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위씨 장천문중 훈도공파 종중⋆⋆
本鄕 장천문중 내 훈도공파(訓導公派)종중을 살펴본다. (기묘보 1卷 p 272∼323) 派祖는 21世 主簿公(諱 德男)이다.(장흥위문 내 유일하게 20世를 派祖名으로 칭하고 있다.)
1. 訓導公(諱 魴)행장 (1999년 己卯譜 誌狀錄 p 97 존재공 작성 忠義錄) 및 주요 내용
生員 晉秀의 子요 習讀 由亨의 孫子다. 天姿가 潁悟하고 才華가 出群하여 經書와 史記에 널리 通하였으며 더욱 실천하는데 독실하였고 文學과 德行이 道內에 알려져 道伯(관찰사)의 추천으로 興陽의 鄕黨訓導가 되어 고을의 子弟들을 잘 가르쳐 敎化가 行成되었고 文行과 碩德이 門下에서 많이 나왔다. 本郡 斗院에서 그대로 살게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壬辰倭亂을 만나 임금이 義州龍灣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忠武公 李舜臣이 巨門島 閑山에다 陳을 치게 되니 公이 奮然히 말하기를 임금이 피란길에 오른 이러한 때를 당하여 臣下된 자 어찌 가히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살기를 도모하리오. 곧 家童 百餘人을 거느리고 忠武公의 陣營에 달려가니 忠武公이 그 忠勇을 가상하게 여겨 公으로 하여금 本郡의 원과 더불어 軍兵을 거느리고 國島(외나라도)의 한쪽을 담당케 하였다. 本郡원이 규율을 잃음에 곧 아뢰어 파면되고 公이 홀로 國島를 지키었는데 그때 敵船이 海港에 가득하고 閑山島 싸움에 敗하니 國島의 陣營이 孤立되고 군사도 적었으며 또한 밖으로부터 援兵이 없어 全軍이 陷沒하였고 彈丸이 비처럼 쏟아져 몸에 완전한 곳이 없었으나 눈빛은 횃불 같아 꾸짖기를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니 賊의 군사들이 어지럽게 칼로 쪼개대니 공이 드디어 害를 당하였다. 卒兵이 그 상황을 달려가 告하니 그 아들 主簿 德男이 屍體가 쌓여 있는 속에서 뼈를 거두어 國島에 葬하니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이 魏將軍의 墓라고 한다. 訓導公 (諱 魴 1532∼1592) 配는 기묘초보부터 누락되어 있으며 후손들이 중간에 화재로 가첩(家牒) 등 소장문서를 잃어 확인되지 않는다.
1)묘소 위치 : 고흥군 봉래면 외나라도(國島) 예하리
2)제향일 : 1991년부터 11월 둘째 일요일 방촌리 東山嶝에서 훈도공 이하 23位 후손과 合祭
2. 후손들의 주요 세거지 내용
훈도공의 子 21世 主簿公 (諱 德男, 1558∼1632)과 配 淑人 하동 鄭氏의 묘소는 고흥군 봉래면 예하리 대동관청등에 있다. 22세 蔭先務郞公 (諱 廷佑 1598∼1667)과 배 김해 김씨 묘소는 考塋下이다. 23세 蔭從士랑公 (諱 東瑚, 1632∼1705)과 配 단인 동복 吳氏 묘소는 고흥군 포두면 옥강리 마복산중 기슭 묘암등이다. 24世 世弘公 (1664∼1730)과 配 부안 金氏의 묘소는 고흥군 포두면 옥강리 마복산하 기슭 주암등이다. 25世 命赫公 (1699∼1780)과 配 성산 李氏의 묘소는 考塋下이다. 26世 伯賢公 (1734∼1819)과 淑夫人 완산 李氏 묘소는 고흥군 포두면 마복산중 기슭 상향로봉과 考塋下이다.
21世 주부공은 훈도공이 전사한 고흥 지역에서 정착하여 조정에서 하사 받은 말을 기르며 26세손까지 살았으며, 27세 南隱公 (諱 道欽, 1763∼1858)께서 선대에서 200여년 정착한 고흥생활을 청산하고 관산 방촌 신기에 돌아와 현재까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종손 麟煥)
1) 근⋅현대 인물
- 계욱(號 : 心松, 1937∼2012) : 고읍마을금고이사장, 관산농협조합장 역임
- 덕량(號 : 香巖, 1913∼1987) : 장흥향교 전교 역임
- 규량(1930∼1993) : 초등학교 교장 역임
- 봉환(號 : 東谷, 1930∼2004) : 1980∼2000년 장흥위문 문중사에 헌신등 功이 많다.
- 두환(號 : 陽泉, 1938∼ ) : 서울 양천구 구의원 재선 역임
- 인환(號 : 錦峯, 1946∼ ) : 현 장흥위씨 도문회 총무
- 형운(1964∼2012) : 전) 양천구의회 의장 역임
- 재천(1975∼ ) : 현) KBS 한국방송국 기자
3. 사진설명
① 훈도공(諱 魴)의 묘소 : 고흥군 봉래면 예하리 栗木嶝
② 훈도공 이하 합제단소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신기 東山嶝
③ 훈도공파 종중 내 신와고택
- 지정번호 : 중요민속문화재 제269호
- 지정일 : 2012년 4월 13일
- 소재지 :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길 111-17(방촌리 461)
1830년대에 東谷 (俸煥)의 5代 祖父인 榮馨이 터를 잡아 조성한 가옥으로 방촌리 신기마을에 있다. 향은 서향이며 건물로는 사당,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채, 문간채 등이 들어서 있다. 안채는 1925년 무렵 구옥을 헐고 약간 앞쪽에 새로 지은 건물이고, 옛 건물은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一’자형 4칸 초가였다고 하는데, 신기마을 입향 당시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본래 3칸 초가였으나 현재는 5칸 규모의 건물이다. 입향 당시에 지은 3칸 기본구조에 증축한 것인데, 증축한 때는 안채를 새로 지은 1920년대로 추정된다.
안채는 정면 6칸 규모로 건물 왼쪽과 앞면에 퇴를 설치하였다. 내부에는 정지, 큰방, 마루(대청), 작은방이 일렬로 나란히 들어서 있는데, 이중 정지와 대청은 각 2칸 규모이다. 정지와 작은방 뒤쪽에는 각각 정지방과 고방 등을 설치해놓았다. 건물 구조는 막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진 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기와를 올렸다. 사랑채는 정면 5칸 규모로 오른쪽 1칸은 앞쪽에 마루, 뒤로는 방을 들였다. 이어진 2칸은 모두 방을 들였고 그 다음으로는 정지칸과 외양간을 두었다. 구조는 안채와 같이 막돌초석 위에 네모진 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으로 되어 있다.
가옥의 역사와 내력, 반가(班家)로서의 건물구성, 각 건물의 건축내용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2년 11월 27일 전라남도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장흥 위봉환 가옥)되었다가 2012년 4월 13일 중요민속문화재 제269호로 승격 지정되면서 명칭도 “장흥 新窩古宅”으로 변경되었으며, 문화재명칭은 중건자인 準植의 號를 따서 장흥 신와고택으로 명명하였다. 현재 위재경(東谷의 子)이 소유하고 오금례가 관리하고 있다.
판서공파 13대손 栢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