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한을 바위에 새긴 우국지사
위인백
사)한국인권교육원장
33세, 운암공파, 대종회 상임위원
더위가 멈춘다는 처서가 되니 무덥던 폭염은 꺾였으나 코로나19 팬데믹은 수그러들지 않고, 침략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 없이 독도의 망상마저 버리지 않은 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도쿄올림픽이 우리에겐 반일의 미묘한 감정까지 겹치면서 1910년 8월 29일 일제로부터 국권을 빼앗겼던 통한의 경술국치가 새삼 떠오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막부봉건시대를 마감하고 중앙집권에 의한 자본주의를 육성·발전시킨 국력을 앞세워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이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1905년 강압적인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한일 신협약으로 군대를 해산하는 등 우리나라를 잠식키 위한 전략을 치밀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조선은 개혁군주인 정조대왕의 갑작스런 서거 이후 어리고 무능한 지도자(왕)들에 따른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휼하지 못하고 서구열강들의 야욕 등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채, 반외세 반봉건을 기치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동학농민혁명마저도 대책 없이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결국은 국권을 빼앗기는 나락으로 빠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일찍이 최강국인 영국과 동맹을 맺고, 1905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 제2차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 등을 통해 조선의 침략을 치밀하고 교활하게 하나하나 준비한 다음 1910년 8월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으로 하여금 한일합병 조약안을 통과시키도록 해서 결국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통한의 합병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는가.
이에 격분한 우국지사들의 자결과 유생들을 비롯한 의병들의 순국의 역사는 그동안 기록되고 알려졌으나 남도 끝자락 장흥에서 이름 없는 선비가 망국의 한을 관지로 바위에 새긴 국내유일의 암각문인 ‘망곡서’가 최근에 발견됨으로써 이 시를 쓴 인물과 그 우국충정에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망곡서 암각문은 필자의 고향인 장흥군 부산면 기동마을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유학자 위원량이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압으로 나라를 잃자 그해 가을 뒷산인 수리봉에 올라 나라를 잃은 망국의 한을 28자의 칠언절구로 읊고 날짜와 자신의 이름까지 새긴 관지로 고종황제가 있는 북향의 바위에 종서로 음각한 것이다.
유학자 위원량이 삼가절하고 곡하며 쓴 칠언절구의 ‘망곡서’를 해독하면 ‘오늘 올라와 이 봉우리에서 느끼나니 이 봉우리야 말로 동방의 의를 지킨 봉우리네. 사람 많아도 못 지킨 것을 봉우리는 지키니 사람이 봉우리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네. 융희경술 가을 위원량근배’라고 새긴 우국충정의 칠언절구는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감히 쓸 수 없는 국내유일의 암각문으로서 역사적인 사료가치가 높다 할 것이다.
회은 위원량은 송암정의 다른 시 말미에도 ‘중략.. 지금 우러러 지난 일들을 헤아리니 경술년 가을에 근왕하지 못함이 한스럽네’라는 시문과 그에 대한 공적비문을 보면, 망국의 한을 지니며 어려운 농민들을 위해서 여생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식에게도 독립정신을 주지시킴으로써 3남인 위장환은 1929년 광주서중 4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해 퇴학을 당했으며, 고향에 내려와 농민들에게 채무를 면제해 주고 영농자금을 무이자 또는 무상으로 내주었으며, 띠 풀로 비옷의 일종인 우장 만들기를 권장하는 등 농촌 계몽운동에 매진했으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요절함으로써 큰 뜻을 펼치지 못했다.
다행히 유학자 위원량의 암각문이 지난해 11월 발굴되어 빛을 보게 되었고, 3남 위장환은 광주일고가 광주학생독립운동 가담혐의로 퇴학당한 학생들 명단을 어렵게 확보해 명예졸업장을 수여함으로써 독립유공자의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우국충정과 독립정신을 기리기위해선 칠언절구의 암각문을 문화재로 등록하는 한편 독립유공자로 예우해서 항일의 흔적 등 기억해야 할 공간으로 조성해 선현들의 자주독립정신을 기리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토록 하는 것이 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가 마땅히 해야 할 정책이고, 오늘날의 우리는 그 정신을 높이 선양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정부는 경술국치에 이른 시대적배경과 근원을 가감 없이 분석해서 다시는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국력을 기르고, 정신교육을 강화하면서 가깝고도 먼 일본이 지금껏 2차 대전에 대한 항복이나 패전을 공식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채 패전의 원인을 수십 번 분석하는 치밀하고 끈질긴 속내를 바로 읽고, 국제정세를 예의주시하며 극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으며, 치욕의 역사는 반복돼선 안 된다. 통한의 역사에 대하여 성찰과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우국지사들에 대한 예우와 그 정신을 계승해나가지 않는다면 어찌 민족의 번영과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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