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위씨 장천문중(2) ★★
장천문중 내 16세~20세 선조님에 대하여 이력 등 중요 사항을 살펴본다.
1. 16세 통덕랑공 (諱 自良 생졸년 미상 1410~ : 추정 , 配 恭人 광산 金氏)
1) 묘소위치 및 제향일 : 실묘 되었다. 陰 10.10 평화 단전등 단소
2) 능주파 (諱 自溫), 관산파 (諱 自良), 관북파 (諱 自恭), 諱 自儉(무손)으로 장흥위문은 이시기부터 분파 되 었고 이름에 항렬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관산파라 칭한 다. 장원봉 밑에서 평화로 이주하여 20세손까지 집성촌 을 이루며 살았던 것 같다.
2. 17세 한성참군공 (諱 宗復 생졸년 미상 1430~ : 추정, 配 순천 朴氏)
1) 묘소위치 및 제향일 : 실묘되었다. 陰 10.10 평화 단전등 단소
2) 여수 종사랑공 (諱 宗魯)문중과 분파되었다.
3. 18세 습독공 (諱 由亨 1450~ : 추정, 配 宜人 평산 申氏)
1)묘소위치 및 제향일 : 평화 다전등, 陰 10.10 단전등 단소
(配 宜人 평산 申氏 장천재, 재향일 : 陰 10.15)
2) 죽남공 (諱 由貞, 配 宜人 천안 全氏) 행원문중과 분파되었다.
3) 주요행장 : 고려합문 지후공 (諱 种)의 玄孫이다. 승문원 습독관으로 선발되었으나 금고록(일종의 연좌제 )때문에 취임을 하지 않고 현) 백산재 주변에 산정을 지 어 기거하면서 친구인 秋江 南孝溫과 수창(酬唱)하면 서 지냈으며 靈川子 申潛 (1491~ 1554)이 귀양시 詩酒로 수작(酬酌)하여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는 說이 있으나 습독공과 酬唱한 시는 확인되지 않는다. 習讀公(由亨) 南秋江 酬唱詩 (기묘보 지장록 p.1134 )
○ 南秋江 酬唱
秋江先生原韻 (本題孟夏與聚餘慶遊魏習讀山亭) (押 苔 嵬 醅 開 回)
본제는 맹하(초여름 또는 음력4월)에 여럿이 모여 위습독 산정에서 즐겁게 놀았다.
漠漠松陰護翠苔 막막한 소나무 그늘은 푸른 이끼를 보호하는데
奈崖忽斷勢崔嵬 달려온 비탈 문득 끊어져 형세가 높고 높네
前臨大野平如掌 넓은 앞들에 이르러 손바닥처럼 평평하고
望盡長江絲似醅 긴 강을 바라보니 출렁인 푸른 물결 술이 괸듯하네
村宴但知園菜足 마을 잔치는 논수밭 채소로 족할 것이고
俚歌猶覺客愁開 시골 노래는 오히려 객지의 슬픔을 일깨우네
主人高論能留我 주인의 높은 이론은 능히 나를 머물 게 하니
座待蒼然暮色回 앉아서 창연히 석양빛이 돌아오기 를 기다리네.
○ 南秋江에게 和答함.
草亭蕭瑟傍江濱 초당이 쓸쓸하게 강변에 있는데
落日殘秋送故人 해 저문 늦가을 고인을 보내는 구나
別後情懷猶不耐 이별한 후 오히려 정회를 견디지 못하는데
雷聲何處更傷神 피리소리 어디서 부는지 내 마음을 상하게 하네.
⋇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 조선 전기 의 문신,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1476년 세조에 의해 물가로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소능을 복위토록 상소하였으나 도승지 임사홍과 영의정 정창 손에 의해 저지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장흥에 왔을 때 습독공 산정에서 수창했다. 甲子士禍 때는 剖棺斬屍까지 당했다. 주요저서 <육신전> <추강집> <추강냉화> <사우명행록> <귀신론> 등
4. 19세 선조님
1) 通善郞公 (諱 晋秀 1480~1564, 配 宜人 광산 金氏)
- 묘소위치 : 통선랑공의 묘소는 장흥 용산 운주리, 광산 김씨는 장천재
- 제향일 : 陰 10.15 장천재
- 아들 5명(鯨, 鯤, 鮐, 鳣, 魴)을 두었다. 이중 차자인 당곡 진사공 (諱 鯤)은 季父 강릉참봉공 (諱 晉賢)의 養子가 된다.
2) 江陵參奉公 (諱 晋賢1483~1564, 배 宜人 탐진 崔氏)
- 묘소위치 :강릉참봉공과 탐진최씨 묘소 쌍조로 장천재
- 제향일 : 陰 10.15 장천재
※ 또 다른 19세 선조님 晋遜(생졸년 미상)께서는 무손, 晋同(생졸년 미상)께서는 아드님(諱 原錫)이후 무손이고, 晋寶께서는 생졸년 미상, 묘소 실묘, 행장이 수록 되어 있지 않아 알수 없어 내용을 생략한다.
5. 20세 선조님
1) 工曹參議公 (諱 鱣 1527∼1609, 配 인천 李氏, 김해 金氏)
- 묘소는 장흥군 장동면 율곡리 호암동 配 인천 李氏와 합조
- 제향일 : 음 3. 3 장흥군 장동면 율곡리 호암동 묘전 단소에서 21세조(휘 덕원, 휘 덕린)와 합제
2) 訓導公 (諱 魴 1532∼1592)配 는 기묘초보부터 누락되어 있으며 후손들이 중간에 화재로 가첩(家牒) 등 소장문서를 잃어 확인되지 않는다.
-묘소 위치 : 고흥군 봉래면 외나라도(國島) 예하리
-제향일 : 陰 10월 셋째 일요일 방촌리 동산등에서 이하 후손과 합제
-주요행장 : 문학과 덕행이 알려져 道伯(관찰사)의 추천 으로 興陽(현 고흥)의 鄕黨訓導가 되어 고을의 자제들 을 잘 가르쳐 敎化가 행성 되었고 文行과 碩德이 門下 에서 많이 나왔다. 壬辰倭亂시 忠武公 李舜臣 陣營에 가솔 100여명을 거느리고 달려가니 충무공께서 公에게 國島(외나로도) 한쪽을 담당케 하였다. 왜군이 한산도 전투에서 대패하여 海港하다가 국도에 침입하였다. 公 은 전투도중에 전사하여 국도에 葬하니 고을 사람들이 현재까지 "魏將軍" 묘라고 한다.
3) 唐谷 進士公 (諱 鯤 1515∼1582, 配 광주 李氏)
- 묘소 위치 : 장흥군 회진면 대리
- 제향일 : 陰 10. 1
- 주요 행장 : 生父는 통선랑공 (諱 晉秀)이다. 1549년 (明宗 己酉)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아들 5형제(五德)를 두었다. 長子는 판사공(諱 德弘), 次子 청계공 (諱 德毅), 三子 운암공(諱 德寬), 四子 판서공(諱 德和), 五子 안항공 (諱 德厚)이다. 후손이 번손하여 전국 장흥위씨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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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20세 선조님 諱 仁遜께서는 행장 수록이 없고, 鯨께서는 아드님(諱 德衍, 諱 德) 이후 무손이며, 鮐께서는 아드님(諱 雲龍)이후 무손이 어서 행장이 수록 되어 있지 않아 알수 없어 내용을 생략 한다.
6. 중요 과제
1) 장흥위문에서도 선조를 모시는 제향문화가 시대변 화에 맞춰 변화 되어가고 있다. 사례로는 2013년부터 평화 霞山祠 시조공 등 五顯大祭에서 笏記(제례순서), 工祝에서 한자음으로 한 후 한글로 풀이 해주어 참여 종원들이 쉽게 이해를 하여 좋은 평을 받고 있다.
70대 이하의 세대에서는 기존의 笏記, 工祝 등의 제향 절차에 익숙하지 않으며 종원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장천문중 주관 제향시에 홀기 등을 한자와 한글 로 혼용 또는 한글로 하는 것으로 개정하고 산하 종중 제향에도 확대시켜 후손들이 제대로 알고 참여하는 제향 행사가 되어야 한다.
2) 16세 통덕랑공 (諱 自良, 配 恭人 광산 金氏)), 17세 한성참군공 (諱 宗復, 配 순천 朴氏) 18세 습독공 (諱 由亨)은 평화 단전등에 설단 하여 매년 음 10.10 제향 을 모시고 있다. 참여 종원들은 본향의 연로하신 어르신 들로 매년 인원수가 줄어들어 (2014년 12명) 合祭가 제기 되고 있다. 방안으로는 습독공의 配 宜人 평산 申氏 외19세 통선랑공 (諱 晉秀)의 配 宜人 광산 金氏, 강릉참봉공 (諱 晉賢, 配 宜人 탐진 崔氏)이 계시는 장천재 묘전 한곳에 확대 설단하여 16세 통덕랑공, 17 세 한성참군공, 18세 습독공 등 16세~19세까지 선조님을 함께 모시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끝으로 선조에 대한 제향은 후손들의 참여 없이 있을 수 없다. 후손들의 참여가 제일 중요한 과제이다.
판서공파 13대손 栢江
2015.12.06 09:32
장천문중 종원들이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6 - 2)의 문제점 해결에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