조참판 직책을 제수 받아 회답별사(回答別使)로 심양에 들어가 중요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수록 되어 있고, 전남대학교 신해진 교수의 朝鮮王朝實錄에서 고증된 자료에 의한 심양왕환일기에는 1631년 公께서 영흥대도호부사겸 방어사로 재직 중에 朝廷에서는 병조참판 직책을 제수 받아 회답별사로 심양에 들어가 朝鮮과 後金(淸나라)과의 당면한 중요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한다.
 

3. 사진설명


1)墓所(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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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貞夫人 진원 朴氏와 合兆로 천관산 대동감시봉(해발 550m)에 위치한다. 公께서 당대 최고의 지관 해남 출신 이의신을 천관산에 대동하고 올라 祖父 이신 당곡 진사공(諱 鯤, 1515∼1582), 父이신 판서공(諱 德和, 1551∼1598)의 묘소(대리 舊 德島), 公의 묘소까지 모두 公께서 잡았다고 傳해지고 있다.

2)墓碣碑(묘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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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천재 습독공(諱 由亨)의 配 宜人 평산 申氏 이하 선조 묘소에서 천관산 방향으로 200여미터 가다보면 바위 위에 세워져 있고 감시봉 묘소를 향하고 있다.(嘉善大夫 行兵曹參判 永興大都護府使兼 南道防禦使公 墓碣銘 並序) 碑는 公의 묘전까지 운반할 수 없어서 현 위치에 孫子인 간암공(諱 世鈺, 1689∼1766)과 曾孫 命觀公(1710∼1762)께서 주도하여 1751∼1753년 사이에 謹竪한 것으로 추정되며 간암공의 지기이신 前通訓大夫 行司憲府執義兼 世子侍講院進善 屛溪 尹鳳九가 撰하였다. 판서공파종중에서는 1993년까지는 묘갈비 앞에서 매년 陰 9. 21에 公과 曾孫 命觀公, 玄孫 사락헌공(諱 伯琛, 1732∼1797)을 함께 제향을 드렸고 1994년에 방촌 망치壇을 설단하고 매년 4월 둘째 일요일에 公을 포함한 판서공 외41位에 대해 제향을 드리고 있다. 또한 세월이 흘러 碑文 내용을 알아볼 수 없어 판서공파종중(三宗契中)에서 2006년에 새로운 烏石碑를 謹竪하였다.

3)竹川祠(죽천사) 配享(배향) 神位(신위)
 관산읍 죽교리 상잠산 자락에 위치한 竹川祠에서 매년 9월 上丁일에 主壁 청계공(諱 德毅, 1540∼1613), 공조참의공(諱 德元, 1549∼1606), 판서공(諱 德和, 1551∼1598), 청금공(諱 廷勳, 1578∼1662), 병조참판공(諱 廷喆, 1583∼1657), 반계공(諱 廷鳴, 1589∼1640), 존재공(諱 伯珪, 1727∼1798)등이 配享되어 지역 유림들이 주관(鄕祠宇)하여 七顯에 대해 제향을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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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중요 遺品(유품)
  영흥대도호부사 敎旨, 後金(淸나라)에 회답별사로 가시어 귀국할 때 後金(淸나라) 칸이(태종) 下賜한 철피리와 옥퉁소, 1624년(仁祖 2년) 李 适(이 괄)의 亂 참여관련 振武功臣錄(振武原從一等勳), 晩悔堂實記 등으로 公과 관련된 중요 유품이 방촌유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公은 당대 朝鮮의 훌륭한 장군으로 仁祖의 信任을 받아 後金(淸나라)과 國境을 접하는 군사 중요 요충지역인 영유수령, 만포첨사, 영흥대도호부사겸 남도방어사, 숙천부사, 갑산부사, 만포첨사 등 두루 歷任하셨다. 이중 영흥대도호부사는 조선의 군사적, 행정적 중요 5곳(함경도 영흥, 평안도 영변, 강원도 강릉, 경상도 안동, 경상도 창원)에 해당되어 관직명을 ㅇㅇ府使라고 하지 않고 ㅇㅇ大都護府使(대도호부사)라고 하여 관직을 임명하였고 해당 부사의 품계는 원칙상은 正三品 이었으나 대부분 公과 같은 從二品의 품계로 당대 能力이 特出한 人物이 任命되었다. (함경도 영흥은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영흥대도호부사가 방어사(從二品)를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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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맺음말
장흥위문의 歷史는 638년 통일신라 선덕여왕 때 시조공(諱 鏡)께서 唐에서 입국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3만의 종원수에 비하여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훌륭한 선대의 업적이 있어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다. 특히 高麗시대에는 門下侍中 역임과 睿宗廟廷(예종묘정)에 배향된 충렬공(諱 繼廷, ?∼1107), 원감국사(1226∼1293), 고려의 충신 합문판사공(諱 种, ?)등 여러 선조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서는 倭亂과 胡亂 등 國亂을 거치면서 괴봉공(諱 大用, 1530∼1610), 청계공(諱 德毅, 1540∼1613), 판서공(諱 德和, 1551∼1598), 청양현감공(諱 天佑, 1556∼?), 수사공(諱 大器, 1559∼1598)등 다수 선조들의 혁혁한 功績과 존재공(諱 伯珪, 1727∼1798)의 높은 학문적 가치 평가로 위문의 기틀을 마련 오늘날까지 勢가 이어지고 있다. 이중 功을 세워 타계 후 贈職 및 除授를 받아 취임하지 못한 여러 선조님이 계셨으나 실제 正三品 (당상관)에 해당되는 벼슬을 역임하신 분은 文科에서는 관북孫으로 北道陵殿誌(북도능전지)를 撰한 호조참의공(諱 昌祖, 號 鶴村 1703∼1759)이 계셨고 武科에서는 公께서 從二品에 해당되는 병조참판, 영흥대도호부사겸 방어사 등 여러 중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公에 대해서는 대리 당곡 진사공의 묘갈비와 당동 유장비, 판서공의 대리 묘갈비와 방촌 신도비, 公의 묘갈비, 고흥군 천등산 상원군수공(諱 東峑, 1649∼1713)의 묘갈비, 방촌 장흥위씨 세장비 등 여러 곳의 碑文에서 관련 기록 내용이 있고 직책을 병조참판으로 남겼으나 인터넷상의 장흥위씨 홈페이지(문중을 빛내신 선조)와 근래 편찬된 일부 책자에는 防禦使公(방어사공)이라 기록되어 혼동을 주는 사례가 있어 訂正 및 차후 편찬되는 기록물에서는 兵曹參判公(병조참판공)으로 기록함이 타당하며 후손의 도리라고 사료된다. -끝-


글.사진 :  栢江 위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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