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예산군 봉산면 궁평리 방문
필자는 최근 병계 선생의 흔적을 찾고자 예산군 내 여러 곳을 수소문 끝에 봉산면 궁평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8대손 윤시현(82세)丈과 연락되어 찾아가 상면(相面)하였다.
병계 윤봉구 선생과 존재 위백규 선생 사제(師弟) 간 깊은 연(緣)과 두 분의 훌륭한 학문, 율곡 이이 선생 등 6位가 배향된 경남 합천군에 위치한 옥계서원(玉溪書院) 등에 대해 대화하면서 252년 묶은 세월의 시간을 헐고 후손간의 情을 나누었다.
원래 선생의 묘소 등 흔적이 있던 곳은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일원이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당 풍수설을 믿고 1846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무덤을 많은 정성과 노력 끝에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내 가야사를 철거하고 가야사지 터로 이장(移葬)하였다. 이로 인해 가야산 자락에 위치했던 선생의 묘소는 현손 헌일 때 지금의 궁평리로 아우 윤봉오 선생의 묘소는 공주시 유구면으로 강제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1)납골당 : 가야산 자락 덕산면 상가리에서 봉산면 궁평리 현재 장소인 8대손 윤시현丈 집뒤 야산에 이장된 병계 선생의 묘소는 이하 후손들 묘와 함께 관리되어 2000년 묘역 내에 선생의 묘표(墓表)를 세웠다.
그러다가 윤시현 등 몇몇 되지 않는 후손들은 걱정이 있었다. 적은 후손들로 선생의 묘소 벌초 등 관리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 판단하고 2013년 봉분(封墳)을 파(破)하여 납골당을 조성하였다.
이때 태안군 원북면 청산리에 위치한 선생의 선친 윤명운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해와
묘역에 묘표를 세우고 이하의 후손 20여기를 봉안하여 관리하고 있다. 정중히 禮를 갖추고 참배하였다.
2)신도비 : 납골당 묘소 앞 밭에는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덕행을 기술하여 후세에
알리고자 시현 등 후손들은 1999년 10월 15일 신도비(神道碑)를 근수(謹竪)하다.
비신석 상단 전자(篆字)는 문헌공 병계 윤선생 신도비 명(文獻公屛溪尹先生神道碑銘)이라 새겼다.
전서(前書)는 조선국 공조판서 겸 경연관 찬선 문헌공 윤선생 신도비 명 병서(朝鮮國工曹判書兼經筵官贊善文獻公尹先生神道碑銘 幷序)라 새겼다.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송자학연구소장 문학박사 학산(鶴山) 조종업(趙鍾業 1930~2014) 근찬(謹撰)하다. 해동서법예술연구회장 장암(長巖) 이곤순(李坤淳 1948년생) 근서(謹書) 병(幷) 전(篆)하다.
후손 윤시현丈의 언동에 의하면 伯父(승혁)께서 후사가 없고, 仲父(당혁)께서 종제 태현을 두었으나 仲父와 태현이 타계하였으며, 仲父(동혁)께서는 딸 2명을 두고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병계 선생의 교지 등 유품을 자신에게 관리토록 책임을 맡겼다고 한다.
3)교지 등 : 현재 47점의 교지와 사본 60권(卷) 30책(冊)의 병계집(屛溪集)을 소장하고 있어 禮를 갖추고 사진 촬영하였다. 공조판서 교지 등 중요 12매를 소개한다.
(1)직산현감 교지
尹鳳九爲奉列大夫行稷山縣監者 1718년 8월 11일 숙종이 윤봉구를 봉렬대부(정4품 下) 직산현감(종6품)으로 임명하였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아 관직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직산현(稷山縣)은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 직산면 일대의 옛 행정 구역이다. 1914년 부·군·면(府郡面) 폐합으로 천안군에 편입되었으며 지금의 천안시 일원이다.
(2)문화현령 교지
尹鳳九爲奉正大夫行文化縣令者 1721년 9월 27일 경종이 윤봉구를 봉정대부(정4품 上) 문화현령(종5품)으로 임명하였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아 관직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문화현(文化縣)은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일대의 옛 행정 구역이며 1914년에 신천군에 통합되었다.
(3)청도군수 교지
尹鳳九爲通訓大夫行淸道郡守者 1725년 5월 26일 영조가 윤봉구를 통훈대부(정3품 下) 청도군수(종4품)로 임명하였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아 관직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통훈대부는 조선시대 문신 정3품 下의 품계명이다. 해당되는 관직으로는 정(正), 직제학, 편수관, 좌유선(左諭善), 우유선, 판교(判校, 좌통례(左通禮), 우통례, 제거(提擧), 찬선(贊善), 상호군(上護軍), 목사, 대도호부사 등이 있다. 청도군(淸道郡)은 지금의 경북 청도군이다.
(4)사헌부 장령(掌令) 교지
尹鳳九爲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者 1734년 7월 20일 영조가 윤봉구를 통훈대부(정3품 下)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임명하였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아 관직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사헌부는 조선시대 언론 활동, 풍속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지금의 검찰청 이다.
(5)김제군수 교지
尹鳳九爲通訓大夫行金堤郡守者 1738년 7월 25일 영조가 윤봉구를 통훈대부(정3품 下) 김제군수(종4품)로 임명하였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아 관직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김제군(金堤郡)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일원이다.
(6)사헌부 집의(執義) 교지
尹鳳九爲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者 1742년 11월 23일 영조가 윤봉구를 통훈대부(정3품 下) 사헌부 집의(종3품)로 임명하였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아 관직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7)세자시강원 진선(進善) 교지
尹鳳九爲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兼侍講院進善者 1744년 2월 8일 영조가 윤봉구를 통훈대부(정3품 下) 사헌부 집의 겸 세자시강원 진선(정4품)으로 임명하였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아 관직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세자시강원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이며, 진선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정4품 문관직 이다.
(8)통정대부 교지
尹鳳九爲通政大夫子
1756년 1월 1일 영조가 윤봉구를 통정대부(정3품 上)로 승계(陞階) 임명하였다.
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신 정3품 상계(上階)의 품계명으로 정3품 상계부터 당상관이라 하였고 하계 이하를 당하관이라고 하였다.
(9)세자 찬선(贊善) 교지
尹鳳九爲通政大夫工曹參議世子贊善者
1759년 11월 15일 영조가 윤봉구를 통정대부 공조참의 세자 찬선으로 임명하였다.
조선시대 공조참의(工曹參議)는 공조(工曹)에 두었던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판서(判書 정2품), 참판(參判 종2품)을 보좌한 관직이다. 세자 찬선은 세자시강원 소속된 교육을 담당하는 정3품 관직으로 시강원의 실질적인 책임자이다.
(10)대사헌(大司憲) 교지
尹鳳九爲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者 1760년 12월 2일 영조가 윤봉구를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 종2품 下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며, 선생은 1760년 1월 16일 가선대부에 승계되었다. 대사헌 조선시대 사헌부의 종2품 관직으로 정사를 논하고 백관(百官)을 감찰하며 기강을 확립하는 따위의 업무를 맡아보았으며 요즘의 검찰총장에 해당된다.
(11)공조판서 교지
尹鳳九爲資憲大夫工曹判書者 1763년 3월 4일 영조가 윤봉구를 자헌대부 공조판서로 임명하였다.
자헌대부는 정2품 下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며,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우참찬, 지사, 판서, 판윤, 대제학, 세자좌빈객, 세자우빈객, 도총관, 제조 등이 있다. 공조판서는 육조에 하나인 공조의 으뜸벼슬로 정2품이다. 지금의 건설교통부 장관이다.
(12)정헌대부 교지
尹鳳九爲正憲大夫者 1766년 9월 5일 영조가 윤봉구를 정헌대부로 승계(陞階) 임명하였다. 선생의 별세 前 마지막 교지이다.
정헌대부는 정2품 上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해당되는 관직으로는 우참찬, 지사, 판서, 판윤, 대제학, 세자좌빈객, 세자우빈객, 도총관, 제조 등이 있다.
<소장 교지 현황>
저서 원본 <병계집(屛溪集)>과 <화양존주록(華陽尊周錄)>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번호 | 제목 | 조회 수 |
---|---|---|
공지 | 성씨순위 및 장흥위씨 지역별 분포 내역 [1] | 1707 |
공지 | 회주사 사호 개칭 경위 [1] | 471 |
149 | 하계수련회 소감문- 위성수 | 117 |
148 | 하계수련회 소감문- 위륜규 | 163 |
147 | 하계수련회 소감문- 위다훈 | 112 |
146 | 하계수련회 소감문- 위다인 | 137 |
145 | 하계수련회 소감문- 위경록 | 320 |
144 | 위문의 별난 특색 雅號-圓山 위정철 | 167 |
143 | 다시, 불멸의 꽃으로 피어나리/위성유 | 256 |
142 | 존재집에 나타난 열녀신드롬-碧泉 위윤기 | 428 |
141 | 「聽溪 위덕의 선생의 아내 추모작, 상왕부(傷往賦)」-碧泉 위윤기 | 302 |
140 | 「위백규 선생의 궁둔 토지제도」-碧泉 위윤기 | 108 |
139 | 「위백규 선생의 시장경제주체론」-碧泉 위윤기 | 146 |
138 | 위송실(魏松實) 독립지사 판결문-碧泉 위윤기 | 203 |
137 | 병계 윤봉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다.!! <4> / 栢江 | 309 |
136 | 병계 윤봉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다.!! <3> / 栢江 | 432 |
» | 병계 윤봉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다.!! <2> / 栢江 | 274 |
134 | 병계 윤봉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다.!! <1> / 栢江 | 456 |
133 | 통훈대부(通訓大夫) 웅천현감공 위정렬 묘갈명(墓碣銘) 고증 / 栢江 | 427 |
132 | 윤봉구와 위백규의 사제상(師弟像) 연구 | 456 |
131 | 위백규 옥과현감의 리더십 연구 2-2 | 249 |
130 | 위백규 옥과현감의 리더십 연구 2-1 | 295 |