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7 14:03
2019년 11월 12일 然堂 두환, 東谷 재원, 德山 계춘, 翠山 수환, 錦峯
인환, 草兮 종삼, 一丁 두환, 竹軒 백, 栢江 성록 등 9명은 9시 관산읍 방촌리 출발~보성군 벌교~고흥읍 ~포두면~동일면 내나라도~봉래면 외나라도 예하리~점심식사~포두면 옥강리~고흥읍~보성군 벌교~ 장흥군 장평면 율곡리 등을 이동하면서 20세 훈도공 魴 묘소, 22세 음선무랑공 廷佑 등 이하 5位 단소와 24세 世弘公 등 이하 3祖 묘소, 20세 양곡공 鱣 묘소 등 3곳을 찾아 참배하였다.
1.훈도공(20세 魴, 1532~1592)
1) 훈도공의 행장(1999년 기묘보 지장록 p 97 충의록) 내용
생원 晉秀의 五子요, 승문원습독 由亨의 孫子다. 천자(天姿)가 영오(潁悟)하고 才華가 出群하여 經書와 史記에 널리 通하였으며 더욱 실천하는데 독실하였고 文學과 德行이 道內에 알려져 道伯(관찰사)의 추천으로 興陽의 鄕黨訓導가 되어 고을의 子弟들을 잘 가르쳐 敎化가 行成되었고 文行과 碩德이 門下에서 많이 나왔다. 本郡 斗院에서 그대로 살게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임진왜란을 만나 임금이 義州 龍灣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忠武公 李舜臣이 한산도에다 陳을 치게 되니 公이 奮然히 말하기를 임금이 피란길에 오른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하된 자 어찌 가히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살기를 도모하리오. 곧 家童 백여명을 거느리고 忠武公의 陣營에 달려가니 忠武公이 그 忠勇을 가상하게 여겨 公으로 하여금 本郡의 원과 더불어 軍兵을 거느리고 國島(외나라도)의 한쪽을 담당케 하였다. 本郡원이 규율을 잃음에 곧 아뢰어 파면되고 公이 홀로 國島를 지키었는데 그때 적선이 海港에 가득하고 한산도 싸움에 敗하니 國島의 陣營이 孤立되고 군사도 적었으며 또한 밖으로부터 援兵이 없어 全軍이 陷沒하였고 彈丸이 비처럼 쏟아져 몸에 완전한 곳이 없었으나 눈빛은 횃불 같아 꾸짖기를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니 賊의 군사들이 어지럽게 칼로 쪼개대니 공이 드디어 害를 당하였다. 卒兵이 그 상황을 달려가 告하니 그 아들 主簿 德男이 屍體가 쌓여 있는 속에서 뼈를 거두어 國島에 葬하니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이 "魏將軍의 墓"라고 한다.
훈도공의 배(配)는 기묘초보부터 누락되어 있으며 후손들이 중간에 화재로 가첩(家牒) 등 소장문서를 잃어 확인되지 않는다.
묘소는 고흥군 봉래면 외나라도(國島) 예하리 율목동이다.
300여미터 전방에는 고흥 나로우주센터가 위치하고 남해가 조망된 천혜의 명당이다.
묘소 앞 훈도공(魴)의 비석은 1926년(丙寅) 2월 상순 관산읍 옥산마을 태생 족후손 春軒 계반(1848~1939) 근찬(謹撰), 1988년(戊辰) 2월 17일, 13대손 東谷 봉환(1930~2002) 근서(謹書), 훈도종중에서 근수(謹竪)하였다.
2)후손들의 제향과 세거지 내용
훈도공의 아들 21세 주부공(德男, 1558~1632)과 配 의인 하동鄭氏의 묘소는 훈도공과 근거리인 고흥군 봉래면 예하리 대동관청등에 있다. 22세 음선무랑공(廷佑 1598~ 1667)과 配 김해김씨 묘소는 考塋下이다.
23세 음종사랑공(東瑚 1632~ 1705)과 配 단인 동복吳氏 묘소는 고흥군 포두면 옥강리 마복산중 기슭 묘암등이다.
24세 世弘公(1664~1730)과 配, 25세 命赫公(1699~1780)과 配 성산李氏, 26세 伯賢公(1734~ 1819)과 配 숙부인 완산李氏 묘소는 고흥군 포두면 옥강리 마복산중 기슭 상향로봉 아래 각각 考塋下이다. 3祖 묘소 한쪽에는
설단과 단비(壇碑)가 세워져 있으며, 묘소 입구 도로변에는 "장흥위씨세장천" 비석이 위치한다.
1979년 봄 안양면 월암마을 태생 족후손 栢堂 대환(1907~1979) 근찬(謹撰), 9대손 香巖 덕량(1913~1987) 근서(謹書), 8대 종손 槐陰 계심(1897~1983) 등이 근수(謹竪)하였다.
훈도공이 전사한 고흥군 나라도(國島) 지역에서 아들 21세 주부공은 고흥 두원에 정착하여 26세 백현공까지 5대에 걸쳐 거주하였으며, 27세 남은공(道欽, 1763~1858)은 선대에서 200여년 정착한 고흥 두원 생활을 청산하고 관산읍 방촌리 새터에 돌아와 현재까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13대 종손 인환)
지난날 1990년까지 매년 4월 5일 오전 훈도공 제향을 묘전에서 모셨다. 오후에는 근거리에 위치한 주부공 묘전에서 제향을 모셨다. 손자인 22세 음선무랑공(廷佑)~26세 伯賢공 간 5位 제향을 1990년까지 매년 4월 7일 고흥군 포두면 옥강리 마복산중 기슭 상향로봉 아래 묘역 단소에서 모셔왔다.
27세 남은공부터 일제강점기(1800~1945년) 150여년 간 후손들은 지금의 관산읍 죽청 포구에서 득량만 뱃길을 이용하여 고흥 녹동을 거쳐 외나라도에 도착하는 해상교통을 통해 훈도공 등 2곳의 제향을 모셔왔다. 광복후부터는 육로 교통을 이용하여 관산읍 방촌리~장흥~보성 벌교~ 고흥읍~포두면~동래등에서 뱃길을 이용~동일면 내나라도~ 봉래면 외나라도 축내 포구에 도착하여 도보로 예하리 관리사옥과 묘소로 이동하였다. 후손들의 제향 참여는 관산읍 방촌리에서 출발로 시작하여 5일이상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후 1991년 방촌리 새터 동산등에 위치한 27세 남은공(道欽)의 묘소 좌측에 설단하고 훈도공 이하 17位를 매년 11월 둘째 일요일 합제를 모셨다.
2007년 30세 식(植)자 선조 6位를 제단을 증설하여 23位 합제를 모시고 있다. 훈도공 후손들은 방촌리 새터를 중심으로 거주해오면서 결혼을 하면 반드시 고흥에 위치한 선조님들의 묘소를 참배하는 풍속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양곡공(20세 鱣, 1527~1609) : 자(字)는 自游요 관(官)은 증(贈) 공조참의로 생원 晉秀의 四子요, 승문원습독 由亨의 孫子다. 配는 숙부인 인천이씨, 김해김씨이며, 묘소는 장동면 율곡리 狐岩洞 癸坐다.
아들은 임진왜란 때 훈련부정으로 도원수 권 율 휘하에서 功을 세워 선무원종이등훈에 책록된 21세 공조참의공 덕원(德元 1549~ 1616)과 종사랑으로 참봉을 지낸 21세 덕린(德鄰 ~?)이다. 묘소 앞 비석은 1978년(戊午) 1월 15일(上元) 안양면 월암마을 태생 방후손 栢堂 대환(1907~1979) 근찬(謹撰) 근서(謹書), 종중에서 근수(謹竪)하였다.
제향은 매년 陰 3월 3일 묘전 단소에서 양곡공(鱣), 공조참의공(德元), 중군공(廷說 1580~1669), 문천공(廷益 1593~1644), 종사랑공(德鄰)의 아들 직장공(廷勣) 등 5位 합제를 모신다.
1) 후손들의 분파 및 주요 세거지 내용
- 공조참의공 德元 후손(기묘보 1卷 p 205~254) : 19세 통선랑공 晉秀, 20세 양곡공 鱣 간 용산 운주리 봉황마을에서 거주해오다가 30리 떨어진 暘谷(장동의 옛 지명)으로 선친 鱣 때 이거 하였다고 추정된다. 22세 廷說公 계열은 26세 伯玲 때에 유치에 거주하다가 다시 31세손 때에 보성 노동에 거주 후 장평으로 이거하였고, 다른 26세 伯玉 때에 장평에서 거주다가 30세손 때에 관산 와룡으로 이거하여 살았으며, 또 다른 26세 伯琦 때에는 유치에서 거주타가 29세손 때에 관산 와룡으로 이거하였다. 다른 22세 廷益公 계열는 안양과 회령에서 거주하다가 26세 弘南, 弘立 때에는 회령과 웅치에서 거주타가 30세손 때에 장동과 용산 송치로 이거하였다. 후손들은 삶이 여의치 않았는지 한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장평, 장동, 유치, 와룡, 송치 등에 분산해서 거주하여 일부 후손들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 종사랑공 德鄰 후손(기묘보 1卷 p 254~271) : 公께서 용산에서 장평 종정에 정착한 후 22세 廷勣, 23세 東美, 24세 世範, 25세 命迪, 26세 伯一을 거쳐 후손 일부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12대손 철환(1958년생)은 제47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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